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0분’ 빠르게 걷는 중년, 16년 더 젊어질 수 있다?
사람들은 언제 자신이 나이 들었다고 느낄까?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질 때, 의자에서 일어날 뿐인데 무릎이 시큰거릴 때,
피부 탄력이 예전 같지 않을 때? 답변은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런데 지난 4월 국제 학술지 《커뮤니케이션스 바이올로지(Communications Biology》에 실린 한 연구는
인간의 노화와 걷기 속도의 관계에 주목했다.
영국 레스터대 연구진이 진행한 이 연구에 따르면
중년층 중 평소 걸음이 빠른 사람은 느린 사람보다 생물학적 나이가 16년이나 젊다고 한다.
그림 1. 평소 걸음이 빠른 중년은 걸음이 느린 사람보다
생물학적 나이가 16년 젊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출처: shutterstock)
생물학적 나이는 매년 같은 날 차곡차곡 쌓이는 숫자 나이(역연령)에 저마다의 노화 정도를 반영한 것이다.
50대인 나와 내 친구가 나란히 걸을 때 걸음이 느린 내가 발 빠른 친구에게 노상 뒤처진다면,
나의 생물학적 나이는 이미 60대이고 친구는 40대일 수 있다는 말일까?
느린 걸음은 단지 생활 습관의 문제 아닐까?
위와 같은 결과가 어떤 근거에서 도출된 것인지, 걷기와 노화의 관계부터 찬찬히 살펴보자.
걷기로 건강을 진단하다
인간의 노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정희원 노년의학 전문의는
1961년 해부학자 레너드 헤이플릭이 ‘세포 노화(cellular aging)’ 상태에 이르는 세포의 특징을 포착하면서
현대 생물학 노화 연구의 출발점이 마련되었다고 설명한다.
이전까지는 노화를 단지 개체 수준의 현상으로 이해했다면,
헤이플릭은 세포 수준에서 세포가 분열을 거듭할수록 증식 속도가 늦어지는 식으로 노화한다는 아이디어를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노화는 유전 프로그램과 여러 사회적 요인의 복합 작용으로 우리 몸의 세포, 조직, 기관에 누적된 구조적·기능적 변화를 통틀어 보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림 2. 미국의 해부학자 레너드 헤이플릭은 세포들이 정해진
횟수만큼 분열하고 나면 분열을 멈춘다는 것을 발견해
현대 노화 연구의 문을 열었다.
(출처: Stanford Medical History Center Flickr)
사실 걷기는 모든 연령대에서 손쉽게 관찰 가능한 신체활동이라는 점에서 건강 상태 일반을 확인하는 주요 지표로 쓰여왔다. 건강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잘 걷는다’는 행동은 무엇 하나 특별한 것 없어 보이나 운동 조절 능력, 근골격 및 심폐 능력, 인지 능력, 동기 부여 등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 필요한 능력 중 한두 가지만 삐걱거려도 인간의 걷는 모습은 금세 달라지고 만다.
배가 아프면 등을 자연히 굽히게 되듯, 에너지를 써 앞으로 나아가는 근골격계와 주위에 반응하는 시각 등 인지 능력이 떨어지면 전체적인 움직임도 굼떠진다.
느린 걷기와 노화, 텔로미어를 보다
느린 걷기 속도가 노화의 징후라는 연구는 이전에도 있었다.
가령 2019년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과 미국 듀크 대학 공동 연구진은
뉴질랜드 국적으로 나이가 모두 45세인 피험자 약 1000명을 대상으로
2년간 수집한 신체 및 뇌 기능 검사 결과와 보행 속도 기록을 분석한 결과,
걸음 속도가 느린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19가지 척도에서 더 빠르게 노화하는 징후를 보였다고 밝혔다.
이들 집단은 MRI 검사 결과에서 뇌의 총 용적과 평균 피질 두께가 더 낮게 나타나기도 했다.
이번에 발표된 영국 레스터대의 연구는 영국 바이오뱅크에 등록된 40만 6000여 명의 데이터를 활용했다.
가장 특징적인 점은 이들이 피험자의 걷기 속도와 생물학적 노화의 지표인 백혈구 텔로미어의 길이(LTL)를 비교했다는 데 있다. 진핵생물의 염색체 말단에 존재하는 이 부위는 유전 정보 없이 무의미한 염기 서열이 반복되는 구간인데, 세포 분열을 거듭할수록 차차 짧아진다. 텔로미어가 계속 짧아지면 세포가 더는 분열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되므로 LTL은 생물학적 연령을 판단하는 강력한 지표로 간주된다.
그림 3. DNA 끝에 있는 텔로미어는 세포 분열 때마다 짧아진다.
텔로미어가 다 닳으면 세포는 분열을 멈추게 되므로 텔로미어는
노화와 수명에 중요한 인자로 연구되고 있다. (출처: shutterstock)
더 많이 그리고 ‘더 빨리’
레스터대 연구진은 평균 나이 56.5세인 피험자들의 LTL, 웨어러블 기기로 수집한 걷기 가속도 자료, 자가 기록한 걷기 습관 자료를 비교 분석했다.
피험자는 시속 6.4km 이상으로 빠르게 걷는 집단,
시속 4.8km 미만으로 느리게 걷는 집단, 그 사이에 속하는 보통 속도로 걷는 집단으로 나뉘었다.
분석 결과, 빠르게 걷는 집단의 사람은 텔로미어의 길이가 더 길게 나타났다.
전체적인 신체 활동량, 다른 신체 활동과의 상관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걷는 속도가 평소 운동을 더 많이 한다거나 더 많이 움직이는 편이라든가 하는 습관의 문제보다
유전적 지표에서 더 큰 상관관계를 보인 것이다.
그림 4. 모델 1의 그래프를 보면, 평균(Average) 속도로 걷는 사람보다 빠른(Brisk) 속도로 걷는 사람의 텔로미어 길이가 더 길다. 연구팀은 모델 2, 3, 4처럼 걷는 속도 외에 음식이나 알코올, 흡연, 수면시간, 혈압이나 당뇨 등의 기저질환, 체질량지수 등 여러 변수에 따라 텔로미어의 길이가 차이가 날 수는 있지만, 모두 빠른 속도로 걷는 사람의 텔로미어 길이가 길게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출처: communications biology)
당초 이 연구는 걷는 속도가 평소 건강 상태의 주요 예측 인자임이 잘 알려져 있고,
더 높은 수준의 신체 활동과 심폐 건강이 더 긴 LTL과 관련 있다는 연구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해야 하는 운동이 아닌, 걷기와 같은 습관적 움직임과 생물학적 노화 지표의 관계를 살피려 한 것이다.
레스터대 연구진들은 하루에 10분 ‘빠르게’ 걷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연구진의 일원인 톰 예이츠 교수는
“이번 연구는 빠른 걷기 속도가 텔로미어로 측정되는 생물학적 나이를 더 젊게 만들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고 말하며 건강을 위해 평소 더 많이 걷는 것보다 ‘일부러 더 빨리 걷는’ 습관이 필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물론 노화란 유전적 요인만으로 전부 설명할 수 없으니, 느리게 걷는 내가 빠르게 걷는 친구보다 노쇠했다고 이르게 낙담하지는 말자. 다만 나의 건강을 위해 친구의 속도에 맞춰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여볼 필요는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