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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제 자립생활을 이야기하자! - 남병준(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
차별과 폭력의 ‘도가니’를 넘어
장애인생활시설에서의 인권유린 실태에 많은 사람들이 경악하고 있다.
그래서 장애인에 대한 성범죄를 강력히 처벌하자고 한다. 맞다. 그래야 한다.
단지 이것이 가지치기에 그치지 않으려면, 사회복지사업법을 개정해서 비리와 인권유린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맞다. 정말이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이고 최선일까?
죄지은 자들은 감옥으로 보내고, 피해자들은 문제가 없는 다른 시설로 옮겨가면 해피엔딩(happy ending)으로 종결되는 것일까?
장애를 가진 사람은 세상과 떨어진 감옥같고 병원같고 군대같은 곳에서 한 평생을 사회에서 격리되어 살아가도 좋은 것일까? 시설에 사는 장애인들은 강간당하지 않고, 두드려 맞지 않고, 배곯지 않고, 강제노역이나 당하지 않으면 되는 것일까?
장애인의 현실 --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장애인생활시설에서의 인권유린의 가장 근본적 원인은 장애인을 시설로 쫓아내는 사회, 장애인이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사회에 있다.
- 1년에 외출을 열 번도 못하는 장애인 10만명. - 전체 장애인중 49.5%가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 (2008년 보건복지부 장애인실태조사) - 생활시설에 사는 장애인 77%가 본인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입소했다고 응답.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 장애인생활시설 인권실태조사) - 최근 5년간 보도된 장애인가족 자살사건만 15건. (2010년 인터넷 신문기사 검색) |
2005년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장애인실태조사에 의하면 1년에 열 번도 외출을 하지 못하고 사는 장애인이 무려 1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또, 전체 장애인중 45.2%가 초등학교 졸업이하의 학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약35만명이 일상생활의 대부분에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데, 이들중 절대다수는 가족의 도움에 의존해서 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중증장애인의 경우 비장애인보다 한달 약20만원의 생활비가 추가적으로 소요되지만, 장애가 중할수록 경제활동에 참가하기 어렵고, 대부분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족의 보호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중증장애인의 삶이란 어떤 것이며, 중증장애인을 부양하며 사는 가족의 삶이란 또 어떤 것일까?
최근 5년간 장애인가족의 자살사건이 무려 15건이나 언론에 보도되었고, 시설장애인의 대부분이 본인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입소했다고 답했다. 이것은 결국 ‘장애인이 살아갈 수 없는 사회’, 가족이 버티고 버티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면 결국 ‘시설로 보내지는 현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당신은 장애인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질문이 너무 막연하게 들린다면 구체적으로 물어보자.
“한국에 장애인은 몇 명이나 있을까?”
상식일 것 같은 질문이지만, 곧바로 답할 준비가 된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의 장애인 현황은 대략 이렇다.
2010년말 현재 한국 총인구 약5천만명, 그중 등록된 장애인은 약250만명으로 장애인구 비율은 이제 약5%에 이른다. 장애의 유형은 15가지 종별로 구분되어 있고, 장애정도에 따라 1급부터 6급까지 등급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한국의 복지제도는 이러한 등급제도를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장애인현황에 관한 일반정보는 정작 중요한 것은 설명해주지 않는다.
또 다시 질문을 바꾸어보자.
“장애인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기준으로 정해지는가?”
어떤 의사나 법률가나 정치가도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갖고 있지 못하며, 장애인에 대한 규정도 사회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장애인구 비율이 나라마다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그 나라 국민들의 ‘몸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인식과 제도의 범주를 말해줄 뿐이다.
주요국의 장애인 출현율 (단위: %)
구분 |
한국 |
일본 (2000) |
독일 (2003) |
미국 (2000) |
영국 (2004) | |
(2005) |
(2010) | |||||
출현율 |
4.59 |
5.0 |
4.7 |
10.2 |
19.3 |
19.7 |
‘장애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고, 의료적인 문제이고, 당신의 불행과 고통은 당신의 몸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못한 탓’이라는 생각은 아주 오랫동안 장애인차별을 정당화시키고 재생산 하는 기능을 해왔다.
이것에 맞서 ‘장애란 사회적인 관계의 표현이고, 신체적 기능의 문제와 불행한 삶의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며, 결국 사회가 각 개인의 고유한 환경과 욕구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는가의 문제’라고 주장하며 장애인운동은 장애인의 권리보장과 환경의 변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장애란 개인의 의료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권리의 문제이다.
요컨대 ‘당신의 몸은 몇 점 짜리인가’를 묻고, 그것으로 장애인을 규정하고 구분하는 것 자체가 차별적이라는 것이다. 장애인이란 결국 장애로 인해 생활에 불편을 겪는 사람이라는 뜻에 불과하며, 정말로 물어봐야 할 것은 ‘당신의 삶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것이다.
장애인운동의 역사는 편의시설과 복지제도 등을 요구하는 투쟁 뿐 아니라, 장애인에 대한 온갖 차별적 미신들을 거부하고 당당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식하고 확장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No pity!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말라!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를 인권이라고 한다. ‘누구나’란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장애를 갖지 않은 사람도 포함된다는 뜻이다.
‘장애인 인권’이라는 말은, 장애인에게만 특별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인간도 마땅히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기본적 권리를 가진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며, 개인이 갖는 특성에 맞추어 보편적 권리가 보장될 수 있도록 구체적 지원을 하는 것이 복지제도의 역할이자 책무인 것이다.
국제장애인권리협약에 명시된 권리
(2006년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
교육권, 건강권, 노동권, 정치적·공적 생활 참여권, 문화생활 참여권, 지역사회에 살 권리, 적절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권리, 생명권·자유권·개인의 안전권, 차별없이 법 앞에서 평등, 법과 법률 능력앞에서 동등한 인정, 고문으로부터의 자유, 착취·폭력·학대로부터의 자유, 있는 그대로의 신체적·정신적 상태를 존중받을 권리, 이주와 국적의 자유, 표현과 견해의 자유, 사생활의 존중, 가정과 가족의 존중
인권은 살아움직이는 것이다.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저절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법테두리에 가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장애인도 편리하고 안전하게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권리가 있지만, 우리 사회는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지 않았고, 국어사전에 ‘이동권’이란 말조차 없었다. 하지만, 장애인 스스로 이동의 권리를 찾아내고 투쟁으로 만들어내고, 결국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2003년에는 국립국어원에서 이동권이란 단어를 ‘신어’로 수록하기에 이르렀다.
이동권(移動權) : 명사 <신어, 2003년> 국립국어원 ‘신어’ 자료집에 수록된 단어입니다. [명사] 이동할 수 있는 권리.
[자료출처 : 네이버사전]
자립생활은 장애인의 당당한 권리!
장애인자립생활운동은 장애에 대한 생각에서부터 장애인복지의 패러다임과 구조를 크게 바꾸고 있다.
‘장애’를 신체기능의 손상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개인적 불행이라 규정하고, 복지의 목적은 장애인에 대한 ‘보호’와 ‘관리’이며, 장애인의 삶은 전문가와 보호자가 관리감독하며, 장애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환자역할이 전부였던 구시대적 철학과 복지제도는 장애인의 당당한 인권선언 앞에 하나씩 무너져갔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장애인자립생활 패러다임은 ‘장애’를 사회적 관계의 문제로 인식하고, 복지의 목적은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것이며, 장애인 스스로 자신의 삶에 관한 것을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핵심적 내용으로 한다.
장애인복지의 대상에 따른 세 가지 패러다임 비교 (Neumann, 1994)
개념 |
보호/관리 |
후원/지원 |
동반 |
시기 |
전후- 60년대 |
60년대- 90년대 초 |
약 90년대 중반부터 |
초점 |
시설수용 |
탈시설화 |
지역사회 |
대상자 |
환자 |
수혜자/고객 |
시민 |
인간상 |
생물학적/허무주의 |
교육학적/긍정주의 |
인류사회학적/ 동등한 인성으로 인정 |
지원목표/우선순위 |
기본적인 욕구관리 =깨끗하고, 배부름 |
경쟁력강화 =기술습득, 행동조절 |
삶의 질 =자기결정권 영위 |
서비스공급범위 |
시설 |
그룹홈, 특수학교 |
가정, 일반학교 |
전문 지원 |
최고의 모범(사례화) =간호, 영양 강화 |
재활후원계획안 =교육 연속성강화 |
개인별미래계획 =자기계획 수립/실천 |
제공되는 서비스 |
관리, 보살핌 |
후원, 지원/프로그램 |
활동보조, 개인별동반 |
지원모델 |
의료적 모델 =보호감호, 치료 |
재활적 모델 =발달심리, 관계치료 |
자립생활모델 =개인별/지역사회 열린 지원 |
지원계획결정과 통제 |
전문가 =의학자, 간호사 |
상호훈련/협동적인 팀 =교육가, 치료사 |
개인 =장애인 당사자 |
문제정의 |
장애, 손상, 결여 |
의존, 비자립 |
참여를 위한 환경장애 |
문제해결 |
관리, 치료 |
제한된 환경의 최소지원, 후원 |
사회참여를 위한 환경개선 및 신환경 창조 |
탈시설-자립생활을 위하여
지난 10여년간 장애인운동은 자립생활의 권리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왔다. 장애인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목숨을 걸고 지하철선로를 점거한 투쟁, 장애인교육권 보장을 요구하며 전국 모든 교육청에서 일어났던 농성투쟁, 활동보조 제도화를 요구하며 한강다리를 기어서 건넜던 투쟁,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농성투쟁,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을 위한 삼보일배 투쟁, 각 지역에서 벌어진 장애인주거권 투쟁, …. 이 모든 것들이 장애인의 자립생활 권리쟁취를 위한 처절한 투쟁의 과정인 것이다.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활동보조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권리로 보장되어야 하고, 자립생활을 위한 주거지원 정책이 필요하며, 최소한의 소득이 보장되어야 한다. 지금 진보적 장애인운동이 활동보조권리보장과 장애인주거권보장, 그리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투쟁에 매진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도가니방지법’이 만들어져서 시설비리와 인권유린이 크게 줄어들더라도, 장애를 가진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라면 장애인들은 계속 시설에 보내어질 것이다.
그곳에서의 삶은 여전히 감옥같고, 병원같고, 군대같을 것이며, 여전히 자신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는 존재감조차 가질 수 없는 대상화된 삶을 강요당하게 될 것이다.
장애인을 저 멀리 격리시킨 세상은 여전히 장애인이 살 수 없는 사회구조를 정당화시키고 차별의 벽을 굳게 지킬 것이다.
이제 장애인에 대한 ‘시설보호’를 당당히 반대하자. 그것은 구시대적 철학과 복지제도의 결정체이며, 장애인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배제시킬 뿐 아니라, 장애인을 자신의 인생으로부터도 철저하게 소외시키고 대상화시키는 잔혹한 폭력임을 분명하게 폭로하자.
이제 장애인의 자립생활권리를 당당히 요구하고 투쟁하자.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인간의 기본적 권리이며, 장애를 가진 사람이 더 이상 시설에 보내어지지 않고, 가족에게 짐스런 존재로 살아가지 않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임을 선언하자.
* ‘장애여성공감’에서 도가니 열풍에 대해 내놓은 논평을 그대로 싣습니다. 함께 나누고 고민해 볼 문제라 생각됩니다. 도가니를 보며 분노한 여러분, 함께 고민해 보는게 어떨까요?
[논 평]
‘도가니’, 분노하는 우리들이 돌아보아야 할 것
영화 <도가니>가 거대한 바람을 몰고 왔다. 영화 흥행기록이 보여주는 양적인 성공 외에도 빠른 시간 안에 사회적 공감대와 분노를 불러일으킨 점에서 그야말로 성공적이다. 여세를 몰아, 장애인․성폭력 관련 법과 장애인시설 관련 제도 개선 등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는 문제들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인화학교 재수사를 촉구하는 풀뿌리 서명운동도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라면 일정정도의 현실 변화를 기대해볼만 하다.
그런데, 현장에서 장애인성폭력사건을 지원해온 본 단체는 지금의 ‘도가니 사태’를 지켜보며 복잡한 심정에 빠진다. 영화로 돌아가 생각을 해보자. <도가니>는 주인공 인호(공유 분)의 시선을 따라간다. 영화에서 인호라는 대리자의 시점은 인화학교 사건 피해자들의 처절한 일상 현실에 접근하는데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 부모가 없는 장애아동, 연고는 있으되 실질적으로 보호를 해줄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 놓인 장애아동의 일상은 대리자의 눈으로만 일부 ‘보여 진다’. 그 누구라도 장애아동에게 놓인 현실의 처절함이 어떤 것일지는 보여 지는 딱 그만큼의 수준 이상 다다를 수 없다. 다만 인호처럼 우리는 ‘엄청난 사건’을 보고 분노하고,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사건 해결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위안을 얻을 수는 있다. 이것이 영화가 높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이유일 것이다.
인호는 소위 ‘보호자들’이(영화 속의 교사들이) 장애아동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인권을 참혹하게 유린 하는 상황을 발견하고, 또 다른 ‘보호자’로서 사건을 해결하는 인물이다. 인호는 우리를 포함해 장애인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지원자 내지 보호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고, 이렇게 ‘힘없는 장애인’과 ‘보호자’라는 구도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의심해야 할 시선이다. 장애인은 시설에서 ‘보호를 받는’ 입장이나 사건해결의 ‘대리를 받는’ 입장에 놓인다. 그런데 장애인을 보호하고 대리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선택이냐는 것이다.
한편, 영화에서 사건의 해결은 두 가지 차원, 즉 현실 법제도에서 장애아동이 성폭력피해를 인정받는가와 불의를 저지른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가에 집중된다. 이는 지극히 사회적 ‘상식’ 선에서의 해결이다. 그러나 성폭력피해 장애아동의 입장에서, 현행 법제도 내 수사․재판 과정에 참여하는 것 자체는 가해자 처벌의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엄청난 고통이다. 영화에서 법정 증인신문 중 오줌을 지리는 유리(정인서 분)의 모습이 잠깐 스쳐 지나간다. 그들의 입장에서 근원적 고통과 공포 자체인 법제도, ‘정상’ 사회의 틀 자체는 가치 판단의 심판대 위에 소환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어린 나이부터 시설에서 자신의 유일하고 중요한 ‘보호자’에게 인권유린을 당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상식’의 경험을 박탈당하고, 사회의 ‘정상성’에서 근원적으로 배제되며 살아온 그들이다. 그 아동들이 사회적 ‘상식’ 혹은 ‘정상성’의 법제도 틀 안에서 피해를 인정받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해결지점으로 생각할거라는 전제는 의심해봄직 하다. 이는 어디까지나 기존 법제도라는 ‘상식․정상성’에 안전하게 기대 살아온 ‘우리’, ‘대리자’의 시선이자 욕망이지 않을까? 피해 장애아동들이 기존의 상식 자체를 냉소하고 뼛속 깊이 불신하는 편이 오히려 설득력 있어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되짚어 봐야 할 지점이 무엇인가 질문해야 한다. 장애인 뿐 아니라 여러 소수자 문제 틀 자체가 ‘정상’ 사회의 시점에서 대리되는 것은 한계와 위험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문제에 분노하고 이를 해결하는 것은 기존 사회의 안락함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만 허용되고 공감대를 얻을 수 있다. 영화 혹은 대리자의 시선에서가 아닌, 실제 우리사회에서 장애인에게 어떤 현실이 존재하는가?
장애아를 출산한 부모가 양육을 포기한 채 버리는 현실에서 입양도 되지 않아 수많은 무연고 장애아가 장애인 시설 수용을 필요로 한다(말할 것도 없이 그런 장애인 수용시설의 존재는 <도가니>의 현실이 발생한 일차적 배경이다). 장애여성에겐 임신과 출산이 필요치 않거나 막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많은 보호자들이 장애여성의 의사와 상관없이 불임시술을 종용한다. 장애아동․청소년이 학교나 또래집단에서 ‘왕따’나 폭력을 경험하고 그 후유증으로 정신질환까지 갖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교육이나 노동의 기회를 비롯한 기본적 사회 관계망을 가지기 힘든 많은 장애여성들은 가정이나 시설, 지역에서 가족(보호자)이나 이웃에게 지속적으로 (성)폭력에 노출된다. 사회적 ‘상식’의 기준을 의심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러한 현실을 사실상 암묵적으로 용인해왔다. 그러면서 동시에 ‘정상/비정상’의 구분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며 ‘정상’사회의 안전함을 지켜왔다.
지금 우리가 ‘분노’하거나 ‘위안’하는 것의 실체는 무엇이고, ‘도가니 사태’의 의미는 무엇인지, 우리들 스스로에게 먼저 질문해야 할 때다. ‘그들’과 나의 거리를 좁히고 직면할 때 <도가니>를 넘어설 수 있다.
2011.9.30
(사)장애여성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