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
이승애
우리는 담벼락을 타고 있어요. 나무와 바위를 오르기도 해요. 매일 안간힘을 다해 오르다 보면 간혹 갈라진 콘크리트 사이나 바위틈에 끼여 옴짝달싹하지 못할 때가 있지만, 결코 낙담 같은 건 하지 않아요. 그럴수록 우리에겐 삶의 의지가 펄펄 살아나지요. 모두 함께 어깨동무하고 힘차게 손을 뻗어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채워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정상에 오르게 된답니다.
우리는 개척자랍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만들지요. 가다 보면 부모형제의 손도 잡고, 친구 손도 이웃 손도 맞닿게 되어요. 그 황홀한 만남을 통해 우리는 더욱 강해지고 성장한답니다. 그대는 누구의 손을 오래도록 잡아보았나요? 아마 없을 거예요.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당신이 먼저 손을 뻗어 봐요. 이웃의 말랑한 손이 당신의 심장을 뛰게 할 거예요.
우리는 화가랍니다. 오래된 토담이나 돌담, 상처로 얼룩진 도시의 회색 벽들도 감자 같은 바위도 우리의 손길이 닿으면 아주 멋진 풍광을 자랑하게 되지요. 누구든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가 있잖아요. 우린 그곳에 연둣빛으로, 짙은 초록으로, 황홀한 노을빛으로 그림을 그려요. 당신은 누군가의 치부를 가려주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요.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아무데나 엉겨 붙어사는 비열하고 잔인한 식물이라고 비난을 해요. 그렇지만 우리는 결코 이익을 위해 상대를 괴롭히는 기생 식물이 아니에요. 스스로 광합성을 하여 양분을 만들고 뿌리에서 물과 무기 양분을 흡수하여 살아가는 독립체의 식물입니다. 다만 스스로 설 수 없기 때문에 남에게 의지하게 되는 거지요. 당신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살고 있지 않나요. 내가 나무를 타고 오르듯 나무는 땅에 의지하고, 사람들은 서로서로 등을 기대고 살아가지요.
우리는 결코 서두르거나 경쟁하지 않아요. 비록 남의 등을 빌려 살지만 나만 살기 위해 무리수를 두지 않지요. 운이 좋게 참나무나 소나무를 만나면 그들의 좋은 성분을 조금씩 나눠 갖기도 해요. 상생하며 서서히 길들여지는 거지요. 이것이 우리들이 사는 법이랍니다.
우리는 소설 속에서도 가끔 언급되기도 하지요. 어떤 이는 긍정적인 존재로, 또 어떤 이는 부정적인 존재로 표현하기도 해요. 나는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라는 작품을 좋아합니다. 그가 우리 담쟁이를 희망적인 존재로 이야기했기 때문이에요. 가난한 화가 지망생 주시는 폐렴으로 죽어가면서 이웃집 담쟁이 잎이 모두 떨어지면 자신의 생명도 다할 거로 생각했어요. 불행하게도 그녀의 죽음을 재촉하듯 어느 날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쳤어요. 담쟁이들은 그 화가를 위해 끝까지 붙어 있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세찬 바람을 이길 수가 없었지요. 그날 밤 이웃집에 사는 마음씨 고운 늙은 화가는 주시를 그렇게 죽게 할 수는 없었어요. 밤새 사투를 벌이며 마지막 잎새를 그려 놓았어요. 다음날 주시는 움푹 들어간 눈, 희망이 사라진 창백한 얼굴로 이웃집 담벼락을 바라보았어요. 그런데 거기엔 놀랍게도 마지막 잎새 하나가 매달려있었어요. 주시는 담쟁이 덕으로 삶의 의욕을 찾게 되었지요.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요. 만약에 우리가 담벼락을 타고 올라가는 습성이 없었다면 그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까요.
반면 이효석은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제일 귀찮은 것이 담쟁이라고 하며 우리의 존재를 비하하고 몹쓸 존재로 전락시켰지요. 그것은 우리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아름다울 때와 아름답지 않을 때 모두 한 존재인데도 말이에요. 보이는 대로 말하고 판단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지요. 당신은 어떤가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그 이면을 보고 있나요.
아주 슬픈 얼굴을 한 아이가 있었어요. 그 아이는 가끔 찾아와 얼키설키 타고 오르는 우리를 부러운 듯 신기한 듯 바라보곤 했어요. 그러다 우리들의 손을 어루만지며 속삭이곤 했지요. “나도 너희처럼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 어깨동무할 수 있는 누군가 내 옆에 있다면 저 높은 벽 따위는 두렵지 않을 것 같아.” 무엇이 그 아이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 걸까요. 당신들은 만물의 영장이니 잘 아실 거예요. 주위를 둘러보셔요. 당신은 누군가를 소외시킨 적은 없나요.
흑인 운동가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Yvonne Davis)는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고 했어요. 벽을 눕히는 일은 간단해요. 손을 잡고 함께 오를 때 벽은 스스로 누워 길이 되지요.
아침이 오고 있어요. 우리 모두 함께 손을 잡아요.
약력
2014년 한국수필 신인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충북수필문학회, 무심수필문학회, 무시천문학회 회원
청주교육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료
저서: 수필집 「아버지의 손」 「신호등」
첫댓글 담쟁이를 통하여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내신 점이 참 좋습니다. 나도 누군가를 타고 기어 오르는 담댕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늘 살피고 보듬는 선생님 모습에 감동입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처럼 예쁘고 따뜻한 글, 감사합니다..
최아영선생님 고맙습니다. 두 번씩 읽으시고 마음 담아 댓글 달아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담쟁이에 대한 사색이 돋보입니다.
난 그저 예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사물을 보는 시선이 곱습니다.
담쟁이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식물이지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요. 고맙습니다.
동화처럼 재미있네요.
글이 아기자기해서 읽는 동안 행복했어요.
회장님 시선이 따뜻해서 부족한 제 글도 행복하게 느껴졌나 봅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읽은 이방주선생님 글처럼 [두괄식]으로 문단을 전개하셨네요!
훌륭한 제자이시군요!(오늘 선생님의 흉내를 내어 봤습니다.)^^
[우리는 화가랍니다. ~~] 이 문단이 제 맘에 쏙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다리아선생님 고맙습니다. 순수하고 긍정적인 모습 닮고 싶습니다.
쉬운 우리말로 초등학생이 동화를 말하듯 해도 소크라테스의 말씀처럼 플라톤의 언어처럼 깊고 격조있는 이런 문학이 수필입니다.
선생님 아직 영글지 못한 제자에게 과분한 칭찬을 하시네요. 앞으로 분발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