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성당
김 남 천
상암에서 남문 거리로 향해서 내려가다가 대동문 거리, 그 다음이 범교, 다시 말하면 서문통 입구인데, 대동강에서부터 보통벌 신양리 쪽을 바라보면서 외줄로 곧바르게 뚫린 상가(商街)가 바로 서문 거리다. 이 거리가 선창으로부터, 서쪽으로 곧바르게 달리는 중에는, 십자로(네거리)를 세 군데나 지나치게 되는데, 그 중 큰 것이 백화점 앞 전찻길, 그 다음이 물산여각, 농방, 가죽전, 잡화상, 축음기 집 등등을 지나서, 양말 공장이 있는 장별리 새길에서 부청 앞까지 가는 길과 교차가 되는 서문통 네거리, 그 다음이 신양리 쪽에서 감옥소 방면으로 가는 길과 서로 엇갈리는 서문 밖 네거리다. 이 네거리까지만 넘어서면 실상은 시외다. 길은 그대로 서성리까지 곧바로 뚫려 있어서, 한쪽으로는 창광산 가는 쪽, 또 한 줄기론 보통문 안으로 갈리는 곳까지 그럴듯하지만, 보통벌 냄새가 코를 찌르는 어수선한 거리고 게다가 노동자와 가난뱅이가 함께 덮친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그러한 거리다.
서문통이라는 거리가 예로부터 제법 번화한 거리이고, 보통벌, 평양의 곡창(穀倉)이라고 할 만한 이 넓은 벌판으로부터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관문을 이룬 길이기는 하나, 워낙이 기장이 짧은 데다, 빠져서 다다르는 부락이 노동자와 빈민의 소굴이고 보니, 전찻길에 가까운 부분에는 평양서도 손꼽이에 드는 누구누구의 포목점이 있고(이름을 밝히면 선전이나 광고가 될지도 모른다고 이
렇게 상호는 숨겨버린다), 또 한다하는 하이칼라 축음기 상회나, 의걸이 장롱,¹ 양복장, 체경이 휘황찬란한 농방이나가 있지마는, 서편으로 갈수록 이런 건 드물어지고 농민을 상대로 하는 잡화상, 자전거포, 지물포, 고무신 가게, 반찬 가게,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참말 국숫집으로 큰 건축은 막음을 막고, 그 다음은 그대로 고개턱을 넘어버리는 것이었다.
이 서문통 거리의 중복판쯤 해서, 그러니까 장삿목으로 치자면 거의 보잘것없는 대목이면서도, 또 생각해보면 그렇게만 볼 곳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그러한 곳에, 낡은 기와집, 단층집, 두 칸 너비의 유리 창문을 해 달고 지붕에 자그마한 간판을 달았는데, 명조체로다 ‘녹성당약국’이라 썼고, 서양 글자는 서양 글잔데 영국 글은 아니고 또 독일 글도 아니고, 찬찬히 살펴보니 어미(語尾)로 보아 에스페란토이기 갈 데 없는 글자로다 ‘벨다 스텔로’ 라고 가로 쓴, 외모로 보아 이 거리로서는 그다지 초라하지 않은 점포가 하나 있었다. 이 점포의 주인 되는 이가 에스페란토 마디나 하는지, 혹은 그가 고적하고 조용한 곳에 있는 동안 이 글자와 친숙했는지, 어쨌건 ‘녹성’으로다 상호를 삼고, ‘녹성당약국’ 이라 했는데, 이 ‘약국’이 ‘약방’이 아닌 것이 실상은 이 집 주인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약국’이란 명칭은 약제사가 없는 매약상이나 약종상은 붙일 수 없는 규정이라 하여, 이 ‘약국’이 저 간판 양쪽에 써 붙인 ‘처방 조제’와 함께, 이러저러한 약방이나 약장수와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라 한다.
새로 전화를 매었는지 유리창에 ‘전화 개설, 이사팔팔’이라고 커다랗게 써 붙이고, ‘마스쿠 아리마스’²니 ‘가정 상비 화장수, 구리세링,³ 가리 액,⁴ 일명, 베르쓰 수(水). 대매출’이니 한 종이를 써서 그 옆에 이리저리 붙였다. 시절은 겨울인가 보다. 유리창 구멍을 하나 뚫고 낡은 함석 연통이 쑥 거리로 나온 놈이, 간판 옆으로 금방 석탄을 넣었는지 꺼먼 연기를 내뿜고 있다.
이 약방과 같은 지붕 밑에 있고, 얇은 널판으로다 칸새를 막은 위 칸은 우중충한 자전거포다. 자전거포라고 해도, 새것은 체면상 두어 틀, 밖에서 잘 보일 만한 곳에 세워놓았을 뿐, 파는 것보다는 낡은 놈 고치는 게 아마 본업인 모양 같다. 이러한 자전거포에 일하는 축들이란 상상만 해도 족할 만큼 뻔한 얼굴 생김새다. 얼굴의 본 판때기는 어찌 되었건, 옷이랄까 낯이랄까 신발이랄까 그 머리에 뒤집어쓴 의관이랄까, 그대로 검댕이와 기름과 먼지투성이다. 이란 축들이 만들어내는 음향(音響)이란, 소름이 끼치는 생철⁵ 째는 소리거나, 지붕까지 울리는 마치⁶ 소리거나, 제법 화덕을 끼고 자분자분한다는 이야기가, 또 바람벽을 뚫고 옆집까지 들릴 만한 쌍스런 잡소리와 기왓골이 떠날 듯한 웃음소리다.
약방 아래집은 뚝 떨어져서 지물포이기 때문에 비교적 조용한 것이다. 그런데 남쪽 거리, 바로 약방의 건넌집이 그중 질색이다. 명색이 잡화상인데, 상점의 이름부터 재미난다. ‘싸게 파는 눅거리 상덤’ 이렇게 긴 놈이 전부 상점 이름이다. 눅거리 상점이라면 눅게 파는 상점, 다시 말하면 싸게 파는 상점이라는 뜻인데, 왜 하필 ‘싸게 파는 눅거리 상덤’은 뭬냐고 할는지 모르나, 도리우치⁷쓰고 전반⁸ 같은 동정을 단 세루 두루마기 밑으로, 옹구⁹ 뿔 바지를 척 늘어트린 젊은 주인님에게 물을라 치면, 딴은 그럴듯도 하여 가로대, 싸다는 말은 경언¹⁰이요 눅다는 말은 평안도 사투리다, 그러니까 북도 사람 남도 사람 모두 끌어들일 셈 치고 붙였다 하니, 조선 안의 잇속은 혼자 차지할 뱃심인진 몰라도, 제법 한글어학자다운 설명이 재미스럽지 않은 바 아니다. 그러나 이걸 갖고야 성화랄 것까지 될 것도 없다. 고약스럽기는 하투에도 몇 차례씩 점원이 총출동하여 점포 앞에 나서서 제금¹¹과 깽매기¹²와 갱지니¹³와 징을 두들겨대는 것인데, 이 소동은 아닌 게 아니라 상당히 머리빡을 산란케 한다. 손님을 끄는 광고술법이 이 지경이 되면 파는 이나 사는 이나, 모두 엔간한 축들이지만, 그 덕분에 부근은 하루도 몇 차례씩 상당한 불편을 겪는다. 그런데 예까지는 그런대로 견뎌 배길 만하다. 아침부터 밤새도룩 줄창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고작 너덧 차례, 한 번에 오 분 내지 십 분이니, 그것 쯤이야 못 참을 리 없겠는데, 참말 기가 막히는 것은 축음기의 확성이다. 가게 문을 떼고 꽹과리를 울려대기 전부터 축음기는 소란스레 울어댄다. 레코드나 좀 좋은가, 맹꽁이타령, 군밤타령. 꼴불견, 조선 행진곡 도합 예닐곱 장 되는 놈을 몇 번이든 되풀이한다. 아무리 질기고 든든한 레코드 판이기로서니 그렇게 지독스레 틀어서야 어데 배겨날 수가 있는가, 그래서 가다가는 합선이 되고 혼선이 되어, 걸걸한 목청으로 어느 연극 영화계의 원로가 넣었다는 ‘군밤 사려, 군밤 사려’가 보템이 아니라 이 분 동안 되풀이된 적이 있었다. 사운드 박스를 손으로 콕 지르기만 하면 될 것을 이 양반들은 재미난다고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러니 불쌍한 건 우리 극계의 원로 되시는 윤 아무개 씨, 그대로 한결같이 ‘군밤 사려, 군밤 사려’ ……
그 아랫집 윗집은 모두 이 ‘싸게 파는 눅거리 상덤’과 한 지붕 밑인데, 이 커다란 건축물의 주인은 물론 옛제부터 서문 거리에서 행세하는 지주이고 고리 대금업자다. 이부¹⁴ 연세가 진갑을 넘어서 점포 뒤로 질펀한 저택, 어느 훈훈하고 깊숙한 방에 누워 계시고, 맏아들은 미국인자 한, 먼 고장에 가서 공부를 하고 왔다는데, 그 흔티 흔한 박사나 학사 학위 하나 못 얻어갖고, 그러니 대체 무얼 공부 했는지는 하느님밖에 모르게 되었는데 두툼한 외투에 궁둥이 쪽에만 띠를 붙인 모양 하며, 모자, 안경, 양복, 구두 도대체 몸 가꾼 품은 제 법 그럴듯하여, 시체¹⁵를 따라 기생첩을 해갖고 어디 비나전골이라든가 어딘가에서 딴살림을 한다고, 한 달에 몇 번밖에는 이 거리 위에 나타나지 않는다. 셋째아들과 딸은 서울 가서 공부를 한다는데 겨울 방학이 되질 않아 아직 돌아오진 않았으니 그 사람 된 품을 알 길이 없다. 명물인즉슨 그러니까 이 집 둘째아들인데, 유도도 좀 했고 권투도 좀 했고, 그의 본 이름보다는 최 도깨비라는 별명이 더 유명할 만큼 어쨌건 수상쩍은 방면으로 이름을 떨친 분이다. 매일 하는 업은, 이 부근 가게와 전방을 여남은 집 차례로 돌아다니면서, 축이나 잡힐 진소리¹⁶를 수작하고, 밤이면 늦게까지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장국밥집이나 맹물집에서 대포나 한잔 걸치고 점포 위층, 전등도 없고 화덕도 없고 침대만 있는 추운 방으로 기어올라가 공처럼 꾸부리고 자버리는 것인데, 이렇게 온기 없는 데서 기거한다는 것도 물론 그의 자랑거리의 하나이다.
어쨌건 이 건축물에 상당히 많은 가게가 있는데, 싸게 파는 눅거리 상점 윗집이 자그마한 고무신 가게, 아랫집이 간판점, 그 라랫집이 양복점이고, 이 집에선 한 동 떨어져서 우편소와 한 지붕 밑에 있는 좀 큼직한 양복점은 서양 사람들의 양복을 주문 맡노라고 일요일엔 가게 문을 닫고(위층과 안방에선 물론 직공들이 일을 하고 있다) 의젓하니 성경책과 찬미책을 끼고 서문통 예배당으로 간다. 서양 사람이나 만나면 외투 자락에서 손을 뽑아, 제법 양국 말이나 하는 듯이 히죽하니 웃으면서 “꿋 모닝, 하우 두 유두” 라든가 뭐라든가를 중얼거리면서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사람 좋은(?) 코 큰 친구는 드물게 보는 독실한 교우라고, 서툰 조선 말로다 “하나님 은혜 많이 받으십니까” 하고 마주 웃는다.
이렇게 이 부근의 상인 신사 제씨를 소개하려면 한이 없을 테니 인제 이만 해두고, 그러니까 이런 틈에 끼어 있는 우리 녹성당약국으로 이야깃머리를 돌려야겠는데……
녹성당약국의 주인 박성운이는 화덕에다 새로이 조개탄 한 삽을 지핀 뒤에 손을 탁탁 털고 다시 테이블 옆에 놓은 의자에, 가만히 엉덩이를 올려놓는다. 불길이 이는지, 화덕 속에서 확 하는 소리와 이어서 으르렁거리는 화염 소리가 나는 것을 힐끔 곁눈질하고, 박성운은 낯을 앞에 앉은 손님에게로 돌린다. 창문께에 등을 돌려 대고 놓인 의자에는, 조금 전에 찾아온 학생복을 입은 키가 작달막한 청년이 낡은 도리우치를 무릎 위에 놓고 앉아 있다.
주인은 이야기가 끊어져서 미안스럽다는 말도, 그러면 다시 말씀을 계속해달라는 인사의 말도, 아무것도 아니하고 턱아리¹⁷를 약간 추키듯 하면서 청년의 얼굴을 바라본다. 스물을 겨우 넘었을까 말까, 반반히 깎은 머리카락이 더북이 자라서 숱지게 관자놀이께를 덮었는데, 본시부터 그리 넓지 않던 이마가 답답하리만큼 까만 눈썹을 압박하고, 눈시울엔가, 입술 위에 지저분한 솜털엔가, 또는 납작지근하게 생긴 밑으로, 검정 콩알처럼 두 구멍이 또렷한 콧구멍엔가, 어덴가 검버섯이 낀 듯이 까마툭한 얼굴을 대밭은¹⁸ 목덜미 위에 올려놓은 이 청년은, 방 안이 산산하여 불이 꺼졌나 보려고 주인이 화덕을 주무르는 동안 중단했던 이야기를, 잠시 입 가상에 희미한 미소를 그리는 듯하다 말고, 삽시에 긴장의 빛을 얼굴에 나타내며, 오순도순하나 열기 찬 목소리로, 그리고 이야기가 진전됨에 따라 연설조로 되기 쉬운 그러한 구초¹⁹로, 이렇게 입을 열어 이어나갔다.
“요컨대 이러한 문화적 욕망에 대답해주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가 아니겠소.”
말을 뚝 끊고 잠시 약방 주인의 얼굴을 고요히 쳐다본다. 그가 말하는 ‘문화적 욕망’이라는 건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많은 대중들 새에 은연중에 자라나고 있는 문화에 대한 갈망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조금 전부터 이러한 실제의 예를 들어갖고 주인에게 설명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보통문 안이나 서성리 같은 빈민가에는 고무든가 양말 같은 것에 종사하는 많은 가족들이 살고 있는데, 밤일이나 아니 하는 박엔 노유²⁰가 한자리에 다섯 여섯 모여서, 옛말을 하든가 전기 책 (이 청년은 전기 책이라는 부류에다 서슴지 않고, 『춘향전』 『사씨남정기』 『심청전』 『유풍렬전』 『열녀조』, 심지어는 『추월색』까지 함께 뒤섞어 간주하였다)을 읽든가 하면서 밤을 새고, 또 사실 이 청년이 이러한 재료를 하나 들어서 설명한 걸, 모두 적으려면 한량이 없지마는, 어쨌든 이 밖에도 수없이 많은 실례를 들어서 말한 뒤에, 요컨대 이런 것은 그들이 문학이나 음악이나 다른 고상한 취미나 오락을 열심히 갈망하고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표적인데, 동시에 그것을 찾으려야 찾지 못하는 구체적인 표적으로도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인 것이다. 이러한 결론이 있은 뒤에 조금 전에 이 청년이 주인에게 말한 ‘요컨대 이러한 문화적 욕망에’ 운운하는 말구가 붙었던 것이다.
약방의 주인은 가만히 앉아 있다. 마주 앉은 청년이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여하간의 대답을 치열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을 비록 눈은 좌장이 놓인 곳을, ‘유키와리밍’ ‘나이스’라고 쓴 병딱지가 주르니나란히²¹한 그 부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기는 하였으나,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표정은 마치 청년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는 것 같았다. 청년은 제가 한 제 말에 흥분하여, 가슴속에 뿌엿한 몽둥이 같은 것이 솟아오르는 것을 참고, 주인의 찬성과 동의를 구하고 있었으나, 생각했던 것처럼 수월하게 대답이 나지 않는 것에 실망하듯,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을 가만히 옆으로 돌렸다.
이 청년은 녹성당 주인 박성운에게서, 단지 자기의 설명과 결론에 대한 찬성이나 동의나 격려만을 기대하였는지 모른다. ‘네 생각이 옳다’ ‘네 결론이 정당하다,’ 이것으로 만족하였을는지 모른다. 그의 표정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이러한 기대에서 어그러진 낙망. 물론 박성운이라고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리는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듣고 앉았는 그의 심경은 결코 그렇게 단순치는 못하였고, 청년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수록 쉽사리 ‘네 생각하는 바가 맞았다’고 무릎을 쳐서, 청년의 영웅 심리를 만족시켜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옳다든가 곯다²²든가 가부간의 판단을 내리거나, 혹은 네 설명과 결론 가운데 어느 것은 편협하고 기계적이고 조급적이고, 어느 대목은 가장 투명한 정당한 분석이라든가 하는 정도로 시비를 가리거나, 그렇게 하기는 물론 박성운으로서 그다지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쉽사리 해치울 수 있는 이것을, 수월하게 해치울 수 없는 미묘한 심리가 주인의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이론과 실제라는 관계를 생각하는 이에겐 어렵지 않게 눈치 채일 심리였으나, 스물 전후의 이 청년이 그것을 이해할 턱이 없다. 녹성당 주인으로서는 그것을 승인
하고 안 하는 것이 단순한 판단만이 아니고, 동시에 그것은 그의 거취까지를 결정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여하간 대답을 해야 할 참인데, 그때에 마침 이 전화를 개시하여 꼭 세번째로 째르릉 전령이 울었다. 주인은 가만히 일어나서 기둥에 매인 전화통 앞으로 갔다. 어디서 약 주문이라도 왔는가 하는 생각에 앞서서 우선 어떻게도 할 수 없었던 궁박한 공기 속에서 자기를 건져내어준 것에, 가벼운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전화 매기 전부터 아내나 사환 아이에게까지 일러두었고, 또 자기 스스로도 몇 번인가 연습해본 대로, 수화기를 드는 즉시 곧 전화통을 향하여 ‘네 고맙습니다. 녹성당약국이올시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전화를 맨 지는 오늘까지 사흘째인데 첫날은 아무 데서도 전화가 오지 않았고, 또 이곳서도 걸지 않았다. 그 이튿날은 전화 있는 몇 군데에 이쪽으로부터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새로 개설했는데, 이러저러한 번호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나. ‘이천사백팔십팔번’의 ‘팔필’ 이 ‘하치하치’가 돼서, 녹성당이 '벌떼처럼 번창해나가겠네그려,²³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신문지국의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도 다 저물어서 전기가 켜질 무렵에, 이 약방과 거래하는 커다란 도매상 M약방에서, 이번 계산은 여느 때보다 열흘 이르게, 이 달 말에 할 터이니 그렇게 알고 준비해달라는, 그리 달갑지 않은 전화가, 실로 밖으로부터 걸린 첫번째의 것이었다. 이 전화는 약국의 책임 약제사요, 박성운의 아내 되는 김경옥이가 받았는데, 두 달이면 해산을 할 불룩한 활멱²⁴처럼 굽은 배를 앞으로 안고, 그는 수화기를 얹어버리면서,
“젠장, 전화 매구 처음 오는 게 겨우 돈 채근이야”
하고 입이 쓴지, 손을 털고 그대로 가게에 달린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두번째 전화가 온 것은 오늘 아침,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삼십 분쯤 전인데, 박성운과는 중학 동창으로 신문지국의 기자, 말하자면 특파 기자로 있는 최영호한테서 온 것으로, 우리 지국원 일동이 신진 작가 박성운씨의 실업계 진출을 축하하는 뜻으로, 대량적 기념 구입을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은단 일원짜리 두 개는 이 할(割) 인 (引)으로,
―노상 이십전짜리 한 봉지는 정가대로, 그리고 이건 특히 지국원 아닌 친구에게서 주문을 받은 건데,
―푸로다르고르 백 그람, 메틸렌브라우 정 오십 알, 태전위산 십 전짜리를 한 봉지 붙여서 고파이파바루삼 한 온스짜리, 그리고는, 한참 전화통을 들고 섰더니 “가만있게, 내가 이즈음 밤잠이 잘 안 오는 게 아무래도 신경쇠약 같으니 무어 적당한 거 없겠나.”
박성운은 연필로 주문을 적다가,
“적당한 약이 없다니 말이 되는가, 부름제 같은 거 먹어보게나, 한 주일만 써보면 알 도리가 있을 테니. 좀 맛은 흉하지만 우리 보통학교 때 수신에서, ‘료야쿠 구치니 니가시’²⁵라는 말 배웠겠다.”
그래서 ,
―그놈, 부름제를 이 일분,
마지막으로,
“가정 봉사도 해야겠으니 베르쓰 수 한 병만 곁달아 보내게.”
주문이 끝나고는 외상이 아니고 당당한 맞돈일세, 기다리니 곧 배달해주게, 이렇게 당부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역시 그래도 친구밖에는 없다 아내도 신이 나서 약을 짓고, 박성운이도 약장에서 약을 내리노라 계산서를 쓰노라 큰일 난 것처럼 돌아갔고, 사환 아이 놈도 화덕의 젓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앉았는 게 무료했던 참이라, 배달 구럭을 들고 엉거주춤해 돌아갔는데, 그 녀석이 배달을 간 지 십 분이 되고, 한참 뒤범벅을 개는 듯이 전방이 활기를 띠고 있을 때 지금 이 청년이 박성운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오는 전화가 바로 세번째 것인데,
“성운이야?”
낯선 목소리가 대뜸 이렇게 묻는다. 좀 어안이 벙벙해서 “네, 나 박성운이올시다” 하고 대답하니, “나 철민인데, 전화를 맸다길래 한번 걸어보느라구.”
이렇게 듣고 보니, 걸찍한 목청의 특징이 전화통에 잉잉거려 뚜렷치는 않았으나 철민의 것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똑똑히 깨닫는 순간 성운은 펀뜻 처음 수화기를 들고 ‘성운이야?’
하는 첫 마디를 들었을 때 벌써, 철민인 것을 자기는 짐작하고, 짐짓 시침을 떼고 ‘네, 나 박성운이올시다’ 하고 대답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과연 자기는 첫 번 발성이 들릴 때부터, 그가 철민인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러면 어째서 자기는 그것을 모르는 척 꾸며대었을까. 그러나 이런 것을 천착하고 있을 사이도 없이, 이편 쪽의
대답 같은 건 통히 개의치도 않는다는 듯이,
“업무가 날로 번창해가는 표적이니, 우리 우인 일동은 이 이상 반가울 게 없네. 한편 생각하면 걱정도 안 되는 건 아니치만. 말하자면 날루 사업이 번창해가면 그만큼씩 더 성운이가 장사치가 되어가는 표적 같애서. 그러나 그런 건 물론 장난의 말이고…….”
이편에서는 한마디의 대답도 않고, 그대로 전화통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따름이다. 전화 개설을 축하하는 친구의 말을 그렇게만 들어버릴 수 없는 대목이 있는지, 약국 주인은 덤덤히 낯에 꺼머툭한 불유쾌한 그림자를 그리며 그대로 서 있는데, 저편에선 기어이,
“저, 내, 아이 보내께 일전 것과 같은 거 오 일분치만 보내주게, 응. 머, 소변두 잘 나오구 거진 나었긴 했지만. 그럼 믿네.”
그러고는 뚝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 이었다. 부득이 이편에서도 아무 대꾸 없이 수화기를 얹어버릴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는 제자리에 와 앉는다. 팔을 걸고 목을 움츠린 채 아무 말이 없다.
전화가 오기 전 그는, 지금 그의 앞에 앉아서 전화통으로부터 돌아오는 그를 힐끗 쳐다본 채 이야깃머리를 잡으려고 입술을 나물거리다 마는 청년에 대하여, 무어라고는 가부간의 대답을 해야할 의무가 쐤었다. 대답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쉽사리 해버릴 수도 없고, 그래서 적지 아니 등이 달아 있을 때 구세주처럼 전화가 왔다. 그 전화가 다 끝이 났고 그는 다시 제 의자로 돌아와 청년과 마주 앉았으니, 이야기는 다시 계속되어야 할 것이요, 그러자면 무엇보다 먼저 청년이 알고자 하는 질문에, 가부간의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 아닌가. 물론 박성운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될 수 있으면, 그것을 잊어버리고 싶었고, 잊어지지 않거든, 마치 잊은 거나 같이 그렇게 뵈려고 애쓰고 있는 자기를 막연하니 의식한다. 전화의 내용을 모르는 청년은, 약방 주인 박성운이가 저토록 침울해진 것은, 필시 전화로 인연해서 심상치 않은 무슨 곡절이 생긴 탓이라고 혼자서 생각하고 있을 것이요, 그래서 섣불리 제 생각에 대한 판단을 구하면, 공연히 그의 머리만 더 산란케 할는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요, 그러자니 결국 손틉으로 책상머리를 긁다가 그대로 도리우치를 만지 작거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인제 이왕 생각하는 김이니, ‘저, 미안하지만 이제 온 전화로 좀 큰 문젯거리가 생겨서, 내가 곧 나가보아야 할 텐데…….’라고든지 뭐라고든지 헛소리를 놓고, 이 짓눌린 공기와 압박에서 벗어날 길을 막연하니 상상해보았으나, 그건 너무 온당치 못한 비겁한 행동이라고 반성하면서, 그대로 침울한 표정만 더 심각하니 양미간에 그리고 앉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필시 이 단순한 청년이 그러한 것을 알 턱이 없으련만), 청년은 아까 말하던 문제는 잊어버린 듯이(아니, 잊어버렸을 리는 만무하다. 그는 박성운이가 혼자서 생각해보고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그렇게 커다란 생각을 자기의 언설에 대해서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요, 그러니까 제가 생각하고 있는 명쾌한 분석과 결론을, 서울서 온 지 반년 가량 되는, 신진 작가에게 토로하는 것으로 자기 만족을 느끼려고 하였던 것임에 틀림없고.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이루어진 지금, 그는 새삼스러이 전화가 오기 전에, 질문 형식으로 되었던 그 이야기의 판단을 다시 구해볼 필요를 인정치 않았던 것이다), 얼굴에 미소를 그리는 듯하면서 자리를 일어나며 ,
“그럼 처음 말씀 올린 대루, 오늘 세시에 만나서”
그 다음은 입을 뚝 감물고 도리우치를 쳐드는데,
“네?”
하고 주인이 의아해하는 것을 보자, 이어,
“저, 아까 말한 거시기, 예술적 가치에 대한 거 말입니다”
하고 말한다.
“아아”
머리를 끄덕이며 ,
“그러시유, 내 만나서 알아듣도록 설명해주겠습니다. 그 자리엔 동무도 오겠소?”
“아니, 나야 그대로 인도만 하군 빠지겠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청년은 꺼떡 인사를 하고, 어린애 같은 자그마하나 다부지게 생긴 몸을, 앞으로 수그리는 듯하면서 까뚝까뚝 신양리 쪽으로 걸어갔다.
박성운은 유리창을 닫고 멍하니 길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중얼 뇌어보다가, 맞은편 싸게 파는 눅거리 상점에서 깽매기, 제금, 징을 요란스레 울리면서, 전방으로부터 세 녀석이 거리로 뛰어나오는 바람에 펀뜻 정신이 들었다.
깽매 깽매, 저르렁 저르렁, 징징.
이 소리를 들으며, 일순간 성운은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 무신경 무감각 상태에 빠져 있었다. 창밖에서 늙은 부인 한 분이 어름거리고 섰는 것도,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를 조금도 마음 붙여 생각지 아니하였다. 눈은 빤히 그것을 보고 있었으나, 망막은 이 늙은 부인의 그림자를, 마치 그의 두 귓구멍이 지금 한창 뚜드려대는 소란스런 깽매기 소리를 청취하지 못하듯이, 아무것도 간취하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창밖의 늙은 부인네는, 어느 것이 출입문인데, 어데를 어떻게 열든가 밀든가 하여야 약방 안엘 들어갈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어서, 그런데, 창 안에서 빤히 저를 내어다보면서도, 문을 열어주든가 가르쳐주든가 하는 일이 도무지 없는 성운이를 수상쩍게 생각하면서, 드디어 용기를 내어 바싹 그의 얼굴을 유리창에다 들이붙이고, 무어라고 양껏 소래기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로소 약방 주인 박성운은 펀뜻 정신이 들었다. 하마터면 약사러 온 손님을 놓칠 뻔했다고, 황급히 창문을 드륵 열고, 늙은이의 입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며, 귀를 기울였다. 필시 무슨 약을, 하다못해 오전짜리 고약이라도 사려고, 이 수건 쓴 시골 노파가 이렇게 안타까이 출입구를 찾고 있었던 줄 직각한 그는 상인다운 표정을 얼굴에 띠고, 노파가 부르는 약명과 눅거리 상점에서 뚜드리는 깽매기 소리를 분별하려고, 두 귀까지를 한없이 긴장시키고 있는데, 그의 고막을 울린 노파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기홀병원²⁶ 얼루루 갑네까?”
하는 사투리였다. 그 말이 하도 뜻밖이고 기대와는 너무도 엄청나게 어긋나서, 아직도 머리를 노파의 얼굴 앞에서 떼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 운동사가 고갯마루에서 굴러 났시오”
하고 설명까지 붙인다. 성운은 상반신을 쳐들고, 그저께 저녁녘에, 회천 가는 고개턱에서 사고를 일으킨 자동차 운전수의 늙은 어머니에게, 기독병원 가는 길을 가리켜주었다. 문득 배달 간 아이 놈이 어째서 여적 돌아오지 않는가 하고 신문지국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전화통 앞에 나온 아이 놈은, 약을 주문한 선생님이 외출을 하셔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한다. 현금을 주겠노라고 곧 배달해달라던 친구가, 그새에 어디로 빠져나갔다는 것도 수상하거니와(하기는 그새에 무슨 사건이 발생하여, 곧 촌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현장에를 달려갔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 사람을 기다리고 앉았는 아이 놈도 아이 놈이라고, 그래 약은 지국장이든가 총무선생께 맡기고, 그대로 와버리라고 핀잔주듯 하여 전화를 끊었다.
깽매기와 제금 소리가 멎고 건넌집²⁷에서는 걸직한 군밤타령이 시작되었다. 성운이는 의자에 돌아와 펄신하니 주저앉아서 가만한 한숨을 내쉬고, 그리고 전신에 가벼운 피로가 퍼지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허공에 겨누고, 멀리 창문으로 건넌집 지붕이, 희여그무레한 겨울 하늘과 잇다은 곳을 바라보는데, 두 입술 틈에서, 저윽이 탄식 조로 ‘장사’ 하는 한마디 소리가, 거의 한숨인 것처럼 가느다랗게 새어나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무의식중에 뱉어놓은 이 한마디 말이 품고 있는 ‘불안’스런 내용에 악연히 놀래어, 벌떡 몸을 일으키었다. 장사라고 시작한 지 불과 석 달, 벌써 제정신이 이것을 감당해나갈 수 없을 만큼 기진하였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은, 성운으로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난로, 약장, 전화, 좌장을 주욱 둘러보고, 독약, 극약의 약장 문이 걸려있는가, 고약이나 다른 유명 매약 중에 품절이 되었거나 밑창이 난 것은 없는가, 난로의 불은 죽지 않았나, 아뿔싸 좌장 위에 먼지가 또 보오얗게 올라 앉았구나. 드디어 성운은 먼지떨이개를 찾아서 유리 좌장을 털어보고 있는데, 아침에 서울 있는 친구한테서 온 한 장의 편지, 내용을 따지자면 ‘군이 서울을 아주 떠나버린 건 일종의 도피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는 말로써 개괄할 수 있는 그러한 편지 사연이, 문득 머리에 떠올라서, 그는 가슴속에서 다시금 울렁거리는 심장의 진동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이때에 별안간 가게와 꿰달린²⁸ 방문이 열리고,
“시방 온 전화가 어데서 완 거요”
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귀를 째는 바람에, 그의 당황한 빛은 일층 더 수상한 거동으로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이때에 마침 옆집 자전거포에서는 세 사나이의 높은 웃음소리가 바람벽을 뒤흔들면서 쏟아져 들려왔다.
오후 세시가 가까워온다. 그런데 경상골 어느 친구네 집으로 배달 간 아이 놈은 돌아오질 않는다. 가는 데 십 분이나 십오 분, 돌아오는 데 또 십 분이나 십오 분, 그래 삼십 분을 잡아본 것인데, 여적 돌아오지 않으니, 집을 찾느라고 시간을 보내는 것일까, 그렇게 소상 분명하게 그려준 지도를. 혹시 도중에서 자전거 사슬이 끊어지든가, 바퀴가 빵꾸를 했거나, 아니, 그런 정도라면 모르거니와 어쩌면 또 사람을 깔거나, 자전거끼리 충돌을 했거나, 전차와 경주를 하다가 뒷부리에 쓸려서 미끄러져 궤도를 베고 뻐드러졌거나 했다면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산약 수약²⁹ 합쳐서 육십 전어치 팔아서 일이십 전 남는가 마는가 하는 장사에, 자전거 수선료나 사람 치료비를 빼내자면, 한 달 동안의 영업이 하늘로 올라간다.
그러나 물론 그렇도록 나쁜 경우를 상상해볼 것까지는 없고 우선 당장에 그 녀석이 돌아오질 않으면 약방이 비는 거나 같다. 아내가 있고, 또 아내야말로 약국의 관리자니까, 신약, 매약, 독약, 극약 할 것 없이, 처방 조제에서 약가 계산에 이르기까지, 무엇하나 못 하는 게 없는 자격자이지만, 만삭이 가까운 무거운 몸,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동안 방 안을 서성거리고 돌기에는 그리 힘든 일은 아닐 것이나, 꼭 시간 맞추어 나가는 데가 어디냐고 따지기 붙하면³⁰ 적지 아니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아이가 돌아오는 몇 분 동안을 기다리지 못하고, 한 분 한 초를 다투어 나가보아야 할 곳이 어디냐고, 묻는 날엔 저윽이 곤란한 문젯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아내는 이야기의 내용을 대충 짐작하고 있다. 노것이 더 탈바가지란 말이다. 모르면 그대로 아무렇게나 속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쓰러쳐버릴³¹수 없을 만큼 아내 김경옥이는 그런 실천적 방면엔 상식 이상의 눈치를 갖고 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시간은 지켜줘야 한다. 성운은 방안으로 들어가 외투를 걸치고, 목에 두터운 목도리를 두르고 머리에는 방한 모자를 쓰고, 입에는 마스크를 걸어야만 한다.
사실 아내와 성운이 새에는, 지금 몇 시간 동안 여러 번 충돌이 일어날 것을 성운의 침묵주의로 인하여 그것이 제어되어왔다. 성운이는 아까, 아내가 문을 별꺽 열면서, ‘시방 온 전화가 어데서 완 거요’ 하는 그 말에 대해서부터, 여적 몇 시간 동안을 침묵으로 일관해서 겨우 아내의 도전을 늘러버리기에 성공했다. 단 한마디의 대답일지라도 성운이가 지껄여대는 날엔, 성운에게 불리하면 하였지, 결코 유리하지는 않을, 많은 비양정³² 소리가 아내의 입에서 쏟아져 나올 것 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전화를 건 철민이라는 박성운이의 친구는, 녹성당약국과는 사이가 좋지 못할 까닭이 있었다. 김경옥이의 입을 빌린다면, 철민은 대충 이러한 사람이다.
“연극을 하면 하는 걸로, 그것으로 일정한 직업을 세우든가, 또 그렇지 못할 경우거들랑 성성한 젊은 몸이니, 노동을 하거나 하다못해 막일이라도 해서 생활 방도를 가져야 하는 게 아니냐. 이건 노동도 허기 싫다, 그렇다고 반반히 손끝의 물만 톡톡 털고, 허구헌 날 오십 전이요 일 원이요, 결코 그게 많은 돈이라든가 그게 아까워서 허는 말이 아니라, 그 근성 이 아주 천박하단 말이오. 노동은 신성하다면서, 그리구 제꺽하면 소시민 근성 이라고 욕지거리를 삼으면서, 자기는 어째서 그런 나타³³하고, 게으르고, 남에게 의뢰하고, 비럭질하려는 룸펜 근성을 버리지 못하느냐 말이야. 남들은 다 제만 못해서 건축장에 가서 벽돌을 지고, 도로 공사장에 가서 광이³⁴를 드는 줄 아는가. 또 그것도 그 정도라면 모르겠는데, 미운 고양이가 두부까지 물어간다고, 어데서 무슨 장난을 해갖고 성병(性病)까지 올려갖고 와서 치료를 해달라고 하니, 우리가 그래 그 집에서 절게살이³⁵를 지냈단 말이요 뭐요. 그게 또 폐결핵이던가 무슨 딴 병이라면 모르겠는데, 트리퍼³⁶까지 를 우리가 맡어 고쳐줘야 할 무슨 책임을 지고 있단 말이오. 글쎄. 또 허는 말이, 날이 차고 불 때지 않은 찬 방에서 자는 관계인지, 냉병이 생긴가 부라구 하니, 세상에 어데 임균이란 게 그렇게 자연 발생 하는 법두 있는 거요. 원 남을 깔보아도 분수가 있는 거지 우린 머 바지저고린 줄만 아는 거야. 연극이면 연극대로 그만한 성실한 맛이 있는 거가 아니고, 이건 그냥 좋다구나 하구서 남을 막 떡처럼 주물러보겠다니, 그런 작자를 치다꺼리허기 위해, 밭 팔아서 약방 채려놨다우.”
아내 김경옥이가 철민이라는 사람을 이렇게 보고 있으니, 박성운이가, 대체 아까 온 전화의 내용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 역시 남이야 엄처시하라고 웃건 말건, 묵목히 침묵주의를 쓸밖에 별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다음 한참 있다가는 신문지국에 약 배달 갔던 아이가, 돈은 못 받아갖고 그대로 돌아왔다.
“언젠 외상이 아니라고 당당허니 올려놓군, 누굴 농락허자는 겐가.”
이러한 아내의 말에, 성운은 또 무어라고 변명이나 설명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냐. 물론 아내의 말에 하나도 거짓이 없음을 성운은 잘 알고 있다. 그는 무거운 몸을 하고 찬 방에 서서 약을 짓고 있다. 그리고 박성운이, 자기로 말해도 새벽 여덟시부터 밤 열두시, 야업하고 돌아가는 소년공들이 종종걸음을 치며 약방 앞을 지나쳐버릴 때까지, 허리를 꼬부리고 주판알을 따지고 있다. 책도 변변히 못 읽고, 글 한 줄을 써보지 못하면서, 그렇게 해서 하루종일 판 것의 매상고가, 때로 돈 오 원이 넘지 못할 때가 있으니, 이렇도록 애쓰고 이를 갈면서 하는 사업에 친구란 이들은 농락이 아니면 착취다. 이렇게 생각하는 아내에게도 물론 일리는 있다고 성운은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또한 침묵을 지키고 있을밖에 별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어이 안 되려니, 철민이한테서 어린아이가 약을 가지러 오고야 말았다. 전화가 어디서 온 거냐고, 아내가 묻는 말에 대답은 하였건, 안 하였건, 어린아이가 와서, 마치 빚이나 재촉하듯이, “철민 씨가 약 달래요” 하고 외쳤으니, 아내의 성미가 온당할 이치 만무하다.
“아니, 어데서 온 녀석인데, 우리가, 머 누구 약을 도덕질해왔냐.”
어린아이는 눈이 휘등그레 섰다.
“그저 가서 그러면 안다구 하든데”
하고 맥없이 경옥이의 앞에 서 있다.
“가서 그러면 안다는 양반이, 대체 어떤 대감이시란 말이냐. 우리집에 빚을 지웠다드냐 돈을 맡겼다드냐.”
그러나 성운은 아무 말도 아니하고 미리 싸두었던 약봉지를 아이에게 들려주어 보냈다. 아내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는지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는 그대로 돌아서서 공연한 화덕불만 쑤셔보았던 것이다.
이때에 문득, 성운은 어린아이 시절에 물속에 누가 더 오랫동안 들어가 있을 수 있는가를 내기하던 그 질식할 듯한 잠수의 경험이 머리에 떠올랐다. 지기는 싫고, 그러자니 물속에서 숨은 답답하고, 눈을 감은 채.숨을 꼭 틀어막고 있던 어린 날의 장난, 그 질식할 듯한 안타까움이 문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아무 관계 없이, 시계는 지금 세시 십분 전을 가리키고 있다. 성운은 큰 결심을 한 것처럼 침착하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아랫목 어둑시근한 곳에서 아내가 편물을 하다가, 펀뜻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성운은 잘 알았으나 그는 애써 못 본 척 모르는 척한다. 모든 것을 무시해버리려는 노력. 이로 말미암아 그의 거동은 몹시 침착하였다. 입을 건 입고, 쓸 건 쓰고, 두를 건 두르고, 그리고 방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여적 가만히 앉아서 남편의 하는 모양을 눈 붙여 바라보고 있던 경옥이가,
“어데루 가시오.”
매우 침착하게 묻는다. 그러나 물론 성운은 못 들은 척하고 방문을 닫는다.
“어데루 가는 게요.”
소리가 좀 높다. 그러나 역시 묵묵부답.
“흥, 정신없이 그리다가…….”
그러나 유리문을 닫고 행길로 나서면서 들은 이 한마디 희미한 말에서, 성운은 약간 주춤해보았으나, 역시 그대로 행길 가운데로 나섰다.
이때에 옆집 자전거포에서는 붕카이소오지³⁷를 하다가 함석 대야를 뚜드리며 어르랑타령을 하는 것이 들려왔고, 건넌집 싸게 파는 눅거리 상점에서는 손님이 아니 온다고 오늘 잡아 세 번째 깽매기를 요란스레 뚜들겨대고 있었으나, 성운은 파출소 앞을 지나면서 ,
“약이 잘 나가십니까”
하고 묻는 나카무라 순사에게,
“오카케사마데”³⁸
하고 대답하고 있었다.
-끝-
2016년 5월 30일 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