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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는 인류와 함께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오래된 악기이다. 인류와 함께 변화 발전해 오면서 인간의 희노애락을 표현해준 동반자가 바로 기타아였던 것이다. 슬플때는 은밀한 시정의 악기였고, 바쁠때는 쾌활한 노래와 춤의 벗으로 변함없이 우리의 곁에 있었다. 그만큼 우리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흥망성쇄가 있듯이 기타아도 수많은 굴곡을 겪어야만 했다. 고대로 부터 바로크시대 까지는 악기의 여왕 노릇을 하였지만 '예술에는 한없는 진보와 믿기 힘들만큼의 가능성이 있다'라는 요제프 할의 말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음량이 작다는 치명적인 이유 때문에 8자 모양의 기타아를 짖눌러 1자처럼 만들어 신음케했던 시절이 많았다.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다시 8자모양이 되살아나 오늘날에 이른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최고 장수 악기로 빛을 발하고 있다. 간혹 기타아의 기원을 원시 시대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 어떤 원시인이 바다거북의 시체에 남은 근육 한줄기를 우연히 튕겨 보았더니 핑 하는 소리가 났다고 하는데 이를 기타아의 시초로 보는 설이 있는데 이것은 과장 되었다고 할수 있다....
기타아의 기원...
역사상 기타아족이 처음 나타난 곳으라고 알려진 도시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왕국(B.C.3500~1900)에는 이미 기원전 4500년부터 수메리안 파투르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기원전 2500년에 들어오면서 부터는 수브아드 여왕 하프가 나타났다. 수메르에 이어진 바빌로니아나 이웃 이집트 문명시대에 오면 "네페르"가 사용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 악기는 대체로 울림이 작고 대신 목이 가늘고 긴 타입에 속한다. 줄감개는 없으며 줄은 받침대 맨끝에다 끈으로 매 놓았던 것 같다. 튕김은 피크의 일종인 플렉트럼으로 적은 줄을 튕겨 울렸다. 기타는 리라(Lyre)의 일종이었던 고대 그리스의 악기, 시타라(Cithara)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그러나 이 악기는 목이 없었기 때문에 기타의 조상으로 볼 수는 없다. 기타의 직접적인 조상은 8세기경 사라센 제국의 스페인 지배 당시에 무어인들이 들여온 '키타라 (Quitara)'라는 악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때 훗날 류트의 조상이 된 '알-우드(Al-ud)'라는 악기도 함께 들어 왔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기타의 원조는 리라와 경쟁적인 위치에 있었던 고대 류트(Lute), 즉 판도라(Pandoura)에 속한다. 고대에는 세종류의 현악기 - 오늘날 우리가 하프(Harp), 리라(Lyre), 류트(Lute)라 부르는 - 가 있었는데 모두 활형악기(Musical bow, 활모양의 악기) 로 부터 발달된 것이었다. 한편 고대 그리스 신화는 영리한 헤르메스(Hermes)가 리라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하프와 리라가 주로 종교 제전이나 군대 행진에 사용된 반면 류트연주자들은 고대 조형예술에서 종종 가정음악으로 여겨지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외로운 인물로 나타난다. 또한 히타이트 류트(Hittite lute)가 여성의 몸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프렛이 있는 지판을 지닌 최초의 악기라는 점에서 기타의 시조라고 볼 수 있다. 중세 로마인이 기원후 4C경부터 애용했던 악기는 피디큘라로 추정된다. 이것은 줄(현,fedes) 에서 유래된 말이며 대강 작은 현악기란 뜻을 지녔다. 이 피디큘라는 점차적으로 피디큘라 -> 피둘라 -> 비둘라 -> 비올라 -> 비우엘라로 변해갔다. 비우엘라는 활로 켜는것, 플렉 트럼은 치는것, 손으로 튕기는것 등의 3가지가 있다. 악기 모양은 비슷하고 뒷판은 평평하다. 짧은 네크를 지녔으며 줄감개가 뒤로 많이 기울어져 있고 줄은 6코스(겹줄)이나, 5겹줄 또는 7겹줄도 있었다. 이 비우엘라는 16세기에 거의 쇠퇴해 버렸다. (주1) 기원후 8세기초 무렵에는 이슬람 교도의 스페인 침공의 결과로 알-우드(Al-ud,나무라는 뜻)와 여기에는 여기에서 파생된 퀴타라를 도입시켰다. 알-우드는 무어 류트(moorish lute)이다. 퀴타라는 울림통 뒷면 이 평평한 발현악기인데 이 악기의 직접적인 선조가 된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베리아반도(스페인과 포르투칼을 포함하는 반도)로의 (주2) 기타아 유입이 아랍인에 의해서라는 이 설이 의문시 되고 이슬람의 스페인 침공전 이미 그리스, 로마를 경유하여 유럽에 기타아가 들어왔다는 설이 있다.
Guitar 의 먼 조상 [Lyra에 얽힌 신화]
제우스(Zeus)의 아들 헤르메스(로마어로는 Mercury)는 태어날때부터 매우 교활하고 약삭빠른 신으로서, 왔다 갔다하는 길목을 지키며 무역, 상업, 교통을 담당했지만, 때로는 노상강도신(神)으로도 유명했다. 어렸을 적에 벌써 그는 누구도 엄두를 못내는 아폴로신의 소를 수십마리나 훔칠정도로 배짱이 센 도적이었다. 몰래 훔친 소와 함께 유유히 집으로 돌아가던 헤르메스의 눈에 거북이 한마리가 보였다. 길 옆 풀밭 가운데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모습을 본 그의 머리속에 무엇인가 섬광과 같이 지나가는 기발한 생각이 떠 오른 것이었다. 날쌘 도둑질로 다져진 그인지라 이 느림보를 놓칠리가 없었다. 억세게 구부러진 헤르메스의 손에 움추려진 목이 순식간에 빠져 나오자, 산 두꺼비모양의 골수도 깡그리 긁어 내 팽개쳐 없어져 버렸다. 텅빈 껍데기의 몸체에 금방 꺾어진 막대기가 머리 구멍으로부터 다리 가운데 구멍쪽으로 꿰뚫고 나갔다. 질긴 쇠가죽이 나무 양쪽 끝을 조이기 시작하자, 멍애처럼 휘어졌다. 이 구부러진 막대 끝에 소의 창자로 마든 Gut줄이 건너 매여졌다. 리라는 이렇게 헤르메스의 날랜 기지로 처음 세상에 태어났다. Robert Graves 의 '그리스 신화'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헤르메스는 새로 발명한 거북껍질의 악기와 상아 Plectrum을 가지고 아폴로신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오른손의 Plectrum으로 리라를 퉁기기 시작하며, "전지전능하시며 고상하신 아폴로신이시여! 당신의 냉철한 이성과 관용으로 이 못된 놈의 파렴치한 몹쓸짓을 용서하십시요" 라고 노래를 계속했다. 황홀한 리라의 음색에 깊은 감명을 받고 기뻣던 헤르메스가 소를 감춘곳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소떼가 숨어 있는 Pyrus동굴로 아폴로를 데리고 가는길 도중에서도 쉬지않고 리라를 퉁겨댔다. 주인을 만나 반기는 소들도 보는둥 마는둥, "헤르메스! 너는 내 이소를 모두 갖고, 대신 그 리라를 나에게 주면 어떻겠느냐?"라고 아폴로가 제안했다. 헤르메스가 이에 응낙함은 물론, 서로가 화해의 악수를 나눈뒤로부터, 리라는 아폴로의 독점 악기로 된게 사실이다. 이 귀중한 악기를 얻은 아폴로는 Olympus의 모든 신을 모아놓고 자랑해 가면서 아름다운 음률로 신들의 귀를 기울이게 하는 감동을 주었다. 더우기 그는 태양신이자, 학문과 예술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신이었는데, 리라의 기량은 누구하나 따를 자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 악기야말로 그를 대변해 주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스페인의 민속 음악
스페인의 민속음악은 전세계에서도 가장 풍부한 편이다. 마치 집시음악이 스페인 민속음악의 전부인듯 알기쉬우나 이는 설사 훌륭한 음악성을 가졌다하더라도 전총적인 스페인 음악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이질적인 음악에 속한다. 저 유명한 [칸테 훌라멩고]는 원래 집시들이 동국에서 연주하던(춤추던)곡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순수한 집시의 것은 아니고 잡종인 것이다. 오늘날 스페인의 각지방에는 제각기 독특한 민요들이 아직도 전하여지고 있다. 옛날 카스틸랴의 론다 (Ronda)와 아 로 페사우(A Lo Pesan), 가리샤의 알랄라(Alala)와 무이네이라(Muineira), 카나리아 제도의 폴리아스(Folias), 레온의 아라다(Arada), 안달루샤의 세비야냐스(Sevillanas)와 판당고(Fandango), 아스트리아스의 아스트리아나다(Astrianada), 여스트레아두라의 론다, 발랜시아의 알바에스(Albaes), 아라곤의 호타(Joda), 카탈로니아의 소설적인 로망스(Romance), 발레아레스의 마테이샤(Mateisca), 신 카스틸랴의 세기디야(Seguidilla), 바스크의 아리뉴 아리뉴(Arin-Arin)와 소르찌코(Zortziko), 무르시아의 엘 마요(El Mayo) 등이 오늘에까지 전하는 민속음악들이다. 아주 원시적인 것, 고대선법과 교회 전래 성가에 유래한것, 범 유럽적인 것, 바스크의 독자적인 것, 색다른 조성을 지닌 것, 멜리스마(1음절에 다수의 음표가 주어지는 장식적인 성악)
스페인 초기 음악사
이 세대의 세속음악은 매우 사람스럽고 친근감이 있는것이 특징이며, 솔직한 감정표현으로 이루어진 짧은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음악들을 모아놓은 가곡집으로는 '왕궁의 가곡집','웁살라 가곡집' 등이 있다. 왕궁의 가곡집(Cancionero de Palacio. 1490~1530)은 460곡 중 상당수의 곡들이 비얀시코 (Villancico)로 이루어져 있다. 비얀시코란 비야노(Villno. 서민, 마을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이며 짧은 반복부를 축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 선율도 쉽고 뚜렸하다. 이 비얀시코의 주제는 젊은 여성의 애타는 마음, 남자들이 술집에서 부르는 쾌활한 노래나 축제 분위기의 표현,그리고 매우 서민적인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 세속 작곡가로서 당대 최대의 명성을 떨친 이에는 후안 델 엔시나(1468~1529)가 있으며 대표적인 세속가곡 형식으로는 우아하고 서정적인 궁정가곡 '로만사'가 있다. narrative poem 으로 14세기경 스페인에서 일어난 기사도적. 역사적, 소설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불려진 노래이다. 비얀시코와 로만사를 수록하고 있는 또 다름 가곡집으로는 1556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출판된 웁살라 가곡집이 있다(스웨덴 웁살라 도서관에서 후세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 곳 지명을 따서 이름 지어짐) 이 시기에 스페인 음악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은 알폰소 10세 끄리스토발 데 모랄레스, 그리고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 등이 있다.
류트의 역사
류트나 류트족의 악기들은 동양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류트는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닌현악기이다. 어원으로 따져 볼때, 아라비아의 "나무"라는뜻을 지닌 단어 al-ud와 옛날 프랑스 말의 lut가 그 발전의 경과를 알려주기도 한다. 오늘날의 연주회 음악에서는 서양의 악기로만 인식되어 있지만, 류트의 역사는 오랜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또 여러나라에서 쓰여졌던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음악학자 삭스는, 바이올린족 까지를 포함한 근대적인 현악기들의 조상으로서 류트를 분류하고 있다. B.C.2000년 무렵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그림이나 부조에서, 작은 공명통과 많은 줄받침을 가진 긴 목, 줄감개가 없이 2개의 줄이 평행으로 매어진 고대의 류트를 조그만 채로 연주하고 있는 작은 입상이 발견되고 있으니까, 이러한 류트의 초기적인 모습은 그루 문화 이입에 따라 여러나라에 전해져 그 나라 특유의 음색을 지닌 악기형태로 정착되는 것이다. 류트의 모체로 여겨지는 고대 페르시아 왕조 시대의 바르바트라는 악기가, 아랍과 북아프리카를 거쳐 유럽에 전해져서 류트로 발전 되었으며, 동쪽으로 옮아갔던 것이 동양의 비파로 남게 되었던 것으로 연구되기도 한다. 역사의 측면에서, 문화교류에 커다란 전기가 되었던 회교 제국의 발전과 십자군 운동에 의해 전파되어진 류트의 형태는 중세 유럽의 그림과 조각에서도 확실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줄감개집이 지판 뒤쪽으로 구부러져 있고, 소리가 명료해진 11현의 고전적인 류트가 완성되었던 16세기경 부터 이 악
기의 특성을 살린 음악들이 많이 작곡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다. 궁중악기나 음류시인들의 악기로서 사용 되던 류트는 성악곡의 1성부를 맡거나 무곡의 멜로디를 연주하는 악기로 사용되다가 차츰 다양한 음악으로 진전된 것이다. 베니스에서 1507~08년 무렵에 페트룻치에 의해서 간행되었던 악보가 류트 음악집의 맨 처음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오래 묻혀져 있었거나 분실되는 우여곡절 속에 전부 4권으로 밝혀지고 있는 이 류트곡집에는 스피나치노와 달자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탈리아는 류트 음악의 첫 악보 출판의 업적을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상당기간 류트음악 발흥에 중심역활을 하였다. 천문학자 갈릴레오의 아버지 갈릴레이가 1568년과 1584년 두 차례에 걸쳐 발간한 류트곡집도 좋은 본보기이다. 류트음악 발전시기는 대략 (1)16세기 시대, 1500~90년, (2)황금시대, 1590~1630년, (3)파리음악파 시대, 1615~99년, (4)독일 재홍시대, 1660~1790년 까지를 최성기로 보고 있다. 이탈리아에 이어서 독일에서는 슐릭이, 스페인에서는 1536년 밀란의 작품집이 나와 류트를 위한 음악발전의 기본적인 바탕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 영국 류트음악은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양상을 보인채, 버드와 다울랜드의 출현을 기다린다. 류트 기보법은 이런 변천과정에서 세부적인 내용을 갖추게 되는데, 파반, 갈리아드, 성악곡의 편곡과 리체르가레 풍의 소품 등으로 구성되며, 또 무곡을 모음곡으로한 형식도 나타나게 된다. 악기의 개량에 따른 음악의 변화도 병행되는데, 16세기 후반에 저음현과 줄받침이 늘어난 류트의 출현도 있었고, 저음에다 개방현을 추가하여 이 선을 매어두는 줄감개집을 따로 붙이는 데어르보와 키타로네가 나타남과 동시에 단순히 류트의 크기를 달리하며 정교한 장식무늬를 새긴 모습도 등장하였다. 바로크 음악시대에는 골티에와 바이스가 작곡한 소나타도 탄생되는 등 통주저음 악기로도 사용되도록 표현 영역이 활장되었었지만, 현의 증가에 따르는 주법의 어려움 등은 챔발로의 화려한 음색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류트는 16C 이탈리아에서 특히 번성하여 최초의 류트 책자가 출판된 곳도 이탈리아였다. 류트가 보급된 도시는 400여개를 넘었고 수많은 작품들이 잇달아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앤솔리지는 베르사드의 'Thesaurus Harmunicus'(1603년 간행)라고 할수 있다. 프랑스와 영국도 열광적으로 류트 음악을 받아들인 나라의 하나이며 존 다울랜드(1563~1626)는 당대 일류의 주자였다. 간편하다는 잇점을 제쳐두고라도 류트는 가수들의 반주악기로, 그리고 가정의 앙상블이나 보다 큰 규모의 합주단에서도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었다. 그리나 그 인기는 지속적인 것은 아니어서 대부분 17C말에서 18C 초엽에는 잠잠해졌다. 그렇지만 유독 독일을 중심으로한 유럽에서는 꾸준한 호응이 있었는데 이는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악기의 뛰어남 때문이기도 하고 몇몇 탁월한 작곡가와 연주가의 덕택이기도 하다. 이들 중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대연주가 바이스(S.L.Weiss)를 들 수 있으며 그의 연주는 바하까지 감동시켰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에 나타난 중요한 연주자는 보해미아의 칼 코하우트(Carl Kohaut)이다. 이탈리아에서 류트의 인기가 거의 소멸되었음을 안 비발디는 그의 수많은 협주곡에서 류트를 독주악기로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는 18C 오라토리오와 오페라에 쓰인 한결 서민적인 악기 만돌린의 날카로운 음색이 더 낮게 들렸다. 류트와 현을 위한 F 장조 협주곡을 쓴 코하우트는 비발디나 헨델의 다음세대에 속한다. 그는 바로크 작곡가라기보다는 초기 고전주의 작곡가로 분류되는데 그의 가계가 보해미아 계통이라는 점 외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코하우트는 훌륭한 주자였고 주로 빈에서 활동했으며 류트 협주곡 말고도 교향곡을 여러편 썼다.
비울엘라(vihuela)는 여러가지 점에서 현대기타와 가장 유사한 악기였다. 몸체는 기타보다 다소 작고 가늘지만 그 형태는 매우 닮았다. 오늘날의 12현기타 같은 음량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여섯쌍의 현이 유니즌으로 되어 있다. 이 복현을 "courses"라고 부른다. 비우엘라의 조현법은 오늘날의 기타와 동일한데, 단지 제3현이 반음 낮게 조율되어 있다. 따라서 기타의 G 현을 F#으로 조현하여 비우엘라의 원악보를 그대로 연주할 수 있다. 비우엘라의 실제 음높이도 다양하였다. 루이스 밀란(Luis Milan)은 "제1현을 될수 있는 대로 높게 조율하라"고 지시한 반면, 다른 작곡가들은 좀 더 특별한 조율법을 말하고 있다. 제1현의 조현은 현대기타의 E음에서 4도 높은 A음에 이르고 있는데, A음의 조현법은 현의 길이가 짧은 소형의 비우엘라에 이용된 것 같다.
비우엘라에 대하여 출판된 문헌은 8권에 이르고 있는데, 이곳에는 독주용 기악곡뿐만 아니라 독주용 가곡과 개작된 합창곡이 실려 있다. 이들 문헌은 루이스 밀란(Luis Milan)의 "거장/El Maestro(1536년)", 루이스 데 나르바에즈(Luis de Narvaez)의 "돌고래에 헌정된 6개의 작품집/Los seys libros del Delphin(1538년)", 알론조 데 무다라(Alonso de Mudarra)의 "비우엘라를 위한 세 권의 곡집/Tres libros de musica en cifra para vihuela(1546년)", 엔리쾌즈 데 발더라바노(Enriquez de Vldervabano)의 "사이렌 명곡선집/silva de Sirenas (1547년)", 디에고 피사도(Diego Pisador)의 "비우엘라곡집/Libro de musica de vihuela (1552년)", 미구엘 데 푸엔랴나(Miguel de Fuenllana)의 "오르페우스의 리라/Orphenica lyra(1554년)", 후안 버뮤도(jUAN Bermudo)의 "악기의 표현/Declaracion de instrumentos(1555년)", 에스테반 다자(Esteban Daza)의 "팔라스산/El Parnaso(1576년)"등이다. 이들 곡집에 수록되어 있는 많은 곡들이 연주를 위해서라기 보다 흥미를 위주로 쓰여졌기 때문에 현대의 기타로는 연주할 수 없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무다라의 "환상곡/Fantasia"과 같은 작품도 있는데, 이는 당시 유명한 하프 주자였던 루도비코(Ludovico)의 스타일을 모방한 곡이다. 발더라바노의 대표적인 "소네트/sonnet"는 자장가의 매력과 악고을 보면 두 개의 반주가 있는데, 기타 주자가 단순한 반주를 사용할때는 가수가 멜로디에 장식을 붙여 노래하고(hacer garganta), 반대로 기타주자가 장식을 붙여 연주할 때는 가수가 쓰여진 악보 그대로 노래하였다. (cantar llano)푸엘랴나의 "오르페니우스의 리라"에 수록되어 있는 후안 바스쾌즈(Juan Vasquez)의 "검은 머리소녀요, 나에게 입맞춤을/Morenica da me un beso"은 상당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유쾌한 작품이다. 그의 가곡은 대체로 당대에 있어 가장 재미있는 곡으로 손꼽힌다.
르네상스 기타음악
후안 버뮤도는 기타에 관하여, "기타가 비우엘라와 다른점은, 비우엘라는 여섯 음현을 가지고 있고, 기타는 네 개의 음현을 가지고 있다는 점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기타의 조현은 현대 기타의 제 1~4 현의 조현과 동일하였으며 전체 음높이는 통상적으로 한 음(장2도)이 낮았다. 현은 일반적으로 복현으로 되어 있었으나, 때로 류트와 같이 최고 음현이 단현으로 된 것도 있었다. 기타는 현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작곡가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였는데, 현존하는 문헌을 살펴보면 적어도 프랑스의 작곡가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충분한 노력을 기울인 것 같지는 않았다.
기타아는 루트나 오르간, 비우엘라의 경우와 같이 소위 타블레츄어로 적혀졌던 악기이다. 비우엘라는 15세기초 스페인에서 여러가지 모양의 같아 가운데 하나가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현재와 같은 형태의 기타아가 있었으며, 이 두악기의 차이점은 1555년 유안 베르므도가 "기타아를 비우엘라로 바꾸려면 제1,제6결을 더해야 한다"고 말한것과 같다. 비우엘라 음악의 황금기는 루이스 밀련의 작품이 출판됨(1536년)과 동시에 시작되어 안토니오 데 카베젼의 작품(1578년)으로 막을 내렸다.
알론조 무다라의 판타지아는 [비우엘라 음악을 위한 3개의 음악 대본](세빌;1546년)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제목이 보여주고 있듯이 이 작품은 "루도비코의 수법에 의한"하프를 모방하였다.
왕실의 하프 주자였던 루도비코는 특정한 음에 대한 연주법과 기보법에 혁신을 가져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것을 "잘못된" 소리라고 말하지만 무다라의 견해를 통해서 보면 그러한 음들은 잘 연주될수 있으며 결코 불유쾌한 효과를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루이즈 밀런은 [엘 마에스토로](1536년)라는 그의 음악모음집에 미우엘라의 멋진 효과를 위한 기교적이며 예술적인 기능성을 십분 발휘하였다. 그 작품들 중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세이즈 파나바스]이다.
황제 찰스5세를 지칭하는 [칸시다온 델 엠페라도]는 루이스 데 나르베즈의 [비우엘라를 위한] 여섯개의 타블래 츄어집] 중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죠스킹 데프레의 주제에 의한 것인데 대단한 예술적 기교로 당시의 스타일을 변형시켰을 정도이다. 목자의 노래 [과다메 라 바카]의 변주곡에서 나르베즈는 그 지신이 장식음 예술의 대가임까지 입증하였다. 스페인 음악에 있어 목자의 피규어의 많은 곡들과 마찬가지로 [과다메 라 바카]도 민요이다. 16세기 중엽 경에는 기타아와 비우엘라가 아름다운 음향을 위하여 여러가지 기교적인 변화를 갖게 되었다 이 악기들의 연주의 효과는 줄을 튕기는데 있는 우아함과 명료함이다. 이러한 새로운 양상이 디에고 피사도르(살라망카인 1552년)의 [파바나] 와 [발라네스카]에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 이 음악가의 경우에는 그의 주변이 그의 음악성을 일깨워 북돋우어 주었으며 그 자신도 필립2세 궁전의 축제음악의 감독인 동시에 왕의 음악선생이었기 때문에 아주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드리앵 르 르와(Adrien Le Roy)의 풍부한 모음잡에 실려 있는 "브르고뉴의 브랑르/Branle de Brourgogne" 는 기타에게 밝은 전망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그러나 제약이 많았던 기타를 가장 세련되게 다룬 작곡가는 미구엘 데 푸엔랴나였다. 그의 "오르페우스의 리라"에는 기타작품들도 실려 있는데, 그 중 "환상곡"은 아름다운 연주를 축소시켜 놓은듯한 작품으로, 무엇보다도 스페인 사람들이 기타에 대하여 잘 알고 사랑한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갖게 하여 준 곡이었다.기타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탁월성은 무다라의 "비우엘라를 위한 세권의 곡집"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의 작품은 그렇게 주목을 끄는 작품은 아니지만 적어도 훌륭한 구성을 지닌 곡이다.
4코스 기타의 출현
기타아가 서민들사이에서 널리 퍼지게 된것은 15세기 4코스 기타아가 출현한 이후의 일이다. 코스는 겹줄을 말하는데, 당시는 가장높은 줄에만 단현(외줄)을 매는 형태를 갖추었다. 이 겹줄을 매었던 습관은 18C까지 이어졌다. 악기의 모양은 울림통 양쪽이 가파르지 않게 움푹 파여진 8자형 이었으며 뒷판은 평평하거나 약간 볼록 나왔다. 현제 기타아 다운 모양새의 악기 모습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5~16C 르네상스 시대였다. 4코스 기타아는 서민의 악기로 큰환영을 받았고 일반인들 에게는 널리 애용되어 노래와 춤의 반주 악기로서 인가가 대단하였다. 이 악기는 스페인 뿐만 아니라 유럽각지에 보급되었고 이에 따라 기타아에 대한 표기나 발음도 각기 달랐는데 이탈리아의 경우 기타아라, 프랑스는 기케르 또는 기테른, 독인른 구이테르나, 영국은 기턴, 스페인은 기타라 등으로 불리웠다. 4코스 기타아의 음악은 스페인이 미겔 푸엔라냐 알론소무다라, 이탈리아의 멜시오르데 바르베리, 프랑스의 앙드리앙 르로와, 기용 몰라유등의 대가 들이 나타나 발전시켰다.
르네상스의 류트음악
류트는 다수의 휘어진 버팀목으로 된 배(pear)모양의 몸체를 가졌다는 점에서 기타족과 구별 된다. 줄감개가 들어 있는 머리 부분은 기타와 같이 지판에서 곧바로 연장되지 않고 90도 뒤로 꺽어져 있는데, 이는 좁은 장소에서 다른 연주자와 함께 연주 할 수 있도록 배려된것 같다. 류트인 여섯 음현은 고음현으로부터 내려가면서 트레블(treble), 스몰 민(small mean),그레이트 민(great mean), 콘트라테너(contratenor), 테너(tenor), 베이스(bass)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류트의 악보도 타블라튜어로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프렛을 알파베트로 표시하는 타불라튜어가 사용되었다. (a는 개방현을, b는 제1프렛을 표시하였다) 16세기 류트의 조현법은 미우엘라와 같으며, 전체적으로 현대기타보다 주로 높게 되어 있다.
그러나 비우엘라와는 달리 최고 음현은 복현으로 되어 있지 않았으며, 16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음현이 추가되었다. 7음현의 류트에는 제1음현보다 4도가 낮은 D음의 복현이 추가되었고, B음현의 류트에는 7음현보다 2도 낮은 F음의 복현이 추가 되었다.
류트의 레퍼토리는 매우 광범위하여 한 권의 책으로는 모두 담을수 없다. 오늘날의 문헌에서도 알 수 있듯이 류트는 16세기에 있었서는 부동의 지위를 차지하였던 악기였다. 이러한 사실은 1590년, 덴마크의 앤공주가 에틴버러에 입성함을 축하하기 위하여 쓰여진 축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악기 중의 유일한 왕인 류트를 퉁기며 노래 부른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
바로크란 말은 불규칙적으로 생긴 진주란 의미를 가진 포루투갈어인데, 이 말은 음악과 건축에 있어서 과도한 장식과 기교를 가진 예술작품을 경시하는 의미로 쓰였다. 사실 이말은 바로크양식을 이해하지 못한 19세기의 비평가와 청중으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그 당시 연주가들은 바로크시대의 특징인 불협화음을 피하기 위하여 장식음을 바꾸기도 하고 자신의 취향에 맞도록 화음과 카덴쯔를 고치기도 하였다. 문학세계에 있어서 보우들러박사는 세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젊은 사람들이나 여성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말들을 삭제해 버렸으며, 음악세계에 있어서도 음악편집자들은 바로크시대의 음악에서 본질적인 요소인 장식음이나 불협화음을 없애 버렸다.
이와 같은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몰이해로 인하여 오늘날 편집자들은 19세기의 편집물과 20세기 초의 작품들을 무시해 버리고, 필사본의 원본과 출판물에 집중하여 바로크시대의 작품에서 그 시대의 진정한 정식과 작곡가들의 의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었다. 사실상 이 시대에 생겨난 음악은 무수히 많으나 많은 작품들이 천박하고 저속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바로크 시대의 문헌을 보면, 자신의 후원자들에게는 매우 설득력 있고 표현력이 풍부했던 작곡가들까지도 연주방법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전혀 말을 남기지 않았다. 그 당시 음악가들은 귀족들의 여러 궁전에 소속되어 왕실, 궁정, 교회 음악가란 칭호가 붙여졌다. 그들은 왕실에 예속되어 귀족들을 위해 음악을 창조해냈으며, 작곡가들은 자기 자신을 개인적인 음악 창조자로서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일반적인 형태로 작곡했다. 예를 들어 미뉴에트는 어느 것이든지 헨덴, 텔레만, 그라첼이 작곡한 것처럼 들린다. 이 시대에서는 연주가에게 악곡 해석의 자유를 주고 있다. 이 때의 작품들은 뼈대만 있어서 여기에 연주자가 옷을 입히고 장식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대개의 다이나믹한 능동적 기호 표시(p,f,cresc,decresc.등)는 연주가의 재량에 맡겼었다. 연주가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역시 리듬의 장식과 변화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1753년에 발표된 바흐(Karl Philipp Emanuel Bach)의 하프시코드 연주에 관한 논문에서 "점음표의 뒤에오는 짧은 음들은 항상 악보가 표시하는 것보다 더 짧게 만들어 진다." 이것을 우리는 이중 점음표라 부른다. 1650년에 종래의 4음현으로 된 르네상스시대의 가타는 제5음현을 더하여 기타의 음역을 넓힘으로써 인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사실, 기타는 류트보다도 훨씬 연주하기가 쉬웠다. 류트도 이 시대에 들어와서 저음현을 더하여 음역을 넓혔으며, 프랑스 류트주자들의 영향을 저음(통주저음)의 연주를 위해서는 많이 쓰였지만 다성부의 대위법적인 곡에는 너무 복잡한 악기였다. 이 당시에 이르러 원래 성악적인 기분으로 쓰여진 후기 르네상스의 류트 독주곡은 주로 고음부와 저음부를 중심으로 때로 완전한 화음이 불규칙하게 더해진 단순한 무곡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스페인에서는 6음현의 뷔엘라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고, 그 지위를 건반악기에 빼앗겨 버렸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5음현 기타가 대중 악기로 보급이 되어 두가지의 서로 다른 스타일로 연주되었다. 즉 무곡의 반주에 쓰였던 라스게아도(Rasgueado)주법과 주로 무곡형식으로 된 독주에 쓰여진 푼테아도(Punteado)주법으로 연주되었다. 바로크시대에 있어서 기타와 류트가 모두 부차적인 역할 밖에 하지 못하였으나, "기타광시대"의 초기를 장식했던 찰스2세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의 상황이 윌터 스코트경의 "그라몽 백작의 회상"중에 자세하 적혀 있다.
바로크 기타음악
기타는 바로크(Baroque)시대에서 로코코(Rococo)시대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기타는 대중의 사랑스러운 악기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비제(Robort de Visee), 캉피옹(Francois Campion), 산스(Gaspar Sanz)와 같은 유명한 연주가, 작곡가들이 탄생했다. 산스는 <스페인 기타음악교본>을 저술하였는데 상세한 그림이 곁들여져 있으며 라스가도( Rasgado), 푼테아도(Punteado)주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150년전 밀란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의 기타리스트로 철학자의 면모도 있었다. 한편 산스의 음악을 끝으로 스페인 궁전의 대 기타리스트와 비우엘리스트의 시대는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음악가들은 하프시코드, 바이얼린, 첼로등을 선택했고, 이미 북유럽에서는 탄현악기의 인기가 사라져가고 있었고 스페인이외의 지역에서는 기타가 경박하고 천한 악기로 괄시 받기 시작했으나 스페인에서만 음악 생활의 동반자로서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스카를라티(Dominico Scarlatti, 1685~1757)는 거의 40년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보냈는데 그는 천재적인 음악성을 지녀 많은 곡을 작곡하였으나 기타곡은 단 한곡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기타에 대한 매력은 절실히 느낀 작곡가로서 그의 작품중에는 기타의 특성을 이용한 부분들이 많이 나타난다. 복케리니(Luigi Boccherini, 1743~1805)도 원래는 첼리스트였으나 후원자의 부탁에 의해 두대의 바이얼린, 기타, 비올라와 첼로를 위한 5중주곡을 12곡이나 작곡했다. 그의 음악은 스페인적이었으나 스스로가 스페인음악에 열중한 적은 없으며 스페인의 거칠고 정역적인 음악에는 항상 분노를 느끼며 경멸하고 있었다. 이런 복케리니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음악가는 바실리오 신부(Padre Basilio)였다. 원래 미구엘 가르시아(Miguel Garcia)라는 이름을 가진 수도회의 신부로 당시 궁중의 음악교사로 일했으며 또한 뛰어난 기타리스트로서 그의 제자인 아구아도(Dionisio Aguado)와 여왕의 총애를 받았다. 1799년 페란디에레(Fernando Ferandiere)가 쓴 <스페인기타 연주법>이 손가락위치를 표시하는 타블라츄어 양식 대신 오선악보를 사용한 최초의 교본으로, 이로 인하여 기타음악에는 새로운 길이 열렸으며 또한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기타가 다른 많은 악기들과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겹줄은 음량은 컸지만 두현을 동시에 누르면 서로 음이 맞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당시 이미 많은 제작자들이 겹줄을 버리고 단현의 기타를 만들고 있었으며 부채꼴의 받침목이 도입 되고 울림구멍의 장식, 브릿지의 개량등으로 이후 단순하면서 편리한 토레스기타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했다. 1800년대에 들어와 6현-거트(Gut:어린 양의 창자를 꼬아서 만든줄)로 된 현이 세현, 은선이 감긴 비단현이 세현-의 기타의 표준형이 되었다. 러시아 사람들만이 6현 기타를 받아들이지 않고 7현 기타를 개발하여 사용했다 류트가 성행했던 이탈리아에서도 기타가 우위에 서기 시작했다.
5코스 기타의 출현
17C에 들어서면 5코스 기타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무렵 유럽 여러나라에서는 이 기타를 스페인식 기타아라고 불렀는데 스페인에서는 기타라 에스파뇰아라고 발음 했으며 현재는 시대구분의 편의상 바로크 가타아라고 부른다. 5코스 시타아는 연주하기가 쉬워 대중에게 인기가 좋았다. 주로 라스기아도 주법을 이용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간단한 코드를 튕겨 줌으로서, 노래와 춤의 흥취를 더욱 돋구워 주는 반주악기역할을 하였다. 이 기타아를 창안하고 예술적인 악기로 발전시켰던 이가 바로 빈센트 에스피넬(그는 시인 이기도 하다.)이었다. 5코스 기타아가 스페인 전체로 퍼져 나갔던 시기는 17세기 말이었다. 이 5코스 기타아 보급에 영향을 주었던 사람이 바로 카다루냐 였는데, 지방의사 후안카를 로스 아마트(1572~1642)이다. 그는 [스페인 기타아와 만돌라]라는 기타아 교본을 펴냈는데, 1596년의 초판은 발견되지 않고 1627년 이후에 출판되것만 전해지고 있다. 이 교본이 중요한 이유는 교회나 궁전에서 애호하던 폴리포니가 우세했던 시대에 화음으로서 소리를 내는 방법, 즉 라스기아도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전에 쓰였던 4코스의 기타아가 아니라 5코스 기타아를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책은 해적판까지 합세하여 기타아 보급에 크게 공헌하였다. 당시 스페인식 기타아를 다루었던 음악가들은 화음만 울려주는 것으로는 만족을 못하고 폴리포닉한 음악을 만들어 연주하기도 하였다
라스게아야도 주법과 류트에서 배웠던 푼테아도(punteado:한음 한음 튕기는것)주법을 교모하게 섞어 연주하기도 하였다.
1629년 이탈리아의 포스카리니는 불협화음을 긍정하는 혁신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작곡가로는 포스카리니 부터 시작하여 코르베타, 비제를 중심으로 하는 춤곡파와, 그라나타를 대표로하는 앙상블속의 바르콘티누소로서 역할을 중시하는 파로 나누어 졌다. 이 시대에는 이들 이외에도 루도비코 론칼리, 가스파르 산스, 프란시스코 게라우등 뛰어난 작곡가들이 많이 나타났다. 특히 가스파르 산스, 프란시스코 게라우등 뛰어난 작곡가들이 많이 나타났다. 특히 가스파르 산스는 스페인 출신으로 1674년에 당시 문헌으로는 가장 잘 쓰여진 기타아 교칙본겸 곡집[스페인풍 기타아상의 음악교정]을 저술했을때 여기 실린 곡들의 대부분이 스페인 땅에서 사용된 무곡류로서 미베라아 반도의 민중의 숨결이 통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유럽 음악사상에서 민족주의의 현저한 선구인 한 사람을 찾는다면 아마도 그는 17C 스레인의 가스파르 산스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17C 바로크의 5코스 기타아는 18C들어 와서도 얼마 동안 사용되어 왔으나 프랑스의 프랑스와 캄피온과 산티에고 데 무르시아 므렵을 끝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처럼 쇠퇴한 까닭은 고전파 시대 흐름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8C 음악은 다성부에서 단성부로 옮겨 갔으며 악보상으로도 타물라추어에서 새로운 5선 기보법으로 옮겨 갔는데 이러한 점에 숙달된다는 것이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타아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제 1 쇠퇴기라 말한다.
반도어와 리라-비올음악
반도어(bandore:반도라 또는 판도라 라고도 불리운다)는 시턴(cittern)족에 속하는 금속현을 가진 저음악기이다. 반도어는 류트보다 둥글고 얇은 몸체와 평평한 뒷면을 가지고 있는 점이특징이다. 반도어 음악도 타블라튜어로 쓰여졌다. 조현법은 현대기타의 제 1현~5현과 같으며 제6현만 제5현보다 1도 낮게 되어있다. 안토니 홀본(Anthony Holborne)의 "야경/Night Watch"
은 당시에 매우 유행되었던 선율이다. 반도어는 당시 연주회에서 흔히 쓰였던 악기이다. 리라_비올(lyra-viol)은 활로 연주되는 비올족에 속하는 악기이다. 비올족의 악기들이 단선율을 연주하는데 쓰인 반면, 리라_비올은 주로 대위법적인 음악이나 화성적인 음악의 연주에 이용되었다. 베스비올도 리라식으로 연주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화음을 잡기가 쉬운 약간 작은 악기인 리라_비올이 쓰였다. 1600년 이후, 비올의 거장들이 늘어남에 따라 류트가 누렸던 지위를 위협하는 듯 하였다. (1612년에 출판된 존 도울란드의 "순례자의 위안/Pilgrim's Solace"에 쓰인 다소 방어적인 서문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토마스 포드(Thomas Ford)의 두개의 리라_비올을 위한 이중주, "사우스코트씨의 파반/Mr.Southcote's Pavan"은 두 악기 간에 훌륭한 조화와 매력적인 연주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고전 시대의 음악
고전 음악의 진가, 즉 그 우아하고 명료하며 기품있고 기지있는 매력을 알려면 모차르트의 소나타나 심포니를 듣기만 하면 된다. 바로크시대에 강조된 대위법은 조심스럽게 서로 조화된 화음으로 구성된 선율적인 음들의 형태로 옮겨진다. 꾸밈음과 장식음등 장식품은 없어지고 연주가는 이 시대부터 바로크 시대처럼 쓰여진 악보들을 자신이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J,S 바흐의 아들들도 바로크에서 고전시대로 바꾸어지는 변혁 시대에 속했지만, 그들의 음악풍은 이 시대에 가깝다. 이런 음악의 설득력 있는 연주는 기품있고 명료하며 밝게 나타난다.
18세기의 기타음악
18세기 초반에 들어와서 5쌍을 가진 기타는 점차 대중적인 인기를 잃어가고, 대신 영국에서는 고대의 시턴(Cittern)이 다시 나타났다. 이 시턴은 만돌린과 비슷한 음을 내었으며, 몸집이 작고 철사줄로 되어 있었다. 시턴은 영국풍의 기타, 또는 단순한 기타로 불리워져 때로 역사학자들 간에 논의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예를 들어, 조지와싱턴의 질녀가 숙부에게 기타가 갖고 싶다는 편지를 쓴적이 있는데, 사실 그녀는 기타가 아니라 시턴을 원하였던 것이다. 시턴을 위하여 쓰여진 음악은 종래의 관현악기에 쓰였던 타블라튜어를 사용하지 않고 바이올린과 같이 높은음자리표를 가진 소프라노 보표로 쓰여졌다. 18세기 말엽, 기타는 제6현을 더하여 화음의 가능성이 넓어짐에 따라 다시 대중적인 인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또한 종래의 복현이 단현으로 바뀜에 따라 기타는 매우 단순하여진 느낌을 주었다. 이 전환은 여러가지 근거로 해서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일어났고, 이윽고 프랑스,오스트리아,스페인으로 파급되어 간 듯하다. 스페인에서는 아마도 '단현화(單絃化)'보다는 '6코스화'가 먼저 이루어졌으며 한때는 '6복현(6複絃)'이라는 과도기의 기타도 있었던 것이 전해 오는 문헌이나 악기 그 자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타를 위한 음악은 시턴 음악과 같이 소프라노 보표로 작곡되었으나, 실제음은 악보보다 한 옥타브 낮게 되어 있다. 초기의 기타 악보는 시턴의 악보와 마찬가지로 기보를 간략히 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다른 성부의 음가 표시가 전혀 구별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당시의 기보법은 없어져 버린 타블라튜어의 근본적인 난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따라서, 현명한 작곡가들은 곧 기타 악보를 개량하여 사실상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기타 악보의 기보법을 확립하였다. 당시의 기타는 바로크 시타보다 허리가 깊이 패였으며 프렛의 수도 10개에서 18개로 늘어났다.또한, 기타의 뒷면과 옆면을 자단(rosewood)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현재 코서트용 기타의 제작에 있어 필수적인 재료로 쓰이고 있다. 또한 19세기 초의 기타가 현대 기타와 크게 다른점은 현의 길이가 짧았다는 것이다. 더우기 프렛의 간격이 현대의 기타보다 좁았기 때문에 왼손으로 매우 광범위한 음역을 다룰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작품을 현대 기타로 연주할 때는 할 수 없이 운지를 바꾸어 연주하거나 아예 연주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부분 작곡가에 있어서 그러한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지만 그 중에서 예외적인 작곡가로 디오니시오 아구아도를 손꼽을 수 있다. 그의 많은 작품은 왼손의 어려운 운지 때문에 현대 기타로는 연주될 수 없다.
6외줄 기타아의 출현
18C말경 특이한 현상이 일어 났는데 기타아 리스트가 아닌 일반음악 작곡가들이 기타아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보케리니가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다장조의 오브리카토적 기타아 협주곡과 다,라 장조의 기타 5중주곡, 마단조의 기타아 5중주곡은 현재에도 많이 연주 되고 있다. 이들의 작품은 거의 기타아와 현악기의 중주곡 이었으며 화려한 현악기의 기교나 가락에 비하면 기타아는 너무 단순하고 여렸다. 단지 아르페지오로 시종일관하는 반주격이었다. 그러나 18C후반에 가면 쇠퇴기를 맞았던 기타아가 다시 일어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새시대의 선구자요, 5선 악보에 의한 최초의 교칙본을 내 놓은 기타아 작곡가들이 이같은 흐름을 주도했는데 바로 안토니오 다실바와 페르난도 페란디에르가 그 주인공이다. 또 이무렵 스페인에서는 기타아의 부활의 기운을 불어 넣어준 음악가가 나타났는데 그는 미겔 가르시아 로서 바실리오 신부였다. 바슬리오 신부는 페델리코 모레티와 디오니시오 아구아도에게 기타아를 가르쳤다. 모레티는 바슬리오의 이론과 주법을 이어 받아 정립시켰다. 우선 코스(겹줄)기타아가 아닌 6외줄 기타아로 바꾸었고 1799년 [6외줄 기타의 연주의 원칙]을 내놓았다.
6줄 고전 기타아는 줄 바뀜 뿐만 아니라, 악기 자체의 본질적인 개혁도 불러 일으켰다. 우선 울림통이 커졌다. 모양은 타원 또는 합해진 계란형으로 단순했다. 울림 구멍도 커졌다. 나무 두께는 얇고 가벼워 연주하기가 편리했다. 부채꼴 받침나무를 앞판속에 붙여 현 장력을 증가 시켰다. 프렛(fret)의 칸을 넓혀서 음역이 3옥타브 이상이 되도록 했다. 울림통이 깊어 음도 커졌다. 또한 줄맞춤이 편리해졌고 명료한 음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18세기말 기타아는 역사상 가장 큰 전환기를 맞이 했는데 이 전환은 이탈리아에서 먼저 일어났고 이윽고 프랑스, 오스트리아,스페인으로 파급되어 간듯하다. 19세기 들어서서는 호세 페르나세에 이어 드디어 안토니오 데 토레서(1817~1892)가 근대 표준의 기타아를 확립 시켜 놓았다. 이 성능좋은 기타아로 고전파 기타아리스트들은 단성부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고전적인 작곡 기법과 악기특성을 그들 나름대로 연구하여 아름답고 알찬 작품들을 내 놓았다. 19세기 고전파의 금자탑을 세운 것이다. 당시 활약한 기타아 리스트로는 이탈리아의 펠리페 그라냐리, 페르디난도 카룰리(1770~1841), 그란시스코 몰리노,마우로 줄리아니(1781~1829),니콜로 파가니니,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플레이엘,레오나르도 칼, 요한 네포무크 훔멜, 스페인의 미겔 가르시아, 페데리코 모레티, 페르난도 소르(1778~1839), 디오니시오 아구아도(1784~1849), 독일의 하인리히 힘멜등이었고 그밖에 스스로 기타아를 연주했으며 조금이라도 작품을 남겨놓고 있는 작곡가로는 베버(1786~1826),슈베르트(1791~1828)등이 있다. 이 가운데 이른바 표현파를 대표했던 스페인의 소르와 아구아도, 이탈리아의 줄리아니의 활약은 특히 중요했다.
이들 세사람을 간단히 살펴보면 이들 세사람중 가장 불행했던 소르는 기타아로 대위법을 구분했다는 점이다. 4성의 다성음악은 모든 파트를 상쾌한 흐름으로 울려준다. 아구아도는 작품수가 적으며 고전보수적이다. 손톱주법의 창시자였으므로 매우 섬세하고 정밀하며 흥미롭다. 그 무렵 줄리아니가 이탈리아에 나타나 기타아 음악을 꽃피웠다. 자신의 성격처럼 줄리아니의 작품은 매우 강열하며 외향적인 개성이 깃들어 있다. 독측하고 아름다운 가락은 누구도 흉내낼수 없고 작곡 기법도 고전파로서 완벽함을 지녔으며 직선적인 결단력을 지녔다. 이들 작곡가들에 의하여 꽃을 피우려던 기타아는 여러분도 잘 알겠지만 음량이 작다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인하여 그랜드 피아노와 확장된 오케스트라의 음악에 이겨내지 못하고 제2의 침체기를 맞이하기 이르렀다.
19세기 후반 낭만파가 쇠퇴할 무렵 기타아는 거리의 악사들이나 천한 사람들에 맞겨지게 되었다. 기타아의 고장 스페인에서 조차도 떠돌이 짚시나 거리악사, 농부들만이 기타아를 만졌다. 기타아 리스트가 유명해 질수 있는길은 술집외에는 없었다. 기타아의 이런 서글픈 벽을 무너뜨린 은인이 19세기 말에 나타났다. 바로 근대 기타아의 아버지 스페인의 사람 프란시스코 타레가 (1852~1909)이다. 그는 기타아를 콘서트악기로 부활시키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끊임없는 테크닉의 연주로 아포얀도(APOYANDO)주법을 개발하여 큰 음량을 얻었다. 그의 기타아 오리지널 작품들은 좀더 넓고 형시과 내용의 아름다움을 지녔으며 기타아라는 악기의 기능과 성격에 본질적으로 결부되어있다. 그리고 바하,베토벤,쇼팽을 비롯하여 고금의 작곡가들의 명제자 미겔 리오베트(1878~1938),에밀리오 푸홀(1886~1980),다니엘 포르테아는 근대와 현대를 잇는 가교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나 기타아는 그때까지도 기타아는 작은 음량과 인식부족으로 인하여 보급되지 않아 살롱음악에 불과하였다. 타레가와 그 제자들이 발전시킨 것 이상으로 더 나갈수 없다고 생각했다.
플라멩꼬
플라멩꼬는 '플랑드르 지방의'라는 뜻의 형용사이다. 플라멩꼬의 역사는 일찌기 스페인에 살게 된 동부지중해의 이민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 뒤에도 오랫동안 무어인의 지배하에 있다가 현재의 짚시(여기서 말하는 짚시는 원래 인도에서 온 사람들이다)들이 동양적인 맛을 보충하여 오늘에 존재하는 기본 형식의 틀을 마련 하였다. 현재의 형태와 같은 근대 플라멩꼬는 1800~1850년의 것으로서 오늘날과 같은 기타 반주가 아닌 "손뼉치기"만의 반주로 이루어 졌었다. 플라멩꼬에서는 주위에 들어선 관객들이 연주자에게 정열적인 혼호로써 기분을 돋구어 준다.
이 음악의 최고 연주자들은 마땅히 집시들이다. 특히, "Conte jondo"에 있어서도 절대적이다.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플라멩꼬의 원산지는 전통적인 춤과 노래의 현존지인 세비야냐드와 캐디즈가 위치한 스페인 남부 안다루샤 지방인 것이다. 세비야냐(Sevillana)의 봅 축제 때에 캐스타넷츠의 리듬에 맞추어 밤낮으로 춤을 추는 세비아냐는 쾌활한 3박자로서 캐디즈의 카페에서 생겨난 알레그리아스(Alegrias 환희라는 이름의 Rhythmic한 춤)의 생동감과 비길만하다. 자파티도(Zapateado 발뒷꿈치로 장단을 맞추며 추는 3-4박자의 스페인 독무)는 전문기교를 요하는 남성 독무였으나 오늘날에는 여성 무용수들도 이 춤을 춘다. 이 춤의 복장은 꼭 죄는 바지와 헐렁한 셔츠위에 조끼를 입고 윗부분이 평평한 안달루샤식의 모자를 쓰도록 되어 있다. 껑충껑충 뒤기도 하고 뱅글뱅글 도는 동작과 낙하동작 등의 남성적인 정열의 무용인 화루카(Farruca Galicia인이나 Austria인의 춤)는 서서히 속도를 낮추어 돌다가 매혹적으로 죽음과도 같은 정적의 정지동작에 이른다. 이 모든 춤들의 기분이 기타의 음율위에서 제연되는 것이다. 플라멩꼬 노래(원래는 반주악기가 주가 되는 음악이지만)는 쾌락의 심원하고 비장한 맛을 주기도 한다. 축제 분위기가 감도는 이라는 곡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구조될 가망이 없는 살인죄의 누명으로 고발당한 억울한 사람이 비통한 노래를 부르는 동안 이때 추어지는 룸바(Rumba)와 제 2의 sevillana도 자연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비통하게 만든다. 집시의 음악은 거칠고 난폭하고 슬픈 음악이었는데 그러다가 집시음악이 독측하고 훌륭한 모습을 같추게 되었을때 집시의 오명을 씻기 위해 플라멩코라 불리워지게 되었는데 이는 플라멩꼬가 오만하고 현란한 집시들에 의해 대중앞에서 연주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워지게 된 것이다. 스페인 주점이 문을 연 1840년대에 비로소 플라멩꼬의 음악가는 직업적인 연예인이 되었으며 이 새로운 환경은 플라멩꼬의 야만적인 모습을 잃지 않은채 플라멩꼬의 지위를 높여 주었다.
플라멩꼬기타는 고전 스페인기타보다 작고 가볍기 때문에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는 주석(tinny)소리롤 들린다. 뒤판과 옆판은 자단(Resewood)대신 상나무(Cypress)로 만들어졌으며 머리부분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가볍게 만들어 진다. 또한 금속성 소리는 세휄라(Cejuela,카포타스토)를 사용하게 되면 더욱 낭랑해진다. 셀룰로이드가 발명된 이후 안달루시아의 기타는 기타를 두드리는데서 오는 중격으로부터 기타를 보호하기 위해 플라스틱 보호판(Guard plate)-클래식기타에서는 금기사항인-을 부착하게 되었다. 예 플라멩꼬음악에 있어 기타는 항상 부수적인 역할-장단을 맞추거나 노래나 리듬을 반주하는 -만을 하였다. 이후 기타는 동등한 역할로의 지위상승이 있었고 독주로까지 나서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20세기에도 계속해서 뛰어난 플라멩꼬 음악가들이 배출되었는데 그들은 플라멩꼬가 지닌 고유의 힘과 준엄함을 잃지 않은 채 기술을 향상시켜 나갔다.
첫댓글

이미 배운 내용입니다.^^
객관식 15, 주관식5문제씩 시험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