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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엿보기
모두의 모과들(천년의시작) 정선우 2015년 《시와 사람》으로 등단.
정선우 시인은 그녀가 만나는 세계 속의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행복한 화합을 꿈꾸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와 불행의 공유를 통해서 지금 현재의 지점을 확인하고 이해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세계와의 결합방식을 좀 더 밀도 있고 두껍게 함으로써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서려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는 세계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다른 모습들이 된다. 더불어 시인은 자신이 만나는 일상 속의 세계에 대하여 부정하고 질문함으로써 존재하게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현재의 삶에 대한 궁극적 질문을 통해서 현재가 아닌 혹은 지도에는 없는 세계에 대한 탐구를 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시인이 스스로 대면한 세계에 홀로 어떻게 대응하고 반응하는가를 통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의 불안은 자연스럽게 내일을 담보하는 여기가 아닌 세계로의 희망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게 된다. 우리는 시를 왜 쓰는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지금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계의 불안으로부터, 나를 억압하는 숱한 관계의 틀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서인 것이다. 이 자유로움을 통해 시인은 지금까지 누구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를 열망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것은 곧 세계의 확장을 가져오는 것이기도 하다.
상추 잎에 움츠린 민달팽이 한 마리 외로웠나 나지막한 어깨 하나쯤 필요했는지 모른다 꾸물거리는 것 잎사귀 끝이 흔들리자 순간 허공을 움켜쥐다 놓친다 곱송그린 생이 더 깊게 주름진다 놓친 뒷모습은 아릿하다 시시로 붉은 꽃피우는지 물컹한 근육의 힘들 왼쪽 무릎 관절반월이 다시 시큰하다 뿔을 가지고도 위협이 될 수 없는 무른 내력을 몸짓에 받아 들었다 끈적하게 뱉어낸 시름 하루를 끌고 간다 괄약근을 푼 주름마다 물비늘이 쓸쓸한 생은 숙성중이다 담요처럼 닳아가는 무릎을 읽는다 - 「달팽이를 읽다」 전문
세계 속의 개인이란 사실 매우 무기력한 존재이다. 시 속의 민달팽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간다. 가고 가고 또 간다. 결국 삶은 승패가 아닌 이러한 과정의 연속이며 승패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식물의 잎을 먹고 살아가는 민달팽이는 세상 더없이 약한 존재임에 분명하다. 그의 걸음은 느리고 또 느리며 근육은 무르기만 하다. “뿔을 가지고도 위협이 될 수 없는/ 무른 내력을 몸짓에 받아 들었”으므로 그의 생은 매우 취약하며 항상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그럼에도 멈춤 없이 간다. 민달팽이가 지나간 “물비늘이 쓸쓸한” 흔적은 “숙성 중인 생”에 대한 강력한 물증이다. 시인이 주목하는 부분이 이것이다. 오늘의 슬픔과 상처라는 건 비록 아프지만 살아있다는 것의 증명이고, 그런 살아있음에 대한 자각은 이제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을 찾아가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이승희 시인, 시집해설 「길은 내 안의 ‘쓸쓸함’으로부터 자란다」 중에서 |
첫댓글 "뿔을 가지고도 위협이 될 수 없는
무른 내력을 몸짓에 받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