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뚝 떨어진 날 종강을 기념하여 홀로 옛길에 올랐다. 내 몸에서 나온 말들이 어디로 스며들었는지, 더러는 메아리로 내게 돌아오지 않았는지. 산에서 얻은 충만한 기운으로 허한 말의 집을 채우고자 한다.
옛길의 입구는 산수동(山水洞) 골목이다. 산수가 좋은 동네에서는 산수화가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산수동 잣고개길로 들어선다. 나는 좁고 굽은 길을 사랑한다. 좁은 길은 차가 들어설 수 없으니 조용하고, 굽은 길은 무슨 풍경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옛사람들은 말했다. 차 마시기 가장 좋은 때는 한가한 때이고, 차 마시기 가장 나쁜 때는 번잡한 때라고. 한가한 때가 없으면 번잡한 때라도 차를 마셔야 한다.
산길을 걷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다만 번잡한 틈을 내어 한가함을 찾고자 한다. 산허리를 잘라 빠른 길을 내고 기름을 태워 그 길을 오가느라 소음과 악취를 내뿜었다. 산에 오르며 산아래 동네를 본다. 저 두암동 주공아파트에서 두 해를 살다가 학교 뒤로 이사갔다. 중앙 난방이라 혼자 집에 들어서도 썰렁하지 않아 좋았으나, 산허리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소음과 창틀에 쌓인 검은 먼지가 마음에 걸렸다. 그런 날에는 고가다리 밑으로 해서 산에 오르거나, 고가도로를 타고 화순이나 담양쪽으로 나가곤 했다.
잣고개가 가깝다. 고개 아래 울긋불긋한 천을 단 집이 있다. 마음이 심란하여 종잡을 수 없을 때는 차분히 걸으며 스스로 답을 구하는게 좋다. 그도 어려우면 더러는 처녀보살에게 길을 묻기도 한다. 아직 스스로 저 집을 찾은 적은 없다.
잣고개 위 옛성이 일부 남아있다. 무진고성(武珍古城)으로 무진은 광주의 옛지명이다.
날이 차서 옷을 여러 겹 껴입었더니 그새 땀이 난다. 샘터에서 목을 축인다. 누군가 돌담만 있던 곳에 통나무 기둥을 세우고 이엉을 올렸다.
옛길의 1구간은 산수동에서 원효사까지 약 8킬로, 이십리 길이다. 물론 이 구간은 1187번 시내버스로 빠르고 편하게 갈 수 있다. 1187은 무등산의 높이이고 옛길 1,2 구간도 11.87킬로라고 한다. 대강 그렇다는 말일 것이다. 버스가 다니는 이 길은 옛길에 비해 넓지만 인도가 따로 없다. 옛길은 이 아스팔트 길을 따라서 흐르는데 간혹 이처럼 횡단해야 할 데가 있다. 오후에 출발했으니 저물어서 이 버스를 타고 하산해야 하리라.
샘터가 있고 성터가 있다. 터는 흔적이다. 오른쪽 발바닥 오목한 곳에 난 흉터를 가만히 만져본다. 저물무렵 검정고무신 바닥에 고인 흥건한 피를 보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몹시 화를 냈다. 그 뒤로 아버지는 언덕길에 유리조각이 있나 샅샅이 살피곤 했다.
그 어떤 헛헛한 마음을 가진 나그네가 삿갓을 쓰고 이 길을 오갔고 길의 뒤편에 몇 소절 시들이 떨어졌다. 시가 떨어진 자리에 깎은 돌을 세워 비로소 그 이름을 온전히 기억하고자 한다.
그는 백년 전인 1807년 봄 경기도 양주에서 나서 스물 두 살 이후 팔도를 떠돌다 1863년 봄 무등산 자락 화순 동복(和順 同福)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의 삶은 고단하였으나 그의 죽음은 이 고장 풍속처럼 화순하고 동복하였으리.
샘터를 한참 지나 또 목이 마를 즈음 아쉬운 팻말을 만났다. 풍속이 화순한 사람들은 먹거리를 나누는 데도 인색하지 않은데 어찌된 일인지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 중단하였다고 한다. 마침 마주오는 사람에게 그 사정을 물으니, 장사하는 사람들이 민원을 제기했다고 한다. 무등산막걸리가 생각나 입만 쩍쩍 다셨다.
간혹 싸그락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고개를 들어보게 했다. 찬 바람이 불어도 마른 잎을 마저 떨구지 않는 참나무를 보면 어머니 같다.
화순 담양 등지서 옛길을 따라 장 보러 오가던 사람들이 쉬었다 가던 마을을 지난다. 이 화암마을에는 주막터도 있는데 지금처럼 약을 친 수입 밀가루나 아스팜탐 같은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막걸리가 있었을 것이다.
다시 아스팔트 길을 건넌다. 길 아래는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충장사가 있다.
너덜겅을 건너면 무등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등은 가슴에 뜨거운 돌을 품었다가 어느 날 가쁜 숨으로 뱉어내었는데 그 흔적이 서석대와 입석대다. 수많은 연필들을 묶어 세워놓은 모양이다. 위로 솟구쳐오른 무수한 돌기둥들은 도막나서 골짜기마다 너덜겅을 이루었다.
눈비가 그려놓은듯 천년 세월의 흔적이 자연스런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나의 바람인데, 어림없다.
저물무렵 작은 새들이 대밭에 숨어든다. 새 소리와 대바람 소리가 예불이다. 옷깃을 여민다.
길 끝에서 조금 벗어나 다형 김현승(茶兄 金顯承, 1913-1975) 시비가 있다. 이 시비는 1977년에 세워졌고, 1980년부터 1982년까지 나는 광주에 있었다. 스무살에서 스물 두 살까지다. 그 때 혼자서 혹은 젊은 벗들과 함께 여러 차례 이 자리에 와서 조용히 서있다 가곤 했다. 그러면 참나무처럼 군더더기 없이 마른 다형이 고독한 얼굴로 <눈물>을 얘기했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 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그 시간을 공유하고 싶어 당시 함께 있었던 대여섯 명의 벗들에게 <원효사 아래 다형 시비 앞에 서 있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두 명에게서 금방 답장이 왔다.
<오매 춥다 붕알 다 얼어불것다야 언능 집에 들어가 녹혀야 쓰겄다>
<증심사 아닌 원효사 아래? 차가운 기운 속 멋있는 외출 부럽다>
그러고 보니 원효사를 증심사로 쓴 모양이다.
이십리 길을 두 시간 반만에 걸었다. 중천을 비껴난 해는 서산으로 넘어갔다. 어두움 속에서 한줄기 빛을 잡으려 애를 쓴 셔터가 한참 있다 닫히면서 화면이 흔들렸다. 길 끝에서 바로 1187번 버스를 탔다.
산수동 원점으로 돌아와 골목에 있는 오복식당에서 곰탕 한 그릇을 먹었다. 소주와 맥주를 몇 병째 섞어마시고 있는 노동자 둘이 주모에게 진한 농을 건넸지만 심드렁하게 그만 먹고 가라고 한다. 곰탕집 바로 옆은 목욕탕이다. 배부르게 먹고 뜨거운 욕조에 눕는다. 행복이 따로 없다. 문 닫을 시간이 가까우니 물에서 암모니아 냄새가 났다. 그도 저자거리의 살맛이 아닌가.
첫댓글 첫 사진에 써있는게 무등산 엣길인데.... 가엣길 그러지 안나. 거기에 맞춰 산엣길 그런거 아냐 요. 분석과 고증을 통한 확인바람
ㅎㅎ그게 천이 좀 접혀져서 그렇게 보이네요. 엉뚱한 김샘 재미난 발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