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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충장로 5가에서 부상
증언자 : 김범동(남)
생년월일 : 1947. 5. 7(당시나이 33세)
직 업 : 요리사(현재 요리사)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일찍 부모님을 잃은 김범동 씨는 5·18 때 광주에서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5월 18일 충장로 5가에서 무자비하게 달려든 공수의 총개머리판에 맞았다.
그 뒤로 속골병이 들어 몹시 고생하고 있으며,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지금도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
중국집 주방장이 되기까지
나는 1947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한문공부를 많이 하신 아버지는 마을에서 서당 훈장을 하셨다. 농사는 어머니와 형님 두 분이 맡아서 지었는데 그런대로 넉넉한 편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이던 해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서당에서 한문을 가르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충격으로 어머니 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모든 게 달라졌다. 나는 큰 형님과 함께 살았는데 형님이 노름으로 재산을 거의 날려버렸기 때문에 졸업 을 앞 둔 상태에서 국민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그 뒤 집을 나온 나는 남의 집에서 소를 키우며 숙식을 해결하는 '깔담살이(꼴머슴)'를 했다. 그런 생활을 한 지 몇 달 후 새로운 생활의 터전을 찾아 서울로 올라갔다.
어린 나이에 서울로 가서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전라도 사람에 대한 극심한 차별대우였다. 어느 일자리든지 전라도 사람이라면 쉽게 써주려 하지 않았다. 다만 한 식당에서만은 출신 지역을 별로 따지지 않았다. 나는 중화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을지로 입구의 '을지반점'이라는 식당에 들어가 배달부로 일했다. 그러다가 식당에 다니면서 알게 된 어떤 아저씨 소개로 김수동이라는 사람의 양아들로 들어가게 되었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 소유의 목공소에서 일했던 김수동 씨는 해방 후 일본인이 넘겨주고 간 목공소를 차지하게 되어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양아들이 된 나는 그와 목공소 일을 했다. 3년 뒤 그 집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양아들이라는 명분으로 나를 부려먹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뒤 다시 식당생활을 했다. 서울에서 웬만큼 크다는 식당이면 거의 다 돌아다닐 정도로 이 집 저 집 전전했다.
18세가 되던 60년도에는 식당 주방에 들어가 일하면서 월급 2천5백 원을 받으며 열심히 생활했다. 어떤 사람의 소개로 광주에 있는 동화반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때가 1974년이었다. 광주에서 1년 동안 생활하던 중 29세 때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뒤 집을 사서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38만 원을 주고 얻은 그 집은 18개월 만에 무허가 건물로 철거를 당하게 되었다. 토지와 건물에 대한 관계법을 전혀 몰랐던 내가 등기부를 열람해 보지 않은 채 집을 산 데서 온 불행인지도 모른다. 철거비 조로 집값의 반도 못 되는 15만 원을 받아 그중 10만 원으로 새로 전셋방을 얻어야 했다.
서울생활을 하던 중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도 겪었다. 같은 주방에서 일하던 사람과 말다툼이 크게 되어 서로 치고 받고 하다가 그의 이가 둘이나 빠져버린 일이 있었다. 돈을 들여 이를 고쳐주기는 했지만 그 일로 인해 28일 동안 구치소 생활을 해야 했다. 그 뒤 벌금을 물고 풀려난 나에게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 후 '전과자'라는 사실로 인해 내가 당한 피해는 결코 적지않았다.
다시 광주로 내려온 1979년도에는 무진중학교 부근에서 20만 원에 세를 내어 스낵코너를 했다. 10·26일 아침, 스낵코너의 문을 열던 나는 대통령이 죽었다는 방송을 듣고 매우 놀랐다. 혹시 이북방송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1980년에 들어 급격히 늘어난 학생들의 데모를 보면서도 나는 별다른 걸 느끼지 못했다. 매스컴에서 나오는 말과 학생들이 외치는 소리가 다를 때면 매스컴에서 하는 말을 더 믿었다. '아직 배우는 과정에 있는 나이 어린 학생들이 뭘 알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해 5월엔 광주 방림동에 살면서 충장로 5가 입구에 있는 '제일관'이라는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5월 18일 이전까지는 아무것도 듣고 보지 못했다. 주방장으로서 주인을 제외하고는 그 집의 모든 것을 총책임져야 했고, 또 다른 종업원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했으므로 그것에 신경을 쏟다 보니 자연히 그 밖의 일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식당 주방장으로 죄없이 당해
5월 18일 오후 3시 반쯤 식당은 손님들이 없어 한가했다. 그래서 나는 장갑을 끼고 고장난 버너를 수리했다. 그러던 중 밖이 소란스러워 내다보니 대학생들이 대열을 지어 충장로 5가에서 4가 쪽으로 구호를 외치면서 뛰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뒤를 공수부대가 쫓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충장로 4가 사거리까지 나가게 되었다. 그때 광주일고에 있는 이발소 앞 도로변에서 젊은 여자 한 명이 공수부대에게 당하는 것을 봤다. 3-4명의 공수부대가 그녀의 블라우스를 나꿔채자 옷이 찢어지면서 맨살이 드러났고, 워커발로 차버리자 인도에서 차도로 굴러 떨어졌다. 도로에 나뒹구는 그 여자에게 공수대는 또 달려들었다. 어디를 찍어버렸는지 퍽하는 소리와 함께 그 여자는 잠잠해졌다. 충장로 5가 사거리에서 50여 명의 사람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하지 못하고 악만 쓰고 있었다.
그 순간 충장로 5가로부터 4가까지 공수부대 30여 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철조망이 달린 헬멧을 쓰고 진압봉과 함께 총을 맨 상태였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해 도망갔다. 그때까지 손에 기름 묻은 장갑을 끼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던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빨리 도망가지 않았다. 설사 도망을 한다고 해도 이미 식당문이 닫혀진 상태였기 때문에 몸을 숨길 마땅한 장소도 없었다.
식당문 앞에서 나는 공수부대와 막닥뜨렸다.
"전라도 놈들, 씨도 남기지 말아야 해"
눈이 시뻘건 그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무턱대고 달려든 그들은 총개머리판으로 다짜고짜 내 어깨를 내리찍었다. 나는 그자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에게 끌려가지 않고 학생들의 부축을 받으며 한일은행 앞에 있는 김두원 신경외과로 갔다. 나중에 들어서 알았는데 조선대의대 동창생들도 그때 당했다고 한다. 그들은 광주일고에 모여 배구를 하던 중 밖이 소란하여 내다보다가 공수부대에게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의사와 간호원은 최루탄 가스로 인해 눈물을 흘리면서 응급치료를 해주었다. 어깨띠를 두른 채 병원에서 나와 식당에 잠깐 들른 뒤 집으로 가는데 거리마다 공수부대가 서 있었다. 내 모습을 보고 또 달려들지나 않을까 나는 더럭 겁이 났다. 공수부대를 피해 서동에서 실내체육관 있는 데로 갔으나 그곳에도 공수부대가 지키고 서 있었다. 월산동 파출소 쪽으로 가려 했지만 거기도 공수부대가 있었으므로 대성국민학교 담을 넘었다. 다시 석산고등학교를 지나 간신히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캄캄한 저녁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끙끙 앓았다.
19일, 약을 좀 사 먹기 위해서 집에서 나왔지만 대부분의 약국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친구의 도움으로 어느 약국 안집에서 약을 사다가 먹었다.
21일, 12시경에 도청에 나가 보았다. 도청 앞에 진주해 공수부대와 대치하고 있는 시민들로 금남로는 꽉 차 있었다. 도청 옥상에는 헬기도 보였다. 트럭에 가득찬 시민들이 도청으로 돌격하려 할 때 나는 그들을 가로막았다. 우리들이 만약 공수대 한 사람이라도 다치게 했을 때 고성능 무기를 갖춘 그들은 그보다 몇 배의 보복을 우리들에게 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날 오후에 친구들과 전남대 병원에 가서 시체 확인을 했다. 조카가 집을 나간 뒤 며칠간 소식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나 하고 찾아본 것이다. 시체는 병원 안뿐만 아니라 밖에도 많았는데 밖에 있는 시체 사이사이에는 부패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얼음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미 상당히 부패돼 버린 시체들로 냄새가 심했을 뿐더러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시민들은 시위대에게 김밥과 담배, 음료수 등 먹을 것을 많이 제공했다. 각 동에선 통장과 반장이 돈이나 쌀, 김 등을 걷어 김밥을 준비하기도 했다. 아주머니들의 부탁으로 광주공원에 있는 시민군 본부까지 김밥을 운반하기도 했다. 대성국민학교 4거리에서 두 개의 라면 박스에 가득 담긴 김밥을 나와 다른 두 사람이, 지나가던 시위차에 싣고 갔다.
25일, 긴 머리의 아가씨를 포함한 서너 명의 사람이 버스를 타고 유동 삼거리에서 도청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마이크로 가두방송을 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곧 쳐들어옵니다. 광주의 아들딸을 지킵시다."
27일 새벽에 나는 사방 곳곳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총소리를 들었다.
속으로 든 골병
5·18 이후 몸이 불편해 식당에 나가지 못하고 4개월 이상을 쉬었다. 두들겨맞은 데 좋다는 약이면 뭐든지 다 해 먹었다. 보통 한약방은 약값이 비싸니까 한약 재료 도매상에 가서 지네를 사다가 가루를 내어 먹기도 했다. 또 시골에 내려가서 붕어, 미꾸라지를 고아 먹기도 했고, 심지어는 송장뼈를 고아 먹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똥물을 마시기도 했다. 솔잎으로 마개를 한 병을 화장실에 1년간 매달아 놓으면 솔잎이 줄어들면서 병에 똥물이 들어가 고였다. 그것을 한 잔씩 마셨는데 냄새가 나기도 하고 역겹기도 했지만 맞아서 골병든 것에 특효가 있다고 하여 참고 마셨다. 그 뒤로도 돈이 없어 한약방에는 쉽게 못 가고 단방약을 많이 사용했다.
겨울에는 날만 궂어도 쑤시고, 여름엔 찬 곳에 조금만 있으면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찬방이나 외풍이 있는 방은 피하고 뜨끈뜨끈한 방에서 자야 했다. 총을 맞아 팔이나 다리를 절단당한 사람은 물론 두말 할 나위 없겠지만 많이 맞아 겉으론 멀쩡하지만 나처럼 속골병이 든 사람의 고통도 정말 크다. 지금도 잠을 잘 때는 두꺼운 옷으로 어깨를 감싸고 자야 한다. 언제부턴가 일명 삼씨라고 하는 대마초씨를 먹는다. 본래 성분이 안 좋다는 것은 알지만 사는 날까지 고통을 덜 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먹는다. 지금도 집에는 여러 가지 한약 뿌리가 보관되어 있다. 호박을 고아 먹으면 좋다고 하여 호박도 준비해 놓고 있다.
1981년 5월 30일부터는 주월동에 중화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진미식당을 개업해서 직접 운영했다. 남의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것보다 직접 운영을 하니까 훨씬 경제적으로 나았고 속도 편했다. 그래서 1986년까지 만 5년을 했더니 천여 만 원이 모아졌는데 도중에 식당을 그만두었다. 내 몸도 말아니었지만, 아내가 당뇨병에다 합병증까지 겹쳐 자주 병원 신세를 져야 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기는 했지만 약값으로 거의 들어가버려 점점 마음 속에서 회의가 일었다. '이렇게 죽자꾸나 하고 일해 봤자 뭘해' 하는 회의가 일었다. 1985년 식당을 그만둔 뒤 1년 이상을 더 쉬었다. 가까스로 목구멍에 풀칠할 수는 있지만 사람 사는 몰골이 말 아니었다. 아내의 제안으로 함께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기도원에도 가보았다.
그러고는 생각을 고쳐먹기 시작했다. '비록 가난하지만 죄짓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되었다. 그 후로 이곳 신흥식당에서 월 45만 원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숨죽이며 살아오다가 기독교 방송을 듣고 1987년 12월에 이지현 씨가 회장으로 있는 '5·18 광주민중항쟁부상자동지회'에 가입했다. 이번에 시청에 추가 신고를 했다. 또 다른 부상자회를 이끌고 있는 박옥재 회장은 5·18 당시에 치료를 했던 병원측에서 진료증명서를 받아와야 한다고 했다. 병원에 갔더니 차트 보관 시효가 5년인데 5년이 지났기 때문에 모르겠다며 딱 잘라 거절했다. 그래서 YMCA에 소속해 있는 부상자회에 나가고 있다.
5·18과 같은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다. 어서 진상규명이 되어야 하겠지만 현 6공화국하에서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빨리 보상을 해서 지금까지 건강과 직장을 잃고 어렵게 살아가는 부상자와 유족들이 지난 날의 악몽에서 얼마만큼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매스컴에서는 '얼마를 보상해 주겠네' 하고 떠들어대니 기가 막히다. 그 소리를 듣고 친구들은 당사자의 아픔같은 것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채 술 한잔 사야겠다고 난리다. 위정자들은 우리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매스컴을 이용해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 (조사정리 최정숙)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