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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雪國)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 소설가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중편소설 '설국'의 ' 첫 문장'입니다.
마치 詩 처럼 간결하고 압축적이며 서정미를 갖춘 빼어난 문장으로 유명합니다.
설국의 배경이 되는 일본 동북부 니카타는 '눈의 고장'이자 '설원(雪原)의 땅'입니다.
흰 눈, 흰쌀, 투명한 사케까지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야스나리는 니카타를 '살을 에는 칼바람도 따뜻하게 와 닿는 곳'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일본엔 니카타가 있지만 한국엔 강원도가 있습니다.
지난 주말, 늦가을에 찾은 강원도에서 폭설을 만날지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습니다.
강원도 평창 해발 1100m 고지대에 있는 '안반데기'마을을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영동고속도로는 유난히 터널이 많은 곳입니다.
버스가 긴 터널을 빠져나올 때마다 소설 '설국' 첫 문장처럼 '눈의 나라'가 가까워졌습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안반데기 마을로 향하는 좁고 구불구불한 길 주변 산간마을은 하얀 솜이불을
뒤집어 쓴 것처럼 눈속에 파묻혔습니다.
마을 이름이 '안반데기' 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안반덕'이라고도 부릅니다.
안반데기는 떡메로 쌀을 내리칠 때 쓰는 ‘안반’처럼 생긴 ‘덕(산 위의 평평한 구릉 지대)’이라는 뜻입니다.
화전민들이 피와 땀으로 일군 광활한 배추밭과 청정한 자연환경은 척박한 땅을 관광자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시사철 나그네들이 먼길을 마다않고 찾아오고 하늘이 맑을땐 밤 하늘에 총총히 빛나는
은하수와 별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한 겨울엔 주민들도, 이곳을 찾는 나그네도 불편할 겁니다.
폭설이 내리면 길이 푹푹 빠지고 미끄러워 마을까지 차가 올라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반데기까지 2.6km를 나선형의 완만한 임도를 타고 걸어 올라갔습니다.
'비옷'이라도 걸치지 않으면 등산복이 다 젖을 만큼 눈보라가 거칠게 몰아 쳤습니다.
하지만 숲이 우거진 임도에서 미세먼지 한 톨 없는 첫 눈을 온 몸으로 맞는 것은 색다른 경험입니다.
온통 하얀 수묵화 풍경과 발에서 전달되는 '뽀도독'거리는 촉감은 겨울 도보여행의 묘미입니다.
야스나리는 설국속의 니카타가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며 설경의 미학을 표현했지만
안반데기는 이날 폭설로 들판과 마을은 물론 하늘까지 하얘졌습니다.
거대한 풍차가 '윙윙'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설원 한복판에 서면 마음속에 스산한 바람이 붑니다.
슈베르트의 연가곡으로 유명한 W.밀러의 시 '겨울나그네'는 실연의 상처를 잊으려고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들판으로 방랑의 길을 떠나는 젊은이의 방황을 그린 작품입니다.
눈 덮힌 안반데기는 '겨울나그네'처럼 쓸쓸한 감성에 젖게 할만큼 아름답고 적막하고 차가운 들판입니다.
이 곳에선 귀청을 때리는 찬바람 조차도 따뜻하게 와닿습니다.
새벽부터 하염없이 내리던 눈발이 한 낮에 그치자 눈에 파묻힌 배추밭의
기하학적인 무늬가 설원에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배추가 뽑힌 250만평에 달하는 허전한 들판에 눈이 가득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백두대간에 접한 안반데기는 적설량이 유독 많기로 악명 높은 곳입니다.
12월도 오기도 전에 벌써 '눈의 세상'이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동면(冬眠)에 들어가듯 겨우네 눈속에 갇혀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전만큼 갑갑하고 외롭지는 않을 겁니다.
올림픽 아리바우길이 생긴 이후 들판을 덮은 엄청난 눈을 감상하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 온 '겨울나그네'의 발길이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 길을 이렇게 오랫동안 걷는 것은 흔치않습니다.
온 사방 거대한 설원을 둘러본 기억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눈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 마다,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산뜻하고 청량한 기분이 듭니다.
이렇게 왕복 10km를 걸었습니다.
폭설때문에 고루포기산 숲길과 능경봉을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래도 원없이 눈보라속에서 안반데기 특유의 설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강원의 '설국' 안반데기를 떠나 일상으로 돌아 왔습니다.
설국을 뒤로 하고 영동고속도로 터널을 빠져나오니 다시 '가을'이었습니다.
첫댓글 글이 참 좋네요...
땡큐~~ 늘 멋진 사진 올려줘서 고마워.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8.11.26 11:15
갑자기 내리는 눈에 마음조리신 회장님~~무사히 즐거운 트레킹을 마치게 되니 안도의 숨을 쉬시고~~
올해의 눈은 그날 내린 눈으로 원없이 보았답니다
늘 신경쓰시고 애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얀 설경이 지금도 아른거린답니다
멋진글과 사진 즐감했습니다
폭설에 미끄러져 몇몇 넘어진 회원이 있어서 걱정했어요.
모두 건강한 분들이라 별 부상이 아니어서 다행이예요.
가인님도 늘 건강한 도보여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
회장님의 무거운 마음은 생각도 안나고.. 갑작스레 맞은 눈밭 구경에 색다른 하루 즐거웠습니다.
영동고속도로에서 워낙 눈이 많이 내려 걱정했는데 대신 보기드믄 설경을 감상하게 됐네요.
함께 걸으며 좋은 풍경을 보면 즐거움도 배가 되겠죠..^^
@올리버 고생많이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