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韓龍雲]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범어사 등지에서 활동한 불교 개혁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정옥(貞玉), 아명은 한유천(韓裕天).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卍海). 아버지는 한응준(韓應俊)이며 어머니는 온양 방씨이다.
활동 사항
한용운[1879~1944]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슬하에 딸 한영숙이 있다. 어려서부터 사서삼경을 독파하여 글을 잘 지었으며, 특히 시를 짓는 데 특출한 재주를 나타내었다. 1892년 14세 때에 향리에서 천안 전씨 전정숙(全貞淑)과 결혼한 후, 1905년 27세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승려 김연곡(金蓮谷)에게 득도하고 승려 전영제(全泳濟)로부터 봉완(奉玩)이라는 계명을 받고 승려가 되었다. 그 후 건봉사(乾鳳寺) 승려 만화(萬化)의 법을 받아 법명을 용운, 법호를 만해라 하였다. 1908년 일본을 방문하여 도쿄 등지를 순회하였는데, 이때 조동종의 종무원을 찾아가 홍진설삼(弘眞雪三)의 호의로 학비 없이 조동종계 구택대학(駒澤大學)에서 일본어와 불교 및 서양 철학을 배웠다.
1910년 10월 6일 원종의 대종정인 이회광(李晦光)이 일본의 조동종과 한국 불교의 통합을 꾀하는 조동종 맹약을 체결한 사실이 알려지자 한용운은 이회광의 소행이 한국 불교를 일본에 팔아먹는 매종(賣宗) 행위라고 규정하고 임제종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임제종의 임시 종정이 된 한용운은 1911년 10월경 임제종의 종무원을 부산의 범어사로 이전하고, 1912년 4월 10일 서울 인사동에 ‘조선임제종 중앙포교당’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6월 21일 조선 총독부의 탄압으로 임제종의 현판이 철거되자 임시 종무원을 동래 범어사로 이전하였다. 범어사 강원 강주가 된 것도 이 시기 즈음이다. 1914년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한 것을 비롯하여, 1915년에는 영남·호남 지방의 사찰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갖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유심(唯心)』지를 창간하였는데, 범어사 출신 김법린(金法麟)·김상헌(金祥憲) 등이 이를 도우며 한용운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1919년 2월 하순 경에 한용운은 범어사로 와서,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전개된 범어사 승려의 3·1 운동을 촉발하였다. 한용운은 3·1 운동의 민족 대표로 참여한 뒤, 1927년 신간회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조선불교청년회의 체제를 개편하여 조선불교총동맹으로 개칭하고 김상호(金尙昊)·김법린·최범술(崔凡述) 등과 함께 일제에 맞서 불교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9년 광주 학생 사건이 일어나자 전국 확대를 위한 활동을 맹렬하게 전개하였다. 1930년 『불교』지를 인수하여 사장이 되면서 불교 혁신 운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면서, 불교 청년 운동의 부활을 외쳤다. 일제 말기에는 창씨 제도, 강제 징병·징용과 물자 공출에 반대하였다. 1944년 6월 29일 지병인 신경통으로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尋牛壯)에서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한용운의 모든 사상은 투철한 불교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한용운은 「내가 믿는 불교」라는 논설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첫째, 불교는 그 신앙이 자신적(自信的)이다. 즉 신앙의 대상이 신이나 상제 등 다른 무엇에 있지 않고 오직 자아에 있으며 자아를 통해서 부처를 완성할 수 있기에 다른 신앙에 비해 예속적이 아니다. 둘째는 교지의 평등이다. 부처님 말씀에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한 것은 이를 의미한다. 셋째, 불교는 초월적 유심론이다. 즉 피상적으로 볼 때에는 유심론인 것 같지만 심(心)과 물(物)이 서로 상즉(相卽)해 있으며 불교에서의 심은 물을 포함한 심이라는 것이다.
한용운의 선교 사상은 저서 『불교 대전』과 『십현담 주해(十玄談註解)』에 잘 나타나 있다. 『불교 대전』은 1912년부터 통도사의 『고려 대장경(高麗大藏經)』 1,511부 6,802권을 낱낱이 열람한 후, 그 가운데 1천여 부의 경·율·론에서 뽑아 만들었다. 이것은 1914년 범어사에서 간행하였다. 그리고 『십현담 주해』는 1925년 여름 오세암에 머물 때 감흥을 일으켜 「십현담(十玄談)」에 새로운 주해를 시도한 것이다. 한용운은 선(禪)이란 인간의 마음을 닦는 정신 수양의 대명사라고 정의하고, 「조선 불교 개혁안」이라는 논설에서 “선은 불교의 형이상적 순리를 이름이요, 교는 불교적 언문(言文)을 이름이니 교(敎)로써 지(智)를 얻고 선(禪)으로써 정(定)을 얻는 것이라, 정(定)을 얻어야 바야흐로 생사고해를 건너서 열반 피안에 이르게 되는 것이요, 교를 말미암지 않으면 중생을 제도하는 보벌(宝筏)의 지침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과 교는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하나를 궐(闕)할 수가 없는 것이니 불교의 성쇠는 선교(禪敎)의 흥체(興替)에 영향 받는 것이다.”라고 하여 선과 교가 일치함을 주장하였다.
한용운 혁신 사상의 총화라 할 수 있는 것은 1913년에 간행된 『조선 불교 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이다. 여기서 불교를 유신하기 위해서는 파괴가 선행되어야 함을 주장하면서 “파괴란 훼철해서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구습 중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을 고쳐서 이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유신론에서 12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그 문제란 승려의 교육, 참선, 염불당 폐지, 포교, 사원 위치, 불가숭배의 소회(塑繪), 의식, 승려의 자력 생산, 승려의 결혼, 사원주직 선거법, 승려의 단결, 사원 통할 등이었다.
묘소
묘소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에 있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마련되었다. 묘지 번호는 204411번으로 정상 부근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대한민국장[훈기 번호 제25호]이 추서되었고, 1970년 3월 1일에 탑골 공원에 ‘용운당 대선사비’가 세워졌다. 1981년 10월 20일에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에 만해 기념관[관장 전보삼]이 개관되었고, 1985년 12월 2일에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남장리 산43-1번지에 만해 한용운 선생 동상이 세워졌다. 1990년에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의 만해 기념관을 남한산성 내로 이전하여 다시 개관하였다. 또 1995년에 만해학회 및 홍성문화원 주최로 홍성에서 제1회 만해제가 개최되었고, 생가 터에 만해 추모 사당인 만해사(萬海祠)를 준공하였다.
1999년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설악산 백담사에서 제1회 만해 축전으로 ‘만해학 국제 학술 대회’가 개최되었고, 2003년 9월 23일에는 백담사 입구에 백담사 만해 마을을 개관하였다. 2007년 10월 19일에는 홍성군 만해 생가 앞에 만해 체험관을 개관하고, 매년 9월 만해제 기간에 홍성군 생가지 만해사에서, 만해 한용운 선생 추모 다례를 실시하고 있다.
참고문헌
만해사상연구회, 『한용운 사상 연구』1·2(민족사, 1980)
숭산박길진박사 화갑기념사업회, 『한국 불교 사상사』(원불교 원광사, 1984)
김광식, 『한국 근세 불교사 연구』(민족사, 1996)
김경집, 『한국 근대 불교사』(경서원, 2000)
강미자, 「한용운의 불교 개혁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경성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07)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만해마을
개요
한국문학사의 대표적 시인이자 불교의 대선사, 민족운동가로 일제 강점기 암흑시대 겨레의 가슴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민족혼을 불어넣어 주신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문학성과 자유사상, 진보사상, 민족사상을 높이 기리고 선양하기 위한 실천의 장으로 설립되었다. 주요 시설로 만해의 저서, 유품 등이 전시된 만해문학박물관과 강연이 가능한 세미나실, 청소년수련시설, 숙소, 운동장 등이 갖추어져 있다.
출처:(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2025-01-2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