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형외과라는 병원
굳이 철학적인 인식론이나 심리학적인 의. 무의식을 따지기 이전에 사람에게 있어서 경험적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인식론적인 고정 관념이 먼저 앞서게 된다.
이 고정 관념을 <경험>이라는 단어로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이 단어처럼 천(千)의 모습을 가지는 단어도 흔치 않을 것이다. 즉 느끼는 사람에 따라 제각기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되어, 오히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비유가 걸맞은 표현이 되고 만다.
소위 인식의 그물에 놓여진 사실들이라고나 할까?
<병원>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시라.
초등 학교 2학년의 어린아이는 먼저 <의사>와 <간호원>을 연상하고, 어릴 때 주사 꽂음을 두려움을 느꼈던 아이라면, 먼저 울음부터 쏟고 볼일이지만 어느 정도 병원이라는 곳을 찾아다녀 보신 분들께서는 <의료보험과 지긋지긋한 기다림>을 생각하시고 시원치 않은 욕을 뱉어 내실 분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병원이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야속하든지 또는 섭섭하든지 간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 환자가 되어서 찾아가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실 것이다. 즉 병에 대한 치료- 의사 . 간호원 그리고 온갖 검사기구들이 모두 환자의 병에 따라 부속되어진 <부속물>이라는 생각이 앞서게 된다.
먼저 환자 자신은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기 때문에 병원을 신뢰하게 되고, 그 신뢰는 하나님이나 하느님보다 더 미더운 의사라는 점에서 남에게 보이기 수치스러운 몸뚱이를 훌훌 벗어내 놓고 <봐주십사!>하는 염치도 체면도 없는 환자노릇을 하게 된다.
그래서 병원에서 발가벗고 몸체를 내놓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환자가 된 마음>이라는 자연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의사는 인간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인간이라는 몸뚱이를 다스리는 무감각한 진료상의 판단>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나름대로 수작을 하게 된다. 철저한 합리성의 분석력을 따지고 드는 <검사기구의 눈을 가지는 말하는 기계>와 같은 직업인으로서의 의사가 되어 <아니 볼 것도, 보는 것도 없는 뢴트겐의 X-ray의 감정>을 서로가 믿고 신뢰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의 현상이 버젓이 자행되는(?) 병원이 있으니....아무런 이상한 증후가 없는 사람이 OO을 찾아가 거꾸로 상처를 받고, 또 거기에 붕대까지 칭칭 매고 나오는, 오히려 몸을 상해서 나오는 병원이 있다.
즉 병원을 찾아갈 때는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던 사람이 병원에 찾아가 나올 때는 오히려 환자가 되어 비싼 돈을 치르고 나오는 병원이다.
이 병원이 이름하여 셩형외과(成形外科)로, 영어로는 <플라스틱 써저리(Plastic Surgery)>요, 얼굴을 주로 한다 하여 <페시알 플라스틱 써저리(Facial Plastic Surgery)>라하고 주로 <이비인후과>의사들이 전문으로 한다.
우리말로는 성형외과(成形外科)지만, 서양말로는 이니, 여기에는 서로 간에 사뭇 다른 표현이 깔려 있다.
먼저 서양말의 <플라스틱(Plastic)에는 조소(彫塑)라는 의미가 많아 오히려 생활상의 조화(調和)라는 뜻이 농후한 단어이다. 즉 우악스러운 성형<成形>이 아니라 <조화(調和)라는 관점의...> 뜻이 담겨져 있다.
일종의 전체적인 얼굴의 균형에 따르는 성형(成形)--개조(改造:Reproduction)라는 뜻이 강하게 풍겨진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의사와 환자라는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견해의 차이를 엿볼 수 있게 된다.
<성형외과>라는 간판에는 잘못된 해석의 리프로덕션(Reproduction)의 의미가 깔려 있다.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환자의 입장에서는 <거듭 태어나듯> 자신은 그대로 두고 보다 아름답게 보여지는 얼굴이나 몸매를 가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겠지만, 의사의 입장에서는 그 마음의 십분의 일도 못 미치는(?) 개작 또는 개조의 의학상의 기술을 이용한 변형에 불과한 뜻의 의미밖에는 내놓을 것이 없다.
그래서 성형이라고 보기에는 많은 허풍이 깔려 있어 오히려 <개조외과>라는 간판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주게 된다. 그러나 어차피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믿지 않아서는 안될 바에야 몸을 뜯어고치고자 애쓰는 분들의 기대감과 의사 분들의 영업을 위해서라도, 개조외과보다는 성형이 훨씬 바람직하다는 점에 아무런 의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성형과 개조를 놓고 서로의 마음가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아무래도 고개가 갸우뚱해지기 마련이다.
사람이란 아둔할수록 잘 믿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믿는다는 뜻은 종교나 신앙의 이야기가 아니라, 쉽사리 넘어가는 호기심과 허영, 또는 욕심에 눈이 멀어 자신마저도 부추길 수 없는 나약함을 뜻하는 것으로, 특히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분들의 욕망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 욕망의 우직함이란, 자기의 눈망울마저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남에게 보여지는, 또 남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억지로 고통을 참아 가며 갖은 인내를 감내하는 우직함이다. 그리고 거기에 <뜯어고치는 수리비>를 아랑곳하지 말아야 하는, 어쩌면 천사 같은 마음씨(?), 그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이러한 행위를 경제행위라고 가정해 볼 때, <눈이 먼 학문이 경제학이 아닌가?>를 의심케 하는 대표적인 실례가 될 것이요, 경제라는 현상의 눈먼 장님을 보는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자라는 마음은 성형이라는 단어의 의미처럼, 의사의 기술적인 관점보다는 <자신의 마음의 바램>때문에 모든 것을 따지기보다는 신뢰를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의사와 환자라는 미묘함은 더더욱 흥미로운 관계에 놓이게 된다.
예로부터, <매약불쟁가(買藥不爭價)>라는 말이 있다. 이 어귀는 의사가 지킬 사항이 아니라, 오히려 환자 되는 사람에게 충고를 주는 말이다.
'약(藥)값을 가지고 따지지 말고 의사가 달라는 대로 주어야 하느니라.'의 뜻으로 성형외과의 관계를 보면 마땅히 이렇게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환자의 심정은 마음이 성형이요, 의사의 시술은 개조이기 때문에 비싼 만큼의 신뢰가 선행되어야 더더욱 기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자의 마음에서 느끼는 성형이라는 기막힌 기술(?)과 이러한 환자의 심정을 충족시켜야 하는, 의사 분들의 인간적 고뇌를 보여주는 아량과도 다르질 않는다.
여기에 대한 좋은 비유를 보면 '의불삼세(醫不三世)'라는 고어가 있다.
의사가 같은 과로 삼대(三代)가 이어져 내려오지 않으면 그 의사를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와 다른 비슷한말로, '팔을 아홉 번 부러뜨린 의사가 아니면 의사라고 할 수 없느니라.' 하였으니 의사의 어려움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뜻도 된다.
그리고 대단스럽게 오해를 살 이야기가 되겠지만, 인술(仁術 또는 人術)이란 그 결과에 대한 시비가 따라서는 안 되는, 그런 환자의 마음가짐을 설명하는 좋은 교훈이 된다. 그러므로 특히 성형에 있어 환자의 마음은 집도를 하는 의사를 믿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욕망만큼이나 그 결과에 대한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즉 예뻐지려는 마음만큼이나 오히려 처절한 모습에 대하여서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환자가 되신 분들께서는 더 망가져도 좋다는 <그러한 각오가 없이는 아예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도 나올 법하다.> 왜냐하면 위에서 인용한 고사들이 천여 년이 넘는 옛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오늘날처럼 충분한 실험을 통하여 발전한 의학이라는 점에서도 성형수술이라는 특이성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성형수술이란, 적어도 지금까지는 다른 과와 달라 수련의라는 과정이 에매 모호하고 또 실험대상도 사람 외에는 없다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대신 개에게 쌍꺼풀을 시험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요, 토끼에게 코 성형을 해 볼 수도 없는 형편이므로, 반드시 사람이 아니고선 실험 자체마저도 의미를 찾아보기 힘이 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고약스러운 이야기지만, 흔히들 말하는 성형수술을 잘하는 의사란 <얼마만큼 남의 얼굴을 많이 버려 놨느냐?> 그리고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많은 다독거림을 했느냐?>에 비례하여 의사의 실력을 가늠하게 된다. 소위 전과(?)와 함께 단단한 배짱을 가진 기술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느 병원, 어느 과 보다도, 가장 많은 소송(Sue)과 함께 환자들의 불평불만을 잘 참아 넘기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의사가 된다. 그리고 많은 돈을 벌여들이는 만큼 많은 곤혹을 치러야 하는 의사가 바로 성형외과 의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곤혹스러움은 의사와 환자 사이의 서로의 믿음의 견해차이라는 미묘한 관점에서 기인된다. 환자는 성형이라는 단어 그대로의 뜻을 되새기고, 마치 미(美)를 찾아주는 거울의 환상이나, 콩쥐팥쥐의 이야기에 나오는 두꺼비를 연상한다. 그러나 의사란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 즉 조소나 조형이라는 뜻의 미를 추구하는 조각가이기 이전에 인체의 조직과 해부학적인 기초를 들고 나와 여기에 맞는 변형을 시도할 따름이다.
의학적인 면에서의 미라는 개념이라기보다는, 해부학적인 바탕을 이용하여, 나타나는 결과를 가지고 드러나 보이는 결과를 중요시하게 된다. 그래서 쌍꺼풀이라고 하면 눈꺼풀 위에 가벼운 그리고 자연스러운 칼집의 상처를 내어 그것이 아물게 됨으로써 보다 아름답게 보여지도록 한다. 그러므로 조형적인 미의 감각을 추구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상처라는 해부학적인 면에서 환자를 보게 된다.
환자의 입장으로서는 <상처뿐인...>의 기분이라기보다는, 자기 도취와 환상에 빠진 다음 의사를 믿고 의사가 마치 조물주라도 되는 양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환상, 즉 이미자(李美子)가 사미자(史美子)가 되는 심정으로 고통을 감수한다는 데서 차이가 나오게 된다.
여기에는 환상도 문제이지만 의사라는 대접, 고정화된 신뢰감도 무시할 수가 없다.
예로부터, 의료인이란 지위 상으로의 볼때는 천직(賤職)이었고 직분은 중인(中人)에 속하는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본분으로는 사람의 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다룬다는 점에서 남다른 점이 뚜렷했다.
[동의보감]을 보면 [예기]의 말을 빌려,
'인이무항(仁而無恒)
불가이작무의(不可以作巫醫)
즉, <의사란 모름지기 항심(恒心)을 가져야 한다. 공자(孔子)의 말씀을 빌리면, 항심(恒心)이란 항산(恒産)에서 나오니, 무당처럼 눈치를 보고 잿밥이나 탐하는 그런 마음가짐을 버리고, 오로지 인(仁)으로써 그 술(術)을 행하여 인간적인 훈훈함을 보여주고, 신뢰와 감사를 느끼도록 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인간다운 마음의 눈을 강조한 것으로 의사란 비로 천업이지만 그것을 마다하지 않고 담백하게 받아드려, 어진 사람의 어진 행위로 편안한 마음을 가질수 있는 자기 안락과 널리 베풀어 사람을 구하겠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정신으로 보수가나 의료 주가보다는 인(仁)을 앞세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날,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수입에 의거하여 직업의 천부를 따지는 세태로 보면 <마담뚜>들께서 제1번의 중매 대상자로 의사라는 직업을 높은 주가로 치는 세태라, 인(仁)이라는 단어 나부랭이나 찾아 글을 쓴다면 아무래도 구태 의연한 소리에 불과한 꼴이 되고 말일이다.
그러나 사미자(史美子)가 되고 싶어하는 이미자(李美子)들에게만 모든 것을 감수하라고 한다면 분명히 <저 바다>가 생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수술을 받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의학적인 관점을 전혀 알 바 없는 것이다. 오로지 나타나는 미의 결과에만 기대를 거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란 비싼 돈을 지불하고 그 위에 수술의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비장한 마음만큼이나 의사 또한 환자의 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해부학적인 기술의 결과 그것이 동상이몽(同床異夢)이 되니 문제가 있는 것이요, 성형(成形)이라는 간판에도 세태가 드러나 더욱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만 수술을 하는 의사의 입장이라면 <비너스를 만들어 내는 조각가>라는 허풍스러운 마음을 환자에게 비치려고 노력하기 전에 해부학적인 관점을 앞세우는 본분쯤은 지켜야 할 일이다.
서두의 <인식의 그물>이라는 철학상의 논제에 비하여 성형외과를 보는 필자의 눈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를 해 주시기 바라며, 의사 분들의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