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의 강역고찰
1.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
朝鮮王満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為其遠難守, 複修遼東故塞, 至浿水為界,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満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斉亡命者王之, 都王険.
會孝恵、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即約満為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満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真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真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渉何譙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禦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 即渡, 馳入塞, 遂帰報天子曰「殺朝鮮將」. 上為其名美, 即不詰, 拝何為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発兵襲攻殺何.
天子募罪人撃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従斉浮渤海;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 右渠発兵距険.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縦,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斉兵七千人先至王険.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即出城撃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収散卒, 複聚. 左將軍撃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天子為両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右渠見使者頓首謝:「願降, 恐両將詐殺臣;今見信節, 請服降.」遣太子入謝, 獻馬五千匹, 及饋軍糧. 人衆萬餘, 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為変, 謂太子已服降, 宜命人毋持兵.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 遂不渡浿水, 複引帰.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 至城下, 囲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左將軍素侍中, 幸, 將燕代卒, 悍, 乗勝, 軍多驕. 樓船將斉卒, 入海, 固已多敗亡;其先與右渠戦, 因辱亡卒, 卒皆恐, 將心慚, 其囲右渠, 常持和節. 左將軍急撃之, 朝鮮大臣乃陰閒使人私約降樓船, 往來言, 尚未肯決. 左將軍數與樓船期戦, 樓船欲急就其約, 不會;左將軍亦使人求閒郤降下朝鮮, 朝鮮不肯, 心附樓船:以故両將不相能. 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 今與朝鮮私善而又不降, 疑其有反計, 未敢発. 天子曰將率不能, 前(及)[乃]使衛山諭降右渠, 右渠遣太子, 山使不能剸決, 與左將軍計相誤, 卒沮約. 今両將囲城, 又乖異, 以故久不決. 使済南太守公孫遂往(征)[正]之, 有便宜得以従事. 遂至, 左將軍曰:「朝鮮當下久矣, 不下者有狀.」言樓船數期不會, 具以素所意告遂, 曰:「今如此不取, 恐為大害, 非獨樓船, 又且與朝鮮共滅吾軍.」遂亦以為然, 而以節召樓船將軍入左將軍営計事, 即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 並其軍, 以報天子. 天子誅遂.
左將軍已並両軍, 即急撃朝鮮. 朝鮮相路人、相韓陰、尼谿相參、將軍王唊相與謀曰:「始欲降樓船, 樓船今執, 獨左將軍並將, 戦益急, 恐不能與, (戦)王又不肯降.」陰、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王険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複攻吏. 左將軍使右渠子長降、相路人之子最告諭其民, 誅成巳, 以故遂定朝鮮, 為四郡. 封參為澅清侯, 陰為荻苴侯, 唊為平州侯, 長[降]為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為溫陽侯.
左將軍徴至, 坐爭功相嫉, 乖計, 棄市. 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 當待左將軍, 擅先縦, 失亡多, 當誅, 贖為庶人.
太史公曰:右渠負固, 國以絶祀. 渉何誣功, 為兵発首. 樓船將狹, 及難離咎. 悔失番禺, 乃反見疑. 荀彘爭勞, 與遂皆誅. 両軍倶辱, 將率莫侯矣.
『사기』 청나라 판본(중국 북경사범대학 소장)
(네이버 지식백과 인용)
조선(朝鮮)의 왕 만(滿)은 원래 연(燕)나라 사람이었다. 당초 연은 전성기 때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귀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변방 요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을 멸망시키고 요동(遼東) 바깥 경계에 귀속시켰다. 한(漢)이 일어나자 그곳이 멀어 지키기가 어려워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를 정하고 연에 소속시켰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은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추결(魋結, 상투를 틀다)을 하고 만이(蠻夷)의 옷을 입고는 동쪽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의 옛 비어 있는 지역을 점거하고, 변방을 오가며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연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어 왕검(王險)을 도읍으로 삼았다.
마침 효혜(孝惠), 고후(高后) 때를 맞이하여 천하가 비로소 안정을 찾자 요동 태수는 곧 위만과 외신(外臣)이 되어 요새 밖의 만이를 보호하고 변경을 침범하지 말 것이며, 만이의 군장들이 들어와 천자를 만나고자 할 때 금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를 보고하니 주상이 허락했고, 이로써 위만은 군대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가까운 작은 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땅이 사방 수천리에 이르렀다.
아들에게 왕위가 전해졌고 손자 우거(右渠)에게 이르러 유인한 한의 망명자들이 점점 많아졌고 또 들어와 (천자를) 만나지도 않았다. 진번에서 가까운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만나려고 하니 또 막아서 통하지 못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년) 한(漢)은 섭하(涉何)에게 우거를 나무라고 깨우쳐주려 했으나 끝내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 섭하가 떠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를 앞두고는 수레를 끄는 자에게 섭하를 호송하던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죽였다. 그리고는 바로 (패수를) 건넌 다음 말을 달려서 요새로 들어가서는 돌아가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주상은 그 명분 때문에 꾸짖지 않고 섭하를 요동의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임명했다. 조선이 섭하를 원망해 군사를 일으켜 섭하를 습격하여 죽였다.
천자는 죄인을 모아 조선을 공격했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해 제에서 출발해 발해(渤海)를 건너게 하고, 병사 5만의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나와 우거를 공격했다. 우거는 군대를 징발하여 험한 곳에서 맞섰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는 요동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공격했으나 패해 흩어졌다. 다는 돌아왔으나 군법에 따라 목이 잘렸다. 누선장군은 제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먼저 왕검에 이르렀다.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염탐해 알아내고는 즉시 성을 나와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의 군사들은 패하여 흩어져 달아났다.
장군 양복은 자신의 무리를 잃고 산속에 10여 일 숨어 있다가 점차 흩어진 군사들을 찾아 수습하여 다시 모았다. 좌장군은 조선의 패수 서쪽의 군대를 공격했으나 돌파하여 전진할 수 없었다.
천자가 두 장군으로는 유리할 것이 없다고 여기고는 바로 위산(衛山)에게 군사적 위력으로 우거를 타이르게 했다. 우거가 사신을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을 원했으나 두 장군이 속임수로 신을 죽일까 두려웠습니다. 지금 믿을 수 있는 부절을 보았으니 항복하길 청합니다”라며 사죄했다. 그리고는 태자를 보내 사죄하게 하는 한편 말 5천 필을 바치고 아울러 군량을 제공하기로 했다. 만여 명이 무기를 가지고 바야흐로 막 패수를 건너려는데 사신과 좌장군은 이들이 변고를 일으키지나 않을가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무기를 지니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태자 역시 사신과 좌장군이 속임수로 자신을 죽일까 의심이 되어 끝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되돌아 왔다. 위산이 돌아가 천자가 보고하자 천자는 그를 죽였다.
좌장군이 패수 위의 군대를 물리치고 진격하여 성 아래에까지 이르러 그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 장군도 합류하여 성 남쪽에 진을 쳤다. 우거는 성을 굳게 지키니 몇 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좌장군은 평소 황궁에서 (천자를) 모시며 총애를 받았고, 그가 이끄는 연, 대(代)의 병사들은 사납고 승리로 인해 많은 군사들이 교만했다.
누선장군은 제의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로 들어갔으나 이미 여러 차례 패해 도망쳤다. 그에 앞서 우거와 싸웠으나 곤욕을 치르며 병사들을 잃으니 병사들이 모두 두려워했고 장군의 마음도 참담했다. 그래서 우거를 포위하면서도 늘 조절과 화의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좌장군은 서둘러 왕검성을 공격하려 했고, 조선의 대신들은 몸래 사람을 시켜 사적으로 누선장군에게 항복하겠다는 말들을 주고받았으나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좌장군은 몇 차례 누선장군에게 함께 싸울 것을 채족했으나 누선장군은 서둘러 그 약속을 성사시키려고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좌장군도 사람을 넣어 그 틈에서 조선을 항복시키려 했으나 조선은 내켜하지 않았고 마음은 누선장군에게 가 있었다. 이 때문에 두 장군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 좌장군은 속으로 누선이 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고, 지금은 조선과 더불어 사적으로 잘 지내지만 조선은 여전히 항복하지 않으니 그가 반란을 일으킬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자는 “장수가 군대를 제대로 이끌지 못해 위산을 시켜 우거에게 항복하라고 타일렀다. 우거가 태자를 파견했는데 위산이 사신으로 처지하지 못하고 좌장군과 함께 계획을 망쳐 끝내 약속이 성사되지 못했다. 지금 두 장군이 성을 포위했지만 또 서로 맞지 않아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고 있다”라 하고는 제남(濟南) 태수 공손수(公孫遂)를 시켜 가서 그 일을 바로 처리하게 하고,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게 했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좌장군은 “조선은 오래 전에 공략했어야 하는데 공략하지 못한 데는 사정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누선장군이 여러 차례 회동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일 등 평소 생각했던 것을 모두 공손수에게 말하고는 “이제 이와 같은 자를 잡지 않는다면 아마도 큰 해가 될 것이며, 누선장군 뿐만 아니라 또 조선과 함께 우리 군대를 없앨 것입니다”라고 했다. 라고 말했다. 공손수도 그렇다고 생각하여 부절로 누선장군을 불러 좌장군의 군영에서 일을 상의하자고 하여 바로 좌장군 휘하에게 누선장군을 체포하게 하는 한편 그 군대를 병합한 다음 천자에게 보고했다. 천자는 공손수를 죽여 버렸다.
좌장군은 두 군대를 병합하고는 바로 조선을 서둘러 공격했다. 조선의 재상 노인(路人)과 재상 한음(韓陰), 이계(尼谿)의 재상 삼(參)과 장군 왕협(王唊)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에 누선에게 항복하려고 했으나 누선은 지금 붙잡혀 있고, 좌장군 혼자 군사를 병합해 거느리고 있으니 전세가 더욱 위급하여 아마 더불어 싸울 수 없을 것 같지만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한음, 왕협, 노인은 다 도망쳐서 한에 항복했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 여름, 이계의 재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 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했다.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옛 우거의 대신 성기(成己)가 반란을 일으켜 다시 관리들을 공격했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과 재상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 백성들을 설득하여 성사를 죽이게 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조선이 평정되어 사군(四郡)을 두었다. 삼을 획청후(澅淸侯)에, 한음을 적저후(狄苴侯)에, 왕협을 평주후(平州侯)에, 장항을 기후(幾侯)에 봉했다. 최는 그 아버지가 죽은 공이 있어 온양후(溫陽侯)에 봉했다.
좌장군은 불려 와서 공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고 계책을 어긋나게 했다는 죄를 받아 기시(棄市)에 처했다. 누선장군은 군대가 열구(洌口)에 이르렀을 때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으나 자신이 멋대로 먼저 공격하다가 군사를 많이 잃은 죄로 죽는 것이 당연했지만 돈으로 속죄하고 서인이 되었다.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우거(右渠)가 (성의) 견고함만 믿다가 나라의 제사가 끊어졌다. 섭하(涉何)는 공로를 속여 군대를 동원하게 하는 단서를 제공했다. 누선장군은 속이 좁은 탓에 재난과 죄를 얻었다. 반우에서의 실책을 후회하다가 도리어 의심을 샀다.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 공손수와 함께 죽었다. 두 군대가 모두 치욕을 당했고, 장수로서 후가 된 자가 없었다.”
2.
조선사오천년의 백두산(白頭山)이 바로 현 알타이산이고, 이 산의 북쪽이 북만주(北滿洲) 그리고 아래쪽 현 천산(天山)까지의 천리벌판이 바로 남만주(南滿洲) 요동벌이였음을 이전 글에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상고조선(上古朝鮮)으로부터 이어지는 찬란한 역사에서 기자(箕子)조선과 위만(衛滿)조선의 강역이 남만주 즉 현 신강지구 천산(天山)이북의 천리벌에서 이루어진 일들이었음을 밝힐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중심에 왕검성(王儉城) 즉 현 우르무치(吳魯木齊)가 있었음을 또한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우루무치가 바로 단재(丹齋,1880-1936)선생이 밝힌 세 개의 평양중 하나가 되겠다.
간교한 일본제국주의는 1910년 우리 조선민족이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한 후 그 웅대하고 찬란한 역사를 왜곡하고 축소시켜 별볼일 없는 열등한 민족으로 강등시키고자 돈으로 매수한 친일파들의 강력한 후원(?)아래 현 한반도 강제이주를 획책하게 되는데, 이자들은 바로 당시 남만주(南滿洲)에 묻혀있던 조선민족 상고역사의 수많은 유물,유적을 현 반도 평양(平壤)일대와 만주(滿洲)라는 지역으로의 이전설치를 시작하게 된다.
고구려라는 역사적 실체의 본향이 바로 남만주(南滿洲) 즉 현 신강지구 천산(天山)이북(以北)으로부터 북만주와 현 몽고(蒙古)지역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이었음을 고려해 보면, 중앙아시아와의 밀접한 연계성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을 것임은 너무나도 당연하며, 교류를 통한 문화의 전파가 고구려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조선사오천년의 백두대간(白頭大幹)이자 마천령(磨天嶺)이 위치한 현 러시아 투바공화국에는 온다르(Ondar)라는 성씨가 매우 많다고 한다. 바로 고구려 온달장군의 이름과 유사하며, 우리가 고증한 고구려의 강역을 상기한다면 이들은 정확히 고구려의 후예임을 단번에 간파해 낼 수 있는 일이다.
친일식민강단사학은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의 간교한 술책에 따라 변조된 조선사(朝鮮史)를 마치 진실의 역사인양 지금도 반도를 그 역사의 중심축으로 놓고 해석하는 작업을 활발히 확대재생산하고 있는데, 조선사오천년의 중심인 백두산(白頭山)과 남북 만주(滿洲)가 밝혀진 이상 그 역사의 진실과 거짓은 올곧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따라서 본 글에서 다루는 사마천 사기(史記)에 기술된 조선열전(朝鮮列傳)의 주무대 또한 현 감숙성(甘肅省) 이서(以西)지역에서 역사속의 남만주(南滿洲)였던 현 신강지구 천산(天山)의 위아래 지역에서의 일들임을 정확히 인식해야 할 일들이다.
3.
이를 좀 더 깊이 있게 알려줄 수 있는 선학(仙鶴)들의 글을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⓵조선상고문화사 – 丹齋 신채호
대개 箕準이 衛滿에 패하여 남방 馬韓의 작은 마을을 쳐서 깨뜨리고 일시 王이라 칭하다가 곧 멸망하였으므로, 陳壽의 三韓傳에서도 '그 뒤에 滅絶하였다' 고 하였던 것이다.
→이는 위만의 반란으로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 유민을 이끌고 현 신강지구 우루무치지역에서 동쪽으로 달아나 현 대륙의 중심지역(장강 부근)으로 이주해 당시 마한(馬韓)에 안착했음을 말한다. 위만이 찬탈한 위만조선의 강역은 지금의 신강지구 우루무치 지역으로 비정되며, 위만(衛滿)이 중앙아시아에서 한(漢)나라로 이어지는 요로(要路)를 차지하고 통제하니, 이후 한무제(漢武帝)의 공격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이 지역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된 것이 정확한 역사의 일들이다.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는 이 신강지구 요동벌의 역사를 현 한반도를 중심으로 왜곡 및 변조 기술한 것이고 이 간교한 일에 이병도를 비롯한 수많은 친일지식인들이 협조,세뇌하여 지금도 친일식민강단사학에 의해 확대재생산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②조선상식문답-六堂 최남선
단군과 개아지, 위만의 나라는 다 朝鮮이란 이름을 썼으므로 이를 三朝鮮이라 하고 또 근세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古朝鮮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단군의 이름으로 세상을 다스린지 천여년 만에 정치의 형식이 변하여 나라어른을 개아지 라고 고쳐 부르면서 다시 천여년을 지내더니, 중국으로부터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조선으로 밀려 들어오는 백성이 많고 이를 제어하기에는 전보다 굳센 정권을 만들 필요가 있어서 중국 사정에 밝은 衛滿이란 이가 대신 조선의 임금이 되고, 개아지 임금은 남방인 韓의 땅으로 옮겨가서 새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중국이란 표현은 당시의 친일식민사학의 흐름을 따라 쓰여진 의미없는 단어로 보면 될 일이고, 기준(箕準)이 대륙의 한복판에 생거하고 있던 마한(馬韓)으로 이주한 역사를 말하여주고 있다.
③六堂 최남선
조선과 중국과의 사이에 貿易으로 큰 관계가 있었는데, 衛滿의 나라가 중간에서 그 이익을 집어먹자 중국에서 이를 미워해 군사를 데리고 와서 쳐서 없앴다. 그 자리에 樂浪이라는 고을을 두고, 낙랑의 곁에 臨屯, 眞蕃, 玄菟(현토) 등 세 고을을 세웠다. 이것을 漢의 4군이라 한다
→한무제(漢武帝)의 위만조선(衛滿朝鮮) 침공이 바로 경제적 이익(利益)에 있었음을 육당은 말해주고 있다. 그 이면에 전쟁을 할 정도로 커다란 이익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그것을 분석해 밝히는 일은 후인의 몫임을 우리는 알아차려야 하겠다. 예나 지금이나 큰 이익은 중개무역(仲介貿易)에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위만조선의 강역이 신강지구 천산부근이 되어야 함은 자명한 일이라 하겠다. 척박한 이 반도에 중개할 물품이 무엇이 있겠는가? 상식적 판단의 일이라 할 수 있다.
④丹齋 조선상고사
王儉城은 대단군 제1세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은 城으로 대단군의 三京은 하얼빈(哈爾賓)과 평양과, 불한 故都 즉 蓋平 동쪽의 세곳이므로, 모두 다 王儉城이란 이름을 가졌을 것이다. 따라서 위만이 도읍한 왕검성은 곧 개평 동북이니, 漢書地理志의 요동군 險瀆縣(험독현)이 그곳이다.
→역사속의 평양이 세 곳이었음을 단재는 후학에 알려주고 있는데. 하얼빈은 송화강(松花江)변에 있어야 하니 현 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로 비정되고, 그 다음 평양은 장수왕(長壽王)이 427년 천도한 곳으로 필자가 고증한 신강(新彊)자치구 아라타이 지구의 부온현(富蕴县)부근으로 비정되며, 마지막으로 개평 동쪽의 평양은 현 우루무치로 비정되는데, 단재(丹齋)는 구한말 당시 이를 정확히 꿰뚫고 있으면서 이 엄청난 역사를 후학에 알리고자 북경(北京)의 어느 골방에서 추위를 이겨내며 서슬퍼런 조선민족의 기개(氣槪)를 불태웠음을 우리 후인들은 사무치는 존경(尊敬)의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일이다.
⑤김교현 신단민사
韓나라 張良은 秦나라가 韓나라를 멸한 원수를 갚고자 하여 동쪽 濊나라에 와서 힘센 장사를 찾았다 濊人 黎道令(여도령)이 이에 응해 120근 되는 쇠뭉치를 들고 博浪沙(박랑사)에서 秦皇을 공격하다가 그 부하를 잘못 맞혔다.
漢 劉邦은 西楚와 서로 싸우다가 貊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기사를 보내어 廣武山 중에서 西楚의 霸王 項羽(항우)를 공격하여 몰아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김교헌(金敎獻, 1868~1923)선생은 구한말 예조참의(禮曹參議)와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낸 기라성(綺羅星)같은 인물이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에 참여하였고, 경술국치(庚戌國恥)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1919년2월 만주 길림(吉林)에서 대한독립선언서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선포하는데 참여하였으며, <神壇民史>는 1914년에 저술한 책으로 선생의 중국망명후 그의 서적대부분은 육당(六堂)최남선이 보관하다가 지금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위의 내용이 바로 송동건 선생이 <고구려와 흉노>라는 책에서 고구려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요청에 군사를 보내 패왕(霸王) 항우(項羽)를 물리쳤다는 기록의 근거가 되는 글이다.
박랑사(博浪沙)의 힘센 장수가 바로 예(濊)족의 여도령(黎道令)이고, 유방(劉邦)의 요청에 부응해 항우(項羽)를 무찔러 한(漢)나라의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군대가 맥(貊)족이라는 기록이다. 예맥(濊貊)은 옥저(沃沮)의 후예로 이들은 온전히 고구려에 편입되어 조선민족의 상고역사를 이루었던 여러 갈래의 한 분파이다. 따라서 김교헌선생은 <신단민사>를 통해 숨겨져 있던 한(漢)나라의 성립과 고구려와의 관계를 논술하고 있는데, 이렇게 엄청났던 고구려를 반도북쪽과 만주로 그 역사의 강역을 옮겨놓은 일제와 친일파들은 이 웅대한 역사의 이야기를 꽁꽁 숨겨놓고 새롭게 교열해 후세를 기만해 온 것인데, 현 식민강단사학의 모리배들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김교현선생이 헛소리를 했다는 패륜의 언어도단(言語道斷)을 거리낌없이 지껄이니 이는 반드시 후세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4.
위의 글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사마천의 사기(史記)라는 책에 나오는 조선열전(朝鮮列傳)의 강역은 현 신강(新彊)지구 천산(天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남만주(南滿洲)와 이를 점유해 역사를 이어왔던 고조선(古朝鮮)일부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과 위만조선(衛滿朝鮮) 이후 한사군(漢四郡)의 강역이 어디였던가가 확연하게 나타난다. 이를 통해 하나씩 고증해 보면 <史記> 朝鮮列傳의 어느 부분이 잘못 기술되었는지 올바로 잡아낼 수 있게 된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역사서술방식이야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가 추구하는 서술방식임을 인정하고 들여다보면, 동(東)과 서(西)를 바꾸어 교열했음을 알 수 있고, <遣樓船將軍楊僕従斉浮渤海>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해 제에서 출발해 발해(渤海)를 건너게 하고”, 라는 문구는 후세 교열하여 현 산동(山東)과 반도조선에 맞추어 놓은 것을 간파해 낼 수 있다.
한서(漢書) 고제기(高帝紀)에 보면 제(齊)나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夫齊, 東有琅邪,卽墨之饒, 南有泰山之固,西有濁河之限,北有渤海之利
<제나라는 동으로는 퐁요로운 낭야,즉묵이 있고, 남으로는 견고한 태산이 있으며, 서로는 땅끝과도 같은 탁하(황하)가 있고, 북으로는 이로운 발해가 있다.>
산동(山東)은 태행산(太行山)의 동쪽에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름으로, 현 감숙성(甘肅省) 기련산(祁連山)이 바로 역사속에 존재했던 태행산이다. 따라서 산동(山東)은 태행산의 우측 현 난주(蘭州)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지역이고, 그 아래에 태산(泰山)이, 좌측으로 황하(黃河)의 상류가 북쪽으로 흘러가고 그 위쪽으로 또한 발해(渤海)가 있었으니, 지금은 사막으로 변해버린 하란산(賀蘭山)의 좌측 거대한 사막지역이 되겠다.
진한(秦漢) 당시의 낙양과 장안이 필자가 고증한 현 감숙성(甘肅省)의 서녕(西寧)과 난주(蘭州)서남쪽 린샤후이족자치구일수도 있겠으나, 사막화 이전을 생각해 본다면 좀더 서쪽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근거는 바로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과 연(燕)나라와의 전쟁을 통해서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데, 연(燕)나라는 진(秦)나라에 제일 멀리 떨어져 있던 나라이고 요동(遼東)과 가까운 나라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조그만 자취만 남아있는 타림분지 우측의 나포박(羅布泊)호수는 1950년이전 미국측 자료에 보아도 호수의 크기가 2-3백km에 달하는 커다란 호수였고, 또한 이 호수는 스웨덴의 지리학자 스벤헤딘(Sven Anders Hedin, 1865-1952)에 의해 염호(鹽湖)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역사의 기록에서 고구려(高句麗) 광개토대왕이 연(燕)나라 정벌과정에서 소금을 언급했다고 하는데, 만약 고구려가 이 반도땅에 있었다면 삼면이 바다인데 무슨 소금걱정을 할 것이며, 따라서 남만주(南滿洲)였던 현 우루무치까지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고구려는 연(燕)나라 판도에 들어있던 로프노르(나포박)호수의 소금을 원했던 것임을 간파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연(燕)나라의 강역이 현 투르판지구의 동남쪽으로 형성되어 있음을 또한 알아낼 수 있게 되는데, 결국 조선민족과 한족(漢族)의 갈등관계는 풍요롭고 살기좋은 남만주 요동벌을 점유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이며, 중요한 식품인 소금(素金)의 공급원으로 나포박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기에 고구려(高句麗),발해(渤海)로 이어지는 광대한 역사는 나포박(羅布泊)호수에서 돈황(燉煌)까지 이어지는 루트를 철저히 공략해 보유해 왔음을 정확히 유추할 수 있다.
현재 만리장성의 서쪽끝에는 가욕관(嘉峪關)이 자리잡고 있다. 단어뜻은 분명 아름다운 계곡속에 있는 관문인데, 현재의 가욕관은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 현 가욕관(嘉峪關)은 북경 자금성(紫禁城)의 일부일뿐이며, 중국공산당은 지명을 이동시키면서 자금성(紫禁城)의 일부 성곽을 가욕관(嘉峪關)으로 변조해 후세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흉노(匈奴)의 남하를 막기위해 쌓았다는 만리장성은 현 천산(天山)이북에 자리잡은 강력한 부여(扶餘)와 고구려(高句麗)를 대비하기 위한 한족(漢族)의 방어시설이었으며, 그들이 말하는 역사의 흉노(匈奴)란 바로 <투구쓴 전사> 부여와 고구려의 개마무사(蓋馬武士)를 지칭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엄청난 역사를 숨기기 위해 중국공산당과 조선사편수회는 단어뜻 그대로 <흉악한 종놈>이라 번역하여 후세를 기만하고 그 찬란한 역사가 현 반도와 그 북쪽 척박한 만주에서의 일이었다고 강변하며 우리 조선민족(朝鮮民族)의 혼(魂)을 빼앗고 굴욕감을 고취시켜 다시는 발흥할 수 없도록 역사를 훼방하고 있음을 오늘의 우리는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경주(競走)해야 할 일이다.
5.
이를 지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23.03.20.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