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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연휴가 지났다. 연휴의 끝에는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아주 화창하다. 알싸한 가을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나 보다.
여자들이 싫어하는 남자들의 화제 베스트 3는 군대 이야기와 축구 이야기, 그리고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라고 하던가? 나도 군대생활에 얽힌 이야기는 할 게 많다. 그러나 축구에 관해선 특별히 할 이야기가 없다. (요즘 한국축구에 대해서는 할 말이 조금 있지만..) 더구나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는 더욱 없다. 군대에서 축구를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우리 부대는 그랬다. 특공대니까.
어쨌든 군대이야기는 특별하지 않으면 안 하기로 내 일찍이 마음먹었었다. 그래서 오늘은 예비군 이야기>
나는 제대를 하고 금방 복학을 했다. 겨우 한 달 놀고 나서. 참 아쉽다. 인생의 황금기였는데. 학교를 다녔으니 당연히 학교예비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101 학군단 산하의..
학교예비군.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학문을 숭상해서 그랬는지 '학교'라는 말이 들어가면 참 관대하다. 예비군도 그랬다. 직장에 소속된 직장예비군이 동네 예비군보다 일반적으로 편하기 마련인데 (정말로 일반적인 경우일 때만 말이다. 동네 예비군 중대장과 평소 친분이 있다던가 하면 동네가 백 번 편하다. 세상사가 다 그렇지 않은가? 동네 형님, 동네 아우, 고향 형님, 고향 아우, 고교 선배, 고교 아우, M고, M 상고, K고, K 상고 ..). 학교예비군은 더 편하다. 우선 훈련시간도 짧고, 그나마 수업을 핑계로 훈련이 방학 때 잠깐 있을 뿐이다. 제대하면 바로 몇 년간 해야하는 동원훈련도 면제되었다. 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나라의 배려이다. 그걸 깨닫고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하여간 예비군으로선 참 좋은 시절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직장에 들어가자 나의 소속도 직장예비군으로 바뀌었다. 직장예비군은 직장에서 훈련을 받는다는 잇점은 있었지만 학교예비군 같이 특별한 혜택은 없었다. (집에서 직장이 먼 사람은 경우에 따라 동네 예비군이 더 편하기도 했다. 그래도 우선 순위가 직장예비군이어서 누구나 직장이 있으면 의무적으로 직장예비군이 되어야 했다)
군복무를 마친 사람이 예비군에 편입되면 초기에 몇 년간, 즉 아직 젊고 써먹을 만할 때에는 동원예비군이라고 해서 유사시 나라의 부름에 동원되는 예비군에 소속된다. 그래도 이 때까지는 아직 기계가 쓸 만하다는 뜻일 게다. 나도 직장예비군에 소속된 후 바로 이 동원예비군 훈련을 다녀오게 되었다.
때는 1983년 초봄. 말이 초봄이지 늦겨울이라고 해야 할 철이었다. 나는 그 전해 12월에 결혼을 했기 때문에 신혼도 아주 신혼일 때였다. (추운 겨울에 결혼해야 금슬이 좋다고 누가 그래서.. 추워야 서로 들러 붙는다나 어쨌다나..하긴 에어콘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으니까 여름에는 들러붙기도 고역이었을 거다) 그런 때에 1주일간이나 나라에 소집되었으니 그 분위기는 마치 신혼 초야를 서둘러 치르고 전장으로 떠나는 독립군 남편과 새색시의 이별 장면 같았다. '서방님..쿨적쿨적..부디 왜놈들을 싸그리 갈아 엎어 버리세요..'
나와 우리 직장에서 함께 가는 여러 명, 그리고 다른 직장, 동네에서 온 예비군들은 모월 모일 모시에 모처로 집결하였다. (군대 일은 비밀이라서..) 우리는 '예비군 수송버스'라는, 폐차직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더 혹사당하는, 낡아빠진 버스를 타고 하염없이 '북쪽 전방'으로 향했다. 내가 근무했던 '남쪽 전방'과는 사뭇 다른 풍광이 을씨년스러운 겨울의 모습과 함께 뒤섞여 새색시를 두고 온 나의 맘을 더더욱 가라앉게 하였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o사단 oo연대. 도착해서는 예비군의 상징인 게으름을 한껏 피우며 입소식을 하고 우리의 내무반을 배정 받았다.
나는 동원훈련을 들어오기 전에 나름대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보려고 했었다. 사람마다 경험의 차이가 심하긴 했지만 1주일간 지겹게 놀다왔다느니, 밤마다 고스톱 치느라 손가락 안쪽 가죽이 다 까졌다느니, 누구는 돈을 숱하게 잃었다느니 하는 식의 무용담이 대부분이었다.
(예비군도 군대라고 허풍 무용담들은.. 그런데 딱 한 사람만이 이런 조언을 했다.
"마누라 가슴가리개를 가지고 가. 그게 포복할 때는 팔꿈치 가리개로 아주 유용해. 평소엔 품고 자도 좋고.."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설마 예비군을 포복시키겠느냐는 안일한 생각과 함께 갓 시집온 새색시에게 가슴 가리개를 달라고 하면 변태취급 당할 것 같은 수줍음에 흘려버렸다)
그리고 또 대부분은 자신이 얼마나 말을 안 듣고 통제에 안 따랐는지를 자랑스럽게 읊어대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나도 고스톱을 조금 가다듬고 갈까 아니면 모자를 비딱하게 쓰고 최대한 개기는 연습을 하고 갈까 하는 생각마저 해보았을 정도였다. 그런 식으로 동원훈련을 우습게 보고 들어간 나와 우리들이었는데..
내무반에 들어가 보니 현역사병들과 우리들이 거의 반반씩이었다. 음.. 심심치는 않겠구만. 현역 데리고 노는 재미가 쏠쏠하겠는데..(이런 환상을 품었으니..) 그런데 잠시 후 이 현역병들이 우리에게 소총과 철모를 비롯한 단독군장 장비를 주는 것이 아닌가? 얼레? 이 놈들이..
"야..상병.."
"옛. 선배님." (어?! 이 부대는 상병이 아직도 군기가 들어 있네..)
"야야..살살 말해라. 귀 안 먹었다. 그리고 이 철모랑 이런 거 말야. 너 잘못 주는 거 아니니? 우린 야비군이야 야비군..현역이 아니라고.." 다른 선수들도 옆에서 거들었다.
"야..상병.. 우린 이런 거 다 졸업했어. 이건 니들이나 쓰는 거지.."
"짬밥 먹은 본 지 오래 됐더니 이 쇳덩어리는 무거워서 못 쓰겄다."
"아닙니다. 선배님들. 단독군장 해주십시오."
뭔가가 이상하게 굴러가는 것 같은 삘이 오기 시작했다. 이거 가슴가리개를 가지고 왔어야 하는 거 아냐? 우리는 궁시렁 거리면서 반은 철모를 손에 들고 집합하였다. 그런데 이 현역들은 우리를 부대 뒷편의 영점사격장으로 몰고 가더니 사격을 하라는 것이었다. 어라? 그러나 우린 이내 이해하였다. 일주일동안 지겹게 놀텐데 그래도 총은 한번 쏘고 가야 보람찬 동원훈련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사격을 끝마치고 내려오니 이번엔 바로 식당으로 끌고 가서 밥을 먹이는 것이었다. 아직도 훤한 대낮에 웬 저녁밥? 점심 짭밥도 거의 남겼는데 또 짬밥.. 대충 식사를 마치고 나니까 이젠 내무반으로 끌고 가더니 민방공훈련용 커텐까지 다 내리고 자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무슨 해괴한 짓거리인가? 대낮에 자라니? 비싼 돈 들여 예비군 동원해서는.. 어허.. 그리고 불이 있어야 고스톱이라도 칠 거 아냐?
깜깜한 분위기라 그랬을까..대충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이번엔 마구 깨우는 것이었다. 자연히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고.. 어수선한 가운데 대충 줄을 맞춰 섰는데 억! 이게 뭐야?! 현역들은 완전군장이었다. 우리 예비군들은 단독군장. 이건 '부대이동'이 아닌가? 에구구.. 필시 우리가 제대로 된 훈련에 휘말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 훈련이 그 당시 매년 미군과 함께 하던 팀스프리트 훈련의 일환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그 훈련은 '북쪽군'이 (요즘은 개념이 모호하고 또 잘못 표현하면 반xx세력으로 몰릴 수도 있어서 부득이 이런 표현을 쓴다) 내려오신 것을 가정하고 진행되는 훈련이었다. 우리는 밤 10시부터 걸었다. 아마 작전상 후퇴하는 것 같았다. 우린 그렇게 밤새 마냥 걸었다. 새벽녘에는 싸늘한 늦겨울의 한기가 무지하게 시려왔다. 그렇게 걷기를 어스름 먼동이 틀 때인 새벽 5시까지 쉬임 없이 했다. 이 무슨 팔자란 말인가? '남쪽 전방'에서 그리 ㅈ나게 고생한 것도 모자라서 제대한 뒤에도 이런 시련을 겪다니.
새벽녘에는 거의 졸면서 걸었다. 어렵사리 숙영지에 도착한 우리는 군용 천막을 치고 (주로 현역병들이 치고 우리는 쉬었지만)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의 동원훈련은 그런 식의 연속이었다. 낮에는 주로 텐트에서 자거나 쉬고 밤에는 걸었다. 꼭 빨치산 같이. 낮에 잠이 안 올 때는 각자 군대 생활의 썰을 풀었다. (우리 나라에 비해 왜국에는 사기 사건이 적다고 하는데 아마 그 이유는 왜인들은 군대가 의무가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대한민국 남자들의 사기성과 허풍은 90% 이상이 군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날이 가면서 각종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 매일 밤마다 10 시간 정도씩 걸으니 무릎이 아프거나 발에 물집이 생기기 시작했고, 때로는 비가 칙칙하게 내리는 가운데 텐트에서 며칠을 지내다 보니 축축하고 찝찝하고 어수선하고 드디어 감기에 걸린 선수도 생기기 시작했다. 간간이 행군도중 못 가겠다고 떼를 쓰는 예비군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참.. 현역 군대생활 다 합친 것보다도 더 힘든 동원 훈련이었다. 그 와중에도 우리가 위안을 삼은 것은 수시로 길거리 가게에서 소주를 사서 수통에 채워 마시는 것이었다. 그 맛이란...
어느 날 새벽. 내 앞에서 걸어가던 선수의 발걸음이 자꾸 꼬인다 싶더니 하필이면 작은 시멘트 다리를 지날 때 휘청하더니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난간도 없는 다리였다. 아주 작은 다리였고 높이도 얕았으니 망정이지 줄 없는 번지점프를 할 뻔한 것이다. 다행히 그 선수는 별로 다친 데 없이 다시 행군을 계속할 수 있었는데, 그 것을 본 우리들은 다리만 나타나면 길 안쪽으로 몰려서 걸었다. 그 새벽 5시경. 어느 삼거리의 제법 큰 시멘트 다리에 다다랐는데, 우리를 인솔하던 중대 인사계가 (상사) 행군을 정지시키고 한 마디 하였다.
"에.. 전쟁이 나면 여러분들은 이 다리까지 후퇴하면서 전원 전사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시체는 대부분 이 다리 밑에 있을 겁니다. 어쩌구저쩌구..."
오잉? 뭐라구? 그럼 여기가 유사시 우리 무덤이란 말이야? 오메..징한 거..
줄거리는 이랬다. 북쪽군이 내려오시면 최전방의 A부대는 최소한의 방어를 하다가 뒤로 빠지고, 약간 뒤에 있던 B부대는 우리 같은 동원예비군을 충원 받아서 완전편제를 갖추어 저항을 하면서 최대한으로 시간을 끌고, 그 사이 후방의 정예 C부대와 미군들이 준비를 마치고 짜잔~ 나타나서 적을 섬멸한다. 뒤로 빠진 A부대는? 그들은 후방에서 박카스 마시며 원기 회복하면서 다음 투입을 준비하고.
결국 우리 동원예비군과 그 B부대원들은 완전한 소모품인 셈이었다. 최대한 저항하면서 시간을 벌고..그래서 그 삼거리 다리까지 후퇴하면서 다 죽으면 임무 끝! 이런 감동적 시나리오가 있었다니..코끝이 찡해왔다. 두고 온 새색시 생각도 나고.. 아직 2세도 없는데..
작전도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우리 부대도 부대로 복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이젠 예비군들이 수통에 소주를 사와서 행군 중에 마시는 것도 뭐라 하지 않았다. 희한한 것은 우려하는 것과 달리 술을 마시니까 더 잘 걷는 것이었다. 술김에 그러는 건지..
부대로 복귀하는 도중에 적군과 만나는 황당한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이미 상황이 끝나고 그들도 부대로 복귀하는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전쟁 중이라면 이거 엄청난 사건일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쪽 부대의 예비군이 물었다.
"수고하십니다. 어디 병력이우?"
"우리는 홍능 병력입니다. 고생이 많수다."
정말 그들은 고생이 많았다. 박격포 좌판을 지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우린 다 소총 한 자루인데..이래서 군대는 보직이라고 했나보다.
부대 내무반으로 복귀해서 술 한잔하며 마지막 밤을 보냈다. 어쨌든 며칠 밤을 꼬박 새며 걸어 작전을 마쳤으니 뿌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런데 어느 새 내 무릎도 퉁퉁 부어 있었다.
동원훈련의 후유증은 1주일 정도 계속되었다. 무릎도 그 때야 제 모습이 되었고. 나는 다시 연구소의 일상으로 돌아와 바쁘게 세월을 보냈다.
그 해 한 여름의 어느 일요일 오후. 아내와 나는 시내에 쇼핑을 나가던 참이었다. 우리가 타고 가던 버스가 종로 5가 근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민방위훈련 사이렌이 울어대는 것이었다. 민방위 훈련을 하는 날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게 무슨 일이지?
버스는 길가에 세워지고 우리 부부와 다른 승객들은 모두 내려서 근처의 지하철 종로 5가역으로 들어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지하철역에는 라디오 방송을 크게 틀어놓았는데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인천지방이 공습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요지의 방송이었다. 그해 초 이웅평이라는 북쪽군 조종사가 전투기를 몰고 귀순한 적이 있었다. 그 때도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그 때의 유명한 멘트는 "이 상황은 실제상황입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라면, 우유 등을 사재는 둥 소동이 있어서 그 후에는 훈련은 꼭 훈련상황이라고 언급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인천이 공습을 받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훈련이 아니고 공습을 받고 있다는 말은.. 전쟁!
나는 의외로 덤덤한 기분이었다. 하긴 내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저 교육받은 대로 몇 시간 이내에 지정된 장소에 모여서, 역시 동원된 차량을 타고 북쪽 전방의 부대로 가서, 총 받고 철모 받고, 전투에 투입될 것이고.. 시간을 끌며 후퇴를 하고 결국 포천 삼거리 다리까지 사이의 어느 곳에 나의 5 척 몇 치의 몸을 누이면.. 그러면 나의 할 일이 끝나는 것 아닌가? 사람으로 태어나 전쟁을 겪을 운세라면 겪는 것이지 무슨 요령을 부릴 것인가? 나는 아내에게 만약 내가 전방으로 가고 못 돌아오면 포천 삼거리 다리밑에 시체가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아내는 내 말이 실감나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방송까지 왕왕대는 상황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도 없어 황당한 표정이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하나둘 지하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우리도 밖으로 나가서 아직 썰렁한 길을 걸어 종로의 처갓집으로 들어섰다. 처갓집에서는 마침 TV로 야구중계를 보다가 갑자기 야구장 관객들까지 대피하는 모습에 황당했었던 모양이었다.
그 날의 그 해프닝은 중공군 조종사 '손천근'이라는 자가 중공제 미그21기를 몰고 우리 나라로 귀순한 사건이었다. (그 당시의 기록을 어렵사리 찾아서 그 조종사의 이름이 '손천근'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담을 쓰다보니 그런 사건도 다시 찾아보고.. 참 좋은 일이다. 그날은 8월 7일 일요일이었다.)
그해는 유달리 사건이 많았다. 아웅산에서 우리 나라 각료들이 떼죽음을 한 것도 그 해였다.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위험한 시절에 동원예비군을 했었구나 하는 생각이다. 여차직 했으면 나는 포천 삼거리 다리 밑에 누워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랬다면 이 나라에는 얼마나 큰 손실이었을까? 그랬다면 예쁜 과부 아내에게는 얼마나 많은 놈들이 껄떡댔을까? 썩을 ㄴ들! 너희가 율리시즈를 아느냐?
비록 추석연휴에 묻혀 크게 논란이 되진 않았지만, 며칠 전 국군의 날에 나랏님께서 또 얄궂은 말을 했다. 6.25를 역사상 세 번째 '통일시도'라고 했다. 물론 전체의 뜻은 전쟁을 하지 말고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는 취지인 듯 한데, 그렇더라도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경솔한 발언이라는 생각이다. 6.25라는 것이 '통일시도'인지, 아니면 단순히 '야망에 의한 도발'인지는 전쟁을 일으킨 놈한테 물어봐야 제일 정확할 것이다. 그 전쟁의 한 쪽 당사자인 나라의 대표가, 적군이 일으켰다고 알려진 전쟁을 '통일시도'라고 평하는 이율배반을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 (만약 그 전쟁이 '통일을 시도하려고' 우리가 일으킨 것이라면 몰라도..)
그 말은 전쟁 당사국의 대표가 해야 할 연설이 아니고 먼 훗날, 정말로 고려 초기부터 지금까지 만큼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역사학자나 할 수 있는, 제3자적인 언급이 아닌가? 참 뭐가 뭔지 모르겠다. 연설문을 써준 사람이 따로 있다면 그의 생각이 궁금하고, 또 그걸 그냥 읽은 나랏님의 생각도 궁금하다. 만약 연설문을 나랏님이 직접 썼다면, 그리고 그 문장의 문제점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면 그것 또한 황당한 경우가 아닌가?
에구..모르겠다. 그런 어려운 것까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고.. 단지 나도 자칫 '통일시도'에 저항하는 반통일세력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 모골송연할 따름이다. 그 해에 '통일시도'가 있었다면 나는 그런 위대한 뜻을 몰라보고 예비군으로 동원되어서 저항하고 시간을 끌다가 포천 삼거리 다리밑에서 '역사의 심판(?)'을 받아 죽었을 것이 아닌가? (나의 현역생활이야 남쪽의 왜적을 경계했다고 치부하면 크게 서운하지도 않다) 그 '통일시도'가 성공했다면 나는 죽어서도 의미 없는 개죽음 내지는 민족의 반역자였을 것이 아닌가? 이런 ㅆ..
포천 삼거리. 시멘트 다리. 지금은 그곳이 어딘지, 아직도 그대로 있는지 조차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지금, 새삼 내가 죽어야 했을 그 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