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제2회 『문장 21』문학상 수상의 영광은 대상에 김동원(시인 · 평론가) 본상에 이영배(시인), 조혁훈(수필가)에게 돌아갔다. 위 세 분을 심사위원 전원일치 수상자로 결정하였다. 대상 수상자 김동원 시인은 각종 지면에 작품을 발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본상 수상자 이영배 시인은 『문장 21』로 등단,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각종 지면에 작품을 발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조혁훈(수필가) 역시 각종 지면에 작품을 발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세 분은 『문장 21』 명성에 부합되는 작가라는 일치된 평가로 수상자로 선정하게 되었음을 밝혀둔다. 이번 수상이 수상자의 더 높은 문학적 성취를 위한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심사위원 모두의 바람이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장 : 이문걸(시인, 동의대학교 명예교수)
심사위원 : 선용(아동문학가, 번역가)
김철(시인, 번역가)
김종(시인, 화가, 언론중재위원)
윤일광(시인, 거제시 예술촌 촌장)
최철훈(시인, 『문장 21』 발행인)
수상소감
왜, 나는 시에 혹하는가
김동원
시는 ‘천하에 천하를 감추는 작업’(若夫藏天下於天下, 장자)입니다. 하여 저는 밤낮없이 천지 만물의 비밀을 들춥니다. 말이 있어 사물의 소리를 듣습니다. 만물의 음양을 받아들여 시의 형(形)과 상(象)을 빚습니다. 전통의 불신과 전복이 아니라 계승과 성찰을 통해, 시의 요체를 뀁니다. 저는 현실 공간인 몸과 시의 공간을 하나로 봅니다. 격물(格物)을 궁구하여 (致知)로 나아갑니다. 직유를 통해 사물의 극을 치받고, 은유를 통해 물아일체가 됩니다. 하여 밤낮없이 소리를 쫓다 언어를 잃었고, 언어를 쫓다 시를 들었습니다. 5시집『빠스각 빠스스각』에서 제가 추구한 시의 세계는, ‘이름이 없는 천지의 처음 무명無名’과 ‘이름이 있는 만물의 어미 유명有名(노자)’의 경계를, 언어로 각(刻)한 작업입니다.
시인은 시신(詩神)과 접하거나, 시마(詩魔)에 들리어 귀신도 반할 귀시(鬼詩)를 짓거나 귀경(鬼景)을 펼쳐 보입니다. 하여, 제게 시는 생사의 그림자놀이입니다. 시는 언어 이전도 아니요, 언어 이후도 아닙니다. 시인은 ‘언어’를 통해 이 세상 모든 더러운 ‘색(色)과 공(空)’의 욕망을 대신 닦아 주는 존재입니다. 사물의 기미(幾微)들과 세계의 기척들을 통해 ‘지금 여기’를 자각한 자입니다.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일이 없이, 모두가 끝없는 시공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한다는 진실을 아는 자가 시인입니다. 하여 저는 해와 달을 심복으로 삼고, 저 광활한 무위의 공간 속에서「시검詩劍」을 뽑아 한바탕 천지무(天地舞)를 춥니다.
제2회『문장21』문학상 대상 수상 소식은, 저를 한없이 적요하게 합니다. 1939년 창간된 『문장文章』 표지를 보고 있으니, 엄혹합니다. 옛 시인들의 뼛속 스민 시 정신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상(賞)은 늘 으슬으슬 춥게 합니다. 이 새벽 베란다 너머로 어둠이 수런거립니다. 시는 언어 밖에도 있고 언어 안에도 있습니다. 수십 억 년 지었다 부순, 몸 가진 것들의 창조와 몸 없는 것들의 노래입니다. 하여 저는 이번 수상을, 지금까지의 시 세계에 덧대, 한국 현대시사에 독자적 서정을 열어나갈 것을 채찍하는 천명의 소리로 듣겠습니다.
수상작
시검詩劍 외 4편
김동원
천하를 갖고 싶으냐!
쉬지 말고 광활한 초원에 말을 달려라
칼을 쳐들고 불의 행간을 뚫어라
아무도 흔적을 남길 수 없구나
바람만 칼끝을 보고 있다
눈을 파내어라, 귀를 묻으라
직유는 결코 혼자 죽지 않는다
귀신도 모르게 은유를 쳐내는구나
불이 내렸도다!
시시각각 말은 휘황찬란하구나
말이 말을 닫으니 일어나는 말이 없구나
달려도 달려도 이미 와 있는 말
검劍을 찾을 자者 영원히 없을 지니,
무無를 베라, 천지사방 색色을 베라
무덤은 산 자들의 퇴고가 아니냐
정녕, 천하를 갖고 싶으냐,
번개처럼 단칼에 놈의 목을 베라!
말귀
매화 꽃잎은 천천히 허공을 여네. 말귀는 열어 두고, 찻잔 속에 향을 머금네. 대숲 바람이 눕는 사이, 부드럽게 모음이 구르네. 말은 오므라 드네, 아니, 벌어지네. 그래, 그래, 조여 지는 말의 체위. 달빛은 바람의 샅을 핥고 있네.
구름은 또, 허공의 귓등 새로 말이 흐르네.
색의 자음들이 올라타네. 홍紅, 홍紅, 홍紅, 베갯머리에선 색 쓰는 소리가 깊네. 노랑 말귀를 알아 듣는 노란 단풍. 산이 풀리고 노을이 닫히고, 사이사이 말귀가 트이네. 겨울 눈 내리고 봄꽃 피고, 돌아보니, 문득, 말들이 사라지고 없네.
칸나
거울 속 꽃은 지는데,
첼로를 타고 카루소는 흐르고
흑 흑 흑, 왜 우는 거야, 바람
돌아보면 부서져버릴 사랑
칸나, 칸나, 칸나
불이 붙어 다 타버려라지, 뭐
거울 속 꽃은 지는데,
흑, 흑, 왜 우는 거야 바람
첼로를 타고 카루소는 흐르고
빨강, 미쳐버려라지, 뭐
칸나, 칸나, 칸나
붉은 라인은 왜 그리 외로운 거야
꽃대에 젖어 빗물은 흐르는데,
흑 흑 흑, 왜 우는 거야 바람
환상곡
우리는 푸른 바람에 손을 넣고 있었네
그는 시간을 잡는다고 했네
어디로 간 걸까, 그 얼굴들은
감쪽같이 어둠에 스며들었네
트럼펫을 불어라!
노을 지는 서쪽 바다에 서서
남자여, 미쳐버려라!
춤추고, 노래하고, 취하라, 여자여!
물 위에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네
피아노에 칸나가 핀다고 했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네
그 저녁 모두 어디론가 가고 있었네
이 시인 놈아
닥쳐요, 잊히면 좀 어때요.
진짜 시인이라면 구름에게 명령해요.
입금 좀 제때 하라고요.
집세가 없어요, 여보!
제발 노을에게 부탁이라도 해 봐요, 우리.
넷이서 밤마다 보름달만 뜯어먹을 순 없잖아요.
달무리라도 덮고 실컷 울고 싶어요.
당신이야 장미 년, 모란 년, 매화 년
끌어안고, 행간 속에 들어가면 그만이지만,
시인의 아내는 뭐예요.
그만, 그만, 내일 바람이 송금한다는
허황한 그딴 소린, 집어치워요. 제발!
빈말이라도, 돈 좀 줘 봐라,
이 시인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