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얼굴을 보고 싶다!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1.
첫째와 둘째는 겨우 11개월 차이다. 연달아 셋째에, 넷째까지 태어났다. 하지만 아내와 나는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았다. 아내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집에서 네 아이를 돌보았다. 다들 혀를 내두른다. 어떻게 했냐며. 그 시절 나도 일을 하고 집에 오면 아이들 보느라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금 세 자녀를 낳고 키우는 부모들을 만나면 입이 떡 벌어진다. 얼마나 힘들까? 정말 대단하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 일을 아내가 해냈다. 지금도 하고 있다.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는 아내가 유치원 교사로 일해본 경험 때문이다. 어릴수록 아이는 손이 많이 간다. 엄마와 아빠 둘이서 자기 자녀를 보살피는 일도 버거워한다. 마음대로 안 되면 혼도 내고, 소리도 지른다. 자기 분에 못 이겨서 등짝 스매싱을 날리기도 한다. 이래도 아기를 이길 수 없다. 두 손, 두 발 다들고 부모님에게 잠깐 맡기고 숨을 돌린다. 그렇게 자녀를 양육하는 시간을 버틴다. 그런데 어린이집 교사는 혼자서 때론 둘이서 하루종일 여러 집 아이들을 돌보아야 한다.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한 아이, 한 아이 세심하게 돌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아내는 집에서 네 아이를 돌보기로 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내는 부모가 자녀를 가장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린이집을 보내거나 유치원을 보내면 오랜 시간 부모 곁을 떠나야 한다. 뒤돌아서면 쑥쑥 크는 그 순간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된다. 우리 아이가 어떤 친구와 어울리는지, 어떤 말을 주고 받는지, 어떤 행동 습관이 있는지 선생님에게 들어야 한다. 아내는 직접 알고 싶어했다. 네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가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일을 즐거워하고 힘들어하는지. 어떤 걸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고 싶어 했다. 첫째와 둘째를 한 해만 유치원에 보내고, 첫째가 6학년이 된 지금까지 집에서 키우고 있다.
정지아 작가의 장편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주인공 아리가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며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문상 온 사람들을 만나며 자기가 알던 아버지와는 다른 색다른 모습을 알아간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다채롭게 이해하게 된다. “나 또한 그러했다.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249쪽)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몇 개나 보았을까?’도 궁금하지만, 아버지는 내 얼굴을 몇 개나 보셨을지도 궁금하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서로가 아는 얼굴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만큼 한 사람이 가진 얼굴은 다양하다. 그 사람이 살면서 만난 사람 수만큼이나 많지 않을까.
지금은 나와 아내가 우리 네 아이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우리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으니까. 같이 이야기하고, 보드 게임을 하고, 운동을 하고, 여행을 하고.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을 우리 아이들과 함께 보낼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아이들은 점점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예전엔 어딜 가도 따라간다는 녀석들이 이제는 아내와 나만 다녀오라고 한다. 크면 클수록 우리를 떠나 스스로 서게 될 거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날 것이고, 더 다양한 얼굴을 가지게 되겠지. 나와 아내가 모르는 수많은 얼굴을 더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가지게 될 더 많은 얼굴이 기대된다.
2.
올해 4월 첫째가 검정고시를 쳤다. 5월에 합격자를 발표했다. 발표 날 첫째와 아내는 긴장하며 기다렸다. 첫째는 당당히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얼마나 기뻐하는지! 아내도 덩달아 좋아했다. 나는 덤덤했다. 가채점에서 합격 점수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첫째가 6년 동안 나와 아내가 하자고 하는 대로 잘 따라와준 게 고마웠다. 정규과정을 받은 우리여서 학교를 보내지 않고, 집에서 가르치는 일은 낯설었다. 누군가 닦아놓은 길이 아니라서 자주 길을 헤매기도 한다. 새길을 내야 하는 수고도 해야 한다. 좌충우돌하는 우리를 믿고 따라와준 아이가 고마웠다.
첫째가 검정고시에서 받은 평균점수는 92점! 태어나서 처음 받은 성적표다. 이 점수는 이 아이의 무엇을 보여줄까? 지난 6년 간 수고를 보여줄까? 좋아하는 과목이나 관심 있는 일? 성격이나 장점, 잠재력? 검정고시에 출제된 문제를 얼마나 잘 풀었는지만 겨우 보여준다. 그래서 아쉽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사회는 아이들이 가진 다채로운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학교 성적, 등급이라는 아주 작은 구멍으로 아이를 보려고 할 것이다. 마치 그 모습이 아이가 가진 전부인 것처럼 말이다.
*'2'를 더 쓰고 싶은데, 다음 글에서 보태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