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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할배는 이래 살았단다.
1. 뒷간 내가 여남은 살 때는 지금과 많이 다른 세상이었다. 그리 오랜 옛날도 아닌 4-50년 전인데 너무 크게 달라져서 아주 먼 옛날처럼 생각된다. 그걸 틈 날 때마다 조금씩 이야기하면 할아버지가 좀 부풀려서 한다고 흘려듣거나 들었던 것도 쉽게 잊혀지고 말 것같아 여기에 적어볼까 한다. 우선 제일 크게 달라진 것부터 시작하자니 냄새가 좀 나겠지만 뒷간부터 해야겠다. 그 모양은 옆에 그림에서 보다시피 작은 움막이다. 높이는 사람 키 정도여서 들어갈 때는 허리와 머리를 수구려야 된다. 그 안에는 큰 독이 묻혀있고 그 위에 납짝한 나무 두 개를 걸쳐놓았다. 거기서 쭈구리고 앉아 볼일을 보는 것이다. 옆과 뒤론 가렸지만 앞은 훤히 트여서 밖에서도 다 보인다. 남자는 그것?까지도....... 그러니 바람이 조금만 불면서 비가 오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볼일을 마치면 옆에 놓인 짚단에서 서너 줄기를 뽑아 꼬깃꼬깃 접어서 벼이삭 부분으로 서너 번 감으면 엄지손까락만한 묶음이 되는데 그걸로 닦는다. 이 볏짚은 까칠까칠하다 더구나 이삭 부분은 더 심해서 닦으면 따가움을 느낀다. 왜 부더러운 풀도 많이 있는데 이 볏짚을 쓰는지 어릴 때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다. 모든 생활이 어린이는 생각도 않고 어른들 중심이었기 때문이리라 싶다. 또 그 짚이 가장 손쉬운 것이었으리라. 이 볏짚에서 신문지로 바뀌기까지 5년쯤 걸렸다. 신문지도 아버지가 구장(지금의 마을 이장인데 당시엔 작은 마을 네 개를 합쳐서 한 사람이 맡았다)을 하신 덕분에 신문이 있었지 일반 가정에선 우리보다 3,4년 더 지난 다음에야 종이를 쓸 수 있었다. 그 당시의 볏짚은 여러 곳에 이용되었다. 신발(짚신)을 만들었고, 지붕과 담장을 덮고, 곡식 등 모든 물건을 담는 가마니 소쿠리. 그리고 모든 걸 묶는 데 쓰는 새끼, 바깥에서 깔고 잠자리, 곡식을 말리는 멍석 등. 이제 뒷간의 환경을 살펴보자. 여름이면 구덩이 안에는 구더기가 수도 없이 바글바글거린다. 마치 죽이 끓고 있는 솥처럼...... 다 자란 놈은 밖으로 기어나와 짚신 사이를 비집고 올라와 발등으로 기어오른다. 쪼그리고 앉아서 볼일을 양손은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에 끼워 앉아 있는데 구더기가 발 위로 기어오른다고 그걸 집어내기도 힘든다. 여름 장마가 지면 빗물이 들어가서 미처 퍼내지 못하면 밖으로 넘쳐나온다. 물이 들어가기도 하고 소변을 본 요강도 여기에 넣기 때문에 늘 묽은 상태로 있다. 그래서 대변이 퐁! 하고 떨어지면 똥물이 궁둥이까지 튀어오른다. 이게 궁둥이에만 묻는다면 닦으면 되는데 옷에도 묻으면 일이 많아지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한다. 이것을 피하는 방법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얼른 일어서야한다. 이건 여간 빠른 동작이 아니면 안 된다. 좀 다른 방법도 있다. 똥이 직선으로 내려가지 않고 비스듬히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똥이 떨어지려할 때 궁둥이를 이리저리 흔든다. 그러면 퐁! 소리 대신 철석 하면서 옆으로 튕긴다. 이렇게 똥과 오줌이 가득 차면 똥장군(똥통)으로 퍼내어 곡식의 거름으로 쓴다. 남자가 있는 집에선 이 똥장군을 지게에 지고 다니지만 남자가 없는 집에선 부인들이 물동이처럼 작은 똥통을 머리에 이고 다닐 수밖에 없다. 그러다 자칫 걸음을 잘못 걸으면 출렁거리면서 똥물이 얼굴로 줄줄 흘러내린다. 왜 그런 더러운 똥물을 그렇게 지고 다니고, 머리에 이고 다니는가? 그게 참 좋은 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겨울 보리밭에 그걸 뿌려주면 잘 자란다. 그게 모자라 못 뿌린 곳은 엄청 차이가 난다.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려면 개똥을 주워서 뒷간에 넣는다, 똥 거름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해서다. 나도 개똥 줍기를 여러 해 했다. 여남은 살 먹고부터 4-5년 새벽마다 부지런히 주웠다. 왜 새벽이냐고? 이것도 경쟁이기 때문에. 남들이 주워가기 전에 한 덩이라도 더 주우려고. 집집마다 키우는 개는 집안에 똥을 누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풀밭이나 길 옆 또는 보리밭에 눈다. 그리고 길을 지나다니며 눈 쇠똥도 줍고. 똥 뿐만 아니라 오줌도 거름으로 쓴다. 똥보다는 못하지만 그것도 그냥 버리지는 않는다. 겨울이면 남정네들은 사랑방으로 모여서 노는데 그 사랑방 주인은 놀러 온 사람들이 눈 소변이 많이 모여서 그게 큰 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알뜰한 사람은 오줌이 마려워도 꾹 참고 있다가 점심 먹으러 집에 가서 누는 사람도 있다. 환이 외할머니가 이웃 마을에 볼일이 있어서 가셨다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소변이 몹씨 마려운 것을 기어이 참고 마을 앞 자기 밭에 와서야 용변을 보셨다고 하더란다. 이렇게 사람의 배설물을 거름으로 쓰면 지금의 유기농 채소라고 하는 무공해 작물이 된다. 나무가 가을에 잎을 떨어트려 그게 썩으면 흙이 부드러워지고 양분이 많아져서 나무가 쑥쑥 잘 자라는 건처럼..... 그러나 여기서 또 폐단도 생긴다. 그렇게 기른 채소를 날 것으로 먹으면 기생충 알을 먹게 되어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등 여러 기생충이 사람들 뱃속에서 자란다. 그 옛날엔 이런 기생충 등으로 배가 아파도 원인도 모른 채 고생을 했고 그러다 심하면 죽기도 했지. 그 뒤 차츰 문명이 발달하면서 기생충을 죽이는 약이 나왔다. 그걸 초등학교에서 검사도 하고 약도 나누어 주었다. 이건 1970년대 전후였다. 냄새가 나고 듣기도 좋지 않은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화장실을 보면 그 나라 문명의 척도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공중 화장실이 참으로 깨끗하다. 겨울엔 따뜻한 물이 나와서 손을 씻어도 시리지 않고, 건조기도 옆에 있다. 대변을 보고 쓰라고 촉감이 좋은 화장지가 걸려있고 그 동안 심심할까 봐 음악까지 흘러나온다. 먹거리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먹는 거지. 이 먹거리가 그땐 너무 귀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은 낙동강 중류를 300미터쯤 앞에 둔 시골이이었다. 그땐 강변에 둑이 없어서 장마때마다 강물이 넘쳐 농토의 대부분을 망쳤다. 벼가 한창 자라고 있는 7월, 물에 잠겨 3, 4일 있으면 다 죽고 만다. 그 논이 다시 벼를 심지 못하고 대신 메밀이나 피를 뿌리고 밭에는 조나 수수 등을 심는다. 이걸 대파(代播)라고 한다. 벼 대신 다른 씨를 뿌린다는 말이다. 이렇게 뿌린 것도 때가 늦은 거다. 곡식들도 늦은 걸 알고 키는 조금만 자라고 얼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거기서 수확되는 건 양이 너무 적다. 강물에 잠기지 않는 논도 있긴 있다. 높은 지대에 있는 논인데 이건 천수답(天水畓)이라고 한다.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로만 농사를 짓는다는 말이다. 이런 논은 벼를 심어놓아도 여름 가뭄이 열흘만 계속되면 논바닥이 갈라지고 벼들은 씨들씨들하다가 죽고 만다. 이럴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배배 꼬여서 시들시들하던 벼가 마치 춤을 추는 듯이 보이고 생기를 되찾는다. 우리 부모님들이 흔히 쓰는 말,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것과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가는 만치 보기 좋은 게 없다.'고. 그래서 우순풍조(雨順風調)로 비와 바람이 순하게 제때에 잘 와야 풍년이 든다. 풍년과 흉년은 하늘이 내리는 거지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다고 믿었다. 가물면 임금님도 높은 산으로 올라가 기우제(祈雨祭:하늘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비는 제사) 를 지냈고 고을에서도 지냈다. 지하수를 퍼 올린다든지, 저수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렇게 조금씩 거둔 걸로 기나긴 겨울과 봄을 지나고 새 곡식인 보리가 나는 6월까지 살려면 여간 힘드는 게 아니었다. 이 고비를 보릿고개라고 했다. 몇 해에 한 번은 강물의 범람이 적어서 벼농사를 잘 지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이때는 또 공출이라고 해서 나라에 바쳐야했다. 논을 가진 정도에 따라 행정관청에서 제멋대로 수량을 정해서 내놓으라고 했다. 정해진 대로 다 주고 나면 남는 게 없어서 그걸 피해보겠다고 외진 곳에 숨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경찰과 면서기 등이 나와서 정말 없어서 못 내는 건지 어디다 숨겼는지 조사하러 나온다. 그러다가 그게 발각이 되면 마구 폭행을 당한다. 내가 살던 바로 옆집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면서기가 나와서 여기 저기 살피다가 뒷간 한쪽에 두엄과 재를 모아둔 속에서 벼 한 가마니를 찾아냈다. 기다란 쇠꼬챙이로 찔러서 뭐가 걸리니 파내라고 해서 나왔다. 그 면서기는 주인을 불러 세우더니 사정없이 박치기로 얼굴을 받았다. 코에 큰 충격을 당하고 '억' 하며 쓸어졌다. 코에서 피가 마구 쏟아졌다. 옆에서 구경하던 이웃 사람이 솜으로 막아도 멈추지 않았다. 그 출혈은 그 이튿날까지 계속됐다. 오리 길이 되는 면소재지에 한 사람 있는 의사가 와서 치료를 했지만 그치지 않았다. 이러다가 사람이 죽는 거 아닌가. 박치기를 했던 면서기도 너무 지나쳤다 싶었던지. 그 다음날 저녁에 사과하러 왔다. 마을 사람들이 그 면서기 멱살을 잡고 "아무리 위에서 시키는 일이라지만 나이 많은 사람을 이렇게 욕을 보이느냐. 너도 한번 당해봐라." 하면서 주먹을 휘두러자 여러 사람들이 말려서 겨우 진정시켰다. 그를 상처가 나게 때렸다가는 더 큰 말썽이 생길 게 번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땐 순사도 권리가 대단했지만 면서기만 돼도 일반인들을 마구 다루었다. 이렇게 풍년이 들어도 양식은 다 빼앗기고 마니 아무리 아껴 아껴 먹어도 이른봄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걸 견디기 위해 나물을 뿌리채 캐고, 나무 껍질을 벗겨서 먹었다. 곡식은 쪼금만 넣고 멀겋게 죽을 끓여서 먹는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배만 볼록하게 나오고 허벅지 다리는 살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어서 쭈굴쭈굴 주름이 잡힌다. 지금 아프리카 빈민국 아이들을 보면 그때 우리와 똑 같다. 풀 중에서 가장 많이 먹는 것이 쑥이다. 이건 좀 흔한 식물이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뿌리째 캐기 때문에 그마저 귀해졌다. 냉이는 참 맛있는 나물이고, 씀바귀도 많이 먹었다. 나무 껍질이란 소나무를 말하는데 송기라고 했다. 겉껍질은 나무처럼 딱딱하지만 그걸 벗겨내면 하얀 속껍질이 나온다. 그걸 벗겨서 물에다 여러 날 담가두면 벌겋게 물이 울어나오면서 좀 부드러워진다. 그걸 다시 방아에 찧어서 더 부드럽게 만든 다음 곡식 가루와 섞어 새알처럼 비벼서 죽을 쑤어 먹었다. 지금도 송기떡이라고 해서 찹쌀과 혼합하여 색다른 별미로 만들어 먹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칡뿌리가 있다. 이건 우리 고향 주변에선 귀해서 먹지 못했는데 산이 좀 욱어진 곳에 가야만 캘 수가 있었다. 칡뿌리에는 제법 찰기도 있어서 잘 장만하면 맛도 있고 영양가도 있는 있는 거였다. 지금은 엄청 흔한 것이 되어 어른 허벅지처럼 굵은 칙뿌리도 많이 나온다. 이렇게 쑥이나 냉이나 송기만으로는 풀기가 전혀 없고 영양가도 없기 때문에 쌀이나 보리, 메밀 등의가루를 조금 넣어서 겨우 엉키는 정도로 끓여야 된다. '입에 풀칠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풀은 종이를 벽이나 창문에 바를 때 쓰는 건데 멀겋게 끓여도 종이는 잘 붙는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건 별로 없어도 입가에 풀칠을 하는 정도가 된다는 말이다. 나의 경우, 산에나 들에 가서 그런 걸 캐고 벗겨 올 입장이 못되었다. 내가 어리고 엄머니는 그때도 다리가 부실하여 그럴 능력이 안 됐다. 아버지는 동네 구장이란 직책을 맡아 나들이에 바쁘고.... 그래서 그냥 멀겋게 죽을 끓여서 먹었다. 제일 많이 먹은 게 메밀당수였다. 메밀가루를 아주 적게 넣고 물은 많이 넣으면 그야말로 풀처럼 된다. 이건 숟가락으로 떠 먹는 게 아니라 그냥 훌 훌 마신다. 아주 배가 고프면 찬물이라고 마시면 배가 부르듯이. 아침에도 이것만 한 그릇 마시고 나무하러 산에 가면 시작도 하기 전에 배가 고프다. 늦은 봄 날 양지에 앉아서 건너편 산을 바라보면 아물아물거리는데 그게 아지랑이 때문인지 허기가 져서 그런 건지. 내 이웃 어느 집에서 저녁에 이 메밀당수를 끓였다. 식구대로 여섯 그릇을 퍼서 마루 끝에 내놓았는데 열아홉살 난 시동생이 산에서 나무를 하고 돌아와 배가 너무 고파서 살피다 보니 그게 눈에 띄여서 한 그릇 마셨다. 그러나 배가 차지 않아 또 한 그릇, 또 한 그릇, 여섯 그릇을 다 마셔버렸다. 그럼 나머지 식구들은 어찌해야 할까. 그렇다고 다시 끓일 수도 없다. 너무 모자라는 양식이기 때문에..... 1944년,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일본은 전세에서 밀리고 있었고, 군인들 먹일 양식 대느라 한국의 양식을 모조리 긁어갔다. 그런 다음 배급이라고 나누어 준 것이 콩깨묵이었다. 콩에서 기름을 짜 내고 그 나머지인데 이거나마 변질이나 안 됐으면 좋으련만 비가 맞고 오래 되어 그런지 시커멓게 색깔도 변했고, 뜬 냄새가 많이 났다. 그러나 배가 너무 고팠던 우리는 그걸 삶아 먹었다. 마치 쇠똥을 삶아 먹는 것 같았다. 이렇게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당시 열한 살이었던 나는 입에 들어갈 것을 찾아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 보리밭에는 깜부기란 게 있었다. 보리가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하고 병이 들어 까맣게 변질된 거였다. 그걸 뽑아서 먹었다. 검은 가루가 입가엔 물론, 옷에까지 묻어서 검은 수염이 이리저리 뻗은 것처럼 보기 흉했다. 양지쪽 언덕 밑에는 잔디보다 좀 억센 풀이 있는데 그 새싹이 돋아나면서 보드라운 속대가 나온다 이걸 삐삐(표준말로는 삘기)라고 하며 뽑아서 먹고 했다. 잔대 뿌리, 찔래 새순, 소나무의 새순(솔밥)과 보드라운 속껍질 등도 먹었다. 이런 것들은 너무 양이 적어서 입에 넣어도 조금 씹히는 정도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건 별로 없었다. 여름이 무르익으면 뽕나무의 오디가 참 맛도 있고 크게도 해서 제법 요기가 됐고, 목화 밭에서 애송이 다래도 먹었다. 이건 많이 따면 목화밭을 망치게 되므로 임자 몰래 몇 개씩만 따먹었다. 내가 초등하교 3학년이든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중간쯤. 고구마를 캐어가고 빈밭인데 거기에 아이들이 너댓이 쭈그리고 앉아 나무꼬챙이로 땅을 파고 있었다. 행여 작은 뿌리나마 남은 게 있을까 봐. 나도 거기에 끼였다. 가느다란 뿌리줄기를 따라 자꾸 파고 내려가면 조금 굷게 되기도 한다. 어린이 새끼손까락 정도로. 그쯤 되면 신이 난다. 조금만 더 굷어지기를 기대하며 파는데 그걸로 끝이다. 그나마 옷에 문질러 흙만 틀어내고 아삭아삭 맛있게 먹었다. 여름 어느날 학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큰길 엎에서 참외 여남은 개를 놓고 팔고 있었다. 그게 너무 먹고싶어서 그냥 서서 눈으로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걸 눈요기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그걸 한 개 사서 그 자리에서 칼로 껍질을 깎는데 그 껍질이나마 먹고 싶었지만 난 그걸 주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 뒤에 나타난 한 아이가 서슴지도 않고 그걸 주워서 먹고는 또 하나의 껍질이 딸에 떨어질까 봐 반쯤 깎인 껍질을 손으로 잡고 있다가 얼른 입으로 가져간다. 그 애가 무척 부러웠다. 보긴 내가 먼저 봤는데 저 애보다 용기가 없어서 빼앗겼구나. 속으로 애석해하면서 그게 끝날 때까지 지켜보면서 침만 꼴깍꼭깍 삼키다도 그 자리를 떴다. 집짐마다 아이를 낳기는 7, 8명, 많이는 열명도 더 낳았다. 피임이란 건 생각도 못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 여러 아이들 중에서 영양실조, 전염병 등으로 반 넘어 죽고 겨우 한두 명 키웠다. 그래서 출생신고도 첫돌을 지난 다음에 하는 게 일반적이고, 더러는 2년, 3년이나 지나서 하기도 했다. 나보다 나이가 서너 살 아래인 이웃 아이는 너무 먹질 못해서 허벅지 살이 하나도 없고 주름만 여러 개 나있다. 그게 너무 보기가 안스러웠던지 그 아버지가 들에 일을 나갔다가 눈에 띄는 대로 개구리를 잡아서 고와 먹였다. 그렇게 서너 달 계속한 결과 그 다리가 제법 통통해지고 얼굴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개구리가 그만치 영양가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러나 요즘 보신용으로 엄청 비싸게 팔리고 있는 뱀은 먹이지 않았다. 당시엔 그게 많았지만 너무 징그러워서 그랬던 것 같다. 벼농사는 이렇게 물에 잠기고 또 가뭄에도 약해서 수확이 아주 적은 반면 보리 농사는 잘 지었다. 비율로 치면 3:7쯤 될 것이다. 이 보리는 쌀에 비해 밥맛도 못하거니와 방아를 찧는데 무척 힘이 든다. 힘드는 비율도 3:7 아니 2:8쯤 되지 싶다. 벼는 껍질이 한겹뿐이면서 쉽게 벗겨지는 반면 보리는 여러 겹이 단단이 붙어 있어서 디딜방아로 몇 시간씩 쿵덕 쿵덕 찧어야 한다. 디딜방아는 오른쪽 그림 처럼 두 사람이 같이 밟야야 하고 한 사람은 호박 옆에 앉아서 썰어넣어야 하는데 우린 어머니와 나 둘뿐이라서 더욱 힘이 들었다. 어머니와 둘이서 한참 찧다가 내려가 썰어넣고 또 조금 찧다가 썰어넣고..... 그러자니 고루 찧이지도 않고 시간은 더 많이 걸렸다. 방아도 집에는 없고 이웃집에 가는데 그 주인 아주머니가 보다못해 좀 거들어 주기도 했다. 이 일은 매일 해야된다. 한꺼번에 많이 찧을 수도 없는데다 한번에 완전히 마무리할 수도 없다. 어느 정도 찧은 걸 좀 말렸다가 찧을 때는 다시 물을 좀 부어서 찧고 하다보니 매일 조금씩 조금씩 찧어야했다. 이 일은 정말 지겨웠다. 두어 시간씩 다리가 아프도록 쿵덕 쿵덕....... 딴 집에선 가족이 많아서였던지 내 나이또래가 이 방아찧는 일을 하지 않고 소 먹이러 다녔다. 여러 아이들이 같이 소를 몰고 산으로 가서 풀어놓고 저희들끼리 온갖 재미난 놀이도 하고 가끔은 참외 설이, 밀 설이, 콩설이 등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척 부러웠다. 그러나 우린 농토도 남들보다 형편없이 적어서 소도 기르지 못했다. 그렇게 여러 해를 지내다가 정미소에 보리 찧는 기계가 나왔다. 그러나 마을에서 20리 길인 현풍읍내였다. 이 기계로 찧으면 보리가 마치 쌀처럼 보얗게 되어 밥을 지어도 아주 부더럽고 맛도 한결 나았다. 그래서 너도 나도 그 정미소로 싣고 가서 찧어왔다. 여기서도 문제는 있었다. 전기 모터로 기계를 돌리는데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서 시도때도 없이 정전이 됐다. 한 번 가고나면 언제 다시 오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 여릇이 같이 보리 여러 가마니를 싣고 가서 다 찧어 오려면 사흘도 걸리고 나흘도 걸렸다. 그냥 두고 집으로 올 수도 없다. 그새 전기가 와서 차례가 됐는데도 사람이 없으면 밀쳐두고 다른 사람들 몫을 찧어주기 때문이다. 밤잠도 그 정미소 안에서 헌 가마니를 펴고 그냥 자면서 여기 저기 사돈의 팔촌까지라도 인척을 찾아소 밥을 얻어 먹기도 하고 굶기도 하면서 기어이 다 찧어서 돌아왔다. 그렇게 찧는 싻은 보리를 얼마씩 퍼냈다. 보리를 디딜방아로 찧는 데서 해방된 나의 마음은 그야말로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고 일년쯤 지나고 나니 밀가루 빻는 기계가 나왔고 곧 이어 국수 뽑는 기계도 나왔다. 이때가 1947년경으로 기억된다. 그러니까 내 나이 열네 살. 이웃집에서 그렇게 국수를 뽑아 온 걸 보고 우리도 어머니와 같이 갔다. 트럭이 와서 온 마을의 밀을 싣고 그 차를 타고 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은 각자 따로 그걸 이고 지고 와야만 했다. 그때도 전기 사정은 여전히 나빠서 하루 이틀 기다리다 가루를 빻고 다서 국수를 뽑아 말려서 오자니 각기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 국수를 뽑아 말린 것은 당색이에 어머니와 나누어 담았다. 어머니는 여남은 뭉턱이, 난 다섯 멍턱이쯤. 그걸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 난 앞에다 안고 20리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열네 살이면 제법 힘도 생겼을 나이건만 난 원래 약골이라 얼마 가지 못하고 내려놓고 쉬고 또 쉬고...... 그걸 보고 어머니는 한 뭉치를 더 자기 당새기에 넣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앞에 안도 가는 나는 길길하면서 조금 가다 내려놓고 또 내려놓고..... 어머니는 다시 한 뭉치를 자기 당새기에 얹었다. 수북하게 솟아올랐지만 앞서 걸어가시고 난 역시 빌빌거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무엇으로든 덮어서 새끼로 멜방을 만들어 짊어졌으면 그렇게 힘이 들진 않았을 건데 그럴 줄도 몰랐다. 점심 나절에 나선 것이 집에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었다. 그토록 힘겹게 만들어 온 국수를 삶아서 먹어보니 어찌나 맛이 좋은지 큰 사발에 두 그릇씩 먹었다. '들고 올 때는 그리도 약골이더니 먹는데는 장골이구나.' 엄마가 그러셨다.
옷과 신발 그때의 겨울은 지금과 비교가 안 될만치 추웠다. 낙동강이 꽁꽁 얼어서 얼음 위로 다녔고, 방 윗목에 냉수를 떠다 놓으면 전체가 다 얼어서 볼록하게 혹까지 생겼다. 온돌방이라지만 산에는 나무가 귀해서 방을 따뜻하게 땔 수도 없었고, 옷도 두툼하게 입을 수 없었다. 장갑과 양말도 없었고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아파도 털모자나 귀마게도 없었다. 그러고도 어떻게 그 추운 겨울을 살았을까? 지금 생각해도 까마득하다. 설날이 가까워지면 '이제 일곱 밤만 자면 설이다'하면서 손을 꼽으며 기다렸다. 설빔으로 옷이나 신발을 새로 사는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명절은 좋았다. 그냥 입던 옷을 새로 빨아 입고 내복은 당시엔 나오지도 않았다. 신발은 새로운 짚신을 신었다. 어머니가 좀 부지런하고 여유가 있는 집 어린이는 솜을 넣은 버선을 신었지만 난 늘 무명베로 만든 버선이었다. 이렇게 설날을 맞아 아침 일찍 윗마을로 올라갔다. 오촌 당숙 두 분이 윗마을에 사셔서 거기부터 먼저 차례를 지내기 때문이었다. 한창 추운 때인데다 윗마을까지는 500미터 거리인데 북풍을 안고 가자니 손과 발과 귀가 시린 게 아니라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그렇게 방으로 들어가면 당숙모님이 "아이구 손이 다 얼었제." 하며 얼른 이불이 깔린 구둘목으로 손을 넣어라고 한다. 얼었던 손이 따뜻한 온기를 받으니 더 아파서 엉엉 우는 아이가 많았다. 그렇게 잠시 몸을 녹인 다음 어른들께 세배를 한다. 그러나 세뱃돈은 한 푼도 없었다. 그땐 그런 게 있다는 것도 몰랐다. 또 차례는 밖에서 지내는데 이때도 춥긴 마찬가지다. 마당에다 멍석을 깔고 마당 다득 어린이들이 한 줄로 서서 반 시간쯤 견디는 것도 여간 괴로움이 아니다. 차례가 끝나면 떡국을 먹는데 지금처럼 하얀 떡국이 아니었다. 나무 껍질 색 같은 피떡국이었다. 그나마 한 그릇도 아니고 떡이 여남은 개씩 정도에 국물만 채워서 반 그릇, 그 떡 중엔 하얀 흰떡은 한두개 들어 있었다. 운이 좋은 아이는 세 개가 들어있기도 했다. 그걸 본 동생이 왜 형은 세 개나 돼? 하며 트집을 잡는다. 형은 그게 안스러워서 한 개나 두 개를 뜨서 동생에게 준다. 그 흰 떡은 보기에도 좋을 뿐 아니라 입에 넣으면 보들보들하고 맛도 좋다. 그러나 피 떡은 까칠까칠한 데다 맛도 영 아니다. 그러나 맛이 없다고 그걸 남기는 아이는 없다. 배가 고프니까. 이런 고생스런 설날인데도 뭐가 좋다고 그토록 손을 꼽으며 기다렸을까? 지금은 먹음직한 음식을 많이 만들고 또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면 세뱃돈도 주시고 옷과 신발 등도 좋은 걸로 사 주고...... 그런데도 옛날처럼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지 않는다. 이건 늘 풍족한 삶 속에서만 살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신발은 모두가 짚신이었다. 볏짚으로 각자가 자기 신발을 만들어서 신었다. 난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짚으로 와라지를 삼아서 신었다. 와라지는 일본말인데 이건 일본인들이 많이 신는 형태다. 발바닥만큼 엮어서 만들고 앞에는 고리 하나를 만들어 엄지와 둘째 발까락 사이에 끼우고 거기서 두 가닥을 만들어 복숭아뼈 밑부분에 묶는다. 그걸 신고 학교에도 가고 집에서도 신었다. 그러나 산에 나무하러 갈 때는 불편하기 때문에 짚신을 신어야했다. 이것도 내가 직접 만들어서 신었다. 이 짚신이나 와라지는 하루나 이틀이면 밑바닥이 닳아서 못 신게 된다. 늘어져서 발에 결려있지도 않는 걸 억지로 끌고 다니려면 오히려 맨발보다 더 거추장스럽게 된다. 그럼 훌쩍 던져버린다. 여기서 '헌신짝 버리듯 한다.'라는 속담이 생겼다. 물건이다 사람이나 필요해서 옆에 두고 쓰다가 도움이 안되면 버리는 걸 말한다. 짚보다 고급스런 신발도 있긴 했다. 돗자리(지금도 제사나 혼례에서 사용함)를 만드는 재료인 골과 삼베의 재료인 삼으로 신을 삼으면 짚보다는 훨씬 보기도 좋고 또 오래 신는다. 이건 재료가 흔하지도 않고 또 신을 삼는데도 제법 정성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일상적인 신발로는 쓰지 않고 특별한 나들이나 새색씨가 시집을 갈 때나 신었다. 짚신과 같이 신은 신발로 게다(일본말)가 있었다. 나무로 만든 건데 단단한 천이나 가죽으로 발이 조금 들어갈 수 있게 만든 것과 짚으로 만든 와라지 모양의 게다도 있었다. 신으면 딸그닥 딸그닥 소리가 났다. 이건 주로 비가 오는 여름에 짚신 대신 신었는데 땅이 질퍽거리는 데서는 흙이 달라붙어 무거워지고 그로 인해 끈이 자꾸 떨어져서 들고 다닐 때도 많았다. 이것도 시장에서 팔기도 했지만 그마저 살 돈이 없어 집에서 만들어 신는 사람이 많았다. 또 나막신이란 게 있었다. 나무로 홈을 파서 발이 들어가는 자리를 만들고 밑에는 앞뒤로 굽을 만들어 여간 비다 오는 날에도 버선발이 젖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건 일하는 사람이나 바쁘게 다니는 사람에겐 맞지 않고 일을 하지 않고 긴 담뱃대를 들고 부채질을 하면서 어슬렁어슬렁 다니는 선비한테나 어울리는 신발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얼마동안은 이런 짚신과 나무로 만든 게다를 신고 다니다가 1948년인가 돼서야 검정고무신이 나왔다. 이건 보들보들하고 발에도 딱 맞아서 달리기도 할 수 있고 물도 새지 않아서 참 좋았다. 한 가지 흠은 처음 신을 때 뒷꿈치가 아팠다. 좀 단단한 고무가 뒷꿈치에 닿아있으니 처음엔 너무 아파서 신발을 완전히 신지 못하고 앞에만 걸고 질질 끌고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아픈 걸 참으며 신다 보면 도톰한 부분이 닳아서 아픔이 덜했다. 검정고무신을 몇 해 신다가 흰고무신이 나왔다. 모양도 한결 예뻐졌고 보드랍기도 한결 더했다. 내가 이 흰고무신을 처음 산 것은 열여섯 살이 되는 설날을 며칠 앞두고 였다. 아버지가 시장에서 사 오신 걸 받아서는 어디에 둬야 하나. 고민을 했다. 방 윗목에 두고 생각하니 혹시 쥐가 와서 갉아먹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다시 벽에다 걸었다. 그러고 생각하니 뾰족한 못에 상처라도 생길 것 같아 다시 내려서 내가 자는 이불 속에 넣었다. 그러나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내가 자다가 몸부림을 치다가 깔아뭉게어 예쁜 모양새가 삐뚤어지지 않을까? 그래서 다시 내가 자는 머리맡에 두고 자기로 했다. 이 흰고무신은 내가 스물세 살 장가를 갈 때까지 신었다. 직장에 다니면서 남들은 구두를 신고 운동화도 신었지만 난 그냥 고무신만 신었다. 장가 온 신랑이 흰고무신을 신고, 갓을 쓰고 왔다고 처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어지간히 가난한 모야이지"하며 쑤근거렸고, 아내는 그 소리를 듣고 너무 실망스러웠다고 6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 얘길 한다. 뿐만 아니라 내복도 떨어진 걸 기워서 입고 온 걸 보고...... 당시 너무나 유명한 동아일보 대구지사에 근무한다는 사람이 그토록 차림새가 초라했으니 그런 소리가 나올만 했겠다 싶다. 난 그때부터도 차림새에 대해서 너무 관심이 없었던가 보다. |
첫댓글 아버지, 글이 너무 길어서 한꺼번에 다 읽지를 못하겠습니다. 차츰 읽기로 하고... 1번 뒷간에서 3번 옷과 신발까지 있는데 한번에 하나씩 떼어서 올리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