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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김현옥 시인 : 대담-조기현 시인
단순함, 혹은 침묵의 깊이에 닿은 따스한 시
조기현 반갑습니다. 먼저 다섯 번째 시집 『댄싱 붓다들』 출간을 축하합니다.
김현옥 축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오신 모든 분들, 반갑고 감사합니다.
조기현 사실 김현옥 시인을 이렇게 직접 얼굴 대하면서 만난 것은 이번으로 두 번째이고 문학 담론을 나누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번 시집을 받고 이런 행사를 제안했지만, 저 또한 참 오랜만에 이렇게 대담자 역할을 맡게 되어 설레기도 하고 또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도 됩니다. 김현옥 시인도 이런 행사가 참 오랜만이죠?
김현옥 저는 이런 자리가 처음이어서 약간 얼떨떨한데, 토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조기현 먼저 궁금한 점 가볍게 질문합니다. 신춘문예 두 번 당선하고 등단한 지 30년, 그동안 모두 다섯 권의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지만 김현옥 시인은 여전히 시인으로서 그 존재와 위상이 우뚝하지 못합니다. 비평가들이 평론으로 다룬 적도 없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시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혹은 시대의 흐름을 놓쳐서 그런 것인지, 무엇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인지 궁금합니다.
김현옥 그렇습니다. 저는 주목받지도 못했고 오랜 세월 시를 썼으나 아직도 무명입니다. 5권의 시집을 펴내고도 시집으로 돈을 벌어본 적도, 상을 타본 적도 없습니다. 제게 있어 시집은 제가 피땀으로 만든 소중한 것을 세상에 건네는 마음의 선물 같은 거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선물이 잘 읽히기나 했나 모르겠습니다. 세상에게 시를 건네거나 나눌 수 있는 기쁨, 혹은 아직도 식지 않은 시에 대한 사랑이 세상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개의치 않고 지금껏 시집을 내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에 질문하신 제가 아직도 무명인 이유는 제 시가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제 시의 질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혹은 제가 제 시를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못한 저의 게으름 탓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누가 알아주건 그렇지 않든 그런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대학시절부터 그냥 시를 꾸준히 써왔습니다. 시인은 외부의 인정보다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인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시를 사랑하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아니까요. 아무런 원고청탁이 없어도 시가 제 속에 차오르니 그것을 썼는데, 그 시들을 세상으로 잘 내보내는 데는 실패를 한 듯합니다.
조기현 어쨌든 김현옥 시인은 주목받지 못한 시인이지만, 그래도 나는 매우 주목하는 시인입니다. 김현옥 시인을 주목하게 된 것은 첫 시집 『언더그라운드』부터였는데, 2008년도였던가요? 그 시집을 보면서 마치 이방에서 모국어를 듣듯이 반가웠습니다. 김현옥 시의 참모습과 그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을 조금이나마 알아보는 것이 오늘 북토크의 주제가 될 수 있을 듯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다섯 권의 시집에 드러난 시적 자아의 정체성이 ‘언더그라운더’·‘아웃사이더’·‘잉여’·‘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보이는데 본인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현옥 언더그라운드, 아웃사이더, 잉여, 무정부주의자, 다 비슷한 맥락입니다. 세상의 변두리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회에 속하지 않은 시적 자아로서 기존 사회의 제도나 구속에서 벗어난 존재들의 표상입니다. 혹시 조용헌의 책 『방외지사』를 읽어보신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존재를 꽃피우는 존재들로서 저는 그들을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역시 진정한 아웃사이더의 표상입니다. 먹이에 급급한 무리들에서 벗어나 높이 멀리 날기 위해 홀로 나는 연습을 하는 그 갈매기는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개척하는 아웃사이더입니다.
저의 기질에 관해 얘기하자면 저는 히피 기질이 다분합니다. 중학교 선생을 20년 하는 동안 억압과 강요와 획일성을 강요하는 현시대의 교육시스템에 적응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저 스스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일을 하고 2009년 명예퇴직 후 제가 살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살아왔습니다.
저의 삶의 가치 중 가장 우위에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그 어떤 권위에도 굴종하지 않을 자유, 내 존재를 꽃피울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내가 원하는 길을 갈 수 있는 자유, 그런 자유가 저의 삶엔 숨구멍처럼 필요했습니다. 세상의 기존 가치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럴,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며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않는 삶, 그것이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길을 택한 저는 바깥의 길보다 내면의 길을 탐색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었다 해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젊은 날부터 내부망명자였던 저는 제 안에 틀어박혀 골방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를 탐색하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시를 썼습니다. 그러니 세상물정 잘 모르는 건 당연한 결과였고 시대의 속도에 맞춰나가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저는 아날로그 정서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디지털의 편리함보다는 아날로그의 낭만성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시대의 속도에 맞추려 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속도를 고집해온 저는 자연스럽게 아웃사이더가 된 것입니다. 어쨌든 아웃사이더로서의 삶은 안정된 집단에서 벗어나 고독을 대가로 치러야 가능한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 아웃사이더는 사회로부터 추방된 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길을 찾아 나선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 누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색깔로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고유한 삶의 노래를 부르는 것, 그것이 아마 언더그라운드, 아웃사이더로서의 시인의 모습이지 않나 싶습니다.
조기현 사실 1980년대는 군부독재체제의 명령체계와 민족민중이라는 대항적 이념 담론이 맞서던 시기였습니다. 그 사이에서 ‘나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으로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고 삶을 시작해야 했던 청년 문학인들은 아웃사이더로서 자신을 자각하게 되기가 십상이었지요. 김현옥 시인의 문학도 그런 상황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에서 잠시 시인의 첫 시집에 실린 「언더그라운드」라는 시를 한번 감상해보겠습니다. 김현옥 시인이 육성으로 낭독하면 어떨까요. 부탁드립니다.
김현옥 네, 그럼 한 번 낭독해 보겠습니다.
언더그라운드
세상의 조명 할애받지 못해도
황홀한 술처럼 자신의 노래를 마셔주는
아름다운 귀들에게 뜨거운 서늘함
흘러넘치게 하는 언더그라운드
다만 노래가 좋아, 노래로만 치솟는
순결한 생, 누가 마셔도 가슴 흥건해지는
노래의 언더그라운드
그 무소의 뿔이, 나는 좋다
세상의 지면 할당받지 못해도
황홀한 꽃다발처럼 자신의 시를 받아 안는
아름다운 가슴들에게 어둠 속의 빛을
청아하게 수놓는 언더그라운드
다만 시가 좋아, 시로만 피어 있는
소박한 생, 누가 품어도 가슴 따스해지는
시의 언더그라운드
그 들꽃의 향기가, 나는 좋다
이 시에 나오는 언더그라운드처럼 저는 그냥 시가 좋아 시를 썼을 뿐입니다. 시는 저의 진실과 삶을 표현하는 통로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는 저의 속엣말을 들어주고 저의 슬픔과 외로움을 다독여주는 진실한 친구였습니다. 그러한 오랜 친구 같은 시와 놀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진실하고 순수한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했습니다. 마음의 순수, 그것이 바로 시의 바탕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기현 저는 개인적으로 아나키즘, 무정부주의에 상당히 경도해 있는 문학인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김현옥 시인의 시에서 아나키즘의 사상성을 짙게 느끼는 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의 시에 대해 좀 더 소개해 주시죠.
김현옥 ‘무정부주의자’는 정치적인 의미보다는 은유적인 것으로 이분법이나 경계에서 벗어나 모든 벽을 허물고 우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꿔보는 시적 자아입니다. 좌냐 우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이 무엇인가가 저에겐 가장 중요합니다. 제 삶과 시에서 진실의 탐구는 중요한 이슈입니다. 아직도 대한민국이 좌익이다 우익이다 나뉘어져 서로 비방하고 싸우는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다만 ‘좌 아니면 우’라는 범주에만 갇혀 있는 국민의 의식이 깨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사회를 바꾸려 노력하기 전에 먼저 우리 개개인의 의식혁명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저의 세 번째 시집 『그랑 블루』에 실린 「무정부주의자」란 시를 한번 감상해보고 나서 대화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무정부주의자
여기까지가 내 마음
저기부턴 네 마음
국경의 경비가 살벌해지면
마음은 언제나 시베리아 벌판
국경을 눈 녹듯 허물면
마음은 언제나 오아시스
내 마음에 네가 꽃피고
네 마음에 내가 꽃피면
마음은 언제나 꽃밭
걷고 싶다, 국경 없는 마음의 길
너와 내가 꽃으로 피어
삼팔선 없는 한반도에서
꽃밭 천지 지구 한 바퀴
시에서 나오듯이 저는 한반도도 통일이 됐으면 좋겠고 이 세계도 국경이 사라졌으면 좋겠고 너와 나의 마음의 경계도 사라져 우리 모두가 꽃으로 어우러져 피어나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조기현 김현옥 시인의 시의 어조에서 느끼는 바는, 용감함, 솔직함, 담백함이 매력입니다. 우리 시단에서는 신동엽 시인의 목소리가 그랬다 싶습니다. 이제 시인의 인생사와 시인 자신은 자신의 시를 어떻게 생각하며 쓰는지? 그런 얘기로 방향을 틀어보고 싶습니다. 스스로 아웃사이더 혹은 언더그라운드라 여기며 시인이 30년 동안 써서 세상에 내놓는 시, 그것을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 것인가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김현옥 뭉크가 자신의 그림을 일기라고 했듯이, 저의 시도 일기처럼 자화상이거나 제 삶의 풍경화들이 주를 이룹니다. 삶에서 경험한 것, 느낀 것, 그리고 자신과 삶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 등이 시로 써진 것입니다. 시적인 폼을 별로 취하지 않아서 소박하고 화장빨도 없고 화려한 의상도 입질 않아 눈길을 끌기에는 취약하지만, 시의 맛을 곰곰이 씹어보면 담백한 맛을 느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요란한 시대에 소박한 맛의 취향을 가진 독자들은 드물지요. 화려하고 뭔가 그럴듯해 보여야 눈길을 주는 세상이니까요. 그래도 저의 시에 감동하는 독자들도 있으니 아직은 시를 쓰는 보람이 있습니다. 독자들은 저의 시를 그냥 있는 그대로 맛보고 느껴보고 오래 씹으며 음미해 보면 좋겠습니다.
조기현 그러면 이번에 새로 나온 시집 『댄싱 붓다들』에 대한 얘기를 좀 해볼까요? 우선 이 시집을 ‘에토레 그릴로’에게 헌정한 시집으로 되어 있는데 그에 관한 얘기와 그와의 인연에 대해 좀 듣고 싶습니다
김현옥 네 번째 시집 이후 8년이 지나 출간된 이번 시집 『댄싱 붓다들』은 2021년 공모전에 투고하려고 이미 만들어 놓은 시집이었고 그때 공모전 실패 이후 컴퓨터 속에서 잠을 자던 시집이었습니다. 작년 11월에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저의 연인이자 남편 에토레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거의 삼사 주 만에 급히 출판된 헌정시집입니다. 제 마음속에서 지내는 에토레의 49제 전에 시집을 내서 하늘로 떠난 그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의 영혼에 바치고 싶은 마음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시집 속에 나온 시들 중에 여행에 관한 시들이 나오는데 에토레와 함께 여행한 장소들이 나오기도 해서 나름 헌정시집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를 위한 헌정시집을 내려고 문득 마음먹은 것은 그가 자신의 네 번째 책이자 마지막 책인 『November 2』를 나에게 헌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탈리아인이지만 영어로 소설을 쓴 작가였습니다. 그에게서 책을 헌정 받았을 때의 기쁨과 행복을 기억하기에, 작별 인사도 못하고 급히 세상을 떠난 슬픈 그의 영혼에게 그 기쁨과 행복을 선사하며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댄싱 붓다들』은 에토레의 죽음으로 인해 탄생한 시집이어서 위로와 축하를 동시에 받은,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시집입니다. 에토레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이번 시집을 내었지만, 내고 나서는 이 시집으로 제가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년간 떠나있었던 시가 다시 제게로 왔고 제가 다시 시에게로 돌아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시집을 받은 분들이 위로와 축하를 보내줘서 절망적이었던 마음이 조금씩 추슬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에토레와는 2009년 인도 푸네의 오쇼국제명상센터(Osho International Meditation Resort)에서 만나 십여 년 연인으로 지내다가 2021년 결혼이란 절차를 거쳐 부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년 시칠리아와 인도, 한국을 오가며 따로 또 같이,의 생활을 하다가 2021년부터 시칠리아에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작년 가을 한국에 다니러 왔다가 생각지도 못한 변을 당하게 된 거지요. 14년 동안 우리는 함께 지상의 아름다운 곳들을 많이 여행했고 서로 사랑하며 행복했습니다. 제 인생의 화양연화는 에토레와의 시절이었습니다. 명상과 글쓰기와 음악이라는 교집합이 있어 서로의 내면을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조기현 갑작스러운 에토레의 죽음에 대한 것을 듣고 보니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삶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제 다른 주제로 넘어가서, 제가 보기에 김현옥 시인은 사물과 세계를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는 듯합니다. 사물에 대한 감각적 경험이나 일상적 혹은 사회역사적 관심을 표상하기보다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실존적 혹은 존재론적인 사유에서 얻은 인식을 시적 언술로 형상화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현옥 저의 시들 중에는 존재론적인 성찰과 통찰로 쓴 시들이 많습니다. 저는 존재와 삶의 진실에 대한 탐구에 관심이 많습니다. 내면 탐구와 진실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자신만이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알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지요. 실제로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자신에 대해 무지하게 마련입니다. 내면과 본질에 대한 관심이 존재론적인 혹은 내면적인 시를 쓰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진실을 통찰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길러야 자신 혹은 사물, 세상 혹은 삶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한 눈은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닦아야 밝아지겠지요.
조: 김현옥 시인의 시 세계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려 합니다. 김현옥 시인의 시 세계는 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한 시인의 전체적인 시 세계 혹은 이번 시집을 하나로 집약해서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그래도 많은 시들 중 한 편, 그 한 편으로써 시인의 시 세계를 총체적으로 해명해 줄 수 있는 작품이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아웃사이더의 변명」으로 김현옥 시인의 시 세계를 밝혀 보려 합니다.
이 시는 시인 자신이 자신을 아웃사이더라 밝히고 있고, 아웃사이더로서 살아온 삶의 내력과 의미, 그리고 지향점을 드러내 주고 있다고 봅니다. 아웃사이더라는 키워드를 세계 문학에 등장시킨 작가는 콜린 윌슨입니다. 그는 19세기 이래 유럽 문학과 철학에 걸쳐서 여러 작가가 형상화해 놓은 숱한 아웃사이더라는 존재들을 발굴했습니다. 그가 다룬 작가는 카프카, 앙리 바르뷔스, 니진스키, 도스토옙스키, 니체, 싸르트르 등등.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웃사이더의 존재는 20세기 세계문학의 거대한 줄기가 됩니다. 아웃사이더는 비주류, 국외자, 열외자, 소외자 등인데, 정치적 집단 갈등이 있다면 어느 시대나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보편적이며 문명사적인 문제로 자각되고 문학의 테마로 제기된 것은 근현대사회에 들어서입니다. 아웃사이더는 바깥으로 밀려나서 혹은 스스로 물러나서 존재의 진실을 보는 자입니다. 아웃사이더는 문명사회의 부조리를 꿰뚫어 보고 고발하며, 스스로 세속의 삶을 유보한 채 문학적 언술로서 진리를 개진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김현옥의 시 「아웃사이더의 변명」을 한번 읽어보고 말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읽을까요? 아니 우리 방청하시는 독자님들 중에 누가 한 번 낭독해 주시죠.(독자 낭송)
아웃사이더의 변명
풀 나무 꽃의 이름
공부하지 않았으므로
부끄럽게도, 호명할 수 있는 이름 몇 안 되지
그래도 세상의 교실 밖을 나와
풀에게 나무에게 꽃에게 말 걸었더니
통성명하지 않아도 희한하게 말은 잘 통하네
사교나 비즈니스 비결
공부하지 않았으므로
내 마음의 수첩에 기록된 이름 몇 안 되지
그래서 세상의 교실 밖을 나와
만날 이 없을 땐 저물녘 강둑에 앉아
강물에다 수취인 불명의 편지나 써 보냈지
출세와 명예를 적금 붓는 행복
공부하지 않았으므로
충고하는 그들의 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
그래서 세상의 교실 밖을 나오니
갈 데라곤 내 속으로 난 길밖에 없더군
그 좁고 어두운 길 위에서
적막을 작곡해 보거나 연주해보기도 했어
세상의 교실에서
교과서적인 삶을
공부할 마음이 통 안 났었지
늘 어눌한 나의 발걸음은
세상물정 몰라도 한참 몰랐네
그래도 웃으며 산책하는 덴 별 지장 없더군
조기현 낭송 감사합니다. 세상의 교실에서 부적응한 것이 일견 문제의 사태인 것 같지만 지나고 보니 실제 별문제가 되지 아니하였으며, 어쩌면 오히려 역설적으로 자유로운 삶, 소박하고 진정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계기였다고 이 시의 내용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교실은 자아를 억압적인 질서 -자본과 권력으로 교직된 이데올로기 체제- 에 편입시키려 하지만 시적 화자는 그런 세상의 교실을 벗어나 웃으며 산책합니다. 웃음은 주체에 대한 억압의 실패이며, 주체의 자유의식의 표출입니다. 그러한 ‘세상의 교실, 교과서적인 삶’에서 벗어나 홀로 웃는 시적 화자는 자발적인 아웃사이더입니다. 세상의 교실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온 것이므로, 자기 삶을 세상의 가치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서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20세기 아웃사이더 문학의 테제는 부조리한 세상을 고발하거나 비극적인 자아상을 그리는 것이 주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카프카나 이상 등에서 보듯 20세기 문학에서는 모두 부조리한 세계를 그리는 데 머물 뿐, 특히 이상의 경우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가 절망을 낳는다.”고 했던가요. 그로부터의 초월이 엿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21세기 아웃사이더 문학은 그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아가 어떻게 맞서며 초월해 나가는가,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이 여전히 더욱 심각하게 부조리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는 진실을 여실히 그려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현옥 시인의 시에서의 ‘웃음’과 ‘산책’은 바로 그런 점에서 음미할 가치가 있습니다.
김현옥 네, 선생님의 아웃사이더에 대한 해설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언급하신 대로 저는 주체적인 삶의 길을 선택한 아웃사이더였기에 천천히 가는 산책과 같은 삶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만약 추방되었더라면 그렇게 살 수 없었겠지요.
조기현 이 이야기는 평론가로서 제 나름의 해설이라 생각하시고, 달리 질문을 이어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시작 방법에 관해서 질문합니다. 혹시 시작법에서도 자신이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김현옥 시작법에 있어서는 제 맘대로 자유롭게 쓰는 것이기에 아웃사이더인지 인사이더인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어떤 이론이나 형식에 따르는 게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저의 감각에 따라 쓰는 편인데, 시인 중에 그런 시인들도 많이 있지 않을까요? 여기서 저의 시작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저의 세 번째 시집 『그랑 블루』에 실린 「작시법 作詩法」이란 시를 한번 감상해보겠습니다.
작시법 作詩法
시가 작법 속에 갇히면
갑갑하지 않을까?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시가
장수하지 않을까?
야생의 가슴에서 피어나는 들꽃에게
비싼 기교의 꽃병이 꼭 필요할까?
도매 꽃시장 주인의 기술 연마해야 하나?
가슴 들판으로 소풍 온 당신들에게
초롱초롱한 들꽃 한 다발 품에 안겨주면
당신들 가슴이 꽃병이 되지 않을까?
푸른 가슴 속에서
숨길 수 없는 열꽃들이 폭발하면
느닷없이, 시가, 마그마처럼
위의 시에서도 나오듯이, 저는 시를 그냥 느끼는 대로, 속에서 나오는 대로 쓰는 편이라 제 시는 별로 작위적이지 않고 이미지보다는 존재론적입니다. 시가 다소 투박하고 멋이 없고 어떨 땐 촌스럽기까지 합니다. 꾸미지 않고 자연 그대로, 생긴 그대로 살아가는 저와 시가 서로 닮았다고 봅니다.
조기현 시인들이 많아지고 그들이 써내는 시 작품의 양도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엄청난 요즘, 그러한 시들을 애써 읽어보건만 무슨 방언으로 하는 기도인양 알아들을 수 없기도 하고, 별 뜻 없는 넋두리나 늘 하던 이야기를 되뇌는 경우도 많고, 혹은 시 정신을 강화 단련하기보다 기예를 다루듯이 수사의 기술을 자랑하려는 태도도 흔히 보입니다. 그에 비해 김현옥 시인의 시는 투박하지만 진솔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김현옥 시인의 관점에서는 요즘의 시적 경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본인은 시를 어떻게 배웠거나 익혔으며, 자신과 다른 시인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방법이나 자세로 시를 써나가려는지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김현옥 머리로 시를 쓰는 시인들, 가슴으로 쓰는 시인들, 온몸으로 쓰는 시인들, 영혼으로 쓰는 시인들이 있듯 시인들은 자신의 세계를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시를 씁니다. 시는 시인의 기호에 따라 쓰는 것이므로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다양한 시들 각각 그 나름의 풍미가 있습니다. 그 어떤 풍미가 한때 유행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유행에 따라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시를 쓰면 독자들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시를 골라 읽으면 되니까요. 어쨌거나 비록 제가 이해할 수 없이 난해한 시라 할지라도 ‘아 그렇게도 시를 쓰는구나’, 하는 정도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슴으로 영혼으로 쓴 시들을 선호합니다.
저는 대학 때부터 시를 자발적으로 썼는데 시집을 읽고 사색하고 홀로 썼습니다. 스승이 없어서 저의 시는 가지치기를 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뻗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먼 길을 우회하긴 했지만 제 나름 스스로 시의 길을 찾아서 갔으므로 저의 목소리를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습작의 길에서 서로의 시를 북돋워주는 친구도 없었고, 등단할 때까지 제가 시를 쓴다는 걸 아는 사람이 주위에 거의 없었습니다. 고독한 길에서 제 나름의 감각을 통해 스스로 시의 스타일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가슴 속에서 흘러나오는 걸 쓰는 시였으니 머리가 필요한 기교적인 측면에서는 조금 미약한 편입니다만, 저의 시들이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울림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저는 시를 썼습니다.
그동안의 저의 시는 제 목소리로 부르는 제 삶의 노래 정도입니다. 앞으로 저의 시는 세상에 대해 좀 더 열려 있어야 하고,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는 시를 써보려고 합니다.
조기현 가정해 봅니다. 시인의 시가 더 이상 아웃사이더로서 세상과 맞서는 데 중심을 두지 않는다면, 자연히 다른 길, 다른 가치, 다른 자세로 지향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테면 카프카는 가부장적 체제나 인간중심주의가 빚는 억압으로부터 탈주하고자, 동물-벌레나 개로 변신하는 모티프로써 새로운 삶, 그러니까 모성적, 야생성, 본연으로의 생성기제를 제시하려 했습니다. 아웃사이더나 언더그라운드로서 지녔던 세상에 대한 비관, 그 너머로 꿈꾸는 세상이 김현옥 시인에게도 있다면 그것은 어떤 세상일까 궁금합니다.
김현옥 제가 간 아웃사이더의 길은 세상과 맞서는 길이 아니라 좀 더 저의 본질을 찾아가는 길이었고 또한 세상으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세상을 바라보는 길이었습니다. 숲에서 나와 숲을 바라보면 숲이 더 잘 보이는 것처럼 저는 세상을 관조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세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팽배한 물질주의, 속도주의, 기계화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 등등. 이러한 황폐한 세상 속에서도 저는 서로 함께 꽃피어 꽃밭을 이루는 세상을 꿈꿉니다. 저마다 환하게 피어나는 세상. 인간다운 세상. 그래서 여전히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시가 세상에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기현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명상’에 관한 것입니다. 시집을 읽다 보면 명상적인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명상’이란 것이 어쩌면 시 창작에 있어서 아웃사이더로서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유혹하는 ‘아르키메데스의 점’과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닌지,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언제부터 명상을 접했는지, 그리고 어떤 명상을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김현옥 아무리 시를 써 봐도 삶의 허무증은 치유되지 않아 1996년도에 요가를 시작했는데, 요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명상을 접했습니다. 대학시절 오쇼의 『마하무드라의 노래』를 읽고 잊고 지내다가, 요가와 더불어 ‘오쇼 명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9년 1월에 인도의 ‘오쇼국제명상센터’에 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오쇼 명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쇼가 제시한 동적인 명상들 중 저는 ‘다이나믹 명상’을 아주 좋아하고 많이 했는데, 그 명상의 좋은 점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쓰레기들을 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쿤달리니 명상, 춤 명상, 웃음 명상도 해보면 좋습니다. 처음 그곳을 다녀온 이후 제 의식의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오쇼의 말씀,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라는 것을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오쇼는 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며 삶을 축하하고 삶을 노래하고 춤추며 축제처럼 살라는 오쇼의 가르침을 접하기 전까지 제 삶은 그저 견뎌가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무슨 대단한 초월이나 신비체험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깨어 있을 것,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기쁘게 감사하게 살아갈 것, 이것이 아마 명상의 알파와 오메가가 아닐까 합니다. 이십여 년 동안 몇 번을 제외하고 거의 매년 겨울, 인도로 날아가곤 했는데 인도에서 저는 천천히 살아가는 것을 배웠습니다. 천천히 가도 삶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요. 인도인들이 걸핏하면 하는 말이 ‘노 프라블럼!’입니다. 오히려 천천히 가면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의 여백을 가지는 것이 명상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기현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할 지점인 듯한데, 저는 김현옥 시인의 앞날을 기대하면서 이런 얘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사실 이 행사를 준비하면서 제가 김현옥 시인에게 던진 말이 있습니다. 김현옥 시인이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아니 해야겠습니다. 우리 한국문학에서 노벨문학상을 받을 시인이 누구인가? 하는 화제였는데, 저는 고은 시인의 문학은 이미 지난 시대의 것이 되었고, 또한 대한민국의 남성 문학 작가는 아닐 것이고, 보편성, 저항성, 여성성 등의 함수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나올 것이라 본다, 그러면서 얼마 전까지는 김혜순, 문정희 시인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 김혜순 시인이 시집 『날개 환상통』으로 한국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BCC 어워즈) 시 부문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접하지 않았습니까. 개인적인 소견이나 저는 김현옥 시인도 앞으로 다섯 권쯤 더 좋은 시집을 낸다면 세계적으로 뚜렷한 문학인의 위상을 지닐 수 있다고 봅니다. 끝마무리로 시인은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은지, 독자들과 동료 문학인들이 다 함께 마음을 모아 지향해 가고 싶은 문학의 방향을 구상한다면 어떠할지 마무리 말씀을 부탁합니다.
김현옥 저의 앞날에 대해 덕담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슨 유명한 상이라 해도 그것의 권위에 굴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특히 노벨상 같은 것은 정치적인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심사위원들 모두는 과연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고, 공평할까요? 세상이 주는 상을 받지 못한다 해도, 다만 저는 단순함의 깊이, 혹은 침묵의 깊이에 닿은 따스한 시들을 쓰고 싶습니다. 슬픔과 고통에서 걸러진 투명한 시들, 아픈 영혼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시들, 녹슨 마음을 닦아주고 얼은 마음을 녹여주는 시들, 위로를 넘어서서 치유의 힘을 가진 시들, 그런 시들을 쓰고 싶습니다. 진실로 그러한 시를 써서 세상과 나눌 수 있다면 그 기쁨이 저에겐 이미 크나큰 상입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유명한 책이나 베스트셀러만 쫓아가지 말고 진실로 작가의 영혼이 녹아 있는 책들이 어떤 건지 스스로 탐구하는 자세로 책을 선택하고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시인들 역시 독자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시를 써서 세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하는 데 한몫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 사이펀과 여기 오셔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