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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른 새벽 짐을 거두고 리알토로 나왔다. 밀라노로 향하는 6시 첫차를 타기 위해 우린 4시 반에 일어나 5시 쯤 나왔다. 전 날 맥도날드 집에서 햄버거를 사둔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였다. 혹 그 시각 수상버스가 없을 것 같아 걱정이 되었는데 이른 새벽에도 사람들은 붐볐다. 그런데 나는 기차를 타고 밀라노를 가면서도 1시간 후에 벌어질 일을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탈리아 여행이 지금까지는 잘 견디고 내 의견에 전혀 이견 없이 잘 지내왔는데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밀라노는 섬세하고 화려한 두오모로도 유명하지만 쇼핑관광으로서도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선 내노라고 하는 명품을 싸게 살 수 있다.
아내가 이런 사실을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처음은 밀라노 시내 관광에서 그럴듯한 것을 보면 사겠다고 하더니 이탈리아에 와서는 밀라노 교외 코모 근처에 있는 아웃렛 매장 팩트리스 스토어에 가면 더 싸게 살수 있다고 틈만 나면 말을 하였다. 그래서 그곳을 알아보니 마침 가는 날이 휴무란다. 그러기에 다행스럽다 하였더니만 이제는 아예 코모를 지나 스위스 국경을 넘어 구치 폭스 타운에 가보자고 한다. 여기서 판단을 아주 잘해야지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밀라노 시내관광도 제대로 못하고 마음에 드는 물건도 못 사고 망쳐버릴 수가 있다. 어찌할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묘안이 안 나온다.
만약 내 뜻대로 밀라노에서만 머문다면 좋은 기회를 놓쳐서 아쉽다고 두고두고 잔소리를 들을 것이고 갔다가 생각과는 달리 물건이 시원치 않다면 밀라노 관광은 큰 낭패가 된다. 생각 같아선 이왕 나서는 길이라면 차라리 이탈리아인들이 한 여름 철 찾는다는 휴양도시 코모에 들려 호수 구경도 하고 산위에 케이블카도 타고 올라가 보고 그 로마 시대 카이사르가 배들을 일렬로 호수에 세워 알프스를 건넜다는 역사적 사실도 좀 알아보면 좋을 것인데 의지가 약하여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생각 끝에 밀라노에서 꼭 보아야할 것 하난 우선 보고 출발하자고 타협책을 아내에게 제시하였다.
어차피 그라치에 교회에 들러 최후의 만찬 그림은 볼 수가 없다. 알다시피 최후의 만찬 그림을 소재삼은 다빈치 코드란 영화가 흥행을 하는 때 예약을 해도 안 될 처지이니 그 그림을 본다는 것은 생각을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밀라노 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상징하고도 있으니 그의 과학 기술 박물관은 꼭 가봐야 한다. 우리는 일단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우리는 밀라노 중앙역에 도착하자마자 중앙역 근처에 있는 묵을 숙소에 들러 큰 짐을 내려 놓고 다시 중앙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밀라노는 여타 이탈리아 도시보다 지하철이 잘 정비된 도시이다. 아니 도시전체가 부유한 티가 흐르고 깔끔하다. 이탈리아는 원래부터 북부 쪽이 부강하였고 지금도 그런 부의 편재는 여전하다. 이곳에서 소매치기를 당할 염려는 거의 안 해도 된다. 우린 산탐 브로조 교회에 붙어 있는 다빈치 박물관에 도착하여 그의 천재성을 보았다.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란 생각이 든다. 그가 각 분야에 손을 안 뻗친 것은 거의 없다. 다리 교량, 하늘, 천체, 의술, 그림.. 생각을 담은 모형과 설계물이 즐비하다.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의식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영감과 창조물이 된 것 같다. 완벽주의자라 생각하다 주저한 것은 그대로 미완 상태로 두었다는 그다.
그는 1452년 피렌체 근교의 빈치에서 사생아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수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고, 음악에 재주가 뛰어났으며, 유달리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였다고 한다. 그의 특색인 깊은 정신적 내용의 객관적 표현은, 그의 놀라운 사실적 표현기교의 구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만년에 이르러 과학적 관심을 갖고, 수많은 소묘를 남겼다. 인체해부를 묘사한 그림들은 인체묘사와 의학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과학적 연구는 수학·물리·천문·식물·해부·지리·토목·기계 등 다방면에 이르며, 이들에 관한 수기(手記)나 인생론·회화론·과학론 등이 많이 남아 있다. 현재 그의 기록이 23권의 책으로 남아 있다고 박물관에 적혀 있다.
르네상스의 가장 훌륭한 업적, 즉 원근법과 자연에의 과학적인 접근, 인간신체의 해부학적 구조, 이에 따른 수학적 비율 등이 그에 의해 완벽한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명성은 몇 점의 뛰어난 작품들에서 비롯하는데, 〈최후의 만찬〉·〈모나리자〉·〈동굴의 성모〉·〈동방박사의 예배〉 등이 그러하다. 그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생존했던 가장 경이로운 천재 중 하나다. 1519년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프랑스의 보아주에 가서 건축·운하 공사에 종사하다가 죽었다. 그런 그이지만 그 당시 그를 밀라노 공작에게 메디치 가문이 적절하게 소개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의 천재성은 제때 빛을 발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참 이탈리아는 도시마다 특색이 있고 내세울만한 세계적인 인물이 있어 부럽고 향기롭게 느껴진다. 로마를 교황과 카이사르라 한다면 피렌체는 미켈란젤로이고 베네치아는 마르코 폴로와 비발디가 있으며 밀라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다. 고대 도시에 ,바다의 도시, 르네상스의 꽃의 도시에 명품 상공의 도시가 곳곳에 퍼져 있다. 사는 풍경에 음식 또한 지역마다 특색이 제각기이니 어디 보고 느껴 볼 것이 한 두 가지인가. 폼페이는 또 어찌 구분하여 말을 해둘 것이던가.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든 통일되다시피 생활양식이 똑같다. 그 만큼 세상이 좁아지고 좋아졌다고 할까. 장충동 왕족발을 부둣가에서 맛보고 강원도 감자전을 계룡산에서 맛보고 있다. 꼭 그곳에 가봐야 그 느낌과 그 맛의 정수를 알 수 있다 하는 그런 풍경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일까.
고유하다는 것은 결코 고립되고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더불어 조화를 이루어 개성적이면서도 하나의 더 멋진 통일감을 이룬다는 것을 새삼 느껴보게 된다. 우린 다빈치 박물관에서 못 질 하나 안하고 긴 장대 같은 나무를 비껴 엮어서 다리를 세우는 모형을 만지작거렸다. 아들이 손 쉽게 그 모형을 재현하여 만들어 보였더니만 그곳 관리인이 놀라는 표정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수하다는 것은 이제 자타가 다 아는 사실이다. 자원이 없는 우리로서는 그런 자질을 개발하고 소양을 갖추어주는 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란 생각을 다시 그 과학관에서 해본다. 솔직히 꽤 붐빌 것으로 생각한 그곳은 우리 같은 동양인 말고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과학이 흥미롭지 않다하면 그 후세대는 기대할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우린 다시 중앙역으로 가서 스위스 카이소란 곳을 가는 기차를 탔다. 말라노에서 1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에 그 국경 마을이 있다. 가는 도중 코모란 곳이 나왔다. 호수가 있고 산위에 마을이 있어 보이는 것이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알프스 설산이 깊숙이 들여다 보이고 호수가 짙어 여름에도 시원할 것이란 생각을 했다. 이윽고 기차는 국경 마을 카이소에 닿았다. 간단한 출국 수속을 하고 우린 스위스 마을 역을 빠져 나왔다. 우리와 같이 그곳 폭스타운이라는 아웃렛을 찾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 보였다. 버스를 타고 스위스 산길을 올라 고개를 넘자 바로 자유무역 타운이란 간판과 더불어 폭스타운이 나왔다. 아침도 시원치 않았는데 때가 또 점심시간이라 우린 점심부터 먹었다. 그리고 돌아 본 각 명품 점은 한마디로 말해서 생각외의 곳이었다. 아낸 제법 기대가 컸던 모양인데 실망하는 빛이 역력하였다.
살만한 것은 값이 엄청나거나 세일 대상이 아니고 값이 싸다 싶은 것은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제품으로 중국산보다 못하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린 스위스제 쵸콜렛만 잔뜩 사가지고 돌아섰다. 그런데 버스 기다리고 기차 기다리다 보니 벌써 시간은 5시가 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돌아온 밀라노는 7시가 가까워 어둑해지고 있었다. 우린 이탈리아 고딕 건축의 최고봉 두오모를 훤할 때 보아야한다는 생각에 바삐 서둘렀다. 유럽의 멋진 사진을 소개할 때 등장하는 건물 중 하나가 바로 그 두오모이다. 시간이 늦어서 옥상까지 올라갈 수도 없고 겨우 사진을 찍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하였다.
두오모 바로 앞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가 있다. 유리로 된 지붕이 잇는 큰 아케이드는 벌써 가게 문을 닫은 상태였다. 유리 안 쪽 진열을 살펴보니 세일기간이라고 가격도 싸고 멋져 보이는 것이 제법 눈에 띄었다. 그곳을 가지 않고서도 싸고 좋은 물건을 골라서 살 수 있었는데 우린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아내가 발을 동동 구른다. 갑자기 작은 선물 하나라도 안겨줄어야 할 사람들 얼굴들이 그 쇼 윈도우에 비추어지는 듯하다. 나야 친하다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술친구이니 이곳을 떠날 때 공항 면세점에서 싼 보드카 한 병이면 그만 일 것이지만 아무래도 아낸 이탈리아 간다고 자랑을 꽤 하였던 모양이다. 우린 어둑해지는 밀라노 거릴 터덕대며 빠져나올 수밖에는 없었다. 왜 그들은 7시 넘어서는 장사를 안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기실 어느 면 잘 된 것인지도 모른다. 로마여행은 어디까지나 역사와 그 시대 낭만을 엿보자는 것이지 명품을 사자고 온 것은 아니다. 더욱이 그 가격이 만만하기나 하는가. 그렇다보니 속으론 섭섭하지 않았지만 아내의 느낌을 보아 아쉬운 척은 하였다. 우린 배도 고프고 지쳐서 호텔 근처에 이르러 중국식당에 들어갔다. 바로 근처에 한국식당이 있고 패키지 투어로 온 사람들이 한 무더기 들어가는 것을 보았지만 익히 아는 대로 값이 비싸고 제 맛도 덜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중국집을 들어갔다. 이런 상황 그래도 한국식당 것을 팔아주어야 한다는 논리는 허접스런 말이다. 문득 그 시절 늘 우리를 잡아매었던 국산품애용이란 낱말이 떠오른다. 이제는 그렇게 될 수만은 없는 세상이다. 모든 것이 열려있고 경쟁력이다.
난 그 중국집에서 먹은 볶은 밥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솔직히 우리 동네 중국집보다 더 맛이 있었고 값이 쌌다. 그 바람 한 접시를 더 시켜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거의 포식을 하고 말았다. 식당에서 나오는 참 감사의 표시로 사진을 한 장 찍어 두었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중앙역으로 다시 나가 다빈치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이제 이탈리아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이 난 것이다. 로마로부터 시작해서 북으로 올라와 이제 밀라노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파리까지 가서 비행기를 바꿔 타고 인천공항에 곧 바로 내리면 된다. 모두들 무리한 행군으로 다소 지쳐 있는 표정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씩씩한 느낌이 든다. 이는 무엇보다도 팍스로마나를 팍스 훼미리의 기분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서 누비고 다녔기에 그럴 것이다.
어리게만 보인 막둥이 놈이 그 간에 부쩍 큰 것도 같고 앞장을 서며 가족을 몰고 다닌 큰놈은 듬직함을 여실히 보여주었으며 아낸 남자 셋 뒤치다꺼리에 소홀함이 없이 늘 웃음으로 분위기를 이끌어 갔었다. 그러고 보면 나만 중뿔난 고집으로 때 아닌 오기를 부리고 실수를 하지 않았던가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난 이번 여행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돈이 많이 들었지만 그만큼 얻고 느낀 것도 많은 듯싶다. 시간이 모자라 가보지 못한 곳들도 눈에 선한 것이 다녀갔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니 로마에 대해 그만큼 많이 생각하고 푹 빠져 있다는 얘기도 된다.
난 로마는 여전하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그들의 사고가 여전히 지금 유럽 곳곳에 배어나오고 있으며 유럽을 이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참 로마인은 현명하였다. 그리스의 앞 선 문화를 받아들여서는 과감히 그들의 것을 만들었다. 의술이 그러하고 건축물이 그러하고 예술이 그러하다. 하지만 의식의 세계에선 철학을 중시는 하였지만 그로인한 병폐는 지양하여 논쟁을 자제하였으며 대신 법을 강화시켜 최소한의 관계정립에 힘을 쏟았다. 늘 분쟁을 야기시키는 것이 종교이기에 그들은 다신교를 그대로 순순히 인정하였으며 종교로서 분쟁을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고 종교로 지배하려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린 소녀나 염소를 받치는 것을 합리적이지 않다하여 모순된 사고의 종교 배척을 한 아주 실용적이고 트인 라틴족이었다.
지배와 피지배는 늘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말이다. 그런 그들은 로마시민이라는 큰 틀을 지키기 위해 그 역사의 틀을 뜻과 의지라는 큰 뜻으로 화합하고 용서하여 적군도 없는 격이 되게 하였다. 이를테면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격돌을 할 때 그의 부관이 갑자기 직을 관두고 폼페이우스 쪽으로 간다고 했을 때 카이사르는 그것을 순순히 인정해주었다. 이는 집안 간에 클라이언트 제도라 하여 전통적으로 유지해온 일종의 고객관리적인 관습을 용인하였기에 가능하였다. 적군이 되는 참모를 인정한다는 것, 비록 싸우기는 하지만 영원히 적일 수 없다는 그런 의식과도 상통한다고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싸움이 끝나고 나서 적이 자식들을 씨를 말리는 것이 아니라 거두어 자신의 자식들과 혼사도 시킨다. 난 그런 사고가 참으로 부럽다.
로마는 성분에 따라 삶이 달라지게 하거나 기회를 주지 않은 사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명예를 소중하게 갖도록 애썼기에 전쟁터에 나가서 지면 다시 그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삶이 부의 향배로서만이 아닌 인격이나 명예에서도 큰 가치가 있음을 공공연하게 한 것은 바로 그 시대의 건전성을 엿볼 수 있기도 한 것이다. 난 솔직히 기독교적 처방으로 로마시대를 바라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여행기 처음에서 언급하였듯이 역사란 어디까지나 자신들이 태어난 시대를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의 기록이기에 그 시대를 열심히 산 사람들의 그 발자취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바라보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라고 믿어지기 때문 그렇다.
언뜻 생각하기에 그런 기질의 로마인은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측면에선 다신교를 많이 갖고 있는 일본인의 기질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호탕함과 대범함으로서는 대륙적인 기질인 중국인을 닮은 것도 같고 맛과 멋 그리고 하고자 하면 어떠하든 이루고 마는 끈질긴 성취욕에 있어선 우리를 닮은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만큼 단점보다도 장점이 많은 라틴족이란 생각이드는 것이다. 솔직히 그런 점에서 지금의 로마인은 합리적이고 냉철하였던 그런 고대로마의 기질이 거두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할 때가 많았었다.
이제 나는 그들의 사고 속에 우러난 인류문화의 창달이 어떤 것인지 찬찬히 들여다 볼 기회가 있다면 빠짐없이 챙겨 보고자 한다. 아니 흐릿한 고대 로마를 그렇게 해서라도 가슴에 담고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로마의 역사를 조금 알게 된 것이 그렇게 내 자신 기쁠 수가 없다. 남의 역사를 들여다보니 우리나라의 소중함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예전엔 국사 책에 나오는 것을 그저 달달 볶듯이 외우고 금세 잊고 말았는데 정녕 그럴 것이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된다. 찬찬히 음미하듯 그 시대를 깊은 호흡으로 느끼고 밟아 본다는 것이 그렇게 마음을 풍요롭고 벅차게 하는 것인 줄은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도 되었다. 그러기에 이번 로마 기행으로 남긴 글은 순전히 나를 위한 기록서이고 나의 뜻과 의지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