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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 전산화의 선구자…옥천서 자연살이로 ‘제2인생’
“어린 시절부터 말 잘하고 싶어 시국강연회 찾아다녔다”
‘우리 역사 다시 보기’ 연설 명품 강연으로 국민에게 감동
‘우리역사 다시 보기’ 강연으로 대중적 관심을 얻고 있는 허성도(중문68-72) 모교 중어중문학과 명예교수를 11월 27일 만났다. 허 교수는 부인 이현옥(지리교육69-73) 동문과 2011년 충북 옥천으로 내려가 자연과 벗하며 산다. 그의 집은 일반인이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금강 본류가 시작되는 상수원 보호구역에 자리 잡고 있어서다. 허 교수는 “내비게이션과 지도를 보고 근처까지 온 제자가 있었는데 그 친구도 집을 찾지 못해 결국 마중 나가 데려왔다”고 했다. 어떻게, 왜 이런 곳에 집을 구하게 됐을까. 강연에 반해 왔다가 사는 모습이 더 궁금해졌다.
어떻게 이런 곳에 집을 구하셨어요.
“공인중개사 제자에게 산과 강이 있고, 인가에서 1km 이상 떨어진 곳에 집을 찾아달라고 했더니 여기를 보여주더군요. 한 번 와 보고 바로 결정했습니다.”
집을 지을 수 있는 곳인가요.
“여기가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되기 전에 지어진 집입니다. 사유지죠. 관할 기관에서 매입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건축을 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오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세요.
“아내가 암이 세 가지예요. 이 사실을 알고 저의 인생계획을 다 바꿨습니다. 그동안 나를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아내를 위해 살자. 그래서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을 찾아오게 된 겁니다. 생활해 보니까 너무 좋아요. 때때로 백로, 왜가리도 보고. 자연이 주는 선물이 대단합니다. 대개는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지요. 그런 날은 ‘아! 오늘은 한 번도 거짓말을 안 하고 살았구나.’라는 생각을 하지요. 많은 번민이 사람 관계에서 생기잖아요.”
이곳에 4년간 살면서 부인의 병도 많이 호전됐다. 그의 집 앞에는 배나무와 살구나무 밭이 있고 뒤뜰에는 매화나무 밭과 자작나무 숲이 있다. 겨울이라 앙상한 가지만 보였지만 봄, 여름, 가을에는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며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고 했다.
“저기 자작나무 보이죠? 러시아 소설을 보면 자작나무가 많이 등장해요. 청소년 시절 그 소설들을 읽으며 자작나무 숲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뒷산을 걷다 보니까 자작나무가 몇 그루 보여요. 다른 잡목에 가려 많이 크지 못하고 가려져 있던 걸 간벌을 해서 제 모습을 찾아 줬습니다. 햇빛을 제대로 받으니까 쑥쑥 커서 처음 제 키만 했던 나무가 지금은 저렇게 높이 자랐어요. 자작나무는 단풍이 들면 아주 아름답습니다. 여기에는 이런 보물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을 찾아가는 즐거움이 자연 생활의 기쁨입니다.”
월든 호숫가의 소로우처럼 허성도 교수는 금강변에서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위 사진은 자작나무 숲 그의 집
전기는 들어오나요.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전기도 수도도 없었지요. 전기는 이사 후에 끌어 왔어요. 수도는 지금도 없습니다.”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세요.
“정해진 일과는 없습니다. 그동안 너무나 바쁘게 지냈기에 이곳에서는 쉬엄쉬엄 지내기로 마음먹었어요. 교수시절에는 외국에서 연구년을 보낼 때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부만 했습니다. 하루에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아침에 책 보기 시작한 시간, 끝난 시간, 점심시간, 잠 든 시간 까지 기록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여기 와서는 종일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자유를 느끼며 즐겁게 삽니다.”
농사는 안 지으세요.
“여기에 들어와서 경제적인 소득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하자고 아내와 약속했어요. 그걸 기대하면 비가 많이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이고, 또한 노동량이 늘어날 거잖아요. 치유를 위해, 자유를 맛보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또다시 일의 지배를 받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세 시간 이상 노동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교수 생활하면서 평균 퇴근 시간이 밤 11시 30분이었습니다. 일요일, 공휴일 그런 거 상관없이 거의 매일 연구실에 있었어요. 옛날에는 12시에 건물 전기를 모두 소등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컴퓨터 사용 중에 전기를 함부로 끄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수위 아저씨들이 매일 밤 전깃불이 켜진 연구실을 돌아다니며 확인해요. ‘선생님 불 꺼도 됩니까?’ 그러니까 저의 퇴근 시간은 수위 아저씨들만 알아요. 그렇게 살다 여기에 와서 자유롭게 살아보니 정말 좋아요. 비전공 서적을 마음대로 볼 수 있다는 자유, 일을 안 해도 된다는 자유 그게 참 행복합니다.”
금강 산책로가 너무 멋집니다.
“아침에 주로 강변을 걷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자고 마음먹어도 오랜 버릇 탓에 맹자를 큰 글자로 프린트해서 읽으면서 걸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사람이 만들어놓은 지식을 이해하느라고 이 아름다운 자연과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산, 강, 풀에 미안하기도 하고요. 그 다음부터는 맹자를 안 가지고 다닙니다. 그냥 자연에 푹 젖어서 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마음에 남아있던 욕망이 사라져요. 심지어 좋은 책, 좋은 논문을 써야겠다는 욕망도 사라지데요. ‘내가 왜 책을 써야할까, 내가 책을 쓰면 별것도 아닌 것을 후배들이 읽느라고 고생할 텐데, 이런 거 하지 말자.’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런 생각이 들고 나서 정말 자유로워졌습니다. 저의 석사 논문이 도연명의 시를 다룬 것이었는데, 지식으로만 이해했던 그의 시세계가 요즈음 마음으로 이해되더군요.”
강연 요청이 많을 텐데,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꼭 가야할 모임에만 가려고 노력합니다. 교수시절에는 아내와 변변한 여행 한번 다녀본 적이 없었는데, 요즈음은 지방에 강연을 다닐 때는 항상 아내와 함께 다니고 있습니다. 여행이라고 생각하지요.”
허 교수는 중국어법의 권위자이면서 역사 강연자로 유명하다. ‘그의 우리역사 다시 보기’라는 강연동영상과 강연록은 SNS, 이메일, 블로그 등으로 퍼지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역사 강연을 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는지.
“중·고등학교 시절 국문학과나 국사학과를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학과는 커트라인이 높아서 제 성적으로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주변 선배, 고등학교 사회 선생님의 조언을 듣고 중문과에 입학했지요. 대학 1학년 겨울방학에 충남대 철학과 교수이신 이정호 선생님 댁에 가서 논어를 배웠어요. 한 구절을 놓고 두 시간을 강의하셨는데, 그때 한문에 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제 인생의 개안기였다고 할까요. 한문으로 쓰여진 역사책을 보려면 반드시 필요한 공부였습니다.
이후 3, 4학년 때 당대 최고의 한학자셨던 우인 조규철 선생님에게서 한문을 배웠습니다. 그 분은 당대 최고의 한학자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문집, 비문 등을 갖고 와서 물어보면 거침없이 해석해주시는 모습이 정말 대단해 보였어요. 어느 날 “어떻게 공부하면 선생님처럼 될 수 있습니까?”하고 여쭈어 보았더니 맹자만 1천번 보면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 후로 맹자천독이 제 인생의 화두가 됐습니다.
역사를 마음에 품고 한문을 공부하는 가운데 1980년 충남대 교수로 발령받았습니다. 부임하던 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이 사회에서 직업을 갖고 봉급을 받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기성세대에 속한다. 그러니까 이 나라, 이 역사, 이 사회를 비판할 자유보다는, 이에 대한 책임이 더 크다.’ 그러한 책임 중의 하나가 역사에 대한 기여였습니다. 제가 대학 학부시절에 국사학과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내가 한문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리 국학에 도움을 주고 싶다, 무엇을 도와주면 좋을까? 기초적인 사료를 번역해줄까?’ 하고 물었더니 번역 보다는 한국사 사료의 색인을 만들어 달래요. 저는 이 때 색인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나라 사료의 색인을 만들겠다는 꿈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침 세상에는 컴퓨터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온 후배에게 컴퓨터가 뭐냐고 물었더니 ‘인간이 지속적, 반복적으로 하는 일을 일시에 해주는 기계’라고 하더군요. 저는 이 컴퓨터를 이용하면,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료 입력도 가능하고, 입력만 돼 있으면 필요한 부분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저의 목표가 ‘사료의 색인화’에서 ‘국학의 전산화’로 진일보했습니다.”
허 교수는 이러한 ‘국학의 전산화’를 위해 제일 먼저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문예진흥원 등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계획 없다’는 말만 듣고 돌아왔다. 대기업 총수, 정치인도 만났지만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해야 빛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다들 입을 닫았다. 국가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제 민초들의 힘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3년 지인부터 시작해 후원금 모금을 시작했다. 후원자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강연이 시작됐다.
“매월 한 사람당 천원에서 만원씩 모으기 시작했어요.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돈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매월 후원해 준 분들에게 모금액과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정리해서 우송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금 우리역사 다시 보기 강연의 주요 내용들이 그려졌어요. 14년간 5백44명의 후원자들이 총 1억4천만원을 보내줬습니다. 이 기금으로 조선왕조실록 중 6대조 왕조,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의 원문을 입력했습니다. 제자집성 등 중국의 주요 서적들도 입력했습니다. 그때까지 중국에서는 이러한 입력작업이 전혀 시작되지 않았어요. 이런 자료들은 1999년 일반에게 무료 공개했습니다.”
허 교수는 퇴임하면서 후원금 중 남은 1천5백만원과 사비 8천5백만원을 더해 1억원을 한학자 양성을 위해 써달라고 서울대에 기부했다.
허성도 교수는 명 강연자로 알려져 있다. 논리적이면서 의미, 감동, 재미가 있다. 본 기자가 2014년 서울대 입학식에서 들은 ‘책 속에 길이 있다’는 허 교수의 강연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명 강연 중 하나다. 서울대 교육상 공적에는 “허성도 교수의 강의는 철저한 준비와 충실한 수업으로 정평이 나있고 강의 준비와 수업에 대한 열의는 교육방식의 개선을 위한 노력에서 특히 두드러진다”고 평가하고 있다.
허 교수의 산책길에 보이는 풍경
말 잘하는 건 타고난 건가요.
“말을 잘하고 싶어서 초등학교 때부터 유세장을 쫓아다니며 정치인들이 말하는 것을 유심히 봤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최고의 웅변가가 등장하는 시국강연회는 빠지지 않고 가서 들어왔어요. 대학 때도 명강의로 소문난 교수님의 강의는 모두 찾아 다녔지요. 학회에서 10분 발표를 할 때, 원고를 1백번 이상 읽으며 준비합니다. 안 보고 발표할 수 있도록요. 국제학술대회 발표문은 2백번 읽어요. 중국어로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원어민이 아니기 때문에 더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 합니다. 숨 쉬어야 할 곳, 띄우는 부분 일일이 체크하면서요. 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의안을 거의 외워서 갔습니다. 그렇게 준비하다 보니 늘 밤 11시 30분이 넘어서 퇴근할 수밖에 없었고요.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강의를 잘 하냐고 물어보면 이런 조언을 해줘요. ‘강의안은 당연히 소화해야 하고, 전공 이외의 책을 항상 읽고 있어야 한다. 다른 책을 읽고 있으면 강의가 부드럽게 진행된다. 그러나 강의안만 외워 가면 전달은 되지만 딱딱해진다. 강의와 관련되지 않은 책을 늘 읽고 있어야 한다.’”
제자들의 주례 요청도 많으시죠. 무슨 말씀을 들려주나요.
“결혼해 살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반드시 말로, 소리로 전달하라고 조언합니다. 아무리 작은 상대방의 호의도 가슴에 담아두지 말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로 하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매일 한 가지 이상 신랑 신부가 서로 칭찬해라. 칭찬할 것을 찾다보면 행복한 부부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칭찬이 생활화된 사람들은 어딜 가서도 환영받지요.”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국민들이 독서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경제적 부를 이루면 선진국이 될 거라 생각하지만 착각입니다. 중동의 부자 나라를 보세요. 선진국인가요? 지금 우리나라의 수출액은 프랑스보다 많아요. 그럼 프랑스보다 우리가 선진사회냐, 아니죠. 그렇다면 선진국의 요소는 무엇인가요? 그 나라의 이성과 문화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이성을 살찌우게 하고, 문화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것은 독서밖에 없습니다. 독서는 사유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독서를 통해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고 상대방의 사고체계를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됩니다. 독서하는 국민은 누구도 쉽게 혼란시킬 수 없습니다.”
집필 계획은 없으세요.
“맹자를 평생 읽어오면서 끄적거려 놓은 노트가 있긴 한데, 아직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 많아서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책을 내놓으면 맹자에 관한 또 하나의 짐을 만드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요즈음도 맹자를 보고 있으니 언젠가는 맹자 해설서를 쓰고 싶지만 쓰지 못해도 후회는 안 할 것입니다.
저는 유튜브를 통해 다른 분야의 강의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 강의를 해준 분들에게 항상 감사하지요. 그런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유튜브에 맹자 강의 동영상을 제대로 만들어서 올려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습니다. 맹자가 방대해서(적은 양이 아니어서) 백회 이상으로 나눠 올려야 할 거예요.”
마지막으로 동창회를 위해 한 말씀 해주세요.
“이상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서울대동창회는 끼리끼리의 문화를 넘어 많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는 일도 했으면 좋겠어요. 동창신문의 경우에도 일반인이 보고 감동받을 수 있는 기사가 하나쯤은 있었으면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금강 건너 편 산 아래로 너구리같은 동물 몇 마리가 줄지어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허 교수는 차를 멈추고 한참을 쳐다봤다. “처음 보는 동물이네요. 집에 가면 찾아봐야겠어요”. 부인 이현옥 동문은 “어제는 고라니가 집 뜰에 왔고, 멧돼지가 밭고랑을 다 헤쳐 놓았다”고 했다. 숲의 꿩을 보고 신기해하는 기자에게 허 교수는 “늘 보는 새”라며 이런 생활에 관심이 있으면 나중에 한 번 더 찾아오라고 했다. 언젠가 나도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을까.
허성도 교수는
국내 중국어법 연구의 권위자
국학 전산화의 선구자인 허성도 교수는 대전고를 나와 모교에 입학했다. 서울대에서 도연명 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고 대만으로 유학해 현대중국어법을 연구했다. 중국어법에 대한 스승도 책도 없던 시절, 영어와 중국어로 된 중국어법 논문 등을 구해 공부했다.
1980년 충남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1985년 서울대 중어중문학과로 자리를 옮겨 지난 2014년 2월 정년 퇴임했다. 2006년 제1회 서울대 교육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현대 중국어 어법의 이해’, ‘쉽게 배우는 중국어 입문’, ‘중국어 작문과 어법’ 등의 외국어 서적과 ‘생각’ 등의 인문서를 집필했다. 부인 이현옥 동문과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