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있다. 특히 종이신문의 경우가 그렇다. 젊은 세대들의 일상과 세태를 살펴보면 결코 틀린 얘기가 아니다. 종이신문을 자신이 직접 구독해서 읽는 대학생들은 이제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와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에는 자신이 직접 종이신문을 구독해서 읽지 않으면 일상의 대화에 끼기조차 어려웠다. 일단 그 날치 조간을 읽어야 하루의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일상의 대화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신문읽기는 필수였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생들은 그렇지 않다. 종이신문을 보지 않고서도 충분히 뉴스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이 뉴스를 접하는 곳은 주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이다. 심지어는 나까지도 간혹 인터넷 포탈 사이트를 뒤져 뉴스를 접하곤 한다. 더러는 연합뉴스나 오마이뉴스 등 인터넷신문을 통해 속보에 대한 욕구를 채울 때도 있다.
얼마 전부터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등에서는 전자메일로 뉴스를 보내주기까지 한다. 따라서 중요하고 급한 뉴스는 이들 신문이 보내주는 전자메일을 통해 읽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뉴스를 접하는 것이 종이책에 활판으로 인쇄된 책을 읽으며 젊은 시절을 보낸 내게는 아직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침대 맡에서 종이신문을 펼쳐 놓고 더듬거리는 재미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4개의 종이신문을 직접 구독료를 지급하며 보고 있다. 직장이 있는 이곳 광주에서 3개의 종이신문, 아이들과 아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 1개의 종이신문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아직도 꽤 많은 종이신문의 구독료를 내고 있는 셈이다.
내 아이 중에 대학생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서울집에서 종이신문은 대부분 천덕꾸러기이다. 몇일 동안 단 한 번조차 펴보지도 않은 종이신문이 여기저기 굴러다닐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직도 신문을 끊지 않고 있다. 이이들이 저 스스로를 성장시켜 가는데 신문의 내용이 여전히 많은 교육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실제로는 내 아이 녀석도 각종 뉴스를 티비나 인터넷 포탈 사이트를 통해 섭취하고 있지만 말이다.
광주에서는 학교에서 2개의 종이신문을, 집에서 1개의 종이신문을 보고 있다. 집에서 보는 중앙일보는 정기구독을 신청해 구독료가 아예 자동으로 통장에서 빠져나가도록 하고 있다.
처음 중앙일보를 보기 시작한 것은 삼성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경제계가 오늘의 세계현실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가를 알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그런 욕구를 포기하고 말았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중앙일보가 그런 내 욕구를 제대로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계속해서 중앙일보를 구독하고 있다. 문화면의 다양한 문학기사들과 사회면의 '아침을 여는 시'가 매일 아침을 신선하게 자극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특히 매일 아침 중앙일보를 통해 읽는 '아침을 여는 시'는 내게 그동안 상당한 활기를 주어온 것이 사실이다.
1면부터 접하는 온갖 뉴스들은 늘 쓰레기를 뒤집어 쓰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그 모든 불쾌감을 깨끗이 씻어주는 것이 마지막 사회면에 실려 있는 '아침을 여는 시'이다. 이 '아침을 여는 시' 때문에 나는 최근 몇 년을 잘 견뎌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중앙일보에서 이 '아침을 여는 시'가 7월 1일 자로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그 사실을 확인한 나는 몹시 기분이 나빴다. 뿐만 아니라 김상택의 만평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마음을 편치 않게 했다. 김상택의 만평은 이제 낡았다. 지난 시절, 다시 말해 노태우 정권시절만 해도 김상택의 만화에는 시적이고 예술적인 촌철살인이 있었다. 그러나 김상택은 아직도 그 시절의 발상과 사고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낡은 만평이 시를 대신하여 그 귀중한 지면을 차지하다니! 관성적으로, 그리고 의무적으로 정부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 그의 만평이 아닌가.
나는 중앙일보의 이번 조치를 이해할 수 없다. 무엇보다 중앙일보가 종이신문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를 무시하는 것은 종이신문으로서 중앙일보가 저 자신을 무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종이에 인쇄되는 시가 무시되면 중이에 인쇄되는 중앙일보 기사도 무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시도 종이라는 인쇄매체를 통해 생산되고 향유되어온 바 있다. 그러나 시는 언어예술이고, 언어예술인 시가 언제나 종이라는 매체를 통해 생산되고 향유되어온 것은 아니다. 종이에 인쇄되기 전에는 노래로 불려온 것이 시이다. 과거의 민요나 시조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시의 경우 이제는 오히려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생산되고 향유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차피 시는 돈이나 자본과는 무관하게 생산되고 향유되어 오지 않았는가.
시(서정시)는 언어예술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다. 중앙일보에서 홀대하더라도 시는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해갈 것이다. 이러한 시에 비해 종이신문으로서 중앙일보의 운명은 장담할 수 없다. 뉴스의 매체로서 중앙일보는 기본적으로 자본의 생산과 축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돈이 안 되는 종이신문 중앙일보의 미래를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켜보면 중앙일보만큼 시에 대해 애정을 기울여온 종이신문은 어디에도 없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아침을 여는 시' 란을 없앴으니 홧김에 몇 마디 써보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우울한 항의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우울할지라도 독자 여러분 또한 항의의 마음을 가져 보는 것이 좋으리라.(2005. 7. 1)
첫댓글 공감 한표!!
저도 '오늘의시' 때문에 중앙일보를 구독했는데 정말 아쉽습니다. 저도 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