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에서 가장 알 수 없는 것이 문화 군사강국 부여,백제의 역사다.
중국사서에 낙랑의 서쪽에 잇었던 요서백제가 구태 백제인지,온조 백제인지, 확실하지 않다. 단 한반도로 넘어와 일본에 뿌리를 내린 백제는 온조백제 계열인것 같다. 모용씨에게 얻어 맞고 346년에 산서성에서 망해버린 백제는 구태백제로 추정할 뿐이다.
통전 변방전 권187
至 太 康 六 年(296),為 慕 容 廆 所 襲 破 。 廆, 呼 罪 反 。 其 王 依 慮 自 殺 , 子 弟 走 保 沃 沮 。 武 帝 以 何 龕 為 護 東 夷 校 尉 。 明 年 , 夫 餘 後 王 依 羅 遣 使 詣 龕 , 求率 見 人 還 復 舊 國 。 龕 遣 督 郵 賈 沈 以 兵 送 之 。 爾 後 每 為 廆 掠 其 種 人 , 賣 於 中 國 , 帝 又 以 官 物 贖 還 , 禁 市 夫 餘 之 口。 自 後 無 聞 。
서진 태강6년 모용외가 부여를 기습해서 부수자 부여왕 의려가 자살하고 그자제들이 옥저로 피해 달아났다. 무제가 하감을 동이교위로 하였는데 다음해 부여왕 의라가 사신을 보내 하라를 만났다. 달아난 사람들을 찿아 인솔해 복국하기 위해서 였다. 하라가 우가심을 보내 감독하에 병사를 보냈다. 모용외가 부여인들을 잡아서 팔자 무제가 다시 사서 돌려 보내고, 부여인을 매매하지 못하게 했다.
資治通鑑 97 晉紀17
孝宗穆皇帝 下 永和2年(346)
春,正月,初,夫餘居於鹿山,為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燕王皝遣世子俊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俊居中指授,軍事皆以任恪。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皝以玄為鎮軍將軍,妻以女。
부여는 처음에 녹산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백제가 침략해서 약해지면서 뿔뿔이 흩어져 서쪽으로 옮겨 연나라 가까이 갔으나 방비를 하지 못했다. 전연왕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을 군지휘하게 하고, 모용각,모여근 등 세장군을 보내 1만7 천명의 기병으로 부여를 습격하여 이내 부여를 없앴다. 그왕 현이 포로로 잡히고 그 백성 5만도 포로로 하여 귀환하였다. 모용황이 부여왕 현을 진군장군으로 하고 딸을 그의 처로 했다.
개인적 자료에 의하면 부여의 최후지는 산서성 대동시(大同市) 동남부 광령(廣靈)으로 비정된다. 그곳에 부여왕이 행차했던 驛이 있었다.
부여와 선비는 민족적 동질감이 있었던것 같다. 특히 강성했던 부여의 문화습속과 정치체제 그리고 인적 인프라에 지대한 관심이 있어 망한후 부여 귀족의 70% 이상이 선비 귀족층으로 편입되었다.
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