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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의 난 1
윤형진은지리산 산천재에 줄을 대고 있으면서
조정 소식을
훤히 듣고 있는 관리로, 지함을 잘 알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소문을 듣고 초청한 것이오."
"무슨 소문을 들으셨소?"
"선생께서 운수를 아주 잘 뽑는다고 합디다."
"목사께서는 그런 뜬소문에 귀가 밝으시군요.
그런헛소문에 귀 기울이지 마시고
백성들의 목소리에나 귀를 기울이시지요."
지함은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기근에 배가 고파아우성치는 백성을 두고
이른 말이었다.
목사의낯빛이 금세 틀어졌다.
"여기 모인 선비들 운수나 한번 쭈욱 뽑아보시오."
목사의 목소리에 약간 엄한 기운이 실려 있었다.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번에는 지함의 심사가뒤틀렸다.
"목사님부터 봐드리리다."
목사 윤형진이 붓을 들어 자기 사주를 척 휘둘러썼다.
그걸 한참 들여다보던 지함이 그를 보고 냅다소리질렀다.
"사람 죽이는 데 맛들리셨소?"
"무슨 말이오?"
"올 들어 벌써 셋이나 죽이셨구려."
"그거야 죄인이니까 친 것이지 사사로이 그리 한것은 아니오."
"사사롭든 공사롭든 목사께서 목을 치라고 해서쳤으면
목사가 죽인 것이오."
"아이는 왜 그리 많으시오?
정실에서 다섯,
첩에게서 셋,
종에게서 둘,
여기에서 하나, 저기에서하나,
또 저기에서 둘. 벌써 열넷이고
해마다 하나둘씩 더 쏟아져서
장차 스물은 넘겠소이다
굶는백성이 허다한데
이 많은 자식을 어떻게 먹여 살릴작정이시오?
여자는 그대가 밟고 지나가는
징검다리가아니올시다."
"그만두시오!"
목사 윤형진이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인상을찌푸렸다.
"뭐, 저리 무례한 사람이 다 있어?
어느 안전이라고감히…"
목사가 분이 나서 씩씩거리자
좌중이 일제히 지함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목사를 아는 사람들은 내심 크게
탄복하고 있었다.
지함의 말이 한 치도 틀리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분위기가 틀어지자
관기들이 서둘러 가야금을 뜯고
눈치빠른 관기 하나가 목청을 돋구어 소리를 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에 둘에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얼은 님 오신 날
구비구비 펴리라"
황진이가 송도에서 읊었다는 시가
전주에까지 퍼져있었다.
그때 누군가 지함의 등을 툭 쳤다.
"아니, 유수 어른!"
면앙정 송순이었다.
그는 임꺽정에게 송도를 빼앗긴죄로
귀양을 살고 있었다.
"자네, 그만 일어나세."
송순은 지함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칠순을 한 해 앞둔 송순은
머리가 거의 희끗희끗해져 있었다
노시인의 풍모가 많이 사그라들어
일견 초췌해 보이기까지 했다.
송순은 비록 전주 목사의 연회에 합석하기는 했으나
귀양살이 몸이라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러던차에 지함을 발견한 그는
분위기가 좋지 않게돌아가자
지함을 끌고 나선 것이었다.
송순은 길을 재촉해 담양에 있는 면앙정으로향했다.
"어쩌자고 그러는가?
향리에서는 관헌이 으뜸권세가인데,
목이 두 개라도 되는가?"
"걱정없습니다."
"일단 별일 없이 넘어가서 한숨은 돌렸네만,
젊은혈기를 너무 함부로 쓰지 말게."
"기를 잘 쓰는 것이 도에 이르는 길입니다.
제 기는사람을 죽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도 합니다."
"여하튼 반갑네. 그나저나 늘그막에 얻은 벼슬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 했으니 이제 나는 면앙정에서
그저술이나 마시고 시나 지으면서 여생을 보내야할까보네.
내 나이 벌써 고희가 눈앞이라네.
이제는죽을 날만 기다리는 행시(行屍)지 뭐겠나?"
"아닙니다. 제가 대부인 회갑연에서
유수님의운수를 다시 짚어보았는데
귀양 생활은 잠시일 뿐입니다.
곧 운수가 크게 열립니다.
여기는 잠시쉬는 곳으로 아십시오.
행시라는 것은 더더구나 당찮은 말씀입니다.
앞으로도 이십 년이 넘도록 어떤십간 십이지도
유수님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예끼, 이 사람아. 늙은이를 아주 놀리고 있구먼.
지금도 덤으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진데
앞으로 이십년을 넘게 더 살다니…
그러면 내 나이 아흔이 되네.
난 아흔까지 사는 사람은 말만 들었지 보질 못했네."
"이제 직접 겪게 되십니다."
"그나저나 내가 워낙 시를 좋아하여
쓸 만한 후학을한 명 불러놓았는데
벌써 당도해 있을 것일세.
함께시나 읊고 자연이나 감상하세."
지함 일행은 해 안에 면앙정에 이르렀다.
임실,남원, 순창을 지나
담양의 면앙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송순이 얘기한
정철(鄭澈)이라는 젊은이가 당도해 있었다.
"내가 이 사람에게 송강(松江)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네."
스물여섯 살의 정철은 총기가 있어 보였다.
안명세의 특정기 사건의 빌미가 되었던 사화에서
정철의 부친도 강원도 창평으로 유배를 당하여
그는어린 시절을 자연 속에서 보냈다고 했다.
"그래서 자연을 보는 눈이 남달리 순하고
깨끗하다네
이 사람의 부친과 나는 이전부터 알고지냈지."
정철은 요절한 인종의 귀인이 된 맏누이와
계림 군유의 부인이 된 둘째누이 덕으로
어려서부터 궁중에자주 출입하여
일찍부터 벼슬길에 눈을 뜨고 있었다.
인종이 죽으면서 한때 평창으로 유배되었던정철의가족은
명종과 다시 신뢰를 회복하여
한양으로 올라가있었다.
그의 부친이 안명세와 불운을 같이 했다는 것으로
지함은 정철에게 남다른 정을 느꼈다.
지함은 바로 정철의 운수를 짚었다.
그는 내년에있을 과거에서 장원 급제할 만큼
시험운이 강하게뻗쳐 있었다.
그 뒤로도 대체로 벼슬자리를 계속차지하긴 하지만
자주 유배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 유배 덕분에 정사를 쉬고
걸출한시작(詩作)을 많이 남기게 될 운수였다.
이튿날, 지함 일행이 면앙정을 떠나려 할 때
전주목사가 보낸 파발이 달려왔다.
송순이 서찰을 펴들었다.
황해 괴수 임꺽정, 평산 민가 30여채 불태우고
수많은 인명 살상
서찰을 보고 난 송순은 지함에게 은근한 목소리로물었다.
"이 선비, 임꺽정이란 놈이 난은 일으켰으나
성공하지는 못할 터,
언제까지 발흥할 것 같은가?"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지함은 송순의 물음에 침통하게 대답하고는
하늘을우러러보며 짧게 한숨을 토했다.
"어르신, 그만 떠나겠습니다."
지함은 서둘러 송순을 작별하고,
정휴와 남궁두를 재촉해 면앙정을 빠져나왔다.
"선생님, 전우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휴가 걱정스런 눈으로 지함을 올려다보면서물었다.
백성을 위한다고 난을 일으킨 임꺽정이
민가를불태우고 무고한 백성까지 죽였다면
이제 막바지에이르렀음에 틀림없었다.
임꺽정의 세력이 아직 완전히꺾이지는 않았으나
관군이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지금,
역적 임꺽정 무리의군사(軍師) 노릇을 하고 있는
전우치의 목숨은
풍전등화나 마찬가지 신세였다.
지함은 면앙정을 벗어나자마자,
남궁두에게 당장송도로 올라가
전우치를 찾으라고 일렀다.
"내 말대로 했다면
전우치는 지금 임꺽정의무리에서 빠져나와
화담 산방에 있을 것이네.
자네가가서 데려와
용인 안 진사 댁에 머물도록 하게.
조심해야 하네."
남궁두는 황급히 송도로 달음질했다.
지함은 남궁두를 올려보낸 뒤에는
전우치 걱정을한번도 하지 않았다.
믿는 것이 따로 있는 듯했다.
지함과 정휴는 영광으로 가서
물좋은 굴비를 골라있는 대로 사모아,
역시 용인으로 올려보냈다.
그리고는 영광에서 함평을 지나
강진 쪽으로 길을잡았다.
강진에 잠깐 들른
두사람은 분청사기와 백자를사들였다.
그런 다음 지함은 강진의 해안선을 따라
일일이걸어다니며 지리를 살폈다.
"이곳 강진에 병마절도사가 있으니
지리를 좀살펴보려는 것일세.
두륜산에도 잠시 들러볼 일이있네."
두륜산이라면 정휴도 알고 있었다.
화담 일행을밤새 기다렸던 곳이었다.
남해 바다 다도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두륜산줄기 끝자락에 대흥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함이 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은 무정이,
'내가 죽으면 가사와 바리때를
그곳으로 보낼 작정입니다.
병란에 삼재가 들어도끄떡 안할 곳은
조선 팔도 중에 오직 그곳뿐입니다'
이렇게 말한 곳이라네."
지함과 정휴는 대흥사 경내로 들어가
젊은 중이끓여주는 차를 얻어 마셨다.
"차맛이 좀 특별합니다."
정휴가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젊은 중이찻물을 더 따라주면서 재차 권했다.
"스님께선 법호가…?"
지함이 그렇게 묻자 젊은 중은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초전(草田)이라고 합니다."
"풀밭? 고상한 말로 법호를 짓는 관례를
따르지않았군요."
정휴는 두 잔을 연거푸 마시고는
정신이 어찔어찔해지는 걸 느꼈다.
지함은 워낙 조금씩찻물을 입에 물어서
그때까지도 한 잔을 다 마시지않고 있었다.
"몸이 가라앉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차길래…?"
정휴는 정신이 몽롱해져 고개를 세차게 흔들면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초전이라는 젊은 중이내막을 털어놓았다.
"제가 이 나라에서 영 끊기고 만
다도(茶道)를일으키고자
여러 가지 시험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찻잎을 특성에 따라 나누고,
배합하는 요령을익히다가
좀 별난 차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같은 산승이 차를 마시는 것은
정기를 돋우고
수행정진할 발심을 크게 하려는 것이므로
약(藥)으로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을 맑게 하는 약이좋은 차지요.
지금 두 분이 마시는 차에는 여독을 가라앉혀 풀어내는
약성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몸이나른해지면서
피가 가라앉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기분도 썩 좋아질 것입니다만
너무 자주 마시면 좋지않은 게 흠입니다.
걱정 마시고 마음껏 드십시오."
그제서야 정휴는 긴장을 풀고
찻잔을 한잔 들어 한입에 툭 털어마셨다.
역시 기분이 날아갈 듯유쾌해졌다.
여독이 찻물에 녹아드는 것 같았다.
"기를 마시는 일을 다도로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소이다."
지함이 초전을 긍정하였다.
"그러시다면 두 분께
다선(茶仙) 한 분을 소개해올리지요
이 골짜기를 조금 올라가면 나이가지긋하신
노인 한 분 살고 계십니다.
한번 꼭 만나보십시오."
"어떤 분이시오?"
"차로 기를 다스리는 분이올시다.
그분은 사람을마음대로 부리신답니다."
흥미가 바짝 당긴 지함과 정휴는 초전이 가리키는 대로
골짜기를 올라갔다.
과연 수염이 허연 노인이초가에 앉아 있었다.
"초전 스님이 보내서 온 객입니다."
노인이 물끄러미 지함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나서정휴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차 한 잔 마시겠소?"
"감히 청하겠습니다."
지함이 공손하게 예를 갖추자
노인은 다기를 꺼내어차를 달였다.
찻물이 끓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찻물끓는 소리만 바글거리며 침묵을 흔들었다.
노인이 차를 한 잔씩 따랐다.
"이걸 마셔보시오."
지함과 정휴는 따라주는 차를 받아 마셨다.
"형님, 기분이 좋아집니다."
"글쎄, 나도 그러네. 이게 무슨 차입니까?"
"내가 여러 가지 약초를 시험하여 차로 개발한것이오.
이번에는 이 차를 맛보시오.
조금만드리리다."
노인은 조금씩 차를 따랐다.
"응?"
지함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노인이 껄껄웃었다.
"색기가 동하실 거요. 허허허."
"저희들 육신을 마음대로 움직이시는군요."
"마음대로는 아니지만 조금은 움직입니다.
이 이치로 음양오행이 나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차를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고,
초조해지기도 하고, 용기 백배하기도 합니다.
사람의감정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차가 어떻게 작용을 하는 것입니까?"
"사람이 천간지지를 받아 이루어졌으니,
그것을조절하면
영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는법이라오."
"기를 바꾸는 것입니까?"
"그렇소이다.
내 차를 마시면 기를 바꾸어 드릴수가 있소."
"사람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이다."
"그렇다면 저를 시험해보십시오."
첫댓글 오늘도 덕분에 즐독 했습니다.
글 내용이 갈수록 흥미진진 해지는군요 ~~~ ^^*
이렇게 자꾸 앞날을 보는 안목이 자라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