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산은 조선조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가을두(加乙頭), 잠두봉(蠶頭峰 지세가 누에의 머리와 비슷함에서 연유)이라고 불렀다.『실록』에도 세종 때 이곳이 가을두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원래 우리말의 들머리 즉 머리를 높이 든 형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잠두봉은 양화진의 동쪽 언덕에 있었는데도 이 양화진 나루터에는 한강을 통해서 각 지방에서 조세곡 수송선과 어물,채소 등을 실은 배가 드나들었다.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배는 최고의 교통수단이었고, 또한 양화진 주변은 잠두봉과 어울려 이름난 승경으로 많은 풍류객과 문인들이 뱃놀이를 즐기면서 시를 지었던 풍광이 수려한 곳이었다. 이곳이 병인년(1866년) 천주교 박해(병인박해)로 수 많은 신자들이 목이 잘리어 숨진 뒤 절두산(切頭山 : 머리가 잘림)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로 로즈 제독이 프랑스 함대를 이끌고 1866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침입을 하였는데, 당시 조선은 신앙의 자유는 없었지만 프랑스에서 입국한 선교사들에 의해 천주교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자들은 교통과 군사의 주요한 땅인 양화진이 서양의 세력에 의해 더렵혀진 것이 천주교인들 때문이니 천주교인들의 피로써 오욕을 씻고자 이곳을 천주교인들의 사형 집행지로 택하였다.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 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절두산에서의 기록에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일가족을, 그 해 10월 22일 부인 김억분, 아들 이붕익과 함께 참수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일가를 비롯한 30명 남짓 외에는 전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1996년 병인박해 1백주년을 기념해 그 옛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을 떨구었던 바로 그 자리에 순교 기념관이 세워졌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돼있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박물관을 건립하면서 순례성당을 함께 세웠고, 성당 지하실에는 성인 28위의 유해를 모신 성해실이 마련되어 있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 오후 3시에 순례자 미사가 봉헌 되고 있어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순교자들의 영성을 본받으며 스스로를 새롭게 쇄신해 가는 하느님과 순례자들과의 만남의 성전이다. 또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등이 마련돼 있기도 하다. 특히 순례자들은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가눌 길이 없다. 절두산 성지는 이제 한국 성지의 가장 대표적인 성지로 인식되고 있다. 지하철을 이용해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지리적인 요건과 절두산 성당의 조형예술로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자리잡고 있다.
▒ 피 한 점 찍어 (절두산에서) <김영수> ▒
땅 기울며 하늘 뜨던 절두산 아래에는 강이 흐릅니다 벼랑에 부딪쳐서는 나의 뉘우침이 되고 벼랑과 헤어지면서는 나의 기도가 되는 긴 긴 가을강이 흐릅니라 피로써 씨 뿌려야 생명 거두는 것입니까 마침내 평화 흐르는 언덕 허무의 세상에서 모질게도 아파하는 사람들이 거기 그리움에다 손을 담그고 순결한 사랑 꿈꾸고 있습니다 나는 물무늬마다에 이는 하늘 바라보며 흰 구름마다에 이는 하늘 바라보며 일어나 모자를 벗습니다 손 들어 하늘 아는 이들의 피 한 점 찍어 이마에 그으면 나의 세상도 햇살 내리는 강가에서 가득히 설렘으로 깨어날까요 미소 푸른 아침으로 다가올까요
최 양업 신부님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이 묻히신 곳(수리산성지)
수리산 성지는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피땀 어린 사목 활동을 폈던 최양업 신부님이 신학생으로 간택된 성소의 터전으로 최 양업 신부님의 부친 최경환(1805~1839) 성인께서 기해박해 중이던 1839년 9월 12일 옥사 순교하신 후에 묻히신 유서 깊은 곳이다. 서울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안양 수리산은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해 왔다 해서 ‘담배 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고도 불리었던 곳으로 깊은 골짜기가 많아 박해 시대 때 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왔다. 수리산 속에 있었던 '뒷듬이' 마을은 푸른 소나무 숲 속에 숨겨진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은 땅이 척박하였으므로 담배밭을 일구고, 옹기장사를 하며 살아가던 작은 마을이었지만, 기해박해(1839년) 때 천주교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오랫동안 교우촌으로 이어져왔다. 천주교도들이 조정의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이곳에 정착 이주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하여 담배를 경작했다고 하여 담배촌이라 칭하게 되었다. 수리산은 박해 시대 때 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 왔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피땀 어린 사목 활동을 폈던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1805-1839년) 성인의 묘가 수리산 적막한 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다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해야 했던 그들 일가의 애환이 서려 있다. 최경환 성인은 본래 청양 다락골 사람이었다.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을 헤매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 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이 깊은 산 속에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하지만 기록에 보면 그는 체포라기보다는 스스로 순교의 각오로 포졸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어느 날 새벽 포졸들이 집앞에 들이닥치자 "어찌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좀 쉬었다가 떠납시다."라며 동네 사람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북돋는다. 그의 부인 이성례(李聖禮)가 차려 준 아침을 먹고 난 포졸들은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아들 희정·선정·우정·신정 그리고 젖먹이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가 옥에 가두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최씨 일가의 비극은 후손들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인다. 다섯 자식을 모두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어머니 이성례는 세 살짜리 막내가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지자 그만 실성할 지경이 되고, 네 아이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교하겠노라 말하고 네 아이를 이끌고 풀려 나온다. 하지만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이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에 다시 갇힌 몸이 된다. 4형제는 옥으로와 어머니를 목메어 부르지만 어머니는 다시 또 배교의 죄를 지을까 두려워 등을 돌린 채 자식들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어린 자식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고 그 후로 동냥한 음식을 옥에 갇힌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어 주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에는 그 부인 이성례가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를 앞두고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 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1836년 초에 15세의 장남 최양업을 천주의 종으로 바친 최경환은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우들을 돌보다가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갖은 형벌을 받으면서 40일 이상을 항구함으로 버텨냈다. 이에 형리조차 그를 바위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러나 형벌로 헤어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마침내 옥사로 순교하였으니,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최경환 회장이 순교한 뒤, 옥졸들은 그 시신을 가마니에 넣어 노고산(老姑山, 마포 노고산동의 서강대학교 뒷산) 밑에 갖다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둘째 형 최영겸(崔英謙) 부자가 그 시신을 찾아 이름을 적은 사발과 함께 그 산 중턱에 가매장하였다가, 몇 해가 지난 뒤 시신을 발굴하여 뒤뜸이 앞 수리산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최경환 회장이 1925년에 복자품에 오르게 되자 교회 당국에서는 1930년 5월에 그의 무덤을 찾아 시신을 발굴하여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하였고, 1967년에는 다시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 모셨다. 지금도 담배골에는 수십 가구의 마을이 있고 여기저기 주춧돌이 남아 있다. 최경환 성인의 묘는 바로 마을 앞 산등성이를 조금 올라가 자리 잡고 있으며, 묘소로 가는 길에는 1987년 봄 안양 시내 교우들이 세운 14처가 있다. 또 같은 해 여름에는 동굴 성모상이 축성됐다. 박해의 칼날을 피해 비밀리에 형성된 전국의 교우촌들은 영원한 본향(本鄕)인 천당길을 얻으려는 숨은 꽃(隱花)들의 보금자리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신앙을 지켰으며, 순교를 향한 오랜 고통과 세월을 참고 기다려야만 했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 본향 찾아가세. 인간 영복(永福) 다 얻어도 죽고 나면 허사되고, 세상 고난 다 받아도 죽고 나면 그만이라. 아마도 우리 낙토(樂土) 천당밖에 다시 없네.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사향가' 중에서)
그러나 그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홀연히 형성되었다가 배교자나 포졸들의 눈에 띄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 우리 교우촌이었다. 다행인 것은 현재까지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곳곳에 남아 있고, 신앙 후손들에게 그 신심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 순교자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 회장, 기해박해 때 옥사)
일명 영환(永煥), 영눌(永訥), 치운이라 한다. 우리 나라의 두 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의 아버지이다. 충청도 홍주(洪州) 땅 누곡(樓谷,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부친 최인주(崔仁住)와 모친 경주이씨(慶州李氏)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내포(內浦)지방의 사도' 이존창(李尊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와 혼인한 뒤, 가 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의 벙거지골(笠洞) 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박해와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星), 경기도 부평 (富平)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현재의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수리산)에 정착하였다. 여기에서 회장으로 신자들과 교우촌을 돌보며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 (토마스)를 모방(Maubant, 羅)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에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불안해하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마을 교우와 일가 등 40여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하루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하며 태장 340도, 곤 장 1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모진 형벌로 전신이 헤어진 프란치스코는 말하기를 "내 평생 소원이 칼 아래서 주를 증거하는 것이었 는데, 이렇게 죽는 것이 주님의 명이니, 뜻을 이루지는 못하게 되었다" 하고는 거룩한 영혼을 천주께 바쳤다. 9월11일에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 그 이튿날인 9월 12일 포청옥에서 장렬히 순교하였다. 1925년에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한국 천주교 200 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에 성인 (聖人)의 반열에 올랐다.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 내에 성소가 더 많이 증가하도록 빌어 주소서.
성 서 루도비코(볼리외) 신부가 숨었던 굴아위 동굴(둔토리성지)
둔토리 성지는 1886년 병인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서 루도비코(볼리외) 신부가 박해를 피해 숨었던 굴아위 동굴이 있는 곳이다. 성남시의 국사봉 등성이에 위치한 이 굴아위 동굴은 사람 8명 정도가 쭈그리고 앉아 있을 만한 크기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 중 가장 어린 나이인 26세(1886년)에 치명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서 루도비코 신부가 은신해 있으면서 순교의 영광된 길을 기다렸던 곳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와 의왕시를 잇는 342번 지방도 중간쯤에서 위로 올라가 서울 외곽 순환 고속 국도 밑의 터널을 지나 국사봉 등성이를 오르면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서 루도비코(볼리외, Beaulieu) 신부가 박해를 피해 숨었던 동굴이 나온다.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 중에 가장 어린 나이인 26세에 혹독한 박해의 칼날에 목을 떨군 성 볼리외 신부가 은신해 있던 이 동굴에는 박해의 퍼런 서슬에 맞서 오로지 복음 선포를 위해 낮선 이국 땅에서 숨죽이고 지내야 했던 짧은 삶, 그러나 뜨거운 신앙의 열정으로 불탔던 성인 신부의 자취가 서려 있다. 조선 땅에 발을 들인 지 겨우 9개월, 그 짧은 시간을 위해 그는 고국인 프랑스에서 이곳 조선까지 무려 10개월의 여정을 멀다 않고 찾아왔다. 그렇게 어렵사리 도착한 조선 땅에서 그는 행여 누가 볼세라 상복 차림으로 산과 들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박해의 그늘 아래 숨어 있던 교우들을 찾아 헤매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는 관헌에게 붙잡혀 새남터에서 세 차례에 걸친 회광이의 칼부림 끝에 장엄하게 순교했던 것이다. 1840년 프랑스 보르도 교구의 랑공(Langon)에서 태어난 그는 1857년 보르도 신학교에 입학해 1862년 부제품을 받은 후 이듬해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했고 1864년 사제품을 받음과 동시에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다. 그 해 7월 프랑스를 출발한 볼리외 신부는 다음해 5월 27일 열 달이 넘는 긴 여행 끝에 비로소 조선 땅에 도착한다. 조선말을 배우기 위해 한양에서 몇 십리 떨어진 조그만 교우촌에 머물러 있던 볼리외 신부는 병인박해가 시작되던 1866년 2월 성무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조선말에 능숙해 있었다. 이에 따라 베르뇌 주교는 그에게 한양에서 동남쪽으로 수십리 떨어진 경기도 광주(廣州) 지방을 임지로 맡긴다. 볼리외 신부가 짐을 꾸려 막 임지로 떠나려 할 무렵, 한양으로부터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당도하고 그는 있던 집을 떠나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씨성을 지닌 다른 교우의 집으로 몸을 피한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볼리외 신부는 묘르니(卯論里 : 현 성남시 운중동) 동네에 머물면 교우들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산넘어 청계산 중터, 둔토리(屯土里)굴아위 동굴속에 자진하여 들어가 숨어 지내면서 밤이면 교우들을 찾아가서 전교하였다. 같은해 2월 27일 새벽, 세례 받은 지 얼마 안 된 한 교우 장제철의 밀고로 한 무리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에서 시오리 떨어진 용인 땅 손골(孫谷)에서 뒤이어 붙잡힌 도리(Dorie 김신부 • 헨리꼬) 신부와 함께 이튿날인 28일 한양으로 압송된다. 양손이 붉은 줄로 가슴 위에 묶이고 머리에는 중죄인이 쓰는 모자를 쓴 두 신부는 들것에 실려 바야흐로 순교의 영광된 길을 떠난 것이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드러내며 혹독한 고문을 당한 볼리외 신부는 결국 3월 7일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도리 신부와 함께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 나갔다. 세 번째 칼날에 그의 목은 떨어지고 머리는 사흘 동안 그곳에 높이 달려 효수(梟首)되었다가 몇몇 교우들이 시신을 거두어 왜고개로 옮겼다. 스물여섯의 꽃 같은 나이에 순교한 그는 1968년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고 이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려졌다. 성인품에 오른 뒤 성인의 유해는 현재 절두산에 안치되어 있으며, 둔토리 성지는 분당 마태오 본당에 서 관리하고 있다. 박해의 퍼런 서슬에 맞서 오로지 복음 선포를 위해 낯선 이국땅에서 숨죽이고 지내야 했던 짧은 삶이었으나 뜨거운 신앙의 열정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성인 서 루도비코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이곳은 앞으로 성인의 신앙과 행적을 순례객들에게 느끼게 할 수 있는 성지가 되기 위한 노력이 요구된다. 현재 그린밸트인 관계로 성지조성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 순교자
◆ 성 서 루도비코 볼리외 (Beaulieu) 신부(1840-1866)
한국 이름은 서몰례(徐沒禮),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서 신부는 1840년 프랑스 '보르도' 교구에서 태어나 1864년 파리 외방전교회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에 백, 김, 민 세 신부와 함께 충청도 내포에 도착 입국하였다. 그는 고백을 들을 만큼 한국말을 배운 후 공주 지방 전교를 맡게 되었으나 임지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펴볼 겨를도 없이 박해를 맞았다. 서 신부는 장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 교우집에 피해 있었으나 2월 27일 포졸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에도 고통을 감수하였고 한국말이 서툴다는 핑계로 여러 질문에 일절 대답을 회피하였다. 마침내 3월 7일 서 신부는 장 주교를 선두로 동료인 백, 김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되니 그 때 나이 26세였다.
○ 성 서 루드비코 볼리외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에 있는 모든 외국인 성직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서 루드비코 볼리외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부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전교 유적지-성 도리 헨리꼬 신부님이 체포된 곳(손골성지)
수원시 북쪽에 솟아 있는 광교산 동쪽 깊은 골짜기 안에 위치한 손골 성지는 옛부터 향기로운 풀이 많고 난초가 무성했던 곳으로 '향기로운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손곡(蓀谷)의 형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이룩한 교우촌으로 병인박해(1866) 때에는 10여호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손골은 주민들 사이에서 신자들의 부락 '성교촌'이라 불리어 오는데 특히 이요한, 그의 아들 베드로, 손자 프란치스코 삼대가 손골에서 살던 중 병인박해시 피신하여 신미년(1871년 3월 16일)에 순교하였다 한다(치명일기). 손골은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전교 유적지로서 특별히 성 도리 헨리꼬 신부님께서 조선에 입국하여(1865) 선교하시다가 포졸들에게 직접 체포되신(1866) 곳이다. 이곳은 1857년 페롱 신부,1861년 조안노 칼레 신부, 1863년 오 오매트로 신부 등이 입국하여 활동하던 곳이고, 조선 제4대 교구장인 장 베르뇌 시므온 주교도 방문(1861, 1863)했던 곳으로 신앙의 전통이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성지이다. 손골 성지는 파티마의성모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관리하고 있다. 이 수녀회는 1969년 3월21일(예수 수난 주일) 이우철 시몬 신부가 창설한 방인 수녀회이다.
■ 순교자
◆ 성 김 헨리꼬 도리(Dorie, Pierre Henri) 신부(1839-1866)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뤼송 교구 탈몽에 속하는 생 틸레르 드 탈몽의 작은 바닷가 어촌에서 팔남 매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가난하게 생활하셨지만 신앙이 굳건했고 성 김(도리)헨리꼬 신부 또한 그러한 가정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던 중 뤼송 대신학교에 들어가 소품을 받고 파리 외방 선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차부제품, 부제품을 거쳐 1864년 5월 21일 사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그는 역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받은 백(브레트니에르)위스또 신부, 서(볼리외)루 도비꼬 신부, 민(위앵 마르틴)루까 신부와 같이 그해 7월 15일 마르세이유를 출발하여 9월 중순 홍콩에 도착하였으며 이어 상해를 거쳐 11월 요동지방에 대기하며 조선입국의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다. 다음해(1865년) 4월 17일 동료선교사 3명의 신부와 같이 차쿠를 떠나 백령도를 거쳐 5월 27일 내포에 상륙할 수 있었다. 위앵 신부만 내포에 남고 나머지 3명의 신부는 서울로 올라와 우선 말을 배우기 위해 서울에서 가까운 교우촌으로 보내졌는데 성 김(도리)헨리꼬 신부는 용인의 손골리로 가게 되었다. 얼마 안가서 병인대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즉 1866년 2월 28일 배교자 이선희의 밀고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도청에서 조선에 온 경위와 체류에 대해 설명, 심문을 받은 후 3월 7일 장(베르뇌)시므온 주교와 백(브레트니에르)위스또 신부, 서(볼리외) 루도비꼬 신부와 같이 군문효수형을 받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였 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한국의 103위 순교성 인 대열에 들었으며 유해는 절두산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으나 그중 일부를 분배받아 손골성지에 모셔 안치하고 있다.
○ 성 헨리코 도리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헨리코 도리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의 모든 신학생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박해 초기부터 약 350여분의 순교자들의 피가 흐르던 수구문 (남한산성성지)
남한산성은 천주교의 박해가 일어난 시초부터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이곳에 끌려와 순교를 하신 곳이다. 한국 초대교회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인 신해박해(1791)와 신유박해(1801) 때 많은 분들이 잡혀 있었던 기록이 있으며, 병자호란(1636년) 이후 처형터가 있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당시 광주 일원, 양주, 용인, 이천 등에서 잡혀 온 무명 교우 약 300분이 참수, 교수, 장타, 도모지법 등의 방법으로 치명, 순교하셨으며, 순교자들의 시신은 남한산성의 물이 나가던 수구문을 통해 버려졌다. 이곳의 첫 번째 애환은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양이 위태롭게 되자 인조가 세자와 백관들을 대동하고 피난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인조는 이곳에서 40여 일을 수성하였지만, 모든 사정이 악화되자 결국 이듬해 1월 30일 백관과 군사들의 호곡 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성문을 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와 굴욕의 맹약을 맺은 삼전도에 세워진 청나라 태종의 송덕비를 가리켜 '치욕의 비' 또는 '한(汗)의 비'라 불렀으니, 이것은 곧 '호국의 몸부림'이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39년의 박해 때 남한산성에서는 두 번째 애환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호교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 몸부림은 천상의 승리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신앙인들의 노래는 훗날까지도 이어져 남한산성 한 모퉁이를 치명터로 만들었다. 당시 이곳이 치명터가 된 이유는, 1626년에 산성리가 형성되고 1795년부터 광주 유수가 성안에 거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광주 일대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모든 부귀와 육신의 고통을 버려야만 했다. 남한산성에서 맨 먼저 호교의 노래를 부른 이는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다가 1801년에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된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다. 그 뒤를 이어 광주의 거북뫼 곧 구산(현 하남시 망월동) 출신인 김만집(金萬集, 아우구스티노)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2년 초에 남한산성 옥중에서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순교하였다. 한편 김만집의 형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은 이때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며, 셋째인 김문집(金文集, 베드로)은 김만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되었다. 이곳 남한산성에서 다시 순교자가 탄생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였다. 바로 그 해 겨울 이천 단내(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거주하던 정은(바오로)도 63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재종손 정 베드로와 함께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의 광주 유수가 그들에게 내린 사형은 일명 도배형 또는 도모지(塗貌紙)라고 부르던 백지사(白紙死)였다. 이 형벌은 먼저 팔과 양다리를 뒤로 하여 나무에 결박하고, 여기에 풀어헤친 상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뿌리고 창호지를 한 장씩 겹쳐 나감으로써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순교한 정은의 시신은 동문 밖에 짐승의 먹이로 버려졌다가 가족들에 의해 어렵게 거두어져 단내에 안장되었다. 박해자의 손길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던 구산에 뻗혔다.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 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그와 함께 체포된 김씨 집안의 신자들은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인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경희의 5남이자 성희의 양자인 교익(토마스), 경희의 6촌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는데, 이중에서 김교익만이 안면 있는 포교의 도움으로 생환하였을 뿐 모두 순교하였다. 결국 구산의 순교자는 김성우 성인을 비롯하여 모두 7명이 된 셈이다.
▒ 나의 작은 잔에도 (남한산성 동문에서) <김영수> ▒
슬픔으로 맑게 무너지다 기도로 뜨거이 일어서는 남한산성 여기 동문에서는 물소리 풀향내 가득합니라 알뜰히도 부서져 아득히 던져진 곳 그렇다면 부서져야 하늘 만날 수 있는 것입니까 바람 밝게 흔들릴수록 눈물 희게 빛나는 골짜기엔 흰 구름들 팽팽히 걸려들고 나의 작은 잔에도 죽음 밝게 차오르고 있습니다 수구문(水口門) 커다란 바위들에는 위대한 약속 새겨져 있고 바위들 적시며 흐르는 물에는 영원에 이르는 아픔 보입니다 정녕 나의 슬픔에도 피 어린 기도 스밀 수 있을까요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인 천진암 성지
천진암 성지는 1779년-1784년까지 이벽, 이승훈, 권일신, 정약종, 권철신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들께서 선교사 없이 학문적 지식의 수준에 있던 천학(天學) 을 자발적인 진리 탐구를 위한 6, 7년간의 강학회(講學會)를 통하여 종교적인 신앙의 차원인 천주교회로 승화, 발전시키고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시작한 한국천주교 발상지이다. 또한 이 성지에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성업을 이루신 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 5위 묘가 모셔져 있고, 조선교구 설립자 묘역에는 정하상, 유진길 및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의 직계 가족인 정약전, 정지해, 이석 등 선인들의 묘가 안장되어 있다. 천진암 성지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께서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신,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한국천주교 발상지일뿐더러, 음력 주일 제정과 실천으로 국내에서는 최초로 근로자들의 정기적인 휴식을 겸한 경신예절과 사회계급타파, 남녀평등 실천 등이 교회창립과 더불어 시작되어, 훗날 민족개화와 조국근대화 및 조선 사회개혁 운동의 싹이 트기 시작한, 온 겨레의 정신문화 성지이기도 하다. 천진암은 본래 단군영정 천진을 모시고 산제사, 당산제, 산신제 등을 올리던 천진각 혹은 천진당이라는 작은 초가 당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며, 훗날 천진암이 되어, 1779년을 전후하여 폐찰이 되었었으니, 정약용 선생의 글에, "천진암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하나도 없다" 하였고, 1797년 정사년 당시 홍경모의 남한지에서는, "천진암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사옹원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사찰로서의 기능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성 다블뤼 주교는 1850년 경, 젊은 선비들과 함께 이벽 성조께서 강학을 하던 곳은 쓰지 않는 폐찰이었다고 하였다. 1779년 당시 이벽 성조 26세, 정약용 17세, 정약종 19세, 정약전 21세, 이승훈 22세, 이총억 15세, 권철신 44세, 등 주로 10代와 20대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이상한 천주교 책을 읽고 실천하는 일을 일반 유교 서당에서나 정상적인 사찰에서, 또는 일반 가정에서는 하기 어려우므로, 다블뤼 주교의 기록대로, 폐찰이 된 천진암에서는 여럿이 모여 함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니, 천진암은 바로 유불천이 합류한 곳이고, 조선 천주교회가 시작된 한국천주교 발상지이다. 그런데 정약용 선생은 종종 [천진암]에서 [菴] 자를 빼고 그냥 "天眞"이라고만 부르기도 하였다. 이곳은 1970년대에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1979년에는 경기도 포천에서 이벽의 유해가 이장되었다. 이어 1981년에는 화성군 반월면에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유해가, 인천 만수동에서 이승훈의 유해가, 대감마을 뒷편의 효자봉 자락에서 권철신, 권일신의 유해가 각각 천진암으로 이장되었으며, 1981년 12월에는 경기도 광주 배알미리(현 하남시)에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인의 유해가 간신히 수습되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성지에 한국의 민족종교들과 유교, 불교, 천주교 등의 건축미 일부씩을 참고하면서 한민족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을 세우고 있다. 천년세월을 두고 한겨레의 정신적 기둥이 될 이 대성당 건립에 정권을 초월하여 각계 각층에서, 온 겨레가 자자손손이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함께 모으며, 다같이 정성을 바쳐야 하겠다. 또한 중앙정부를 비롯한 지방자치단체들과 모든 기관들도 행정적으로뿐 아니라 물심양면으로 이 거룩한 사업에 한 몫을 해야 할 것이다.
▒ 허망의 잠을 깨며 (천진암에서) <김영수> ▒
꿈 깊어야 향내 맡을 수 있는 것입니까 목숨 걸어 대지 밝히며 골짜기 거느리는 이들 노래 나는 사랑이 부족해서 낮에도 아프게 기우는 별 하나 봅니다 가슴 안으로 파아란 선 예리하게 그어질 때 나는 비로소 허망의 잠을 깨며 천진암의 샘물에 닿습니다 추억과 꿈 속에 도는 비밀 문득 눈 뜨고 다가오는 물소리 나는 높이 오르는 바람 하나 타고 절벽 위 숨은 꽃잎 하나 흔들다 이곳 골짜기 묘지들 위로 한 올 햇살 되어 떨어질 수 있을까요 부활처럼 흰 구름 속으로 아득히 스며들 수 있을까요
천주교 도입기부터 유서 깊은 사적지이며 순교 성지(양근성지)
신앙 선조들의 순교 기록에 보이는 ‘양근’이라는 지명은 대체로, 초기 한국 천주교회 지도자 권철신(權哲身,암브로시오,1736~1801), 권일신(權日身,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42~1792) 형제의 고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는 양평군이다. 권일신의 친아들로 권철신의 양자가 되었었고, 순교한 권상문(權相問,세바스티아노,1769~1802)의 고향이기도 하다. 우리측 기록에 보면 권상문이 ‘양근 한강포’출신으로 되어 있기도 하고, 서양 기록에는 권씨들이 ‘한감개(Han-Kam-Kai)'에 살았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들은 한강개 즉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 태어나 살았던 것이다. 이 곳에 전국각지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 문하에 모여들 정도로 권철신이 당대 최고의 학자 중의 하나였으므로, 권철신, 권일신 형제의 영향으로 많은 천주교 신자가 배출되었다. (뒤에서 언급할)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 전라도 완주의 유항검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아울러 이 곳은 1801년 신유(辛酉) 박해 때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1760~1795), 윤유오(尹有五, 야고보,?~1801)와 그들의 사촌 누이 윤점혜(尹點惠, 아가타, ?~1801), 윤운혜(尹雲惠, 마르타, ?~1801) 자매 등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애초에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점들에서 태어났는데, 그리 멀지 않은 양근 한강개로 이사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권철신의 이웃에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웃인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간 윤유일은 학문을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스승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기에 이른다. 영세 후 그는 조선 신자 대표로 북경(北京)을 방문하여 1790년 북당(北堂)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이어서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후 선교사를 맞아들이는 일에 매진하다가 5년 만인 1795년 드디어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려 하다가 그해에 순교를 당하게 된다.
윤유일의 순교 이후에도 신앙 생활을 굳건히 하던 윤유오와 사촌동생 윤점혜, 윤운혜도 결국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 특히 언니 윤점혜는 최초의 여회장인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1760~1801)을 도와 여성 신자들의 교육에 힘썼었을 뿐만 아니라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윤운혜는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 ?~1801)와 혼인하여 교리서와 성물을 보급하는 데에 앞장섰던 최초의 양반 부부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1785년 봄에 일어난 명례방 사건으로 신앙 공동체가 와해되고, 교회 지도층에서 다시 재건을 꾀하기 시작한 것은 1786년부터였다. 이때 그들은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수립하였고, 이승훈을 비롯하여 다른 10명의 신자들은 신부로 임명되어 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788년 무렵에 류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이 그 오류를 지적하여 성사 집전이 중단되고, 이어 북경에서 성직자를 영입해 와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면서 고난의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로 선발된 사람이 바로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이었다. ‘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楊根)의 '한강개'(漢江浦, 지금의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곳은 바로 그의 스승이자 이벽과 정약용, 홍낙민(洪樂敏, 루가), 류항검,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녹암(鹿庵)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의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고향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녹암계(鹿庵系) 인물들이 모여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토론하던 마을이었으니, 1784년에 이벽이 이승훈에게 받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찾아간 곳이 바로 여기였다. 이에 앞서 녹암계 인물들이 권철신, 이벽과 함께 강학(講學)을 하던 곳은 한강개 뒤편에 위치한 앵자봉 자락의 주어사(走魚寺)와 천진암(天眞庵)이었다. 양근 권씨 집안의 제자였던 이존창과 류항검은 이후 자신들의 고향인 '여사울'(餘村, 현 충남 예산군 신종면 신암리)과 '초남'(草南, 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을 중심으로 각각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이존창은 내포(內浦)의 사도로, 류항검은 전라도의 사도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한강개 마을에서 비롯된 천주교 신앙이 수표교와 명례방에 이어 여사울과 초남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양근은 주문모 신부님을 모셔오기 위하여 두 차례나 북경에 밀사로 다녀온 윤유일(바오로)과 그 동생 윤유오(야고보)와 4촌 여동생 윤점혜(아가다), 윤운혜(마르타)와 유한숙, 권상문(세바스티아노), 김일호, 이 아가다, 그리고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 등이 태어나거나 살다가 체포되어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곳이다. 그 중 윤유일, 윤유오, 윤점혜, 윤운혜, 권상문 등은 현재 시복 추진중인 분들이다. 윤유일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밀사였다. 이후 윤유일은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에 걸쳐 북경을 다녀왔으며, 1789년에는 라자로회의 북당 선교 단장인 로(Raux, 羅黃祥) 신부에게 조건 세례를 받고, 남당(南堂)에 있던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를 만나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어 1790년에는 다시 구베아 주교를 만나 성직자 파견을 약속받고 귀국하였다. 또한 성녀 조증이(발바라)는 양근 조동성 집안 출신으로 남이관 성인의 아내, 유방제 신부의 복사로 치도곤 합 150도를 맞고 옥에 갇힌지 6개월 후 11월 14일 순교하였다. 윤점혜 아가다는 윤유일의 4촌 여동생으로 천주교를 신앙하기 위해 처녀의 몸으로 밤에 몰래 서울로 도망쳐와 강완숙의 집에 머물며 동정녀 소공동체를 만들고 동정녀들을 지도하였고, 고향 양근으로 이송되어 참수할 때 목에서 흰피가 나왔다고 한다. 그 동생 윤운혜 마르타는 순교자 정광수와 결혼한뒤 서울로 이사하여 자기 집에 공소를 마련하고 주문모 신부님을 모셔다가 미사를 드리며 성물을 만들어 신자들에게 보급하다가 1801년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권철신의 양아들(권일신의 아들)로 처음 양근 옥에 갇혀 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 당하였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음으로 양근으로 이송되어 1801년 12월 27일 23세로 순교하였다.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는 1801년에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전주 중바위 성지 참조)와 쌍벽을 이루는 분들이다. 이 동정 부부는 모두 양근 출신으로 조숙은 조동성 유스티아노의 친척이고, 권 데레사는 권일신의 딸이다. 이들 두 동정 부부는 1819년 5월 21일 참수로 순교하였다. 권 데레사의 머리를 찾아다가 성녀 조증이 발바라의 집 대바구니에 담아 두었는데, 그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달레는 전하고 있다. 이처럼 양근 성지는 순교 성인의 탄생지이고, 순교자들의 피로 신앙이 뿌려진 곳이고, 윤점혜 아가다를 통하여 한국 교회의 수도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 벌 수 있고,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를 통하여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의 모습을 본 받을 수 있는 곳이다. 2004년 6월 이 곳을 방문하였을 때는 권철신의 방계 후손인 권일수(요셉) 신부가 성지 개발을 전담하고 있었다. 권철신의 생가터인 대감마을과 주어사를 포함한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이면서 순교지인 이곳을 종합 개발하려는 전담신부의 외로운 노력에 많은 교우들의 동참이 절실하게 보였다.
전통적 신앙 공통체의 모습이 남아 있는 성 김성우 안토니오의 고향(구산성지)
구산 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여덟 분의 순교자가 묻히신 거룩한 성지이다. 이곳 뒷산이 거북 형상을 닮았다 하여 거북 구(龜)자와 뫼 산(山)자를 써서 구산 이라고 하였다. 구산은 한강변 미사리 조정 경기장 옆에 위치해 있으며, 순교자들의 숨결이 200여 년 동안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곳이다.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 위치한 구산 마을은 먼저 103위 성인 중 71번째 성인인 김성우(안토니오)를 비롯해 박해 시대에 많은 치명자가 탄생한 유서 깊은 사적지라는데서 그 교회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모방 신부가 방문한 공소 중에서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이곳은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의 고향으로, 그는 1830년경에 셋째 아우인 윤심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때 둘째 아우 덕심(아우구스티노)은 입교를 망설이던 끝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 후 3형제의 신앙 실천과 전교 활동은 실로 눈부셨으니, 얼마 안되어 구산 마을 전체는 하나의 교우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김성우는 3년 뒤인 1833년에 유방제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어의동, 즉 서울 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동대문 밖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서울 마장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구산으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을 마련하고, 1836년 여름에는 모방 신부를 모셔와 성사를 받았다. 이때 모방 신부는 김성우의 신심을 높이 사서 이곳의 공소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39년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3월 21일(양력) 포졸들에게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약간의 돈을 주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해 말에 다시 포졸들이 들이닥쳐 집에 있던 그의 아우들과 사촌 김주집을 체포하여 광주 유수가 있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끌고 갔다. 그중 둘째인 덕심은 체포된 후 고문을 참아 받으면서 관헌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였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41년 1월 28일에 통회와 신앙심을 지닌 채 병사로 순교하였다. 반면에 셋째인 윤심과 사촌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한편 김만집의 형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은 이때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에 47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고 1925년 7월 복자위에 올랐다가 마침내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셋째인 김문집(金文集, 베드로)은 김만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되었다. 박해자의 손길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던 구산에 뻗혔다.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 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당시 김문집의 나이는 66세의 고령이었다. 그와 함께 체포된 김씨 집안의 신자들은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인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경희의 5남이자 성희의 양자인 교익(토마스), 경희의 6촌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는데, 이중에서 김교익만이 안면 있는 포교의 도움으로 생환하였을 뿐 모두 순교하였다. 결국 구산의 순교자는 김성우 성인을 비롯하여 모두 7명이 된 셈이다. 한편 가까스로 생환한 김교익은 사형이 집행된 뒤에 매일같이 형장으로 찾아가 김문집과 김성희·경희 등 3명의 시신을 찾아다 구산의 가족 묘역에 보존되어 오던 성 김성우와 김만집 형제의 무덤 옆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김차희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에 의해 거두어져 안양 수리산에 안장되었다가 실묘되었으며, 후손이 없던 김윤희의 시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순교 후 김성우 성인의 유해는 아들 김성희(암브로시오) 등에게 거두어져 고향에 안장되었으며, 1927년 5월 30일에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명동 성당을 거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현재 구산 성지에는 그의 무덤과 두 형제의 무덤, 1868년 3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김성희와 김윤심의 아들인 김경희의 무덤이 있으며, 같은 날에 순교한 김덕심의 둘째 아들 차희와 김주집의 아들 윤희의 가묘, 그리고 1867년에 포도청에서 순교한 최지현의 무덤이 있다. 구산은 성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묘소를 가족 묘지에 이장, 보존하고 있어 우리 나라에서 박해 시대의 자취가 가장 원형대로 남아 있는 곳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150여 년 동안 교회를 지키며 신앙 생활을 확고하게 지켜 가고 있는 교우촌으로 도시화로 인한 급변 속에서도 구산 마을은 한마음으로 신앙 안의 일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6.25 당시에 구산 마을은 원로 신부들의 피신처로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낮에는 곳곳에 무성한 사람 키보다 더 큰 갈대숲 사이에서 숨죽이고 엎드려 있다가 저녁에 살금살금 나와 지친 몸을 쉬었다고 한다. 현재 1백20여 세대 5백여 명의 교우들이 살고 있는 구산 마을은 급격한 도시화와 이농 현상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교회이며 순교의 얼이 살아 있는 곳이다. 길을 가다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하느님을 믿는 형제이기에 구산 마을은 이웃집 친구를 만나러 가듯 정겨운 마음으로 찾아가 볼 만한 곳이다. 구산 성지내에는 수원교회사연구소가 있어 성지와 순교자들의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 뜨거이 죽음 익히며 (구산에서) <김영수> ▒
가난한 사람이 작은 꽃잎에다 가슴 기울여 문지르는 들판에는 사라지고도 살아 있는 이 안개 속에서 눈 맑게 뜨고 있습니다 죽어서도 깨어 있는 바람 있어 꽃잎을 흔들 때마다 나는 한 자락 부끄럼으로 깊어집니다 삶이야 한 호흡일 뿐이지만 죽음은 영원한 햇살입니까 이제 나의 젊음도 용서의 물소리에 따스히 젖고 싶습니다 내가 손 뻗어 죽음에 닿으려 해도 흔히 싸늘한 삶에 이마 닿지만 나도 이제 뜨거이 죽음 익히며 슬픔 다 비워내면서 떠나면서는 뒤돌아보지 않으리이다 돌아오면서는 뒤돌아보지 않으리이다
절두산은 조선조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가을두(加乙頭), 잠두봉(蠶頭峰 지세가 누에의 머리와 비슷함에서 연유)이라고 불렀다.『실록』에도 세종 때 이곳이 가을두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원래 우리말의 들머리 즉 머리를 높이 든 형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잠두봉은 양화진의 동쪽 언덕에 있었는데도 이 양화진 나루터에는 한강을 통해서 각 지방에서 조세곡 수송선과 어물,채소 등을 실은 배가 드나들었다.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배는 최고의 교통수단이었고, 또한 양화진 주변은 잠두봉과 어울려 이름난 승경으로 많은 풍류객과 문인들이 뱃놀이를 즐기면서 시를 지었던 풍광이 수려한 곳이었다. 이곳이 병인년(1866년) 천주교 박해(병인박해)로 수 많은 신자들이 목이 잘리어 숨진 뒤 절두산(切頭山 : 머리가 잘림)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로 로즈 제독이 프랑스 함대를 이끌고 1866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침입을 하였는데, 당시 조선은 신앙의 자유는 없었지만 프랑스에서 입국한 선교사들에 의해 천주교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자들은 교통과 군사의 주요한 땅인 양화진이 서양의 세력에 의해 더렵혀진 것이 천주교인들 때문이니 천주교인들의 피로써 오욕을 씻고자 이곳을 천주교인들의 사형 집행지로 택하였다.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 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절두산에서의 기록에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일가족을, 그 해 10월 22일 부인 김억분, 아들 이붕익과 함께 참수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일가를 비롯한 30명 남짓 외에는 전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1996년 병인박해 1백주년을 기념해 그 옛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을 떨구었던 바로 그 자리에 순교 기념관이 세워졌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돼있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박물관을 건립하면서 순례성당을 함께 세웠고, 성당 지하실에는 성인 28위의 유해를 모신 성해실이 마련되어 있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 오후 3시에 순례자 미사가 봉헌 되고 있어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순교자들의 영성을 본받으며 스스로를 새롭게 쇄신해 가는 하느님과 순례자들과의 만남의 성전이다. 또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등이 마련돼 있기도 하다. 특히 순례자들은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가눌 길이 없다. 절두산 성지는 이제 한국 성지의 가장 대표적인 성지로 인식되고 있다. 지하철을 이용해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지리적인 요건과 절두산 성당의 조형예술로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자리잡고 있다.
▒ 피 한 점 찍어 (절두산에서) <김영수> ▒
땅 기울며 하늘 뜨던 절두산 아래에는 강이 흐릅니다 벼랑에 부딪쳐서는 나의 뉘우침이 되고 벼랑과 헤어지면서는 나의 기도가 되는 긴 긴 가을강이 흐릅니라 피로써 씨 뿌려야 생명 거두는 것입니까 마침내 평화 흐르는 언덕 허무의 세상에서 모질게도 아파하는 사람들이 거기 그리움에다 손을 담그고 순결한 사랑 꿈꾸고 있습니다 나는 물무늬마다에 이는 하늘 바라보며 흰 구름마다에 이는 하늘 바라보며 일어나 모자를 벗습니다 손 들어 하늘 아는 이들의 피 한 점 찍어 이마에 그으면 나의 세상도 햇살 내리는 강가에서 가득히 설렘으로 깨어날까요 미소 푸른 아침으로 다가올까요
최 양업 신부님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이 묻히신 곳(수리산성지)
수리산 성지는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피땀 어린 사목 활동을 폈던 최양업 신부님이 신학생으로 간택된 성소의 터전으로 최 양업 신부님의 부친 최경환(1805~1839) 성인께서 기해박해 중이던 1839년 9월 12일 옥사 순교하신 후에 묻히신 유서 깊은 곳이다. 서울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안양 수리산은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해 왔다 해서 ‘담배 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고도 불리었던 곳으로 깊은 골짜기가 많아 박해 시대 때 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왔다. 수리산 속에 있었던 '뒷듬이' 마을은 푸른 소나무 숲 속에 숨겨진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은 땅이 척박하였으므로 담배밭을 일구고, 옹기장사를 하며 살아가던 작은 마을이었지만, 기해박해(1839년) 때 천주교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오랫동안 교우촌으로 이어져왔다. 천주교도들이 조정의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이곳에 정착 이주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하여 담배를 경작했다고 하여 담배촌이라 칭하게 되었다. 수리산은 박해 시대 때 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 왔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피땀 어린 사목 활동을 폈던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1805-1839년) 성인의 묘가 수리산 적막한 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다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해야 했던 그들 일가의 애환이 서려 있다. 최경환 성인은 본래 청양 다락골 사람이었다.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을 헤매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 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이 깊은 산 속에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하지만 기록에 보면 그는 체포라기보다는 스스로 순교의 각오로 포졸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어느 날 새벽 포졸들이 집앞에 들이닥치자 "어찌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좀 쉬었다가 떠납시다."라며 동네 사람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북돋는다. 그의 부인 이성례(李聖禮)가 차려 준 아침을 먹고 난 포졸들은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아들 희정·선정·우정·신정 그리고 젖먹이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가 옥에 가두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최씨 일가의 비극은 후손들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인다. 다섯 자식을 모두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어머니 이성례는 세 살짜리 막내가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지자 그만 실성할 지경이 되고, 네 아이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교하겠노라 말하고 네 아이를 이끌고 풀려 나온다. 하지만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이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에 다시 갇힌 몸이 된다. 4형제는 옥으로와 어머니를 목메어 부르지만 어머니는 다시 또 배교의 죄를 지을까 두려워 등을 돌린 채 자식들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어린 자식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고 그 후로 동냥한 음식을 옥에 갇힌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어 주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에는 그 부인 이성례가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를 앞두고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 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1836년 초에 15세의 장남 최양업을 천주의 종으로 바친 최경환은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우들을 돌보다가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갖은 형벌을 받으면서 40일 이상을 항구함으로 버텨냈다. 이에 형리조차 그를 바위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러나 형벌로 헤어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마침내 옥사로 순교하였으니,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최경환 회장이 순교한 뒤, 옥졸들은 그 시신을 가마니에 넣어 노고산(老姑山, 마포 노고산동의 서강대학교 뒷산) 밑에 갖다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둘째 형 최영겸(崔英謙) 부자가 그 시신을 찾아 이름을 적은 사발과 함께 그 산 중턱에 가매장하였다가, 몇 해가 지난 뒤 시신을 발굴하여 뒤뜸이 앞 수리산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최경환 회장이 1925년에 복자품에 오르게 되자 교회 당국에서는 1930년 5월에 그의 무덤을 찾아 시신을 발굴하여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하였고, 1967년에는 다시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 모셨다. 지금도 담배골에는 수십 가구의 마을이 있고 여기저기 주춧돌이 남아 있다. 최경환 성인의 묘는 바로 마을 앞 산등성이를 조금 올라가 자리 잡고 있으며, 묘소로 가는 길에는 1987년 봄 안양 시내 교우들이 세운 14처가 있다. 또 같은 해 여름에는 동굴 성모상이 축성됐다. 박해의 칼날을 피해 비밀리에 형성된 전국의 교우촌들은 영원한 본향(本鄕)인 천당길을 얻으려는 숨은 꽃(隱花)들의 보금자리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신앙을 지켰으며, 순교를 향한 오랜 고통과 세월을 참고 기다려야만 했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 본향 찾아가세. 인간 영복(永福) 다 얻어도 죽고 나면 허사되고, 세상 고난 다 받아도 죽고 나면 그만이라. 아마도 우리 낙토(樂土) 천당밖에 다시 없네.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사향가' 중에서)
그러나 그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홀연히 형성되었다가 배교자나 포졸들의 눈에 띄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 우리 교우촌이었다. 다행인 것은 현재까지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곳곳에 남아 있고, 신앙 후손들에게 그 신심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 순교자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 회장, 기해박해 때 옥사)
일명 영환(永煥), 영눌(永訥), 치운이라 한다. 우리 나라의 두 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의 아버지이다. 충청도 홍주(洪州) 땅 누곡(樓谷,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부친 최인주(崔仁住)와 모친 경주이씨(慶州李氏)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내포(內浦)지방의 사도' 이존창(李尊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와 혼인한 뒤, 가 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의 벙거지골(笠洞) 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박해와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星), 경기도 부평 (富平)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현재의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수리산)에 정착하였다. 여기에서 회장으로 신자들과 교우촌을 돌보며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 (토마스)를 모방(Maubant, 羅)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에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불안해하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마을 교우와 일가 등 40여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하루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하며 태장 340도, 곤 장 1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모진 형벌로 전신이 헤어진 프란치스코는 말하기를 "내 평생 소원이 칼 아래서 주를 증거하는 것이었 는데, 이렇게 죽는 것이 주님의 명이니, 뜻을 이루지는 못하게 되었다" 하고는 거룩한 영혼을 천주께 바쳤다. 9월11일에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 그 이튿날인 9월 12일 포청옥에서 장렬히 순교하였다. 1925년에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한국 천주교 200 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에 성인 (聖人)의 반열에 올랐다.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 내에 성소가 더 많이 증가하도록 빌어 주소서.
성 서 루도비코(볼리외) 신부가 숨었던 굴아위 동굴(둔토리성지)
둔토리 성지는 1886년 병인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서 루도비코(볼리외) 신부가 박해를 피해 숨었던 굴아위 동굴이 있는 곳이다. 성남시의 국사봉 등성이에 위치한 이 굴아위 동굴은 사람 8명 정도가 쭈그리고 앉아 있을 만한 크기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 중 가장 어린 나이인 26세(1886년)에 치명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서 루도비코 신부가 은신해 있으면서 순교의 영광된 길을 기다렸던 곳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와 의왕시를 잇는 342번 지방도 중간쯤에서 위로 올라가 서울 외곽 순환 고속 국도 밑의 터널을 지나 국사봉 등성이를 오르면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서 루도비코(볼리외, Beaulieu) 신부가 박해를 피해 숨었던 동굴이 나온다.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 중에 가장 어린 나이인 26세에 혹독한 박해의 칼날에 목을 떨군 성 볼리외 신부가 은신해 있던 이 동굴에는 박해의 퍼런 서슬에 맞서 오로지 복음 선포를 위해 낮선 이국 땅에서 숨죽이고 지내야 했던 짧은 삶, 그러나 뜨거운 신앙의 열정으로 불탔던 성인 신부의 자취가 서려 있다. 조선 땅에 발을 들인 지 겨우 9개월, 그 짧은 시간을 위해 그는 고국인 프랑스에서 이곳 조선까지 무려 10개월의 여정을 멀다 않고 찾아왔다. 그렇게 어렵사리 도착한 조선 땅에서 그는 행여 누가 볼세라 상복 차림으로 산과 들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박해의 그늘 아래 숨어 있던 교우들을 찾아 헤매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는 관헌에게 붙잡혀 새남터에서 세 차례에 걸친 회광이의 칼부림 끝에 장엄하게 순교했던 것이다. 1840년 프랑스 보르도 교구의 랑공(Langon)에서 태어난 그는 1857년 보르도 신학교에 입학해 1862년 부제품을 받은 후 이듬해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했고 1864년 사제품을 받음과 동시에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다. 그 해 7월 프랑스를 출발한 볼리외 신부는 다음해 5월 27일 열 달이 넘는 긴 여행 끝에 비로소 조선 땅에 도착한다. 조선말을 배우기 위해 한양에서 몇 십리 떨어진 조그만 교우촌에 머물러 있던 볼리외 신부는 병인박해가 시작되던 1866년 2월 성무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조선말에 능숙해 있었다. 이에 따라 베르뇌 주교는 그에게 한양에서 동남쪽으로 수십리 떨어진 경기도 광주(廣州) 지방을 임지로 맡긴다. 볼리외 신부가 짐을 꾸려 막 임지로 떠나려 할 무렵, 한양으로부터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당도하고 그는 있던 집을 떠나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씨성을 지닌 다른 교우의 집으로 몸을 피한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볼리외 신부는 묘르니(卯論里 : 현 성남시 운중동) 동네에 머물면 교우들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산넘어 청계산 중터, 둔토리(屯土里)굴아위 동굴속에 자진하여 들어가 숨어 지내면서 밤이면 교우들을 찾아가서 전교하였다. 같은해 2월 27일 새벽, 세례 받은 지 얼마 안 된 한 교우 장제철의 밀고로 한 무리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에서 시오리 떨어진 용인 땅 손골(孫谷)에서 뒤이어 붙잡힌 도리(Dorie 김신부 • 헨리꼬) 신부와 함께 이튿날인 28일 한양으로 압송된다. 양손이 붉은 줄로 가슴 위에 묶이고 머리에는 중죄인이 쓰는 모자를 쓴 두 신부는 들것에 실려 바야흐로 순교의 영광된 길을 떠난 것이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드러내며 혹독한 고문을 당한 볼리외 신부는 결국 3월 7일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도리 신부와 함께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 나갔다. 세 번째 칼날에 그의 목은 떨어지고 머리는 사흘 동안 그곳에 높이 달려 효수(梟首)되었다가 몇몇 교우들이 시신을 거두어 왜고개로 옮겼다. 스물여섯의 꽃 같은 나이에 순교한 그는 1968년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고 이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려졌다. 성인품에 오른 뒤 성인의 유해는 현재 절두산에 안치되어 있으며, 둔토리 성지는 분당 마태오 본당에 서 관리하고 있다. 박해의 퍼런 서슬에 맞서 오로지 복음 선포를 위해 낯선 이국땅에서 숨죽이고 지내야 했던 짧은 삶이었으나 뜨거운 신앙의 열정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성인 서 루도비코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이곳은 앞으로 성인의 신앙과 행적을 순례객들에게 느끼게 할 수 있는 성지가 되기 위한 노력이 요구된다. 현재 그린밸트인 관계로 성지조성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 순교자
◆ 성 서 루도비코 볼리외 (Beaulieu) 신부(1840-1866)
한국 이름은 서몰례(徐沒禮),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서 신부는 1840년 프랑스 '보르도' 교구에서 태어나 1864년 파리 외방전교회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에 백, 김, 민 세 신부와 함께 충청도 내포에 도착 입국하였다. 그는 고백을 들을 만큼 한국말을 배운 후 공주 지방 전교를 맡게 되었으나 임지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펴볼 겨를도 없이 박해를 맞았다. 서 신부는 장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 교우집에 피해 있었으나 2월 27일 포졸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에도 고통을 감수하였고 한국말이 서툴다는 핑계로 여러 질문에 일절 대답을 회피하였다. 마침내 3월 7일 서 신부는 장 주교를 선두로 동료인 백, 김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되니 그 때 나이 26세였다.
○ 성 서 루드비코 볼리외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에 있는 모든 외국인 성직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서 루드비코 볼리외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부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전교 유적지-성 도리 헨리꼬 신부님이 체포된 곳(손골성지)
수원시 북쪽에 솟아 있는 광교산 동쪽 깊은 골짜기 안에 위치한 손골 성지는 옛부터 향기로운 풀이 많고 난초가 무성했던 곳으로 '향기로운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손곡(蓀谷)의 형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이룩한 교우촌으로 병인박해(1866) 때에는 10여호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손골은 주민들 사이에서 신자들의 부락 '성교촌'이라 불리어 오는데 특히 이요한, 그의 아들 베드로, 손자 프란치스코 삼대가 손골에서 살던 중 병인박해시 피신하여 신미년(1871년 3월 16일)에 순교하였다 한다(치명일기). 손골은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전교 유적지로서 특별히 성 도리 헨리꼬 신부님께서 조선에 입국하여(1865) 선교하시다가 포졸들에게 직접 체포되신(1866) 곳이다. 이곳은 1857년 페롱 신부,1861년 조안노 칼레 신부, 1863년 오 오매트로 신부 등이 입국하여 활동하던 곳이고, 조선 제4대 교구장인 장 베르뇌 시므온 주교도 방문(1861, 1863)했던 곳으로 신앙의 전통이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성지이다. 손골 성지는 파티마의성모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관리하고 있다. 이 수녀회는 1969년 3월21일(예수 수난 주일) 이우철 시몬 신부가 창설한 방인 수녀회이다.
■ 순교자
◆ 성 김 헨리꼬 도리(Dorie, Pierre Henri) 신부(1839-1866)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뤼송 교구 탈몽에 속하는 생 틸레르 드 탈몽의 작은 바닷가 어촌에서 팔남 매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가난하게 생활하셨지만 신앙이 굳건했고 성 김(도리)헨리꼬 신부 또한 그러한 가정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던 중 뤼송 대신학교에 들어가 소품을 받고 파리 외방 선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차부제품, 부제품을 거쳐 1864년 5월 21일 사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그는 역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받은 백(브레트니에르)위스또 신부, 서(볼리외)루 도비꼬 신부, 민(위앵 마르틴)루까 신부와 같이 그해 7월 15일 마르세이유를 출발하여 9월 중순 홍콩에 도착하였으며 이어 상해를 거쳐 11월 요동지방에 대기하며 조선입국의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다. 다음해(1865년) 4월 17일 동료선교사 3명의 신부와 같이 차쿠를 떠나 백령도를 거쳐 5월 27일 내포에 상륙할 수 있었다. 위앵 신부만 내포에 남고 나머지 3명의 신부는 서울로 올라와 우선 말을 배우기 위해 서울에서 가까운 교우촌으로 보내졌는데 성 김(도리)헨리꼬 신부는 용인의 손골리로 가게 되었다. 얼마 안가서 병인대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즉 1866년 2월 28일 배교자 이선희의 밀고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도청에서 조선에 온 경위와 체류에 대해 설명, 심문을 받은 후 3월 7일 장(베르뇌)시므온 주교와 백(브레트니에르)위스또 신부, 서(볼리외) 루도비꼬 신부와 같이 군문효수형을 받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였 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한국의 103위 순교성 인 대열에 들었으며 유해는 절두산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으나 그중 일부를 분배받아 손골성지에 모셔 안치하고 있다.
○ 성 헨리코 도리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헨리코 도리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의 모든 신학생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박해 초기부터 약 350여분의 순교자들의 피가 흐르던 수구문 (남한산성성지)
남한산성은 천주교의 박해가 일어난 시초부터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이곳에 끌려와 순교를 하신 곳이다. 한국 초대교회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인 신해박해(1791)와 신유박해(1801) 때 많은 분들이 잡혀 있었던 기록이 있으며, 병자호란(1636년) 이후 처형터가 있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당시 광주 일원, 양주, 용인, 이천 등에서 잡혀 온 무명 교우 약 300분이 참수, 교수, 장타, 도모지법 등의 방법으로 치명, 순교하셨으며, 순교자들의 시신은 남한산성의 물이 나가던 수구문을 통해 버려졌다. 이곳의 첫 번째 애환은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양이 위태롭게 되자 인조가 세자와 백관들을 대동하고 피난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인조는 이곳에서 40여 일을 수성하였지만, 모든 사정이 악화되자 결국 이듬해 1월 30일 백관과 군사들의 호곡 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성문을 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와 굴욕의 맹약을 맺은 삼전도에 세워진 청나라 태종의 송덕비를 가리켜 '치욕의 비' 또는 '한(汗)의 비'라 불렀으니, 이것은 곧 '호국의 몸부림'이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39년의 박해 때 남한산성에서는 두 번째 애환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호교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 몸부림은 천상의 승리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신앙인들의 노래는 훗날까지도 이어져 남한산성 한 모퉁이를 치명터로 만들었다. 당시 이곳이 치명터가 된 이유는, 1626년에 산성리가 형성되고 1795년부터 광주 유수가 성안에 거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광주 일대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모든 부귀와 육신의 고통을 버려야만 했다. 남한산성에서 맨 먼저 호교의 노래를 부른 이는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다가 1801년에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된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다. 그 뒤를 이어 광주의 거북뫼 곧 구산(현 하남시 망월동) 출신인 김만집(金萬集, 아우구스티노)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2년 초에 남한산성 옥중에서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순교하였다. 한편 김만집의 형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은 이때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며, 셋째인 김문집(金文集, 베드로)은 김만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되었다. 이곳 남한산성에서 다시 순교자가 탄생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였다. 바로 그 해 겨울 이천 단내(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거주하던 정은(바오로)도 63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재종손 정 베드로와 함께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의 광주 유수가 그들에게 내린 사형은 일명 도배형 또는 도모지(塗貌紙)라고 부르던 백지사(白紙死)였다. 이 형벌은 먼저 팔과 양다리를 뒤로 하여 나무에 결박하고, 여기에 풀어헤친 상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뿌리고 창호지를 한 장씩 겹쳐 나감으로써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순교한 정은의 시신은 동문 밖에 짐승의 먹이로 버려졌다가 가족들에 의해 어렵게 거두어져 단내에 안장되었다. 박해자의 손길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던 구산에 뻗혔다.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 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그와 함께 체포된 김씨 집안의 신자들은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인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경희의 5남이자 성희의 양자인 교익(토마스), 경희의 6촌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는데, 이중에서 김교익만이 안면 있는 포교의 도움으로 생환하였을 뿐 모두 순교하였다. 결국 구산의 순교자는 김성우 성인을 비롯하여 모두 7명이 된 셈이다.
▒ 나의 작은 잔에도 (남한산성 동문에서) <김영수> ▒
슬픔으로 맑게 무너지다 기도로 뜨거이 일어서는 남한산성 여기 동문에서는 물소리 풀향내 가득합니라 알뜰히도 부서져 아득히 던져진 곳 그렇다면 부서져야 하늘 만날 수 있는 것입니까 바람 밝게 흔들릴수록 눈물 희게 빛나는 골짜기엔 흰 구름들 팽팽히 걸려들고 나의 작은 잔에도 죽음 밝게 차오르고 있습니다 수구문(水口門) 커다란 바위들에는 위대한 약속 새겨져 있고 바위들 적시며 흐르는 물에는 영원에 이르는 아픔 보입니다 정녕 나의 슬픔에도 피 어린 기도 스밀 수 있을까요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인 천진암 성지
천진암 성지는 1779년-1784년까지 이벽, 이승훈, 권일신, 정약종, 권철신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들께서 선교사 없이 학문적 지식의 수준에 있던 천학(天學) 을 자발적인 진리 탐구를 위한 6, 7년간의 강학회(講學會)를 통하여 종교적인 신앙의 차원인 천주교회로 승화, 발전시키고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시작한 한국천주교 발상지이다. 또한 이 성지에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성업을 이루신 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 5위 묘가 모셔져 있고, 조선교구 설립자 묘역에는 정하상, 유진길 및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의 직계 가족인 정약전, 정지해, 이석 등 선인들의 묘가 안장되어 있다. 천진암 성지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께서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신,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한국천주교 발상지일뿐더러, 음력 주일 제정과 실천으로 국내에서는 최초로 근로자들의 정기적인 휴식을 겸한 경신예절과 사회계급타파, 남녀평등 실천 등이 교회창립과 더불어 시작되어, 훗날 민족개화와 조국근대화 및 조선 사회개혁 운동의 싹이 트기 시작한, 온 겨레의 정신문화 성지이기도 하다. 천진암은 본래 단군영정 천진을 모시고 산제사, 당산제, 산신제 등을 올리던 천진각 혹은 천진당이라는 작은 초가 당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며, 훗날 천진암이 되어, 1779년을 전후하여 폐찰이 되었었으니, 정약용 선생의 글에, "천진암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하나도 없다" 하였고, 1797년 정사년 당시 홍경모의 남한지에서는, "천진암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사옹원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사찰로서의 기능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성 다블뤼 주교는 1850년 경, 젊은 선비들과 함께 이벽 성조께서 강학을 하던 곳은 쓰지 않는 폐찰이었다고 하였다. 1779년 당시 이벽 성조 26세, 정약용 17세, 정약종 19세, 정약전 21세, 이승훈 22세, 이총억 15세, 권철신 44세, 등 주로 10代와 20대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이상한 천주교 책을 읽고 실천하는 일을 일반 유교 서당에서나 정상적인 사찰에서, 또는 일반 가정에서는 하기 어려우므로, 다블뤼 주교의 기록대로, 폐찰이 된 천진암에서는 여럿이 모여 함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니, 천진암은 바로 유불천이 합류한 곳이고, 조선 천주교회가 시작된 한국천주교 발상지이다. 그런데 정약용 선생은 종종 [천진암]에서 [菴] 자를 빼고 그냥 "天眞"이라고만 부르기도 하였다. 이곳은 1970년대에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1979년에는 경기도 포천에서 이벽의 유해가 이장되었다. 이어 1981년에는 화성군 반월면에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유해가, 인천 만수동에서 이승훈의 유해가, 대감마을 뒷편의 효자봉 자락에서 권철신, 권일신의 유해가 각각 천진암으로 이장되었으며, 1981년 12월에는 경기도 광주 배알미리(현 하남시)에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인의 유해가 간신히 수습되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성지에 한국의 민족종교들과 유교, 불교, 천주교 등의 건축미 일부씩을 참고하면서 한민족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을 세우고 있다. 천년세월을 두고 한겨레의 정신적 기둥이 될 이 대성당 건립에 정권을 초월하여 각계 각층에서, 온 겨레가 자자손손이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함께 모으며, 다같이 정성을 바쳐야 하겠다. 또한 중앙정부를 비롯한 지방자치단체들과 모든 기관들도 행정적으로뿐 아니라 물심양면으로 이 거룩한 사업에 한 몫을 해야 할 것이다.
▒ 허망의 잠을 깨며 (천진암에서) <김영수> ▒
꿈 깊어야 향내 맡을 수 있는 것입니까 목숨 걸어 대지 밝히며 골짜기 거느리는 이들 노래 나는 사랑이 부족해서 낮에도 아프게 기우는 별 하나 봅니다 가슴 안으로 파아란 선 예리하게 그어질 때 나는 비로소 허망의 잠을 깨며 천진암의 샘물에 닿습니다 추억과 꿈 속에 도는 비밀 문득 눈 뜨고 다가오는 물소리 나는 높이 오르는 바람 하나 타고 절벽 위 숨은 꽃잎 하나 흔들다 이곳 골짜기 묘지들 위로 한 올 햇살 되어 떨어질 수 있을까요 부활처럼 흰 구름 속으로 아득히 스며들 수 있을까요
천주교 도입기부터 유서 깊은 사적지이며 순교 성지(양근성지)
신앙 선조들의 순교 기록에 보이는 ‘양근’이라는 지명은 대체로, 초기 한국 천주교회 지도자 권철신(權哲身,암브로시오,1736~1801), 권일신(權日身,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42~1792) 형제의 고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는 양평군이다. 권일신의 친아들로 권철신의 양자가 되었었고, 순교한 권상문(權相問,세바스티아노,1769~1802)의 고향이기도 하다. 우리측 기록에 보면 권상문이 ‘양근 한강포’출신으로 되어 있기도 하고, 서양 기록에는 권씨들이 ‘한감개(Han-Kam-Kai)'에 살았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들은 한강개 즉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 태어나 살았던 것이다. 이 곳에 전국각지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 문하에 모여들 정도로 권철신이 당대 최고의 학자 중의 하나였으므로, 권철신, 권일신 형제의 영향으로 많은 천주교 신자가 배출되었다. (뒤에서 언급할)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 전라도 완주의 유항검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아울러 이 곳은 1801년 신유(辛酉) 박해 때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1760~1795), 윤유오(尹有五, 야고보,?~1801)와 그들의 사촌 누이 윤점혜(尹點惠, 아가타, ?~1801), 윤운혜(尹雲惠, 마르타, ?~1801) 자매 등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애초에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점들에서 태어났는데, 그리 멀지 않은 양근 한강개로 이사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권철신의 이웃에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웃인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간 윤유일은 학문을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스승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기에 이른다. 영세 후 그는 조선 신자 대표로 북경(北京)을 방문하여 1790년 북당(北堂)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이어서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후 선교사를 맞아들이는 일에 매진하다가 5년 만인 1795년 드디어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려 하다가 그해에 순교를 당하게 된다.
윤유일의 순교 이후에도 신앙 생활을 굳건히 하던 윤유오와 사촌동생 윤점혜, 윤운혜도 결국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 특히 언니 윤점혜는 최초의 여회장인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1760~1801)을 도와 여성 신자들의 교육에 힘썼었을 뿐만 아니라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윤운혜는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 ?~1801)와 혼인하여 교리서와 성물을 보급하는 데에 앞장섰던 최초의 양반 부부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1785년 봄에 일어난 명례방 사건으로 신앙 공동체가 와해되고, 교회 지도층에서 다시 재건을 꾀하기 시작한 것은 1786년부터였다. 이때 그들은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수립하였고, 이승훈을 비롯하여 다른 10명의 신자들은 신부로 임명되어 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788년 무렵에 류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이 그 오류를 지적하여 성사 집전이 중단되고, 이어 북경에서 성직자를 영입해 와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면서 고난의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로 선발된 사람이 바로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이었다. ‘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楊根)의 '한강개'(漢江浦, 지금의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곳은 바로 그의 스승이자 이벽과 정약용, 홍낙민(洪樂敏, 루가), 류항검,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녹암(鹿庵)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의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고향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녹암계(鹿庵系) 인물들이 모여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토론하던 마을이었으니, 1784년에 이벽이 이승훈에게 받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찾아간 곳이 바로 여기였다. 이에 앞서 녹암계 인물들이 권철신, 이벽과 함께 강학(講學)을 하던 곳은 한강개 뒤편에 위치한 앵자봉 자락의 주어사(走魚寺)와 천진암(天眞庵)이었다. 양근 권씨 집안의 제자였던 이존창과 류항검은 이후 자신들의 고향인 '여사울'(餘村, 현 충남 예산군 신종면 신암리)과 '초남'(草南, 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을 중심으로 각각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이존창은 내포(內浦)의 사도로, 류항검은 전라도의 사도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한강개 마을에서 비롯된 천주교 신앙이 수표교와 명례방에 이어 여사울과 초남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양근은 주문모 신부님을 모셔오기 위하여 두 차례나 북경에 밀사로 다녀온 윤유일(바오로)과 그 동생 윤유오(야고보)와 4촌 여동생 윤점혜(아가다), 윤운혜(마르타)와 유한숙, 권상문(세바스티아노), 김일호, 이 아가다, 그리고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 등이 태어나거나 살다가 체포되어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곳이다. 그 중 윤유일, 윤유오, 윤점혜, 윤운혜, 권상문 등은 현재 시복 추진중인 분들이다. 윤유일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밀사였다. 이후 윤유일은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에 걸쳐 북경을 다녀왔으며, 1789년에는 라자로회의 북당 선교 단장인 로(Raux, 羅黃祥) 신부에게 조건 세례를 받고, 남당(南堂)에 있던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를 만나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어 1790년에는 다시 구베아 주교를 만나 성직자 파견을 약속받고 귀국하였다. 또한 성녀 조증이(발바라)는 양근 조동성 집안 출신으로 남이관 성인의 아내, 유방제 신부의 복사로 치도곤 합 150도를 맞고 옥에 갇힌지 6개월 후 11월 14일 순교하였다. 윤점혜 아가다는 윤유일의 4촌 여동생으로 천주교를 신앙하기 위해 처녀의 몸으로 밤에 몰래 서울로 도망쳐와 강완숙의 집에 머물며 동정녀 소공동체를 만들고 동정녀들을 지도하였고, 고향 양근으로 이송되어 참수할 때 목에서 흰피가 나왔다고 한다. 그 동생 윤운혜 마르타는 순교자 정광수와 결혼한뒤 서울로 이사하여 자기 집에 공소를 마련하고 주문모 신부님을 모셔다가 미사를 드리며 성물을 만들어 신자들에게 보급하다가 1801년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권철신의 양아들(권일신의 아들)로 처음 양근 옥에 갇혀 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 당하였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음으로 양근으로 이송되어 1801년 12월 27일 23세로 순교하였다.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는 1801년에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전주 중바위 성지 참조)와 쌍벽을 이루는 분들이다. 이 동정 부부는 모두 양근 출신으로 조숙은 조동성 유스티아노의 친척이고, 권 데레사는 권일신의 딸이다. 이들 두 동정 부부는 1819년 5월 21일 참수로 순교하였다. 권 데레사의 머리를 찾아다가 성녀 조증이 발바라의 집 대바구니에 담아 두었는데, 그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달레는 전하고 있다. 이처럼 양근 성지는 순교 성인의 탄생지이고, 순교자들의 피로 신앙이 뿌려진 곳이고, 윤점혜 아가다를 통하여 한국 교회의 수도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 벌 수 있고,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를 통하여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의 모습을 본 받을 수 있는 곳이다. 2004년 6월 이 곳을 방문하였을 때는 권철신의 방계 후손인 권일수(요셉) 신부가 성지 개발을 전담하고 있었다. 권철신의 생가터인 대감마을과 주어사를 포함한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이면서 순교지인 이곳을 종합 개발하려는 전담신부의 외로운 노력에 많은 교우들의 동참이 절실하게 보였다.
전통적 신앙 공통체의 모습이 남아 있는 성 김성우 안토니오의 고향(구산성지)
구산 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여덟 분의 순교자가 묻히신 거룩한 성지이다. 이곳 뒷산이 거북 형상을 닮았다 하여 거북 구(龜)자와 뫼 산(山)자를 써서 구산 이라고 하였다. 구산은 한강변 미사리 조정 경기장 옆에 위치해 있으며, 순교자들의 숨결이 200여 년 동안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곳이다.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 위치한 구산 마을은 먼저 103위 성인 중 71번째 성인인 김성우(안토니오)를 비롯해 박해 시대에 많은 치명자가 탄생한 유서 깊은 사적지라는데서 그 교회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모방 신부가 방문한 공소 중에서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이곳은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의 고향으로, 그는 1830년경에 셋째 아우인 윤심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때 둘째 아우 덕심(아우구스티노)은 입교를 망설이던 끝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 후 3형제의 신앙 실천과 전교 활동은 실로 눈부셨으니, 얼마 안되어 구산 마을 전체는 하나의 교우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김성우는 3년 뒤인 1833년에 유방제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어의동, 즉 서울 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동대문 밖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서울 마장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구산으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을 마련하고, 1836년 여름에는 모방 신부를 모셔와 성사를 받았다. 이때 모방 신부는 김성우의 신심을 높이 사서 이곳의 공소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39년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3월 21일(양력) 포졸들에게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약간의 돈을 주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해 말에 다시 포졸들이 들이닥쳐 집에 있던 그의 아우들과 사촌 김주집을 체포하여 광주 유수가 있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끌고 갔다. 그중 둘째인 덕심은 체포된 후 고문을 참아 받으면서 관헌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였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41년 1월 28일에 통회와 신앙심을 지닌 채 병사로 순교하였다. 반면에 셋째인 윤심과 사촌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한편 김만집의 형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은 이때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에 47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고 1925년 7월 복자위에 올랐다가 마침내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셋째인 김문집(金文集, 베드로)은 김만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되었다. 박해자의 손길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던 구산에 뻗혔다.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 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당시 김문집의 나이는 66세의 고령이었다. 그와 함께 체포된 김씨 집안의 신자들은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인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경희의 5남이자 성희의 양자인 교익(토마스), 경희의 6촌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는데, 이중에서 김교익만이 안면 있는 포교의 도움으로 생환하였을 뿐 모두 순교하였다. 결국 구산의 순교자는 김성우 성인을 비롯하여 모두 7명이 된 셈이다. 한편 가까스로 생환한 김교익은 사형이 집행된 뒤에 매일같이 형장으로 찾아가 김문집과 김성희·경희 등 3명의 시신을 찾아다 구산의 가족 묘역에 보존되어 오던 성 김성우와 김만집 형제의 무덤 옆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김차희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에 의해 거두어져 안양 수리산에 안장되었다가 실묘되었으며, 후손이 없던 김윤희의 시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순교 후 김성우 성인의 유해는 아들 김성희(암브로시오) 등에게 거두어져 고향에 안장되었으며, 1927년 5월 30일에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명동 성당을 거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현재 구산 성지에는 그의 무덤과 두 형제의 무덤, 1868년 3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김성희와 김윤심의 아들인 김경희의 무덤이 있으며, 같은 날에 순교한 김덕심의 둘째 아들 차희와 김주집의 아들 윤희의 가묘, 그리고 1867년에 포도청에서 순교한 최지현의 무덤이 있다. 구산은 성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묘소를 가족 묘지에 이장, 보존하고 있어 우리 나라에서 박해 시대의 자취가 가장 원형대로 남아 있는 곳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150여 년 동안 교회를 지키며 신앙 생활을 확고하게 지켜 가고 있는 교우촌으로 도시화로 인한 급변 속에서도 구산 마을은 한마음으로 신앙 안의 일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6.25 당시에 구산 마을은 원로 신부들의 피신처로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낮에는 곳곳에 무성한 사람 키보다 더 큰 갈대숲 사이에서 숨죽이고 엎드려 있다가 저녁에 살금살금 나와 지친 몸을 쉬었다고 한다. 현재 1백20여 세대 5백여 명의 교우들이 살고 있는 구산 마을은 급격한 도시화와 이농 현상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교회이며 순교의 얼이 살아 있는 곳이다. 길을 가다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하느님을 믿는 형제이기에 구산 마을은 이웃집 친구를 만나러 가듯 정겨운 마음으로 찾아가 볼 만한 곳이다. 구산 성지내에는 수원교회사연구소가 있어 성지와 순교자들의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 뜨거이 죽음 익히며 (구산에서) <김영수> ▒
가난한 사람이 작은 꽃잎에다 가슴 기울여 문지르는 들판에는 사라지고도 살아 있는 이 안개 속에서 눈 맑게 뜨고 있습니다 죽어서도 깨어 있는 바람 있어 꽃잎을 흔들 때마다 나는 한 자락 부끄럼으로 깊어집니다 삶이야 한 호흡일 뿐이지만 죽음은 영원한 햇살입니까 이제 나의 젊음도 용서의 물소리에 따스히 젖고 싶습니다 내가 손 뻗어 죽음에 닿으려 해도 흔히 싸늘한 삶에 이마 닿지만 나도 이제 뜨거이 죽음 익히며 슬픔 다 비워내면서 떠나면서는 뒤돌아보지 않으리이다 돌아오면서는 뒤돌아보지 않으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