28. 한국의 기도 도량 / 월악산 덕주사
바위에 새긴 신심이 부른 관음, 망국의 한 그리움으로 달래다.
신라 진평왕 9년에 창건돼
관세음보살 꿈 꾼 덕주공주
8년 불사 끝 조성한 마애불
미륵세계사 석불과 마주봐
▲누구하나 오라고 한 적 없다. 재촉하지도 않았다.
월악산 중턱, 소나무 한 그루와 극락보전을 벗 삼은 마애불은 그 자리에 계셨다.
구하는 이가 있어야 베푸는 법. 목마름이 물을 찾듯 부처님 가르침도 갈증이 먼저다.
국운은 날카로운 칼끝 위에서 위태롭게 춤추고 있었다.
여차하면 미끄러져 깊게 베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바람 앞에 등불은 꺼지고 말았다.
새롭게 일어서는 고려 왕조에 신라는 복속되고 말았다.
남매는 경주를 떠나 금강산으로 향했다.
목숨 줄 이어 훗날을 기약하고자 월악산 하늘재를 넘어야 했다.
덕주공주는 걸음을 재촉하는 오라버니 마의태자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안타까웠다. 신라의 미래를 책임질 태자가 나라를 버려야만 하는 현실이 덕주의 마음을 찢어 놨다.
덕주는 수없이 뒤를 돌아봤다.
나고 자랐던 고국을 등져야만 하는 심정이 발등에 떨어져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오라버니는 가끔 걸음을 멈출 뿐, 돌아보진 않았다.
‘아…, 오라버니.’ 덕주는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려는 탄식을 급히 두 손으로 막았다.
신라를 일으켜 세우려던 야망을 키우던 오라버니였다.
도망치듯 나라를 떠나는 그 마음은 오죽했을까.
오라버니 마음에 드리운 그늘이 덕주에게서도 빛을 거둬갔다.
▲가지런한 덕주사 관음전 초입.
갈 길이 구만리였지만 해는 짧았다. 어둠이 문경군 마성면, 하늘재에 깔렸다.
오라버니는 그제야 덕주를 바라보며 마른 입술을 뗐다.
“오늘은 여기서 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 일찍 다시 길을 나서자구나.”
덕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마의태자는 상기된 얼굴로 누이동생을 찾았다.
덕주 역시 오라버니에게 할 말이 많았다. 마의태자가 먼저 말을 붙였다.
“어젯밤, 신묘한 꿈을 꿨다. 관세음보살님을 만났지.
관세음보살이 내게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큰 터가 있으니 불사를 하고 석불을 세워라.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다’고 하시더구나.”
덕주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오라버니 얘기가 간밤에 꾼 자신의 꿈과 비슷했다.
덕주도 오라버니에게 꿈을 말했다.
덕주 꿈에 현몽한 관세음보살은 “새가 인도하다 앉는 곳이 인연 터”라고 했다.
남매는 단박에 예사롭지 않은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계곡 물에 목욕재개하고 서쪽 하늘을 향해 합장하고 절을 올렸다.
다음 날 서쪽의 고개 하나를 넘다 고개마루턱 큰 바위 황금빛 포경문(布經文)을 발견했다.
남매는 그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고 최고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소를 찾았다.
그리고 단단한 바위에 신심을 아로 새기기 시작했다.
1, 2, 3년…. 시간이 흘렀다.
덕주는 불사의 회향을 보지 않고 금강산으로 떠난 오라버니가 못내 그리웠다.
불사에 전념하며 구도의 길을 걷는 일에 여생을 보내겠다는
자신의 결심도 오라버니를 설득하지 못했다.
오라버니는 왕권을 계승하지 못한 비련의 주인공이었다.
덕주의 만류에도 오라버니는 금강산으로 떠났다.
마지막 핏줄인 오라버니와 헤어진 덕주는 사무치는 그리움을 바위에 새기는 부처님으로 달랬다.
출가한 덕주는 아버지 경순왕의 애틋한 부정도 그리워했다.
그리고 오라버니의 건승을 서원했다.
마애불은 덕주의 그리움과 절절함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8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였다.
마의태자는 누이동생이 머무는 곳에서 남쪽에 자리해 미륵석불을 만들었다.
한사코 누이동생의 만류를 뿌리쳐야 했던 미안함을 담았다.
석불의 시선은 송계계곡을 향하도록 했다. 미륵불이 누이동생의 마애불을 바라보도록 했다.
마의태자는 분을 바르면 하얗고 아리따웠던 덕주를 그리워했다.
자신이 실수할 때면 온화한 미소로 다독여주던 누이동생이었다.
미륵석불의 얼굴이 덕주를 닮아갔다.
▲충주댐 건설로 덕주사로 자리를 옮긴 약사여래.
제천 월악산 덕주사(주지 원경 스님)는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남매의 전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신라 진평왕 9년(586), 당시 월형산 월악사였으나
덕주공주가 높이 15m의 마애여래입상(보물 제406호)을 조성한 뒤
산은 월악산으로 절은 덕주사로 바뀌어 불리게 됐다.
망국의 한을 품고 이곳에 깃든 남매의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난 부처님을 찾아 덕주사에 들었다.
하늘은 푸른 물감을 풀었고, 바람은 봄을 재촉했다.
주지 원경 스님과 사찰 대중스님, 신도 몇몇이 한갓진 풍경을 자아냈다.
길은 가지런했다. 돌담 같은 길을 굽이쳐 오르면 관음전이었다.
관음전 오른쪽엔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작은 약사전이 자리했다.
덕상골 정금사터라고 전해오던 곳에 있던 부처님이
1983년 4월 충주댐 건설로 인한 수마를 피해 덕주사로 오셨다고 한다.
중생들을 모든 질병에서 구하고 마음의 어둠을 씻어주는 부처님에게 합장 3배를 올렸다.
봄바람이 약사전 풍경을 쓰다듬었다. 왼쪽으로 걷자 범종각이 마중 나왔다.
종각은 월악산 자락을 품에 안고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대웅보전 오른쪽으로 조금 더 가니 큰 돌덩이가 보였다.
‘능엄비’였다. ‘능엄경’ 10권 가운데 7권에 실린 능엄신주가 산스크리트어로 새겨진 비였다.
월광사지에서 나온 거란다. 옛날엔 농사꾼들이 참을 먹던 자리였다고.
엎어져 있을 땐 중요한 돌인 줄 아무도 몰랐단다.
한 농부가 덕지덕지 붙은 흙을 털어내니
한문 같은 글씨가 있어 국립공원에 신고하면서 알려진 비다.
중요한 가치는 늘 주위 어딘가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늘 찾지 못해 우왕좌왕 했을 뿐이다.
마음자리에 이미 불성을 갖춰 놓고서 보지 못하는 우리네 모습도 이 비와 같지 않을까.
▲여느 탑 기단석에 돌탑이 앉았다.
멀리 대웅보전을 손질하는 스님과 신도들 마음이 차곡차곡 부처님 전에 쌓인다.
대웅보전, 종무소, 종각, 다실이 너른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마당에 덩그러니 놓인 여느 탑 기단석이 외로워 보이진 않았다.
기단석은 탑 대신 낮게 쌓아 놓은 돌탑을 올려놨다. 봄볕도 경내에 가득했다.
돌탑 너머 대웅보전을 손질하는 스님과 신도들 마음이 봄볕을 닮았다.
그네들 신심이 차곡차곡 부처님 전에 쌓이고 있었다.
월악산 최고봉인 영봉으로 걸음을 옮겼다. 덕주공주의 마음을 느껴볼 요량이었다.
가파른 돌길 1.6km를 30~40분 걸었다. 마애여래입상에 가까워지자 돌탑들이 여기저기 놓였다.
기묘하게도 마애불 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마애불은 가만했다.
마애불은 누구에게도 찾아오라 청한 적이 없다.
월악산 중턱, 소나무 한 그루와 극락보전을 벗 삼은 마애불은 그 자리에 계셨다.
소나무 그림자가 가사장삼마냥 마애불을 감쌌다.
마애불 왼쪽은 1인 천막법당이 지키고 있었다.
법당 안에는 작은 범종과 좌복 하나 108염주, 목탁과 요령이 놓였다.
벽에는 손때 묻은 장삼이 걸렸다. 주인을 기다리는 게다.
마애불 앞에서 예불 드리고 기도하며 쉼 없이 정진하는 어느 스님이 주인이리라.
‘유토피아’를 저술한 토마스 무어는 “가장 깊은 감정은 항상 침묵 속에 있다”고 했다.
좌복 위에 앉은 이의 절절함은 말이 필요 없다. 빈 법당이 차라리 절절함이었다.
목탁소리, 요령소리, 염불소리 모두 절절함 앞에선 침묵이다.
구하는 이가 있어야 베푸는 법. 목마름이 물을 찾듯 부처님 가르침도 갈증이 먼저다.
삼배 올리고 마애불을 등지고 앉으니 월악산 능선이 펼쳐졌다.
시선은 마애불이 응시하는 곳을 따라 나선다.
남쪽 어디쯤, 덕주공주 오라버니인 마의태자가 누이동생을 그리며 조성한 미륵불이 계실 테지.
덕주사 주지 원경 스님과 찻잔을 사이에 두고 시선을 마주했다.
스님이 들려주는 덕주사 전설에서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한과 그리움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때부터이리라. 덕주사는 관음기도도량이라고 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철야기도를 봉행하는 이유도, 천수천안으로 중생을 살피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실천하는 의료봉사단을 지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덕주사는 관음의 가피가 상주하는 도량이었다.
70대 노보살 얘기를 꺼내는 원경 스님 음성이 찻잔 속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켰다.
“마애불을 청소하시는 노보살이 계십니다.
아들은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며느리와 손주는 노보살과 충주에서 생활하시지요.
주말이면 며느리가 손주를 데리고 서울에 갑니다.
하루는 노보살이 며느리에게 가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간밤에 꿈이 좋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며느리만 차를 끌고 서울로 향하는 데 앞과 뒤에서 차가 들이받는 사고를 당했지요.
그런데 다친 곳 하나 없이 몸이 성했답니다.
노보살이 제게 찾아와 수없이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덕주사 마애불을 마주보고 있는 미륵세계사 석불입상.
훌륭한 농사꾼에게 나쁜 땅이란 없다.
마음밭에 부처님을 향한 믿음과 고마움을 파종하는 방법은 기도다.
바쁜 일상은 핑계이리라.
무지개는 태양의 반대편에서 뜨고 연은 바람이 강할 때 멀리 날아오른다. 그랬다.
노보살은 마애불을 참배하고 주변을 쓸고 닦으며 쌓았던 공덕이 가족을 구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을 고마움으로 표현한 것이다. 원경 스님은 신심이 따로 있지 않다고 했다.
부처님을 굳게 믿고 기도하면서 생활 속에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봄의 길목에 선 고목들이 앙상했다.
곧 고목도 주렁주렁 열매를 맺으리라.
마음자리 앙상하다고 실망은 이르다. 불성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고목을 보지 말고 나뭇가지에 싹튼 새순을 볼 일이다.
제천 월악산 덕주사에 봄이 피어나고 있다.
2013. 04. 11
최호승 기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