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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오라버니!
이제 오라버니께 못할 말 어디 있겠습니까?
내 나이 팔순이 다 되어..오라버니 구순이 다 되었는데..뭬가 미셔버 말 못하갔소!
오라버니께서 83년도 유월에 보내주신
구구절절 담은 편지가 내 애 간장을 끊은지도 23년이나 지났소!
그 때는 혈육을 30여년만에 찾은 기쁨도 기쁨이려니와
설움이라는 낱말 따위로는 대신할 수 조차없던 ...
남편잃은 슬픔보다
내 뼈 내 살로 만든 내 새끼들! 귀한 내 다섯자식들
내 육신을 갈래갈래 조각내더라도 내 자식들 제대로 키우느라 온 정신이 나갔었슴다..
내가 에미노릇 제대로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슴다..
늘 가슴 한켠에는 시리고 아프고 풍죽하게 키우지못한 죄 미안했고
내아들 중국에서 좋은 재간 알려진 넘 되어있음도
내가 잘 키운거보다 지가 꼭 하고싶은 거 열심히 한 길가더니
이름난 음악 작곡가 되어있습디다.
내가 ...
남편잃은 과부되었어도.. 언젠가는 한국 땅,내 조국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늘 가슴 시리게 안고 그 누구못지않게 굳굳이 잘 살아 나왔고..
내 새끼들이 중국대륙 한 귀퉁이 땅에 태어나
그 땅 위에서 뼈가 굵어졌다고해서...조선족이란 이름이긴 하지만
참으로 자랑스런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한국인으로 잘 살아가고 있으며..
"껍데기는 한국사람같이 생긴 넘들이지만 알맹이는 중국 뙤넘들이야" 라는
<한국사람>야유를 받아도..
"살기는 중국땅에 사는 넘들이지만 정신은 저샌징 딱이야"라는
<중국사람>야유를 받아도..
그 말한이가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한대 쥐어 갈기지 않고
포용하며 살아나오는 아량과 지혜와 인내도 갖추어 살아가는 내 새끼들 입니다.
오라버니!
우리식구들이
그 모진 바람.. 중국 문화혁명을 내가 어찌 지나왔겠소?
사람이 날로 죽어 넘어지고 공개처형되는 그 아픔을
중국 그 대륙은 어디 그런 난리 겪고 싶어서 겪었던 난리였겠소?
좋은 세상 만난 오라버니는 내 눈에 정말 부럽소!
한국땅에서 비만에 걸려 살 빼려고
운동하러 다니실때
난 중국땅 질퍽거리는 길에 눈 내리면 눈 치우지않아
벌금 물어야 하는 나라법 앞에서
눈알이 튀어 나갈듯한 혹한에 자식보다 한걸음이라도 더 먼저
껑껑 얼어붙는 눈 뜯어내려고 달려나가곤 했습니다.
국가와 국가의 사회문제나,문화 역사를
50여년 반세기 서로 다른 사회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에 실려온 탓에
한 피를 나눈 오라버니와 이 동생 사이에도
문화의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음이 비단 우리들 뿐만이겠습니까만
그리웠던 내 친 오라버니 살아생전을
단 한번 만이라도 더 보고 가려고..
그리운 내 아버지 산소 한번더 찾아가 뵙고 가려고...
말그대로 오매불망 찾아 왔을 뿐임다!
그러나 그 역사 그 세월들은
내 그리움을 갉아먹고 다 지나는 바람이었을 뿐..
이제 우리 두 사람
백발로 서로 바라보고 섰는데..
왜
왜
오라버니는
"너 중국 좋다더니..돌아 가거라..중국으로 당장 돌아가거라.."
이 조국산하에서 누릴것 누리고 사시면서 호통만 치십니까?
20년전
편지 구구절절 한국으로 돌아오라 돌아오라 하시더니
이제야 그 긴긴 행로에서 돌아온 제게
어찌하여
"너..돌아 가거라..중국으로"
"너..돌아 가거라..중국으로"
"너..돌아 가거라..중국으로"
"너..돌아 가거라..중국으로"
종일 같은 단어,같은 억양으로 이 말씀밖에 못하시는 겝니까?
어찌하여 이 한마디만 골수에 박으시고
되풀이 하시는 치매에 걸리시어
엄동에 퍼 붇는 눈발멎기 기다려 비행기 어지럼증도 내다 버리고
오직 한국땅 오라버니 곁에 온다는 기쁨하나로..
고향땅으로 온다는 기대하나로..왔는데..
부풀어 날아갈듯했던
이 가슴을 어찌 문전 박대 하여 갈기갈기 찢으시는지요?
그 20여년이 흐르는 세월동안 도데체 무슨일이
오라버니를 내땅 이 곳에서 이토록 병들게 했단 말씀이오?
애통합니다
조금만 더...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계시더라면
이 동생이 오라버니 붙들고
우리 어머니 고향-이 한국땅도 바라보이지않는 중국 간도땅 한곳에 묻었는데
그 무덤마저 사라진 저 중국에서의 50년 파란만장했던 삶과 그리움
토해내기도 전에
무슨 지독한 병으로
"너..돌아 가거라..중국으로"
라고 되뇌시는가 ! 하고 내 입이 굳어 아무대꾸 못한채
오라버니랑 올케의 게면쩍은 ..묘한 모습을 뒤로하고
낯설은 유교수를 따라 나섰지요
나 그날 처음 유교수라는 사람 공항서 보았으니
불원천리 찾아간 오라버니 집을 낯설은 이 앞세우고 그리 나서는 순간..
내 오장육부가 설움과 슬픔으로 찢어지기 시작했던 것임다!
나 오라버니께 돈 좀 달라 한국 온거 아니외다!
나 이래뵈도 오라버니 닮아 자존심 강하고 경우바르게 한평생 살아왔슴다.
나 중국땅이 싫어서 한국땅 찾아 온게 켤단코 아니오!..
아니오이다! 오라버니
나 그리 구차한 형편도 아니며
중국서 사는 우리 동포들!
중국 싫어서 그나라 버리고 한국땅서 살겠다 하는 사람도
혹간 있을순 있겟지만
그나라 그 형편에서 맞춰
평온하게 잘 살아 가는 이들이 더 많으니
선입견으로 날 서럽게 몰아내셨다면
나 진정 섭섭합네다만.
내 눈에
오라버니 마음에 긴 병이 들어와 있는것 같기에
말로만 들은 치매기로
날 중국 돌아가라 호통치시는 그 모습이
정녕 더 일찍 한국으로 돌아와 오라버니 곁에 함께 하지 못했던 세월만이
한 스러울 따름입디다.
결국엔 오라버니!
내 호적
내 이름 다 한국땅에 두고도
오라버니 호적에 가족으로 붙어있는 내이름 석자
<신우식>이
오라버니 인감도장 한번 못얻어
<한국인> 못되고 있으니
이 병원에서도 한국 호적만 회복되면
병원비를 보험처리해 줄 수 있다 하여 희망을 걸었던 것 마저
무산되고 만 것이니
이제는 아픈 몸보다 다시 살아난 생명의 값을 이 팔순 늙으막에
빚 지고 살 일들이 ..살아도 산 게 아니외다
내 나라에서 낳지 못하고 내 조국에서 키우지 못했어도
내 사랑하는 내 자식들
그 시대 그 중국 척박한 땅에서도
이리 반듯하게 키워놓았으니
"아버지..아버지 떠난 이 못난딸의 자식들이올시다
절받으시고 복 많이 내려 주소"라고 자랑겸 말씀드리려고 준비한 말도...
그 한 마디 말을 20수년간 오직
내 가슴 안에만 숨겨 넣어놓은채
오직 "하루빨리 내 땅 내 조국 고향에 다시 돌아가리라"는 기대로 아껴두었다가
지난 1월 이땅을 밟았는데....
오! 한국에 온지 15여일 만에 장이 터져버린것은
말 그대로 오라버니와 올케의 슬픈 병색을 보고 나의 애간장이 녹은것이외다
똥을 싸고..피를 쏟고..그리고 기절한 채
의식을 차리고나니 수술실이었는데..
나를 수술하실 안박사님은
"나를 믿느냐?..그러면 내가 믿는 하나님을 믿어라..그러면 수술 잘 될 겁니다"..
내가 그동안 뭘 믿고 살아왔을게요?
내가 그 하 많은 세월의 주름들을 어찌 기록으로 다 남길것이며
내 기억을 단 한순간도 내버려두지 않는
그 모진 고초를 어찌 살았다고 표현 할 수 있으리요
내가 오라버니 사랑하는 마음이 한없었어도
오라버니 돌아오라 하실적에 못 돌아온 것은 용서해 주시고
사노라고 흘려댄 내 눈물을 위로좀 해 주소!
나의 삶은
이곳 한국같지 않았음은 말로할 필요도 없습네다
그 흔하게
십자가 서있는 교회안에서
두손 모아 기도할 그 자유로운 믿음..그런 믿음의 환경조차 없었으므로
죽음앞에 살아남는 그 순간 믿는 그 바램이 내 신앙이었슴다!
그래서 수술대 위에서
"나를 믿느냐?..그러면 내가 믿는 하나님을 믿어라.."
하신 의사박사님의 음성을 따라
처음으로
"하나님을 믿겠으니..내자식들 살고있는 중국으로 돌아가게 꼭 살려쥐 보소."
나 마취되어 한치 순간뒤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 믿어 보리라" 양눈에 눈물흘리며
다시 살아 나고싶어
아무 조건없이 목숨걸고 하나님 따라 들어간다 ..이 내 몸 맡겼소
그게 이 땅에서의 내 살아날 신앙이었으면 나 이제 그 고백
하나님 있든 없든 거두지 않을거요 결코 후회도 않소!..이렇게 살아나 있잖슴둥?
이러면 훌륭한 계약이 이루어 진거제?
지난날 중국땅에서의 내 살아났던 신앙도 표현은 달랐으나
중국땅도 그 소산으로 날 살려줬음을 켤코 부인할 수 없는 과거 역사요!
오라버니..그런데
오라버니 ..
그러나 나의 배를 가르고 보니 수술칼도 대기전에
내 뱃속은 끔찍한 고름의 강이었더라 하였슴다!
그게 왜그래왔던지
그 고름의 애간장은 내가 살아온 모진 세월과 그리움의 상처 였소!
얼마나 아팠는지 아십네까? 나 죽어도 오라버니 맘 안아프게 하고싶어
나는 차라리
비명조차 지르지 않으려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뜯으며 그 상흔을 감추었더니
유교수가 내 말라붙은 똥 다 발라 내어 닦아주고 구린내 달은채로
병원으로 실고 간거..
의식이 돌아온 순간
중환자실 침대앞에서 피도 물도 섞이지 않은 그 여인이
나 살려달라 자기 하나님께 기도하는거 다 보았슴다!
내가 외국인이라 의료보험도 안되고 병원비는 중국돈으로 환산하면
우리 아들 딸들 평생벌어 합쳐도 갚지못할 거금이 쏟아져 내렸는데도
"일 없슴다..ㅎㅎ 할머니..일 없슴다.."라며 내 조선말 흉내를 내어가며
나를 억지로라도 웃게 만들고는..
오늘날 까지 내 한국 국적만 회복되어 나오면 병원비 아무 걱정없이
대한민국에서 다 해결된다고 위로하기에
염치 불구하고 오랫동안 이렇게 누워있는 이 병원침대가
어떨때는 바늘방석같지만
죽을병인데 죽지않고 괜히 살아나서 유교수 고생시키고
중국에 자식들 살아난 목숨 다시 잃을까 백방으로
살아서 별난
오라버니
어쩌면
지난 50수년 기다려운 나의 귀향이
그리 쉽게 이루어 지리라 여긴 나의 탓일것이라
이 지경으로 누워있더라도 한국인이면서 한국 국적을 얻지 못함이
지금도 내 탓이라 여김다!
이렇게 병원에 누운채 겨울갔고 봄도 오더니 삽시에 가 버리고...
우리 일생을 뒤 집어 흔들어 놓았던 6월이 마저 다가옵네다.
그러나
사랑하는 오라버니!
아무래도 좋습네다!
나 굳굳 합네다!
일 없슴다
아무리 중국으로 돌아가라 하셔도
일 없슴다!
오라버니 본정신 드시면 인감 한번만 찍어주소!
오라버니만이 내가 친 동생이라 보증해 주는 혈육이니
우리가 고향 뒷 동산에서 잔디 삘기 캐먹던 친 동기간이 맞다고
정신 차리고..날 알아볼 수만 있다면 그때 인감도장 한번만 찍어 주소!
지금은
무엇엔가 겁먹은 우리 오라버니 병들어
어딘가 자유롭지 못하신것 같지만
젊은날 똑똑하기 그지없던 청년으로
천하를 호령해도 든든하기만 하셨던 그 기백으로
굳굳이 제 정신 차리시오!
그래야 우리 그리웠던 지난날 들을
아버지 산소 앞에서 통곡하며 털어놓고
부등켜안고 ...얼싸안고...
한 맺힌 우리 두 오누이 그리움을 눈감으며 달랠길 있을 것임다!
사랑하는 나의 오라버니~
사랑하는 나의 ...단 하나뿐인오라버니...!
오늘은 신우식 할머니의 생신날이다.
어제
중국에 계신 신우식 할머니의 아드님이신 00 교수님의 모습을
컴퓨터 화면을 통하여 만났다.
그동안
수 개월을 몇차례 중국으로 왕래하며 00교수를 만나곤 했으나
지금은 신우식 할머니 한국에서 쓰러지셨다는 전갈 받은 이 후
그 쇼크로 쓰러지시고
지병이 돋아 <투석>하며..링겔을 방 천정에 달아놓고
아직 투병하고 계신 모습에 할 말을 잊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분은 평소 말씀이 흔하지 않은 분이다.
그런데도 이 두 마디를 아끼지 않으신다.
나의 사랑과 노력으로 조그마한 기쁨이라도 그 분 내외께
일어날 수만 있다면...하고
이 글을 띄엄띄엄 적어 올린다.
팔이 너무 많이 힘들다..그래도 ..
중요한 얘기는 사랑하는 우리 님들께 다음편에 올려 드려야 겠다.
어제는 다니는 병원 <정형외과>에서
내일은 같은병원<신경과>에서
병명이 확실히 잡히지도 않는 마비 증세와
밤 마다 일어나서 그칠줄 모를는 강한 통증으로
"이러다 6월3일 연주 못하게 되려나?...설마 .."
기도한다.
죽는 날까지..나는 크로마하프를 연주하며 죽으리라
식인종한테 잡혀가도 아름다운 하프선율로 찬양하면
혹...안 잡아먹고 살려줄줄 아남?..ㅎㅎ
이 세상에 아직 미전도국이 남아있는 한 ..
난 크로마하프를 안고 저 미시시피강 가에라도 가서 순교하리라..
에그..그런 꿈
내가 꿈꾸는 그 곳으로 ...가리라
힘내자!
yooyoo
(계속)
-예고편- 사랑하는 한국인..사랑하는 중국인..
(1983년 6월 6일 중국 신우식할머니께 보낸 오빠 000 님의 편지)
그리운 나의 동생!
그대의 서신을 받고 나 역시 한참동안
눈물로 서면을 적시었다.
30수년만의 첫 편지이니 우는것도 당연한일로 생각되면서도
생사존망을 몰라 탄식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었기 때문이다.
3매의 사진으로 그 쪽 가족 상황을 완전 포착하였으며 한가지 가슴 아프고 괴로운 일은
매부 서거소식이다.
그대가 3년전에 홀 몸이 되다니..나로서는 전연 생각외의 청처벽력이 아닐수 없다.
바로 나의 동생이 과부라는 불명예로운 몸이 되다니 참으로가막힌 노릇이다
비록 5남매의 자녀가 다 잘 자랐다 하지만
남편없는 그 외롭고 괴로운 심정을 내 어삐 이해하지 못하리
내 손이 떨려 글싸기 빗나간다.
우리집은 예로부터 훈장(선생)노릇이 대대로 계속되는구나.
나도,조카도,아들,딸도 모두가 교사들이니 말이다.
시시로 마음이 괴로울때는 굳은 결의로자녀들을 독려하여
"분발하여라"
나에게 자주 편지주기바라며 고국에 한 번 다녀갈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인가 연구하여 보아라.
조카가 교원이니 그런 문제를 잘 풀수 있겠지.
중국 적십자사에 문의하는것도 좋은 방법일 것인즉
주소를 알게되니 서로 만나고 싶은 마음 더욱 간절하다.
무슨 말로 위로하면 그대의 아픈 마음을 받랠 수 있을까..
20 이 훨씬 지난 만혼이었는데
거기에 말년도 되지못한채
인생의 진미를 알 수 있는 중년갱년기에 사별하게 되니
그 애닯으고 안타까움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우리집은 증조 할아버지,할아버지 모두 큰 선비로서
양반의 탈을 쓰고 너무 청빈하여서 큰댁 할아버지가
종 2 품의 벼슬이었지만 불 같이 가난하여서 나도 외가에서 잔뼈가 굵었으며
그대도 어릴때 얼마나 고생 하였던가.
그대의 딱한 처지 맹랑할 따름이며왕복 비행기 삯과
기타 여비를 내가 미국돈으로 대어 줄 테니 한번 힘써 보기 바란다.
나도 인생이 사양길에 접어들어 황혼이 멀지 않은것 같으니
모든것이 조급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나의 전 안사람에게도그저 살아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간단히 알려주라
애들의 신상에 피해 있을까 두려워한다.
나도 지금부터는 육성 방송을 하지 않을 것이며
오래 사노라면 만날 수 있겠지.
누가 누구를 원망하며
시국을 탓하여서는 무엇하랴.
이 모든것이 우리들의 운명인것 같다.
어머니 사진을 오랫만에 뵈옵고
내 혼자 한없이 울었다.
내가 의정부 외삼촌에게 갖다 보이면 그 양반도 자기 친 누님이니까
울것이다.
나는 가을에 고향에 갈 터인즉
그때 아버지 산소앞에 엎드려 그대와
작은 누이동생,그리고 그 조카들이 살아있음을 보고 드릴것이다.
내가 고향에 돌아왔을때 작은 할아버지 역시 조상 산소에서 통곡..
울어서 내가 살아왔음을 보고드리던 그 모습이 역력히 눔에 떠 오른다.
서울에서 안동까지는 고속으로 3시간에 간다.
이 편지가 그대에게 도착할때는
그대의 생일쯤이 될것이다.
금년 단오날은 6월25일이다
어머니 산소 약도를 꼭 보내달라고 하였는데..
가도 찾기 힘들터인즉
언제든지 나하고 조카와 함께 세사람이 가자!
근 40년 묵은 무덤이니 이만 저만한 묵뫼가 아닐터 인즉
고생하고 갔다가.찾지 못하고도리어 섭섭하기만 할것이다
헛고생 하지 말기만 바라며 좋은 바람에 희소식 있기만 빌면서 고대한다.
다시 그대의 음력 5월 5일의 생일을 축하한다.
86년에는아시아대회88년에는 전 세계의 올림픽 대회가9월에 열릴터이니
전 가족이 꼭 오라!
두 손으로 환영할 것이다.
서울 국제공항인 김포공항에 내리는 그대의 모습이 훤히 눈앞에 떠 오른다.
우리식구가 모두 나가 환영할 것이다.
오늘은 이만...
또 다음 기회가 있으니까 부디 건강하여라!
83년 6월 6일 오빠 씀
*DOO ROO 연주단*
*DOO ROO 연주단* + DOO ROO 선교회+ http://cafe.daum.net/yooyoo78
한국크로마하프예술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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