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사도의 성격은 고후13장까지 계속됩니다.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이며 성도라 부름을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는 있지만 건축으로 치면 준공검사를 받지 못한 상태의 교횝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고린도 전 후서를 통해 가장 강력한 펀치를 날립니다.
5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림받은 자니라” 이 말씀에 고린도교회도 대답을
해야만 하고 이 시대의 교회도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만 할 겁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의 목사가 30년 목회를 한 시점에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그리스도인이 죽음 이후에
영화롭게 된다고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잘 못임을 알았다고 고백하는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목사들이 예수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행하여
복을 받아 이 땅에서 잘 살자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도 안 되는 억지를 성도들에게 볼륨을 있는 대로 높여 소리칩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이 복을 받아 형통하게 되어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를 어떻게 믿는가 설명할 수 있는가 또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가 질문을 해서 자극을 줍니다.
아담 안에 선악과의 독성이 배어있는 인간에게 선이란 말 그대로
선입니다. 반면에 악은 인간의 양심으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들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잠김(성령세례)이 없는 신자의 회개는
선이냐 악이냐 일뿐입니다. 그건 잡초의 이파리만 뜯어내듯 하는 행위의
단속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서 성령의 조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회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따라 죄와 사망에 대해 죽고
주 안에서 의와 생명을 얻어 하나님을 향해 살아난 자로 발견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선악간의 회개를 반복하는 신자는 유대인과 같이 율법 아래에서
늘 자신의 행위를 돌아본다 달아본다 하는 회개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서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차하고 깨닫는 순간에
자신이 육신을 따라 어둠에 있다는 걸 알고 주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십자가의 공로를 기억하고 빛 가운데로 돌아오면 그 피의 효력이 작동합니다.
그래서 선악간의 회개인가 빛과 생명과 어둠과 사망에 대한 회개인가에
따라 그 사람이 진리의 사람 곧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알아낼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사실은 신앙에 있어서 시험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좋지는 않습니다.
아스팔트를 입혀 도로를 다 완성하고 바닥을 뚫어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도로준공검사를 위해서는 완성된 도로를 뚫어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모여서 떼를 지어 구호를 외치고 독트린을 주입하고 노래를
떼창하여 기운을 북돋우고 도덕적인 일을 즐기는 것으로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나 지금의 교회나 도로 바닥을 뚫어보고 준공여부를 시험하듯
믿음의 본질문제를 시험해 봐야 할 겁니다. 과연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계심이 믿어지고 진리의 성령의 역사에 대한 확증이 있는가 시험해 봐야지요.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계시는 믿음에 대해서 시험을 해서 확증(도키마조)
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이 말씀은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망이냐 생명이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항상 테스트 해 봐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결격사유를 환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대면하면 그 결점이 드러나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떨어져
있을 때에 회초리보다 더 따가운 질책의 서신을 그들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대면하면 약해지고 떨어져 있으면 강해진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내가 가면 어긋난 자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단호한 말을 하지만(2절)
끝내 형제라고 부르며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어 위로를 받고 평안하라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신다는 말로 마무리를 합니다.
바울은 진리의 사람이기에 그들을 정죄만 하여 넘어뜨리지 않고 세우려고(10절)
안간힘을 쓰는 참 사도의 모습을 우리에게 모델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바울은 축도라 일컫는 축복으로 고린도후서를 마무리 합니다.
이는 성막으로 치면 번제단이 아니며 향단의 단계도 아닙니다. 지성소의
은혜의 보좌와 그 위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만의 축복입니다.
번제단에서 죄를 처리하면서 남을 축복할 수 없고, 향단에서 향을 피워 올리며
남을 축복할 겨를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리고
지성소에서 나와 성전을 등지고 백성들을 향해 축복하게 되는 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과 지금도 살아서 간구하시는
그 은혜와 그 아들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교통이 되지 않는 사람이 어찌 축복하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심과 살아 역사하심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진리의 성령을 따라 주와 한 영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며
찬양하는 복을 받고 돌아서서 두 팔을 벌려 성도들을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후서 강해를 마치면서 부디 우리 모두가 새 언약의 일꾼으로 주의
형상으로 화하여 그 영광으로 영광에 나아가 그 영광을 본 자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에게
있을 지어다(13절) 하고 담대하게 축복할 수 있는 복의 통로가 되기를 당부합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주께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