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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께서 시시각각 이끌어주신 수련의 길
2026년 07월 12일
글/ 헤이룽장 대법제자
1. 사부님과의 첫 인연
내 본적은 산둥(山東)이다. 우리 7남매 중 나는 셋째였다. 우리집 땅은 6무(畝, 1무는 약 200평)밖에 되지 않았고 아들만 넷이었기에 아버지는 우리가 장가를 못 갈까 봐 큰형과 둘째 형을 셋째 외삼촌을 따라 동북으로 가게 했고, 나와 넷째 남동생은 집에 남았다. 이때 토지가 국유화돼 합작사에 들어갔다.
우리 마을에 류(劉) 씨 성을 가진 가난한 집이 있었는데, 가장이 병이 많았다. 나와 동갑인 딸이 하나 있었는데 나에게 돈 한 푼 받지 않고 아내로 주겠다고 했다. 이런 뜻밖의 좋은 일을 만나자 부모님은 즉시 결정해 약혼시켰다. 그해 내 나이는 겨우 14세였다.
2년 후, 미래의 장인어른이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20세가 됐을 때 류 씨 집안에서는 이 혼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아버지가 중매인을 보내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부모님에게 처음부터 동의하지 않았으니 지금 차라리 잘됐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그동안 우리집에서 그 집에 준 게 많은데 혼사가 깨지면 돌려받지도 못해”라고 하셨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어머니에게 “제가 그 집 가족을 만나볼게요”라고 말했다.
비록 약혼한 지 6년이나 됐지만 우리 둘은 한 번도 말을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녀 집에 도착해 가족을 만나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나는 그녀에게 “혼사는 양가 어르신들이 정하신 거지만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됐는데, 당신은 이 혼인에 동의하나요? 동의하지 않는다면 나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다시는 이 일을 꺼내지 않겠습니다. 만약 동의한다면 날을 잡아 결혼합시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난처해하며 “나중에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요?”라고 했다. 나는 “안 돼요. 성사 여부는 오늘 당신이 결정해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우리는 그녀 가족의 반대 속에 결혼했다. 결혼식 날 밤, 나는 북쪽 벽에 한 여성이 나타난 것을 보았는데 40~50대 정도로 보였다. 나는 깜짝 놀랐고 아주 또렷하게 보였는데 다시 사라졌다.
결혼 이듬해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 그해가 바로 1966년이었는데, 산둥에 큰 가뭄이 들어 1인당 25kg의 밀이 분배됐고 옥수수는 모두 말라 죽었다. 이런 해에는 굶주릴 수밖에 없어 나는 아내와 상의해 동북으로 가려 했지만 그녀는 동의하지 않았고 부모님도 반대하셨다.
아버지는 동북에서는 남녀노소가 모두 한 온돌방에서 자기 때문에 지낼 수가 없다고 하셨다. 형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들은 배급 식량을 먹고 있어 우리에게 줄 여유 식량도 없었다.
96년 6월 26일 밤으로 기억한다. 나는 아직 잠들지 않았는데, 한 사람이 내 머리맡에 서서 “자네 동북으로 가게, 동북에 李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자네를 보살펴줄 걸세. 이 사람은 40세가량의 나이에 중간 체구이고 중산복을 입고 있네”라고 말하고는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너무나 또렷하게 보았다. 그래서 나는 동북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2. 동북으로 가서 전법륜을 얻다.
나는 동북에 온 후 李 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친구로 사귀었다. 2개월 후 아버지에게 50위안을 보냈고, 아버지는 답장을 통해 이제 내 생계를 걱정하지 않는다며 안심하셨다.
그동안 나는 많은 고난을 겪었고 생명이 위태로운 적도 10여 차례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위험할 때가 되면 즉시 전환점이 생겼다. 가장 위험했던 한번은 내가 나무에 기대어 돌을 깨고 있을 때였다.
산 위에서 남쪽 방향으로 굴려 내려보낸 큰 돌이 아래로 구르다가 중간에서 방향을 틀어 내 쪽으로 직진해 굴러왔다. 5~6m 앞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갑자기 2m 넘게 튀어 올랐고, 그 큰 돌은 내가 기대고 있던 나무를 그대로 들이받아 산 아래로 넘어뜨렸다. 산 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멍해졌다. 위험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지나고 나니 오싹했다.
내가 53세 되던 해 가을, 계속 기침이 났고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듬해 봄,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여러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았지만 효과가 없었고, 마지막으로 종양병원에서 검사한 결과 폐암 말기 진단이 나왔다. 온 가족이 절망 속에 울었고, 병원 진료와 검사에 많은 돈을 써서 빚이 많았다.
이 절망적인 순간에 누군가 나에게 법륜대법(파룬따파, 파룬궁) 수련서인 ‘전법륜(轉法輪)’ 한 권을 주었다. 처음에는 볼 기분이 아니었지만 4일이 지난 후 책에 도대체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지 보려고 하다가 한 번 읽기 시작하자 내려놓을 수 없게 됐다.
책에서 업력을 소멸할 수 있다고 한 것을 보고 나는 ‘만약 내 몸에 5천 kg의 업력이 있는데 하루 연공으로 50kg을 소멸할 수 있다면, 내 몸의 업력이 50kg 줄어드는 셈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후 2시부터 밤 12시까지 계속 읽었다. 내일 다시 읽어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 계속 이어서 읽었고 새벽 4시까지 읽었다. 잠시 잠들었다 깨어나면 다시 이어 읽으며 연속해서 10여 일을 보았더니 눈이 충혈됐다.
책에서 연공으로 에너지를 가지(加持)해야 한다고 해서 나는 연공장에 가서 공법을 배우며 정성껏 따라 배웠다. 20일 후 아침에 참장(站樁)을 할 때, 머리 위 포륜(抱輪) 동작에서 손을 들어 올리자마자 밧줄로 묶인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게 됐다.
그때 나는 마음속에서부터 둥그런 무언가가 목구멍까지 올라와 숨을 쉴 수 없음을 느꼈고, ‘이제 끝났구나’라고 생각했다. 종양병원 의사가 급성 종양은 반드시 죽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을 바꿔 ‘죽음도 두렵지 않다. 죽더라도 연공은 다 마치고 죽자’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구토를 했는데 무엇을 토했는지 차마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연공을 마친 후 무엇을 토했는지 보니 아무것도 없었지만, 입안이 끈적거리고 비린내가 났다.
밤에 잠을 잘 때 비몽사몽간에 한눈에 30km 밖까지 볼 수 있었는데 두 사람이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채 다가왔는데, 한 명은 솜 두루마기를 입고 악비(岳飛)와 같은 투구를 쓴 노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뚱뚱하고 덩치 큰 승려였다.
그들은 내 머리 위를 지나갔는데, 지나간 후 노인이 다시 돌아와 나에게 “지금부터 자네 병은 다 나았네, 절대 일하느라 피곤해지지 말게”라고 말했다. 나는 ‘걷지도 못하는데 무슨 일을 하겠어!’라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나는 살아갈 희망을 품게 됐다.
어느 날 보도원이 나에게 “어느 연공장에서 사부님의 공법 비디오를 틀어주니 가서 봐요. 그렇지 않으면 연공 동작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 연공장에는 10여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먼저 동작을 해보라고 한 이후 사부님의 공법 비디오를 틀어주었다.
TV에 사부님께서 나타나셨는데 표정이 물처럼 고요하셔서 나는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비디오를 다 보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나를 아는 한 수련생이 자기 집에 가서 사부님의 초상을 보자고 초대했다.
나는 초상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이분은 바로 1966년에 내 머리맡에 서서 “동북으로 가게, 동북에 李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자네를 보살펴줄 걸세”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분이셨다!
알고 보니 사부님이셨구나! 내 눈물은 어떻게 해도 통제할 수 없었고, 마치 태어나서 가장 친근한 분을 처음 뵙는 것 같았다. 그 수련생은 그렇다면 사부님 초상을 집으로 모셔 가라고 했고, 이렇게 사부님 초상이 우리집에 오게 됐다.
3. 사부님께서 매번 나를 구해주시다.
당시 나는 천목(天目ㅡ 제3의눈)이 열리는 것에 대해 잘 몰랐지만, 가부좌하고 정공을 할 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과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연공장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등 뒤에서 누군가 그리 밝지 않은 손전등을 내 앞으로 비추는 것 같아 뒤돌아보니 빛이 또 등 뒤로 갔다.
내가 한 바퀴 돌자 빛도 따라서 한 바퀴 돌았고, 나는 그 빛이 내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임을 발견하고는 눈에 병이 생겼나 보다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자려고 눕자마자 온몸이 짓눌려 움직일 수 없음을 느꼈고, 눈동자도 돌릴 수 없었으며, 머리에서 심한 소리가 나며 생명이 끝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직 못다 한 일이 뭐가 있지? 다른 사람이 내게 빚을 지고 안 갚은 건 전생에 내가 그에게 빚진 거로 치더라도, 내가 남에게 빚진 것은 어쩌지? 아이들도 아직 어린데, 에휴, 자식에겐 제 살길이 있겠지.’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한 가지 내려놓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功을 다 연마하지 못했으니, 죽더라도 나는 수련해야 해.’ 이렇게 생각하고 약 10분 정도 지나자 머리가 조금 움직였고 눈도 움직일 수 있었으며 온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나는 일어나 사부님께 절을 올리며 소리 내어 울었다. 사부님께서 또 나를 구해주셨고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또 한번은 밤에 연공장에서 가부좌하고 연공할 때였다. 건물의 문은 닫혀 있었는데, 나는 천목으로 큰길에 버스 한 대가 와서 건물 아래 도로에 정차하는 것을 보았다. 차에서 두 명의 여성이 내렸는데 30대 정도였고 둘은 얼굴도 같고 입은 옷도 같았다.
차에서 내린 후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계단으로 들어와 연공장 쪽으로 왔다. 이때 연공장의 문이 열리고 입구에 많은 사람이 가득 차서 마치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두 여성은 연공장으로 비집고 들어와 사람들을 한 명씩 살피더니 마지막으로 나를 보았을 때 안색이 크게 변했고, 눈을 부릅뜨고 성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생각했다. ‘어느 전생에 저 사람들에게 목숨을 빚졌거나 무슨 빚을 져서 오늘 빚을 받으러 왔나 보다. 내가 정말 목숨을 빚졌다면 갚을 수 있지만 나는 지금 대법을 배우고 있고 사부님의 관리를 받는다. 만약 사부님께서 내게 갚으라고 하신다면 나는 반드시 갚을 것이며 모든 것은 사부님 말씀에 따르겠다.’
이 두 여성이 내게 2m도 채 안 되게 다가왔을 때, 나는 천목으로 사부님의 法身께서 멀리서부터 오시는 것을 보았다. 노란 옷을 입으시고 순식간에 내 왼편에 서셨고, 두 여성도 내 곁에 도달했다. 나는 가부좌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사부님과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대치하다가 떠나갔다. 내가 사부님을 몰래 쳐다보니 사부님께서는 두 눈썹을 꽉 찌푸리고 계셨다……. 입구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흩어졌고 사부님도 사라지셨다.
갑자기 어떤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몹시 처절했다. 내가 선정에서 출정(出定)한 이후, 현장에 있던 수련생들에게 오늘 밤 연공장에서 일어난 일과 여자의 울음소리에 대해 물었으나 그들은 모두 모른다고 했다.
연공장에서 나는 이 두 여성이 우는 소리를 사흘 밤 동안 들었고, 그 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지경이었는데 그 이후로는 들리지 않았다.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연공장에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에게 왜 연공을 못 하게 하냐고 물으니 윗선의 명령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연공장은 없어졌지만 나는 매일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했다.
나는 수련생들과 함께 시골 마을로 내려가 진상 자료를 배포하고 현수막을 걸었다. 어느 날 내가 ‘9평 공산당’을 다 배포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임무를 완수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매우 기뻤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 됐는지 갑자기 온몸에 오한이 들고 서 있을 수 없었으며 밥도 먹을 수 없었고 10여 일이 지나도 낫지 않았다.
수련생도 걱정했지만 나는 “괜찮아요, 업력을 소멸하는 중이에요”라고 말했다. 가족들이 병원에 가자고 권했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보름 동안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지만 나는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難忍能忍, 難行能行)’(전법륜)라는 법리를 떠올리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16일째 되던 날 오후 4시경 구토가 쏠려 토하고 또 토했다. 목구멍이 짠맛이 나서 보니 토한 것이 모두 검은 피였다. 한참을 토하고 나니 밤 10시가 됐고 화장실에 가려고 문을 나설 때 머릿속으로 바람이 휙 들어오는 느낌이 들며 머리의 한 작은 부분이 비워져 아주 편안했다.
물을 몇 모금 마시고 사흘을 더 토하고 나니 머리가 완전히 비워져 아무것도 없는 듯 무척 편안해졌다. 한밤중에 깨어 배가 고파 국수 세 그릇을 먹고 물을 많이 마셨다.
마음속에 더욱 확신이 생기자 또다시 토하기 시작했는데, 토사물이 목을 긁는 느낌이 나서 보니 모두 돌가루였다. 수년간 돌을 깨며 들이마셨던 것이었다.
이 죽음의 고비도 이렇게 넘기게 되니 정말이지 ‘버드나무 우거지고 꽃 밝은 곳에 또 하나의 마을이 나타나네(柳暗花明又一村)’는 시구 그대로였다!
2010년은 가장 고통스러운 한 해였다. 이 해에 아내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큰아들은 45세에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나는 그를 구할 방법은 파룬궁 수련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몇몇 수련생이 그와 함께 법공부와 연공을 했지만, 결국 그는 세상을 떠났다.
나는 수련하면 살아야 하는데 왜 사부님께서 그를 보살펴주시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내가 가부좌 정공을 할 때 큰아들이 부적절한 이성 관계를 맺는 장면을 보았다. 부처님은 자비를 말씀하지만 위엄도 있는 법이다.
큰아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날 오후, 그가 웃길래 내가 왜 웃느냐고 물으니 사부님께서 오셨다고 했다.
1년 후 나는 가부좌 중에 아주 높은 공간에 자그마한 집이 있고, 문이 서북 방향으로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방 안에는 침대가 있었고 그 위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내 큰아들이었다.
바람이 너무 불어 추울 테니 문을 닫아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내가 문을 잡고 닫으려 할 때, 사부님께서 나를 끌어당기며 허락하지 않으셨다. 나는 가부좌에서 출정한 후 그가 아직 죄업을 다 갚지 않았기에 다른 공간에서 고생하며 업력을 소멸하도록 하신 것임을 깨달았다.
아들은 고작 40여 일 수련했을 뿐인데도 사부님께서는 그를 보살펴주셨다. 보니 누가 수련하든 결코 헛되지 않았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 친척과 친구들은 내게 새로운 짝을 찾으라고 권했고 자식들도 동의했다. 몇 명을 만나보았지만 모두 마땅치 않았다. 하루는 한 음양선생(陰陽先生, 지관)이 자기 여동생이 54세인데 남편이 죽어 재가하려 한다며 나더러 만나보겠냐고 물었다.
그가 여동생을 데리고 왔는데 보니 바로 내가 아내와 결혼하던 날 밤 북쪽 벽에서 걸어 나오던 그 여성이었다. 조금도 틀림없었다. 알고 보니 그녀가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결혼했다. 결혼 이후 생활은 줄곧 아주 좋았다. 그런데 2년 이후 나는 수련 층차가 떨어진 것을 느꼈고, 내 자신이 틀렸으며 재혼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돌이킬 수 없으니 헛수련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다. 이 일을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집은 시장 근처에 있었다. 어느 날 가부좌하고 정공을 수련할 때 나는 사부님의 法身이 오신 것을 보고 급히 마중을 나가며 “사부님, 이렇게 바쁘신데 어찌 오셨습니까. 방으로 들어오십시오”라고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나는 들어가지 않겠다. 닭을 팔러 왔다”라고 하셨다. 내가 보니 광주리에 정말 세 마리의 닭이 있었다. 사부님은 사라지셨고 나도 선정에서 출정했다.
어찌 된 일인지 생각해보았지만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고 어디서 또 잘못됐는지 몰랐다. 며칠이 지난 후에야 나는 선정 중에 깨달았다. 나는 닭띠고, 내 전처도 닭띠였으며, 후처도 닭띠였다. 나는 모두 다 인연임을 깨닫게 됐고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동안 숱한 비바람을 겪으며, 대법 수련은 바로 용광로처럼 대법제자를 강철로 단련시켜 낸다는 것을 느꼈다. 수련은 반드시 고생을 겪어야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이 고생을 견뎌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고생은 심성 경지를 끌어올리는 진귀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지식 수준이 낮아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