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조영래 / 아름다운 전태일
전태일(1948.9.28.~1970.11.13.)
격변의 한국현대사를 10년 주기설로 거론할 때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시기가 1970년대라 하였다. 50년의 한국전쟁, 60년의 4.19를 거치면서 이념과 혁명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얼굴이었다면, 70년대의 코드는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에서 찾아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한강의 기적을 일군 산업화의 주역 경부고속도로와 한 청년노동자의 죽음이 던진 이 기막힌 관계는 그대로 70년대의 두 얼굴이라 하겠다.
역사에는 수많은 위인이 있고, 또한 민중의 이름으로 횃불을 든 영웅들의 일대기 또한 숱하게 있었지만, 제 한 몸을 불사르며 전부를 위해 애쓰다 간 이는 오직 전태일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것도 배움이 일천한 노동자 신분으로 시대의 어둠을 살랐다는 사실은 가슴을 뜨겁게 부끄럽게 한다. 그 어떤 정치인의 구호보다 선동적인 몸짓으로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그는 외쳤다. 끝끝내 제 뱃속의 허기는 채우지 못한 기막힌 생이었다.
전태일. 그는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민중의 아들, 억압의 아들로 이 땅에 왔다. 가난한 재봉사의 아들로 세상에 태어나 평생 배불리 먹어본 적 없는 극빈의 삶을 살았다. 가난에 의해 저지른 아버지의 힘겨움은 술과 폭행으로 이어졌다. 어머니의 식모살이, 동생을 길바닥에 버려야 했던 거지시절 이야기들은 그 시대 흔한 가난의 상징으로 치부하기에 너무나도 궁핍한 절대적 가난이었다. 그 힘겨움 속에서도 자신의 일기장에 가슴 뻐근해질 슬픔을 새긴 것은 그의 평전이 가지는 묵직한 기록의 중요성이 되었다. 스무 살 시절에 멋모르고 전태일을 학습한 후, 다시 만난 그는 성자의 철학을 몸으로 실천한 성인으로 와닿았다. 그 위대한 신념에 책장을 넘길 수 없을 만큼 눈물과 콧물을 쏟았다. 그것은 연민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배움의 기회가 주어졌던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이었다. 안타까울 만큼만 적셔보았던 배움의 기회. 그 시절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다음의 문장은 보는 사람도 잠시 행복에 웃게 할 정도였다.
‘청옥고등공민학교. 아마도 여러분은 이 이름을 들었을 때에 초라한 건물에서 배워봤자 크게 성공할 가망도 없는 답답한 인생 지각생들이 다니는, 한 평범한 학교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일 외에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 삼백만 근로자 대표 전태일 이라고 새겨진 비석 앞에 서서 누군가가 가만히 소리 내어 청옥고등공민학교 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잡초가 우거진 무덤 위로 전태일의 은은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채 1년도 되지 못하는 학창시절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단 것은 배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노동운동 당시의 막막함을 떠올리게 한다. 그에겐 배운 대학생 친구가 그 누구보다 절실했다고 기록하였다. 배움에 대한 태일의 희망을 아버지는 주제넘은 ‘지랄용천’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그는 아버지식 인생유전을 끝가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삶은 남루하였으나 그의 정신은 위대했기 때문이다.
그는‘한 인간으로서 설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 저 완강한 타인의 성채’를 ‘부한 환경’이라 이름 지었다. 그의 생에선 절대로 만날 수 없는 환경에 선을 긋고 그들이 외면하는 곳에 강렬한 평화의 열망이 있음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가 겪은 처절한 가난은 이 세상을 빨리 터득하게 하고 냉정하게 바라보게 하였지만, 그의 의식이 항상 마지막까지 목적한 곳은 이 세상의 힘없고 외로운 약자들의 거처였다. ‘언제든지 밑지는 생명을 연장하려고 애쓰는 불쌍한 사람들’은 따지고보면 그와 무관한 그들의 가난이었다. 그것을 내것으로 받아들여 끌어안는 것이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의 차이로 경계지어진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담배꽁초 줍기, 아이스케이크 장사, 우산장사, 손수레 뒤밀이... 그가 몸으로 일군, 이름조차 생소한 온갖 허드렛일과 세상의 직업 중 가장 아래에 해당하는 온갖 궂은 일들이 언제나 그의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꿈이 밑바닥에서 피어올라 고층빌딩을 향하지 않고 세상의 가난을 온전히 제 힘으로 부딪히려 했단 것에 오늘의 존경이 자리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 땅의 힘없고 가난한 약자들을 위해 열여섯이 생각할 수 있는 그 나이의 풍습을 뛰어넘은 거리의 천사. 평범한 인간다움을 삶이라 부르지 않겠다는 듯,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철저하게 홀로 죽음의 빛으로 나아간 그는 틀림없이 성자였다.
청계천 평화시장 시다(견습공). 그의 첫 직업이자 그곳 피복노동자들이 처음 밟게 되는 직업의 시작이다. 보조 없이는 일해도 시다 없이는 못한다는 말이 설명하듯, 시다의 임무는 막중한 고역을 예측케 한다. 가정형편으로 중학교를 가지 못한 어린 여공들이 하루 종일 다리미질을 하고 실밥을 뜯고, 미싱사나 재단사의 잔심부름을 하며 뼈가 굵어간다. 기술이 빠르면 잔심부름을 하지 않아도 되는 미싱보조가 되고 미싱보조 3~4년이면 미싱사가 되고, 오야 미싱사가 되려면 적어도 6~8년, 청춘의 ‘사계’는 그렇게 가고 미싱은 잘도 돌았다. 아침 8시에 출근하여 낮1시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허리를 겨우 펴고, 도시락을 후딱 먹어치운 후 허리를 구부리면 밤 10시, 11시까지. 나는 돌연 민중가요 ‘꽃다지'속의 노랫말 속 '나 오늘 밤 캄캄한 창살아래 몸 뒤척일 힘조차 없어라'를 어린 여공들의 노랫말로 바꾸어 나직이 불러 보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왜 그 노래를 끊임없이 흥얼거렸을까. 그 노래의 본질이 무엇이든 가슴아픈 시대를 살아낸 약자의 노래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
빽빽이 들어찬 창살 같은 작업장 속에 가난하고 힘없는 인간이 사육되는 비정한 실상을 그는 자신의 일보다 더 아프게 바라보았다. 배우지 못한 설움과 힘겨운 노동이 부당한 세월을 견디도록 이끄는 동안 그 굴종의 부당함을 최초로 생각했던 이, 자신을 태워서라도 온몸으로 저항했던 이. 결국 그의 걸음은 길을 만들었다. 생활의 곤궁이 키운 생명력으로 불가사의한 삶을 살아낸 어린 여공들의 삶. 그들을 위해 제 한 몸을 희생하리라 다짐했던 청년노동자는 단순한 열정만이 아니라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가시밭길을 택했다. 그가 걸어간 길이 고난의 길이었지만 훗날의 노동운동은 그가 낸 길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폭압의 세상을 향해 여기에도 인간이 있노라 당당히 외치는 인간선언의 도화선. 그의 희생은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힘없고 나약한 노동자 전체를 위해 치켜든 노동의 횃불이었다.
우리는 결국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했던 한 사람의 성자를 잃었다. 인간에 대한 위대한 사랑은 1970년 11월 13일, 노동운동사의 획을 그은 ‘인간선언’의 화형식을 치러서야 본격적인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그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故조영래 변호사에 대한 깊은 신뢰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가 가진 한 인간에 대한 존엄의 사상 덕분에 우리는 시대를 비춘 횃불의 삶을 기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전태일 평전>이야말로 일생에 한 번은 읽어야 할 위대한 고전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이 시대의 편리한 속도와 넘쳐나는 물질의 만찬을 그때의 태일이라면 어떻게 바라봤을까. 우리의 가슴에 전태일식 헌신이 이 이기적 욕망 앞에 조금은 필요한 시점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울러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아들의 유언을 받들어 이 땅 위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되셨던 것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느낀다. 위대한 어머니상을 훌륭히 이끌어내신 바탕에는 아들의 유언만이 아니라, 일찍이 아들을 나라에 바친 어머니의 자의식에 이미 내재된 본성이라 생각한다. 조만간 이소선 여사의 다녀간 삶도 만나길 희망한다. 긴긴 억압의 굴레를 뚫고 시대의 등불이 된 청년성자 전태일과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삶에 뒤늦은 감회를 올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