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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율격의 변천에 관한 고찰
문학박사 이 석 규
1. 최남선의 [백팔번뇌] 이전
① 1900년대 초반기의 창가 등 서양식 시가가 들어오면서 우리 시가는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② 1907- 1910까지 약 4년간 400여 편의 시조가 매일신보에 발표되었고, 여러 교단의 잡지, 학생들이 내는 교우지 같은 데도 자주 시조가 실렸다.
③ 이 무렵 많이 쓰고 읽히던 전통적 시문학 형태는 가사, 국문풍월, 시조 등이 있었는데, 어느 것이 근대 우리시가의 대표적 장르가 될 것인가에 대한 경쟁에서 시조가 단연 우월했다. 가사는 교술시이기 때문에 밀려나고 언문풍월은 한시를 흉내 낸 것이기 때문에 한시와 함께 불신되어야 했다. 시조는 서정시이며 묘미 있는 형식을 갖추어 청산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시조를 國詩라고 여기게 되었다.(조동일, 2005, 한국문학통사 5권 참조)
④ 1913년 최남선이 <歌曲選>을 내었는데, 시조라는 말을 곡조가 아닌 시로서 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 책을 증보하여 1928년에 [시조유취라]는 표제로 내게 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고 ‘시조’를 이 장르의 명칭으로 확정짓게 되었다.
⑤ 참고로 1916- 1920사이에 노작 홍사용이 시조집을 [청구가곡]이란 제목의 필사본을 내었다. 모두 106 수를 싣고 있는데 고시조가 40수, 홍사용의 작으로 추정되는 시조가 52수, 다른 사람의 작품이 14수로 되어 있으며 특히 고시조 40수는 이제까지 알려진 어느 시조집과도 표기가 달라, 그가 기억하고 있던 것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⑥ 1920년대 시조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좌파에서 계급문학을 주장하는데 맞서서 우파가 반론을 펴면서 계급을 추월한 민족문학의 정수인 시조에 커다란 의의를 부여하고 시조부흥을 주장하였다. 좌파는 시조가 지난 시기의 양반문학이며 소극적이고 퇴영적 사고방식이나 나타내는 것이므로 가치가 없으며 또한 계급을 초월한 민족문학이 될 수 없으므로 당연히 시조를 배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민족문학 자체를 배격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국민문학파에 속해 있던 많은 시인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활발하게 시조를 창작, 발표했다, <1>
2. 崔南善(1890- 1957)
1) 호는 六堂 1908 [少年] 발간, 육전소설 발간, 3,1운동 <독립선언서> 작성, [백팔번뇌], [시조유취], [단군론], [조선역사], [삼국유사 해제], [조선독립운동사], [백두산 근참기], [심춘순례], 등. 조선주의, 한국주의를 제창, 주체적 민족정신의 확립을 촉구하였으며, <경부철도가>, <세계일주가> 등으로 7.5조 형식의 新詩를 시험하였다. 잡지 [少年]은 통권 23호까지 지속되었는데, 10호에서 23호까지 國風이란 이름으로 모두 30 수의 시조를 발표하였다.
2) [百八煩惱]에 대한 평가
[백팔번뇌]의 題語는 石顚 朴漢永, 碧初 洪命憙, 春園 李光洙, 爲堂 鄭寅普 등 네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 있고, 홍명희와 이광수의 발문이 실려 있다.
(1)홍명희(1888-1968)는 [백팔번뇌]의 발문에서
① 육당은 근래 최고의 시조작가이다.
② 우리 시조는 일본 하이쿠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격이 높다.
③ 육당의 ‘님’은 “조선”인 바, 그 “조선”을 육당은 남달리 사랑하는 사람이다.
* 시조는 역사적으로 그 임무를 다 마치고 과거로 돌아간 역사적 산물이다.
(2)이광수(1892- 1950) [백팔번뇌] 발문에서
① 육당의 시조는 주역(周易)이다.
② 한편의 시조를 얻기 위하여 온갖 정력을 집중하고도 며칠 걸려서야 써내는 사람
③ 육당은 “시조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했는데, 육당은 사실상 시조에서 자신의 번뇌를 표현할 가장 좋은 그릇을 발견한 것 같다.
④ 육당의 시조는 우리시조 사상에 일신경역을 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조와 육당은, 국어와 주시경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⑤ 시조를 국문학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주장한 이가 육당이요, 그 생각으로 시조를 처음 지은 이도 육당이다.
⑥ 그의 수십 편의 시조는, 시조가 신문학으로 재생하는 역사를 열었다.
⑦ 육당의 시조는 지극히 엄숙한 법칙을 지켰다. 육당이 “법칙은 시가의 생명”이라 함은 진리이다.
2) [백팔번뇌]의 특성
<2>
① 최초의 현대 시조집 [백팔번뇌]에는 108편의 시조를 싣고 있다.
② 모두 정확히 정격을 지키고 있다.(고시조들 보다 더 엄격하게 형식을 지키고 있다.)
초장 3 4 4(3) 4
중장 3 4 4(3) 4
종장 3 5 4 3
③ 시조 삼장을 각장 2행 1연으로 하여 3연 6행으로 배행하고 있다
위하고 위한구슬
싸고다시 싸노매라
때묻고 이빠짐을
님은아니 탓하셔도
바칠제 성하옵도록
나는애써 가왜라.
최남선의 연시조 <궁거워> 9수 중 첫수
드는줄 모른잠을
깨오는줄 몰래깨니
뉘엿이 넘는해가
사리짝에 붉었는데
울우에 옴크린괴는
선하품을 하더라
연시조<一覽閣에서> 3수 중 둘째 수
④ 육당의 진한 감정과 감수성도 잘 나타나 있지만, 특히 고시조에서는 보기 드물게 직관에 의하여 쓴 시조가 아니라, 깊은 사색과 고뇌를 통하여 창작한 사상성, 철학성이 깊은 작품들로 시조의 새로운 세계를 열고 있다.
⑤ 육당의 님, 곧 조선을 사랑하는 진정을 시조의 형식을 빌어서 가장 효율적,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는데, 다시 말하면 시조야말로 정서와 더불어 깊은 사상을 표현하는데도 최선의 형식임을 보여주고 있다. <3 >
3. 鷺山 이은상(1903-1982)>
1) 1924년 [조선문단] 창간 무렵부터 평론, 수필, 시를 쓰다가 1926년 후반 시조부흥 논의가 시작되면서, 시조를 비롯한 전통문학으로 기울고,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시조시인으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동아일보에 <時調單形芻議>, <시조창작문제> 등의 논고를 통해 음수율로써 정형성을 구명하려 하였다. [노산시문선], [노산문선], [朝鮮史話集] 등 100여권의 저서가 있다.
2) [노산시조집] (1932 발행) 昭和 7년 초판 소화 8년 재판)
① 대체로 정격을 정확히 지키고 있다.
3 4 3(4) 4
3 4 4 4
3 5-7 4 3(4)
② 단시조보다 연시조가 더 많다.
③ 아주 정제된 표현으로, 서정적 운치와 흥취 곧 감미로운 전통적 감수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노돌이 여기란다고 놀라보는 저길손아
오백년 옛풍류를 어늬곧서 찾으리오
모래요 강물뿐이니 그냥지나 가시죠.
연시조 <노돌(鷺梁津)> 2수중 첫수
어제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으로 나갓드니
그배는 멀리떠가고 물만출렁 거리오
연시조 <고향생각> 2수중 첫수
4) 노산의 시조관
① 시조는 우리민족이 지닌 문학가운데 시조대로의 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작품으로 증시(證示)하되 동시에 그것으로 족히 여길 따름이다. <4>
② 시조라는 것이 제대로의 맛과 향기를 풍길 수 있다 하더라도 자기체험을 피력함과 동시에 독자와 더불어 같은 세계를 맛보고자 한다.
③ 나의 시조는 어느 것이나 시조형식의 대원칙에서는 벗어나는 것이 아니며, 그보다 내게 있어서는 솟아오르는 시상(詩想)이 저절로 시조라는 하나의 도가니 속에서 용해되었다가 다시 그대로 주성(鑄成)된 것이다. 곧 내용과 형식이 둘이 아니요 하나이다.
④ 예로부터 초,중,종 삼장으로 구성되어 있음은 물론이나 그것을 기사(記寫)함에 있어서 3행으로 써야 한다는 제약은 없다. 한 수의 시조를 1행이나 2행이나 4행, 5행 나아가 6행 7행 8행에 써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종래의 3행이나 6행 등 기계적인 행수배열을 단연히 버리고, 그 사상과 호흡에 맞추어 행수를 자유로이 펴보았다.
4) 시조집 [푸른 하늘의 뜻은] (1970년 발행)
① 변격 파격이 눈에 많이 띄고 정격은 드물다.
② 종장의 3, 5-7, 4, 3(4)는 대충 지키고 있다.
③ [노산시조집]과 비교할 때 38년 후에 나온 이 시조집은 파격이 매우 심하다.
신선한 창공이다 3 4
순결과 안식의 고향이다 6 4 (6 4)
허욕의 방랑으로부터 3 6
인간들은 돌아와야 할 때다 4 7
한 걸음 3 7 4 5
저 높은 언덕 위로
더 올라가 바라보련다
연시조 <창공> 3수 중 첫수
파도야 너 왜 3 2
내 발 아래 와 우는 거냐 4 5
굳이 너 왜 2 2
날 붙들고 우는 거냐 4 4
내 가슴 3 <5>
찢어놓고서 5
같이 울자는 거냐 2 5 (5 2)
<파도야> 전문
5) 노산의 시조집 [조국강산] (1974 2월 초판, 5월 재판)
① 산 40 편, 강 21편, 바다 9편으로 총 70편이 실림
② 시조가 아니라 7 5조 4행 단수: 7,5 조는 정확히 3.4.5조를 뜻한다.
③ 수필 기행문과 함께 조국강산의 사랑과 멋, 아름다움을 노래한 서정 정형시
지팡이 끄을면서 치악산으로
궁예의 힘찬모습 보러왔건만
영원성 다쓸리어 터조차없고
석양을 까마귀만 지저귀누나
<치악산> 전문
백제의 혼이깃든 기나긴금강
낙화암 스칠적엔 흐느껴울다
웃으며 다시흘러 논산강경에
오곡을 길러놓고 서해로트네
<금강> 전문
4. 가람 이병기(1891-1961)
1) 시조부흥운동의 최남선을 이은 두 번째 기수라 할 수 있다. 주시경에게 조선어문법을 공부하면서 우리말과 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모아 나중에 서울대학교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1926년 [시조회]를 발기하였으며, 이를 1928년 [가요연구회]로 바꾸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조혁신을 제창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1926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율격과 시조>(동아일보), 1929 <시조원류론(新生1-5)> 1932 <시조를 혁신하자> 등 20여 편의 시조론을 발표하였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으로부터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등을 주장하였으며 1939년 [가람시조집]을 내었다. 주로 순수 서정적 작품을 썼으며 6.25 후에 사회적 관심이 뚜렷해졌음을 엿볼 수 있다. <6>
2) 전통적인 양식인 시조를 계승하되 고풍을 버리고 혁신을 해야 한다는 의지에 따라 설득력 있는 대책을 강구하려고 노력하였다. 1932년에 발표한 [시조(時調)를 혁신(革新)하자]라는 논고에서, 가람은 시조를 정형시이면서 자유시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종래의 시조 표준형식을 고정시키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새로운 시조는 자수로 헤아릴 수 없는 묘미를 구현해야 한다고 하며 다음을 제시했다.
첫째 관념에 머무르지 말고 실감실정을 나타낼 것,
둘째 고정된 내용에서 벗어나 취재의 범위를 넓힐 것,
셋째 작자의 개성에서 흘러나오는 격조를 개척할 것,
넷째 연작을 쓸 것 등을 주장했다.
특히 연작시 곧 연시조를 주장하는 데 있어서 그는 “한 제목을 가지고 한 수 이상 몇 수까지든지를 그 시간이나 위치가 같든 다르든, 다만 그 감정의 통일만 되게 하는 것이다. 가령 이에 다섯 수가 각기 독립된 것이면서도 서로 관련이 있어 전개되며 통일 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3) 가람은 이와 같이 한 수 한 수 독립성과 전편으로서의 통일성을 갖춘 연시조를 주장하고, 그러한 작품의 창작을 실천하였다. 여기서 수의 독립성이란 시조의 형식유지, 보존이란 의미를 띠었고, 궁극적으로는 전편의 통일성을 지향했던 시인이다.
가람은 그리하여 시각적 표현에의 관심을 가짐으로써 신선한 시조세계를 추구했으며, 선비적 기품과 한국적 고아함을 잘 드러내는 시조를 썼다.
또한 구체적 표현이 가능한 시어선택, 고전적 한국적인 것에서, 현대적 세계적 관점을 소재로 잡아야 한다는 의지, 특히 시조이 기본형에서 약간의 음수를 가감할 필요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가람의 혁신론에 대하여 백수인( 조선대 국어교육과 교수 <가람의 언어의식과 시어선택>)은 “짓는 시조, 읽는 시조를 강조한 나머지 부르는 시조와의 화해를 전연 고려하지 않은 태도는 온당하지 못하다”고 평하기도 한다. cf)민병기(창원대 교수, 현대시조형 시론)
4) [가람시조집],
1939년(昭和 14) 발행하였으며 72 수의 시조가 수록되어 있음
(1)정지용의 평가
① 가람은 시조를 사적(史的)으로 추구하고 이론으로 분석했으며, 비평의 기준을 세우고 계몽적으로 보급한, 말하자면 시조학(時調學)을 출발시킨 사람이다.
② 순수 조선적 포에지를 담기에 가장 맛가롭고 읊을 수 있으며 부를 수 있는, 악기로 치면 단소와 같이 신묘한 시형이 시조 三章 외에는 없다.
③ 전래 시조를 뛰어넘어 근대적 시 정신으로 시조 재건의 노력을 높게 평가한다. 시류를 초월한 시조중흥의 영예로운 위치에 서있다.
(2) 형식적 특성
① 시각적, 구체적 표현을 하고 있다 (정제된 언어사용)
② 단시조가 거의 없고 주로 연시조를 썼다
③ 대체로 정격을 지키고 있으나, 다만 한 소절이 2자 또는 5자로 된 곳이 더러 있다.
④ <풀벌레>, <우레>는 평시조는 아니고 엇시조나 사설시조로 보기가 어려운 3연으로 된 자유시가 실려 있다. 이것을 시조라고 생각하는지는 의문이다.
⑤ 시조의 파격이나 변격이 나타날 단초가 엿보인다.
가람의 작품의 예
폭포 소리/ 듣다/ 귀를/ 막어도 보다 4 2 2 4
돌을/ 베게 삼어/ 모래에/ 누워도 보고 2 4 3 5
한 손에/ 해를 가리고/ 푸른 虛空/ 바라본다 3 5 4 4
바위/ 바위 우로/ 바위를/ 업고 안고 2 4 3 4
또는/ 넓다 좁다/ 이리 저리/ 도는 골을 2 4 4 4
시름도/ 疲勞도 모르고/ 물을 밟어/ 오른다 3 6 4 3
얼마나/ 험하다 하리/ 오르면/ 오르는 이길 3 5 3 5
물소리/ 끊어지고/ 힌 구름/ 일어나고 3 4 3 4
우럴어/ 보이는 봉오리/ 발아래로/ 놓인다 3 6 4 3
연시조 <溪谷> 6수 중 4-6수
오날도/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3 5 4 3
꽃이 지든/ 蘭草/ 다시 한 대/ 피어나며 4 2 4 4
孤寂한/ 나의 마음을/ 저기 위로/하여라 3 5 4 3
이병기 <난초3> 3수중 첫수
<8>
(3) 한마디로 시조의 변격이나 탈격의, 소위 정격을 허무는, 단초가 가람 이병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또는 같은 시대의 많은 시조시인들과 함께 인식하고 공감했던 ‘시조의 혁신 방법’이었다.
5. 자산(自山) 안확(安廓)(1886-1946)
1) 1926년부터 4년간 李王職 雅樂部에 근부하면서, 음악 및 국문학 관계의 관한 왕실소장 자료에 접하여 훈민정음 기원설 제시, 歌詩의 장르설정(삼대목체, 정읍체, 첨성체, 경기체, 장편, 시조)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국권피탈 후 국학연구에 몰두, 고구려 문학, 시조, 향가, 미술사 등을 깊이 연구하였음. 저서는 [조선문법], [조선무사영웅전], [자각론], [조선문학사], [조선문명사](일명 조선 정치사) [시조시학](1940) 등 저서와 [조선어의 가치] 등 8권의 저서와 논설 140여 편을 남겼다.
서양문물 수용을 통한 근대화를 찬성하되 민족문화의 장점을 기반으로 한 수용론을 폈으며, 당대 보기 드문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cf) <자산 안확 선생 저작전집> 권오성, 이태진, 최원식 공저
엄밀한 학문적 기반 위에서 민족문화의 전통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그 발전과정을 다양한 분야에서 검토함으로써 국학 발전의 중요한 기반을 조성했다.
2) [시조시학] 1940년 발행
내용은 總說, 本源, 組織, 詩語와 聲調, 文章法, 時調詩의 種類, 詩歌史와 時調詩, 作詩法 등 9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自山詩選]이 포함되어 있다. 곧 이 저서는 학술 서적 이론서적인 동시에 시조집을 겸하고 있다.
(1)시조시학의 형식 부분 발췌
① 시조를 음악과 분리하면서 ‘時調詩’라고 명명함
② 고시조를 분석하여 精致한 시조의 이론을 제시함
③ 韻, 律調, 절, 어휘, 구, 장, 문장법, 篇 등에 관하여 문법적, 수사학적 및 음악적 율격이란 관점에서 고루 접근해 이론을 세웠는데, 그 중 시조의 형식에 관하여는 다음 형식을 제시하였다.
<9>
초장 1구(내구) 7
2구(외구) 8 15자 3 4 4 4
數韻
중장 1구(내구) 7
2구(외구) 8 15자 3 4 4 4
종장 1구(내구) 8
2구(외구) 7 15자 3 5 4 3
각 장의 합수는 15자로 수운된 바, 각 15의 음절은 3장이 동일하고 시간 단위가 정확히 일치한다. 종장의 둘째 소절 음수가 4-6,7 자로 되어 있는데, 정형시는 어느 나라 시든 그 박자 운동이 동일한 시간으로 되지 않은 것이 없다.
각 구는 선 7, 후 8 로 된 것은 6 구의 자수 상태가 波形線을 지어 旋律美를 나타낸 것으로, 영미의 6,8조의 음절수와 같은 것이다. 장단구로 하지 않으면 선율의 美感이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 시조의 정형성은 강약이나 고저를 쓰지 않으므로 字數로서 율동의 요소로 삼는다.
이는 종장도 동일해야 할 것 같지만, 시의 묘미를 취한 것 뒤에, 연시조가 되어도 그것으로 매듭을 지어 구분케 하는 역학을 한다. 율동의 원칙을 지킨 것은 음악작법과도 통한다.
3) [自山詩選] 1940년 발행. 時調詩 160 首 수록
疊疊한 뭉게그늘, 虎帳느려 논듯해라.
林風이 뒤집히니, 햇덩어리 움직인다.
大祚榮 잇거든긔야, 예와엇디 하드냐.
<駐시단가(露地)>
江波에 바람치니, 발근달이 구으른다.
단풍에 서드르니, 到處마다 落葉이라.
萬里에 客의愁心이, 새로수선 허고나.
<吉林秋> <10>
글자 수를 고정을 하여 정확히 3.4 4 4, 3 4 4 4, 3 5 4 3의 자수율을 지키고 있으며, 句마다 쉼표를 찍고 章마다 마침표를 찍어 장과 구를 표시하였다.
6. 이호우(李鎬雨)(1912-1970), 호는 爾豪愚
1) 1939년 동아일보 <낙엽>을 발표하고 1940년 <문장>지에 이병기 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이호우 시조집], 누이 이영도와 함께 낸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중의 1권인 [休火山] 등이 있다. 후반 <문장>지를 중심으로 시조변혁운동을 일으킨 시조변혁운동에 선두 주자이다. 그런 가운데도 시조를 민족시로서 유지 보존하여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율격을 지키고자하는 전통에 대한 염원과 그것으로부터 일탈하고자 하는 변혁에의 의지가 충돌하는 가운데 조금씩 시조 율격에 자유시적 표현 양식을 도입하였다.
2) [爾豪愚 時調集]
1955년 발행. 첫 시조집으로 등단 후 6.25 동란까지의 작품 70편이 실렸으며
상당히 자유로운 모습이 보임
등단 작품인 <달밤>은 완전한 정격인데, 여러 편에서 한 소절이 2자 또는 5자로 된 것들이 1 –2회 섞여 있는 정도의 일탈을 보이나, 그래도 비교적 정격을 지키고 있다.
임이/ 오는가 보오/ 새벽이/ 오는가 보오// 2 5 2 5 <새벽 초장>
봄을/ 마주 서니/ 마음 자꾸/ 어려만 지네// 2 4 4 5 <적은 기원> 초장
홀로/ 가는 길은/ 도리어/ 밤길이 좋아// 2 4 3 5
다만/ 별빛을 밟으며/ 걷는/ 길만은// 2 6 2 3 <밤길> 초장, 중장
3) [休火山] 제2 시조집(1968)
1부는 [이호우 시조집] 이후의 작품들.(1955- 1968)
2부는 [이호우 시조집]에 실린 작품들(1955년 이전 작품들)
1부 작품의 예 <11>
어린/ 싹들이/ 가지 이뤄/ 자리 잡고 2 3 4 4
송이 송이/ 피었던 꽃들/ 열매 다/ 영글었도다 4 5 3 5 <낙엽> 초장, 중장
싸움 터질 듯/ 팽창한 대낮/ 고비의/ 정적 5 5 3 2 <午> 초장
끓는 가슴을/ 달래어 가듯이/ 이 날을/ 견딤은 5 6 3 3 <休火山> 중장
나의/ 肉身을 길림에/ 나를마저/ 잃어버리고 2 6 4 5
차라리/ 짐승이 부러워// 산을 보고/ 섰네 3 6 4(2) 2(4) <나의 별> 초,중장
이 정도의 일탈은 [휴화산] 곳곳에서 수없이 발견 되며, [이호우 시조집]에 비하여 율격 파괴 매우 더욱 심하다. 그런데 보다 더 근본적 율격 파괴의 현상은 다음 예에서 보인다.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아려/ 눈을 감네 6 5 4 4 <개화> 초장
3 8 4 4
3 3 5 4 4
바람 한번/ 스쳐만 주면/ 오르르 필 / 저 꽃망울들을/ 4 5 4 6
가슴으론/ 이리 느낌을/ 그대손길/ 와 닿지 않네/ 4 5 4 6
絶壁서 /내리 뛰듯/ 그렇게/ 피고지라/ 지고지라 3 4 7 4
<손길> 전문
첫째 <개화>의 종장 소절을 어디까지로 보느냐는 문제가 일반적 표현으로 받아들면 6, 5, 4 4 로 보이는데, 종장 첫 소절을 3음절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니까 그렇게 억지로 맞춰서 이해한다면 3, 8, 4, 4 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색하기 짝이 없고 둘째 소절 8은 누가 봐도 3, 5로 되어 있는 두 소절이다. 그렇다면 3, 3, 5, 4, 4 가 되어 다섯 소절이 되어 시조의 가락이라고 볼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 종장에서도 이처럼 모호한 율격처리를 한 작품이 대여섯 군데나 발견된다.
둘째 <손길>은 초, 중장의 몇 소절을 전통적 율격에 맞출 수 있음에도 일부러 일탈을 시도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시조형식의 치명적 파괴 현상은 종장 둘째 소절이 4음절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시조의 율격 [3.4 3.4/ 3.4 4.4/ 3.5 4.3] 깨려한 흔적으로 가득하다
이런 점을 보면, 시조형식 파괴의 마지막 중요한 관문이라 할 수 있는 ①종장의 둘째 소절을 좀더 길게 함으로써, 종장이 네 개의 소절 이상이 되어 시조형식을 파괴해 버리고 마느냐 하는 점 ②둘째 소절을 4자로 줄이거나 첫 소절의 3자를 2자 또는 6자로 보일 수 있도록 표현해서 시조의 본질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시조의 종장 3, 5, 4, 3의 형식은 앞의 초, 중장에서 일어나고 전개된(起,承)된 내용의 발전을, 종장 첫 소절 3 자에서 일순간에 전환을 이루며, 둘째 소절 5+에서 화룡점정의 크라이맥스를 창출하고, 마지막 4, 3에서 숨을 고르며 끝내는 절묘한 리듬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종장 처리가 시조형식의 요체라 한 것인데, 이호우 시조는 이처럼 시조의 본질을 야금야금 파괴함으로써 자유시로 접근하는 길목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7. 草汀 金相沃 (1920-2004)
1) 1939년 가람 이병기의 추천으로 [봉선화]를 <문예>지에 싣고, 194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 등단하였는데, <봉선화>, <낙엽> 등이 등단 작품이며 <백자부>, <청자부>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시조집 [草笛](1947), [故園의 曲](1956), [三行詩](1973)등이 있으며, 시집으로 [이단의 시](1949), [석류꽃](1952), [의상](1953), [목석의 노래](1956) 등이 있다.
2) 첫 시조집 <草笛>(1947년 발행)
① 그는 序에서 시조에 대하여 “아무런 理論이 없다”는 말 외에는 시조의 이론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
② 감수성이 풍부한 시적 정서를 39편의 정격시조에 담고 있다.
③ 단시조와 연시조로 되어 있는데 주로 연시조가 많다.
눈을 가만/ 감으면/ 구비 잦은/ 풀밭길이 4 3 4 4
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고 3 3 4 4
白楊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3 5 4 4
<思鄕> 3수중 첫 수
꽃피자/ 비바람도/ 어찌 이리/ 잦을런가 4 4 4 4
성기고/ 어린 가지/ 부질없이/ 흔들어서 3 4 4 4
오가는/ 진흙 발아래/ 이리 저리/ 밟힌다 3 5 4 3
<愛情> 전문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3 4 3 4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3 4 4 4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도/ 보내자 3 5 4 3
<13> <봉선화> 3수 중 첫 수
3) [三行詩](1973년 발행)
① 삼행시라는 제목 아래 김상옥 詩集이라고 되어 있으며 총 65편이 실렸다.
② 삼행시 시집에 실린 작품을 유형별로 분석해보면
-정격시조 31 편, 파격(또는 변격) 12편, 삼행시(시조가 전혀 아님) 8편, 자유시15 편으로 되어 있다.
<시조>
奉恩寺 가는 길은 억새풀 바다였다 3 4 3 4
千이랑 萬이랑 벌판을 덮던 물결 3 3 3 4
荒涼도 아름다울손 그 가을 그 억새.... 3 5 3 3
멀리 해으름은 솔 푸른 그늘에 젖고 2 4 3 5
新刊 古書들 나란히 꽂힌 房안 2 3 3 4
억새풀 우짖는 소리 僧俗 따로 없었다. 3 5 4 3
<억새풀> 전문
<변격시조>
몇 십층 빌딩보다 오히려 키가 큰 너 3 4 3 4
지금 먼지구덕에 어깨 쭈그리고 앉았지만 2 5 6 4
한때는 불구덩이에 휘말려도 차디찬 눈발 끼얹던 너 3 9 5 4
<착한 魔法> 2 수 중 첫 수
<삼행시>
주황색 네모난 저 돗자리를 누가 펴고 있나 3 3 5 6
두루말이, 물빛 두루말이 걸어놓은 가장이에 4 6 4 4
모이를 찾듯, 몇 개의 꽃잎이 머리 맞대고 앉는다 5 6 5 3
<따스롭기 말할 수 없는 無題> 2수 중 첫수
<자유시>
생시엔 꿈도 깰 수 없어, 연방 내려쬐는 뙤
약볕은 무섭도록 고요하다. 혼자 뒤쳐진 한
소년이 늪가에 앉아, 피라미새끼 노니는 것
을 보고 있다. <늪가에 앉은 少年> 3연 중 첫 연
<14>
5)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김상옥은 시조집과 시집을 합하여 모두 7권을 냈는데 그 중 시조집이 3권 시집이 4권이다. 그리고 시조집 3권중에 한권은 시조집이라고 하지 않고 제목을 [三行詩]라고 하고 그 아래 金相沃 詩集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시조를 삼행시라고 하며, 시조와 자유시 그리고 시조도 아니고 자유시라고 보기도 좀 모호한 작품들을 함께 싣고 있다는 점은 특이하다. 따라서 그는 시조와 시를 의도적으로 가르지 않고 시조와 시를 동시에, 곧 시조에 적합한 내용은 시조로, 시에 적합한 내용은 시로 쓰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시조인지 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작품들 많이 써서 시조와 시의 접근을 갈수록 더 강하게 시도하고 있다.
요컨대, 전통적 시조형식에서 조금씩 자유시의 표현 방식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시조와 자유시 사이를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이 두 가지의 형식을 적당히 하나로 통합하려는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8. 마무리
1860년대 이세보, 1880년대 안민영을 끝으로 고시조 시대가 마감을 하고, 밀려오는 서구문물의 영향을 받아, 사회와 문화가 천지개벽을 하듯 급격한 변화의 시대를 겪게 된다. 그 중에 시가분야에서는 새로운 민요가 나오고 일본 또는 서양에서 들어온 각종 창가, 창가가사들이 널리 퍼지면서 시조가 주춤하는 듯했다.
그러나 1907년- 1910까지 4년 동안에 매일신보에 발표된 시조가 무려 400여 편에 이르고 있으며 각종 종교단체나 학교 단위로 내는 교지 및 잡지 등에 학생들의 시조가 꾸준히 발표되었다. 1908년 육당 펴낸 [소년] 지에는 신시(新詩)와 함께, 육당 자신이 쓴 시조 30편이 국풍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1926년 육당의 [백팔번뇌] 출간과 국민문학파의 시조운동의 영향으로 시조는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질적 양적 수준을 지켜가며 수많은 시조인, 시인, 문인들에 의하여 새로운 근현대시조로 발전하는 기초를 세워간다.
시조가 변질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그 본격적 출발은 1932년 가람의 [시조를 혁신하자]는 논고가 발표되면서부터 본격화 된다.
물론 1932년에 간행된 [노산시조집]에서도 조선시대 수준의 정격을 지켜왔다. 그러나 가람 이후 서구적, 현대적, 자유시를 닮아가려는 경향에 의해, 시조의 본질적 율격과 형식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후 1970년대까지, 아니 오늘날까지 많은 유명한 시조시인들이 시조를 전통적 율격 못지않게 자유시를 닮아가려는 경향에 따르고 있다. 그 대표적 시인 이호우와 김상옥에 대하여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특히 노산 이은상은 [노산시조집]과 [푸른 하늘의 뜻은] 정격과 파격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심력에 저항하는 구심력처럼, 육당의 [백팔번뇌]나, 1931년 조윤제의 <시조자수고>, 그리고 1940년에 발행된 自山의 [시조시학] 및 [자산시선] 등은 고려로부터 조선까지 이어지는 600년이 넘는 세월을 이어온 시조의 형식적 체계를 세워 그 근본적 율격을 재구성하고 오히려 더욱 정제된 형식 곧 표준을 세우고 그에 따라 엄격한 정격시조를 써 왔다. 심지어 혁신파를 주도해온 가람, 노산, 이호우, 초정들조차도 사실상 정격시조를 많이 발표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1950년대 후반기에서 60년대 초에 등단한, 유성규, 장순하, 이우종, 정완영을 포함하는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시조시인들이 정격 고수를 외치고 있으며, 현재도 정격을 지키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시조창작에 노력하는 시조시인들이 참으로 많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다만 여기서 꼭 짚어봐야 할 것은 첫째 그러면 왜 이처럼 시조를 혁신‧변혁하려고 해왔는가? 둘째 혁신과 변혁의 방향은 옳았으며 그 수준은 적절했는가? 하는 문제를 차분하게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의 대한 접근은 첫째, 시조형식의 본질 곧 율격문제에 대하여 체계 있는 이론적 접근이 필요하다. 둘째 그동안 시대적 사회적 배경과 시조시인들의 심리적 경향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셋째 이러한 변혁 또는 혁신이 근대화시대의 한 경향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지속되어야 할 것이지 하는 문제를, 수백 년간의 시조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거시적 관점에서 살피고 판단해야 한다. 넷째 정형시라는 것에 대한 국민과 시인들의 태도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의 인식 또는 대처방법들을 고려해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에 대한 답은 이미 나름대로 갖고 있겠지만 학문적 성찰을 거쳐서 체계를 세우고 깊은 논의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끝으로, 이 강의는 더 많은 시조시인들의 경향을 통시적 공시적 고찰을 통해서 완전한 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과제를 남기고 이상으로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