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수도사 주지 적문 스님
사찰음식, 대자유 품게 한 구도열정으로 지은 공양
중앙승가대학 2학년 때, 사찰음식문화연구소 설립
28년 동안 향상일로, ‘사찰음식 명장’ 반열
신선한 재료와 대화하며, 채소만의 독특함 살려야
오신채· 육류 사용하면, 한식과의 경계성 무너져
수도사 ‘원효 오도성지’ 지자체서도 각별한 관심
산사와 마을 상생공동체, ‘원효· 호암마을’ 조성 박차
절·마을 잇는 대공원 추진, 연지· 사찰음식박물관 기대
사찰음식연구에 매진해 온 적문 스님은 ‘마을골목이 희망이고, 마을주민이 미래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수도사와 원정마을이 상생하는 공동체를 도모하고 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공양게 전문)
공양은 존재와 직결된다.
“일체의 제법은 식(食)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식(食)에 의존하지 않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일아함경’도 설하고 있을 정도다. 하여
산사에서는 채소 다듬고, 국 끓이고, 밥 짓는 일
하나하나를 소중히 다뤘다.
채공(菜供), 갱두(羹頭), 공양주(供養主)의 정성이 배인 음식은
각기 특성이 있기에 사찰마다 다양한 맛을 창출해 왔다.
절만이 간직해 온 오묘한 공양의 세계를
‘사찰음식’ 코드로 풀어낸 장본인은 적문(寂門) 스님이다.
완도에서 태어난 적문 스님은 10살 때
자신의 고향 남망산(南望山) 중턱에 자리 잡은 신흥사(新興寺·옛 불로사)에 들었다.
어머니 손잡고 자주 다니던 절이었는데 숙연이었던지 자연스레 안착했다.
목포 유달산 반야사에 머물며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출가 원력을 굳혔다.
군 제대 직후 화엄사로 가 행자생활을 시작했고 법주사에서 강원교육을 마쳤다.
그리고 복지를 전공하고자 중앙승가대학교에 입학했다.
‘승가대신문’ 기자로 활동한 적문 스님은 의·식·주를 소재로 한 ‘불교 대중문화’ 연재를 기획했다.
승복 기사를 위해 관련 논문 하나를 검토하던 중 저자의 후기에 눈길이 꽂혔다.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우리가 간과해 온 불교문화를 이웃종교인이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승가의 일상에 담긴 불교문화 정수를 갈무리해 기록으로 남겨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연재를 향한 열정은 더욱 뜨거워졌다.
사찰음식연구에 매진해 온 적문 스님은 ‘마을골목이 희망이고, 마을주민이 미래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수도사와 원정마을이 상생하는 공동체를 도모하고 있다.
사찰음식 관련 자료는 전무하다시피 해 요리연구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황혜성, 왕준련 선생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며 기사를 작성해 갔다.
그때 황혜성(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중요무형문화재 38호, 1920∼2006) 선생이
학보사 기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하지 말고 연구소를 설립해 집중적으로 고구해 보라 권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한 적문 스님은 대학 2학년 때인
1992년 10월27일 자신 외에도 연구원 2명이 포진한 ‘한국전통사찰음식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사찰음식 실태조사와 연구에 매진한 적문 스님은 1년 후인 1993년
그 결과를 발표했는데 불교계뿐 아니라
사회의 주요 매체에서도 앞다퉈 보도할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주목할 결과 중 하나가 많은 사찰들이 오신채와 인공 조미료를 여과 없이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려서부터 절밥을 마주하며 축적해온 경험에 비춰 볼 때 “이건 아니다!”라고 직감했다.
전국의 주요 사찰을 답사하며 사찰음식 연구에 박차를 가했고
마침내 2000년 220여 가지의 사찰음식을 망라한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는-전통사찰음식’을 선보였다.
적문 스님은 이 책을 통해 청정, 유연, 여법 3대 원칙을 토대로 한
산중 음식조리 법도(法道)를 전했다.
청정함이란 인공 조미료나 방부제가 들어 있지 않은
신선한 채소로 만든 맛깔스런 맛을 내는 깨끗함을 말한다.
무엇보다 오신채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유연함이란 짜고 맵지 않을 것을 뜻한다.
수행에 정진하는 스님들의 위장에 부담이 덜 가도록 부드럽고 담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법함이란 양념을 하더라도 단 것, 짠 것, 식초, 장류 순으로
골고루 적당하게 넣어야 함을 이른다.
양념을 적게 쓰면서도 채소가 가진 독특한 맛을 살려 주는 게 핵심이다.
고난이 없었던 건 아니다.
서울 신당동(1992), 동대문(1994), 역촌동(1995∼2004)을 전전했는데
연구소 운영비가 가장 큰 문제였다. 한때 8000만원의 빚을 떠안고 있었던 적도 있다.
인연 닿는 스님들의 화주로 겨우 버텨왔는데 끝내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당시 구룡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던 정우 스님의 제안이 활로를 터주었다.
“연구기금 마련을 위한 사찰음식을 만들어 매입해 달라고 청해보라!”
된장, 고추장, 더덕장아찌, 도라지장아찌, 무장아찌 등을 만들었다.
조계사, 봉은사, 화계사, 도선사의 협조를 얻어 일주문 앞에 장을 폈다.
전국에서 유행했던 ‘웰빙’ 덕분이었을까? 1억5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한고비 넘긴 적문 스님은 연구와 실습, 강의에 집중했다.
2003년 평택 수도사 주지를 맡은 후에는 평택과 서울을 오가기가 벅차
2005년 ‘한국전통사찰음식문화연구소’를 수도사로 옮겨왔다.
1992년 설립된 이 연구소가 지금까지 94기에 걸쳐 배출한 인재는 3000여명에 이른다.
사찰음식 전승·보존과 대중화에 탁월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10월 조계종이 지정하는 ‘사찰음식 명장’ 반열에 올랐다.
현재 수도사는 조계종 지정 사찰음식 특화사찰 13곳 중 하나로 우뚝 서있다.
사찰음식을 연구하는 길목에서 넘어야 할 벽이 재정난만은 아니었을 터다.
“비아냥스레 곁눈질이 따가웠습니다. ‘비구가 되어 앞치마 두르고 칼을 잡느냐!’는 겁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물건 파는 장돌뱅이라는 조롱도 들어야 했습니다.
억장이 무너지기도 했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었습니다.”
적문 스님은 국 끓이고 채소 다듬던 행자시절을 떠올렸다.
“대중스님들의 건강이 지탱되고 하루빨리 성불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밥을 지었습니다.
때로는 부지깽이로 박자를 맞추어가면서 ‘천수경’ ‘반야심경’을 암송했습니다.
하루빨리 수계득도하여 큰방에 입방해 대중스님들과 함께 발우공양하기를 희망했습니다.
공양간에서 만든 건 음식만이 아닙니다. 두터운 신심, 성불을 향한 원력을 빚은 겁니다.
대자유를 품게 한 구도열정으로 지은 밥이요, 공양이었습니다.”
사찰음식을 마주하는 일 또한 깨달음을 향해 걷는 여정의 다름 아니라는 뜻이다.
일찍이 옛 선지식도 음식을 만드는 일부터 먹는 것까지 모두 수행의 한 과정이라고 보았다.
사찰음식연구에 매진해 온 적문 스님은
‘마을골목이 희망이고, 마을주민이 미래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수도사와 원정마을이 상생하는 공동체를 도모하고 있다.
사찰음식은 이제 ‘대중화’라는 명제 앞에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산사를 벗어나 일반인들을 위한 사찰음식이라면
오신채와 약간의 고기를 넣어도 괜찮지 않느냐는 것이다. 적문 스님은 손사래를 저었다.
“오신채와 육류 사용만은 절대 용인할 수 없습니다.
사찰음식과 일반 한식과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신선한 야채와의 깊은 대화를 통해 건져낸 정갈하면서도 담백한 맛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대중화·세계화를 추구한다고 해서
인공 조미료에 익숙한 현대인과 서양인들의 입맛에 맞출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켜온 맛을 내놓으면 될 일입니다.”
수도사에는 적문 스님의 원력으로 2017년 개관한 ‘원효대사 깨달음 체험관’이 있다.
수도사에 조성된 ‘원효대사 깨달음 체험관’ 전경.
원효 스님의 오도 이야기는 크게 3가지 버전으로 내려왔다.
원효대사 깨달음 체험관 개관 1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이평래 충남대 명예교수가 발표한 ‘원효 대사의 과거, 미래, 현재’ 논문을 통해 살펴보면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의외의 결론이 도출된다.
영명연수(永明延壽)의 ‘종경록(宗鏡錄)’은 시체에서 나온 썩은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고 전한다.
각범혜홍(覺範慧洪)의 ‘임간록(林間錄)’은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고 전한다.
그런데 모두 깨달음의 무대가 당나라다.
반면 찬녕(贊寧)의 ‘송고승전(宋高僧傳)’의 ‘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편은
깨달음의 시공간을 신라로 전한다. 오도의 순간을 들여다보자.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의상 스님이 본국(신라)의 해문(海門, 포구)에 이른 후
심한 비바람을 피하려 토감(土龕)으로 보이는 곳에 몸을 의지한다.
다음 날 아침 확인해 보니 무덤 속 해골 옆이었다.
아직 가랑비가 내리고 땅이 질퍽거려 하룻밤을 더 묵는데 귀신이 나타나 괴상한 짓을 한다.
원효가 말한다. “전날 밤에 머문 잠자리는 토감이라고 생각하니 안락하더니만,
오늘 밤에 머무는 잠자리는 귀향(鬼鄕)에 의탁한다고 생각하니 뒤탈이 많구나.
헛된 마음 생겨나니 여러 헛된 것 생겨나고,
헛된 마음 소멸하니 감실과 분묘는 둘이 아니다! 삼계는 오직 마음일 뿐이다.
만법도 오직 마음일 뿐이다. 어찌 따로 법을 구하러 오랑캐 나라에 가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당나라로 떠나지 않은 원효에 무게를 둔다면 찬녕의 ‘송고승전’ 속 이야기가 설득력 있다.
‘해골 물’ 마시고 깨달았다는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거둬야 하는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원효·의상 스님이 묵었던 무덤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2006년 발표된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의 ‘평택 원효 대사 오도성지 학술조사 보고서’는
수도암지를 원효 스님의 오도처로 추정했다.
원래의 수도암은 평택 원정리 봉화재가 있는 산기슭에 있었고
1960년대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그 자리에는 한국석유공사 LNG 가스저장소가 들어서 있다.
수도암의 맥을 이은 수도사는 유력한 ‘원효 대사 오도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자 침잠했던 사하촌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도 융성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것이다.
단청 안 된 대웅전과 요사채만 있었던 수도사를 중창한 건 적문 스님이다.
“원정마을도 처음부터 현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1980∼1990년대 평택화력발전소, LNG기지건설, 해군 제2함대사령부 이전 등에 밀려
원래의 터에서 현 위치로 이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도사와 원정리는 서부 평택 중에서도 생산기반이 유독 약해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적문 스님은 ‘마을골목이 희망이고, 마을주민이 미래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수도사와 원정마을이 상생하는 종합발전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일단 수도사는 도량확대 등 산사로서의 품격을 고취시키는데 역량을 집중하고,
원정마을은 담장과 진입로 개선 등을 통해 마을경관을 특색 있게 조성하는 방안을
다각도에서 검토하고 있습니다. 평택시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원정마을에는 호랑이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절과 마을의 공동체 프로젝트를 ‘원효·호암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명명했다.
마을과 수도사, 괴태곶 봉수대(평택 향토문화유적 1호)를 잇는 둘레길 부터
연지(蓮池)와 사찰음식박물관을 포함한 3만여 평 규모의 공원조성도
주민·지자체와 협의하며 추진하고 있다. 공원, 마을, 산사를 포함한
대규모 관광단지가 조성된다면 평택의 랜드마크로 급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적문 스님은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사찰음식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주민들이 가정에서 요리하거나 창업·취직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공원이 조성되면 사찰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도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 주민들이 맡아주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습니다.
공원이 하루아침에 조성될 수 있는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만면에 퍼지는 적문 스님의 미소 속에 “꼭 해내고 싶다”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원효·호암마을 가꾸기 사업. 이것은 ‘사찰음식’ 화두 하나 들고 향상일로를 걸어 온
적문 스님의 원력이 사회로 회향하는 대작불사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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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문 스님은
지리산 화엄사로 출가한 적문 스님은 법주사승가대학·
중앙승가대 불교복지학과· 동국대 행정대학원 복지행정과를 졸업했다.
은사는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했던 정대 스님이다.
현재 수도사 주지, 한국전통사찰음식문화연구소장,
평택불교사암연합회장을 맡고 있다.
석사학위 논문 ‘전통사찰음식이 현대인에게 미치는 영향’,
저서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전통사찰음식’이 있다.
2020년 3월 11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