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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류귀종(萬流歸宗)-6-통권90화
암회색 바위와 쌀쌀하기 그지없는 험산(險山). 사람들은 이곳을 흑산(黑山)이라 불렀고 그곳에 사는 주민 스스로 흑부(黑府)라 칭했다. 험하디험한 흑산이 유명한 것은 이곳에 강호 무림을 위진 시키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하인들 중 흑산의 위치를 제대로 아는 자가 얼마 없었지만 알 만한 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웅랑교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흑산자의 철강시는 그 위력이 대단합니다. 도검이 통하지 않고 지치지도 않으니 웬만한 고수 정도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거야 누구나 아는 것이고, 문제는 흑산자의 강시를 얼마나 많이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느냐지!”
“하나 괴팍하고 자존심 강한 흑산자가 과연 우리의 뜻에 따라줄까요?”
“친구가 되지 않겠다면 적이다. 흑산자가 서해수군 제독과 돈독한 관계를 가진 이상, 언제고 우리 뒤통수를 칠지 모르지. 나중을 위해서라도 시간이 있을 때 처리하는 것이 좋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바람 속을 뚫고 찰갑(刹甲) 밑에 두툼한 털가죽 옷을 입은 수십 명의 사내들이 흑산의 자그마한 골짜기를 따라 말을 몰고 있었다. 바로 웅랑교 웅기영주(熊旗領主) 웅천패(熊天覇)와 웅기에 속한 웅인들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산을 올랐을까. 계곡 사이에서 허공에서 말소리가 웅웅 울려왔다.
“클클클클, 더 이상 들어오면 전부 죽이겠다.”
―히히히힝~!
폐부를 갉아대는 목소리에 말들이 놀라 뒷걸음질치고 웅천패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한곳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호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저는 웅랑교 웅기영주 웅천패입니다. 고인께서는 천하의 열두 지존 중 한 분이신 강시지존이 아니신지요?”
“클클클클, 내 집에 찾아와 내가 맞냐고 묻다니 우습구나. 너희 곰탱이들이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지 모르나 본좌는 흥미 없으니 떠나라!”
흑산자는 단호하게 더 이상 어떤 협상이나 대화의 여지를 주지 않았지만 웅천패는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본 웅랑교가 이번에 천하를 도모하는데 고인의 힘을 빌리려 합니다.”
“….”
하지만 그 말의 대답은 계곡 앞에 반쯤 썩어 문드러진 자들이 나타남으로써 끝났다.
“영주, 강시입니다.”
“재미있군. 간단명료한 것이 마음에 들어. 웅기는 들어라!”
―워!
웅기영주의 말에 짧은 기합성으로 대답을 대신한 27기의 웅기들은 어느새 놀란 말을 달래고 대열을 맞추어 섰다.
“어디 그 유명한 강시지존의 강시들의 힘을 시험해볼까.”
“돌격!”
웅천패의 눈짓을 받은 웅고(熊考)는 대열을 갖춘 웅기들에게 공격을 명했다.
―두구구구구….
좁은 산길에서의 돌격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웅인들은 기본적으로 흑막의 사람들이다. 웅랑교의 기병들이 돌격을 시작하자, 그것을 확인한 흑부의 반오가 문드러진 손으로 어렵사리 목에 걸려 있는 호각을 들더니 기이한 음률에 맞추어 불었다.
―피~ 삐~ 비비~!
그러자 그 소리에 강시들이 반응하여 저돌적으로 달려오는 기마들을 덮쳐갔다.
―퍽! 퍼벅!
보병과 다르게 강시들이 육탄으로 말을 막아서자 일부는 강시를 튕겨 보냈고, 일부는 말을 고꾸라뜨렸다. 그러나 웅인들은 십수 년안 무예를 연마한 자들이었다. 말이 고꾸라지며 앞쪽으로 넘어졌지만 신법을 전개해 말에서 떨어져 나와 낙법으로 충격을 분산시켰다. 그리고 흉성을 드러내며 곰으로 둔갑했다.
―크앙~!
보통 사람이었다면 곰들의 포효에 전의를 잃고 몸이 굳었을 테지만 그들의 상대는 공포와 같은 감정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쿵! 콰직! 퍽!
산 자와 죽은 자의 싸움은 산 자의 우세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기이한 호각 소리와 함께 수백 구의 강시들이 계곡 위에서 떨어져 내려오자 상황은 급변했다.
―삐~~~피~ 삐~ 비비~~~!
―크앙?
“영주!”
“파혼풍뢰강(破魂風雷剛)!”
―빠강~!
수백 구의 강시들이 웅인들을 덮쳐 위급지경에 빠지(는 것을 보고??)자, 싸움에 참가하지 않고 있던 웅천패는 강기를 뿌려댔다. 쇠 부러지는 소리를 동반한 파혼풍뢰강은 떨어져 내려오는 강시들을 공격했고, 웅인들은 본능적으로 전장을 이탈했다.
“웅기 최정예인 풍자조(風字組)가 맥을 못 추다니, 과연 강시의 위력은 대단하군. 대단해! 그러나 내 앞을 막기에는 부족하다. 건곤화환(乾坤花環)!”
웅천패는 앞으로 나서며 허공에 거대한 불꽃 고리를 만들어 계곡의 절벽에서 떨어져 내린, 엉켜 있는 강시들을 휩쓸었다.
―화르르르르르….
엄청난 고열에 강시들은 순식간에 재로 변해버렸다. 웅천패가 사용한 이것은 무공이라기보다 마법에 가까운 선술이었다. 동방 대륙 오신룡(五神龍) 중 하나인 우(于)는 행동하는 가장 활동적인 용이었다. 잠들어 있기보다 깨어 있기를 좋아했고, 둥지에서 사색과 명상을 하는 것보다 여행하는 것을 선호했다. 칸 대륙에서 그의 발길이 스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그런 여행을 하는 도중 누군가 찾아왔다. 바로 앙(殃)이었다. 앙(殃)은 우(于)에게 굉(宏)과 조(祚)가 만들어놓은 왕조를 부수고 자신들의 왕조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우(于)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웅인(熊人)이 되어 그의 곁에 머물렀다. 우(于)는 세상을 여행하면서 귀천을 떠나 거의 모든 삶을 살아보았지만 왕조(王朝)를 여는 건국 영웅의 삶은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앙(殃)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간 각기 다른 삶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봉인해두었던 힘을 완전히 풀어놓았다.
“이놈! 음시마강(陰屍魔剛)!”
―카릉~!
웅천패는 숨어 소리나 지르던 상대가 모습을 보이며 검은 박쥐처럼 계곡 사이를 빠르게 왕래하더니 그대로 강기(剛氣)를 뿌려대자 전신에 호신강막(護身剛膜)을 둘러쳤다. 호신강기(護身剛氣) 정도는 갈기갈기 찢어버릴 위력이 있는 흑산자의 음시마강이었지만 웅천패 독문의 호신강막은 깨는 정도의 위력만 보였다.
―헉!
“패웅참장(覇熊斬掌)!”
“구음마조(九陰魔爪)!”
―캉!
―촤아아아아~!
그러나 호신강막이 깨지자 이제껏 태연하던 웅천패는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패웅참장 초식을 쳐내며 허리를 튕겼고, 흑산자의 조강(爪剛)은 웅천패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그의 애마를 산 채로 갈아버렸다. 그리고 무릎을 구부리지 않고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귀신같은 표홀신보(飄忽神步)로 기척이나 낌새도 없이 재차 구음마조의 거무스르한 조강을 머금은 손톱을 휘둘러왔다.
“욱! 감히….”
웅천패는, 아니 우(于)는 인간들이 말하는 초극 고수라는 괴물을 비로소 실감했다. 본신으로 화신(化身)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쉴 새 없이 생명을 위협하는 흑산자의 압도적인 체술(體術)에 도무지 찰나 짬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천만다행(千萬多幸)으로 흑산자의 공격이 멈춰졌다.
“웅랑교가 어찌 되었든, 본좌와는 상관없는 일. 떠나라!”
“감히….”
“….”
“누구에게 명령하는 거야! 만천빙우박(滿天氷雨雹)!”
―쿠릉~!
“….”
―탕타닥. 탕따,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여, 영주….”
“크악!”
―퍽 퍼벅!
분노에 찬 신룡 우(于)가 만들어낸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우박이 천지사방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것은 웅랑교의 웅인들도 흑산자도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그리고 좁다면 좁고 넓다면 넓은, 소가 끄는 수레가 충분히 지나다닐 수 있는 넓이의 계곡은 우(于)가 만들어낸 얼음 덩어리들이 가득 메웠다.
―쩡! 쩌정 푸하~!
얼음이 가득 메워진 계곡에서 누군가 얼음을 깨고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여기저기 살가죽이 찢긴 형상의 처참한 몰골을 한 웅천패였다.
“휴우~! 이거 호인이가 알면 한 소리 하겠군. 가장 똘똘한 놈들로 골라 왔는데….”
웅천패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람 같은 신법을 전개해 흑산을 올랐다. 그리고 얼마 후 웅천패가 뚫어놓은 구멍으로 검은 옷에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노인이 기어나왔다.
“지독한….”
얼음 속을 헤치고 나온 흑산자는 흑산에 부는 칼바람에 새삼스레 몸을 떨었다. 사방에서 전신을 때려오는 바위만한 얼음 덩어리를 막아내느라 무리하게 호신강기를 시전했다가 결국 공력이 고갈되어 추위조차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흑산자의 몸뚱이는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흑산자에게 희망이 있었다. 노인은 마지막 안간힘을 짜내 품속에서 곤옥 반지를 꺼내들고 마지막 공력을 쥐어짜냈다. 그러나 내상이 생각보다 깊었는지 공력이 모이지 않았다. 그러나 흑산자는 포기하지 않고 평생 정심하게 수련했던 고루혈마공을 찬찬히 끌어올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흑산자는 한줄기 진기를 끌어모을 수 있었고 그 진기를 손으로 모아 곤옥 반지에 주입했다. 그리고 결과를 확인할 새도 없이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
설화는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를 진즉에 넘어선 초극 고수다. 그래서 북자성의 차가운 겨울 칼바람도 설화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러나 겨울에는 그 계절에 맞는 의복이 있었다. 한창 멋을 낼 나이인 설화는 겨울이라는 계절에 맞추어 여행복을 마련했지만 서방님이 말한 여행은 설화의 상상을 초월했다.
“아우~! 더워! 여름옷은 준비하지 않았는데.”
겨울 없이 사시장철 무더위만 계속되는 땅. 남례성으로 설화를 데리고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한 라혼은 설화가 하는 잔소리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해요. 미리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저는 겨울옷만 잔뜩 준비했는데. 이래선 입을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무슨 겨울 날씨가 이렇게 더운 거예요?”
“….”
라혼은 설화가 점점 여자처럼 자라는 데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많다고 생각하며 봉수성의 번화가로 들어섰다. 원래는 곧바로 귀왕림에 있는 가니아에게 설화를 데려가려 했지만 설화가 계속 투덜거리자 기분을 풀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이곳에 온 것이다. 그리고 라혼의 의도는 어느 정도 적중했다. 반란이 토벌되고 호도와의 길이 뚫리자 점점 활기를 띠기 시작한 봉수성의 번화가는 봉록을 받는 하남천원군이 뿌리는 은자에 제법 짭짤하게 장사가 되어 호황을 맞고 있었다. 그러니 남례성 사람들이 느끼기에 제법 서늘해진 날씨는 거리로 나와 지내기에 적합했다. 게다가 곧 대규모의 투함들이 봉수성 항구에 들어올 터이라 항만 시설을 건설하거나 배들을 수리하는 인부들이 품삯을 받아 저녁이면 그야말로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는 봉수성이었다. 그러나 정오의 봉수성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다.
설화가 봉수성 번화가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남례성 특유의 하얀 아오자이를 사 입는 것이었다. 품이 넉넉한 바지와 길이가 긴 상의로 되어 있고 옆이 길게 트였으며 깃은 세워져 있다. 바지는 풍성하게 만들어 통기성이 좋은 옷이었다. 특히 이 옷은 가느다란 여인의 허리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단순한 옷이지만 어떻게 보면 무척 화려한 옷이었다. 특히 설화의 하얀 피부와 섶단 같은 검고 곧은 긴 머리카락은 투명하게 하얀 의장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아이고, 천상의 선녀가 따로 없구랴! 아가씨, 이리 와봐요.”
평생 이곳에서 옷을 만들어 팔던 늙은 부인은 자기가 만든 옷을 아름답게 차려입은 설화를 앉히고 묶은 머리를 풀어 빗으로 빗어주고는 붉은 꽃으로 장식을 해주었다.
“중주에서 오신 분 같은데, 이 옷은 이렇게 입는 것이라오.”
“감사합니다.”
라혼은 아름다운 설화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다 치장이 끝나자 노부인에게 사례했다. 설화는 이 옷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노부인에게 추가로 주문하고는 가게를 나섰다. 하얀 아오자이는 남례성 서부에서 가장 흔한 옷이었고 거리를 지나는 진토인 여인네 절반 이상이 하얀 아오자이를 입고 있었지만 까무잡잡한 갈색 피부의 여인들 사이에 눈처럼 투명한 설화의 미모는 더욱 돋보였다. 진토인들이 보기에, 특이하고 이국적이었다고 하는 말이 맞았다. 그리고 라혼 또한 의식적으로 [컨트롤 참Control Charm] 주문을 풀어 호기심 넘치는 설화와 같이 걸었다.
“어? 저기 대장군님 아닌가?”
“저, 정말이네? 같이 걷는 저 선녀는 누구지?”
“근데 우리 대장군님이 저렇게 잘생기신 분이었나?”
봉수성의 위병들은 본래 임무인 봉수성을 수비하기 위해 봉수성에 나누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위병들은 백호나한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라혼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대화를 들은 진토인은 자연스럽게 통풍 위주로 지어져 오두막 같은 선술집을 나와 대로에서 노상을 벌이고 있는 자에게 뭐라 말했다. 그러자 정오의 한가로움을 즐기던 노상은 자연스럽게 노상을 거둬들이고 슬쩍 모든 사람들에게 부러운 시선을 받는 두 남녀를 흘끗 훔쳐보고는 어디론가 바삐 걸어갔다. 그러나 라혼과 설화는 그럼 움직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봉수성의 이국적인 풍물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
“뭐야? 산이 움직였다고….”
대야는 의외의 소식에 굳은 얼굴의 시화를 쏘아보았다.
“이게 무슨 말이야? 백호나한은 거처에서 폐관에 들었다고 했지 않았나?”
“주, 죽여주십시오.”
“이렇게 된 이상 오히려 잘된 셈이다. 행적이 드러난 이상 감시만 철저히 하면 되니….”
“존명!”
대야 하수는 자신이 직접 그를 감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야는 최후까지 그를 만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백호나한 정도의 고수라면 사람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느라 그와 직접 대면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수는 고수 나름대로 기도(氣度)를 가지고 있는데 대야는 그런 기도를 감지할 수 있었다. 자객이 목표로 삼은 자의 기도에 감화되어 결국 칼을 꺾는 예는 의외로 찾아보기 쉬웠다. 대야 하수는 방 안으로 들어가 고요한 자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바로 백호나한의 초상이었다. 직접 만나보기를 포기한 이상 그의 그림을 그리며 마음속의 칼을 더욱 날카롭게 갈아둘 필요가 있었다.
한편 대야의 눈과 귀를 자청하던 시화는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난 백호나한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봉수성의 비밀 거점으로 직접 왔다. 그러나 시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행적을 놓쳐?”
“죄송합니다.”
“어찌 된 일인가?”
“그것이 대향로를 거닐던 놈이 막힌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그것이 그냥 사라졌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가? 내가 직접 가겠다.”
시화는 남루한 옷으로 갈아입고 백호나한이 사라졌다는 골목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리고 골목의 구석구석을 살폈으나 특이한 점은 없었다. 우측은 토만이라는 상인의 집이고, 좌측은 오우당이라는 중주 사람이 사는 집이었다. 그리고 골목 너머는 홍루(紅樓)였는데, 그곳은 남례일족에 속한 곳이었다.
‘이런 낭패가 있나!’
***
“뭐야? 주군이 봉수성 대향로(大饗路)에서 묘령의 여인과 함께 걸어가는 것을 봤다고?”
“제가 본 것이 아니라, 대향로에서 술을 마시던 위병들이 보았다고 합니다.”
장상은 주군에게 서해수군통제사에 제수되자 몇 배로 바빠졌다. 수군을 훈련시키고 숙련된 선원을 모아 편성하는 일을 장상이 책임지고 도맡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바쁘고 힘든 것이 어디 장상뿐이랴. 실질적으로 하남천원군을 장악한 주군이기에 주군이 알아야 할 일과 결정해주어야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주군은 호도를 접수한 뒤 모원이라는 문관과 반란 진토인의 중심 세력이었던 열지족 추장의 딸을 혼인시키는 것을 마지막으로 땅으로(?) 꺼져버렸다. 바로 폐관 수련을 명분으로 거처의 지하 밀실에 홀로 틀어박힌 것이다. 그리고 주군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젠장, 나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데 그 양반은 미녀를 옆에 끼고 나들이나 다니다니, 이건 너무 불공평하군!”
“자네 불평하는 소리가 바다 건너 남상까지 들리겠네그려….”
“해노 어르신!”
장상은 집무실로 들어오는 해노 인치를 반색하며 반갑게 맞이했다. 봉수성 항구 선착장 근처 과거 위병대장이 사용하던 집무실을 차지한 장상은 백호수영에서 주군이 서해수군통제사가 됨으로써 서해수군으로 바뀐 수군을 조직하고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봄이 되면 서경까지 올라가 이번에 새로 건조한 배를 인수해야 했다. 노꾼과 수병, 그리고 선원을 합하여 한 척당 300명을 태워야 했다. 서해수군에 배속될 투함과 백호수영의 몫으로 미리 확보한 투함을 합하여 투함만 총 214척이었다. 그러니 머릿수만으로 6만 5000여 명이고 이 중에서 배를 운용하는 선원만 2만여 명을 확보해야 했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 본래 서해수군으로 배속될 예정이었던, 그나마 모자란 선원과 수군을 기주와 무주, 계주에서 자신들의 방군으로 편성하고 내놓지 않고 있는데 주군은 장상에게 알아서 최대한 선원을 확보하라는 명만 딸랑 던지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해노 어르신,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수군이 어디 배만 덩그러니 있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데. 주군은….”
“허허허허허, 처음부터 일을 너무 완벽하게 하려 하니 그런 게야! 내가 서경에 가서 확인하니 조정에서 만든 배는 말이 투함이지 사실은 병력 수송 위주로 만든, 크기만 큰 나무 상자 같은 배야. 그러니 바다에서 싸울 수 있는 실제 전력은 많아야 서른 척을 넘지 못할 테니 그것만 제대로 된 선원을 배치하면 될 일이지.”
“그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경험 없는 자에게 배를 맡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누가 아무에게나 배를 맡기라 했나? 다만 경험이란 해보았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일세.”
라혼은 장상을 정식으로 서해수군의 부제독으로 삼아 수군에 대한 모든 책임을 맡기고 해노에게는 특별한 직위를 맡기지 않았다. 그러나 경험이 일천한 장상에게 해노의 존재는 든든한 후견인일 수밖에 없었다. 해노는 공식적으로 토금전장의 사람으로 남아 있게 했다. 아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었고 경험 많은 백전노장이지만 이미 은퇴를 결심할 정도로 노쇠했기에 전장에 나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고문 내지는 조언자로 장상을 돕는 형식을 취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나 라혼에게 있어서도, 장상에게 있어도도 해노 인치는 보배 중의 보배였다. 그의 서해에서의 영향력은 경험 많은 선원과 선장들을 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정도였다.
“서경에도 노는 친구들이 많이 있더구먼. 이번에 옛 친구들을 모아보았네.”
장상은 해노가 건네준 명단을 넘기면서 연방 치하의 말을 입에 달았다.
“아이고, 어르신밖에 없습니다. 무책임한 주군보다 어르신이 백배 천배, 아니 일만배나 낫습니다. 아 참, 어르신. 저번에 서해대수영과 충돌 때 상당한 위력을 보였던 쇠뇌를 설치해야겠는데, 주공의 말로는 최대한 자리를 잡아놓으라 했는데….”
“흐음, 한번 해보세. 기존에 설치되어 있던 쇠뇌를 떼어 자네가 잡아놓은 자리에 모두 설치하고 훈련을 해보세. 저번엔 쇠뇌에 익숙지 않아 화살이 대부분 바다에 그냥 빠진 것도 문제네.”
“역시 실제로 해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쇠뇌 하나에 대략 서너 명의 인원이 달라붙어 있어야 했다. 배라는 비좁은 공간에서 배를 운용하는 주요 선원들의 동선(動線)에 되도록 방해받지 않은 상태에서 쇠뇌를 설치하려면 직접 해보는 것이 가장 확실했다. 인치는 수십 척의 선단도 지휘해본 경험이 있었다. 바다에 떠 있는 배는 그대로 하나의 세계다. 각각 배 나름대로 전통과 규칙, 풍토, 미신까지 가지고 있었다. 선단을 이루고 있어도 바다에 나가면 배는 단절된 상태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러한 배들을 하나로 묶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움직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수백여 척의 함대를 이루는 수군은 나름대로의 공통적이고 절대적인 철저한 규칙이 필요했다. 항해 수칙, 전투 수칙, 함대의 약속된 해진(海陳)을 포진하는 것까지 통일된, 이른바 교본(敎本)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실제로 항해나 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립되고 축적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훈련을 통해 그것을 하나하나 잡아나가야 했다. 서해대수영을 최강이라 하는 이유는 수백 년 간 그러한 경험을 축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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