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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끝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의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영화 제작자 겸 영화 감독이셨던 합동 영화사 곽정환 회장님!
“지금까지 밑진 영화는 단 세편”이라고 말할 정도로 영화의 흥행성을 보는 눈이 탁월했던 님께서는 한국 영화의 한 시대를 풍미하며 충무로의 대부이자 종로의 터주대감이셨습니다.
1930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출생, 영화계에 발을 딛기 전 님께서는 참 군인이기도 하셨습니다.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1963년 <주유천하>를 제작하면서 영화계에 입문, 1964년 합동영화사를 설립하고 영화제작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 오시던 중 님께서는 애석하게도 2013년 11월 8일 새벽 향년 83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님께서는 <잃어버린 태양>, <마지막 정열>, <명동 44번지>, <소령 강재구>, <공처가 삼대>, <청춘 고백>, <어머니>, <해 뜰 날>, <오빠가 있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사랑하고 싶은 여자 & 결혼하고 싶은 여자>, <삘구>, <아찌 아빠>, <투캅스2>, <초록물고기>, <넘버3>, <편지>, <그 놈은 멋 있었다> 등 2004년까지 300여 편에 달하는 영화의 기획, 제작에 참여하셨습니다.
님께서는 또한 제작뿐만 아니라 <쥐띠부인>, <야간비행>, <이중섭>, <이브의 체험>, <무거운 새> 등을 통해 연출자로도 맹 활약하셨고, 서울극장을 운영하며 1990년대 전국 20개 극장 소유를 통한 배급망을 구축하기도 하셨습니다.
님께서는 멀티플렉스 설립 이전인 2000년대 초반까지 국내 영화 배급업과 영화 제작업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또한 님께서 운영한 극장들은 국내 메이저 배급사 시네마서비스의 성장에 커다란 주춧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영화의 젊은 느티나무셨던 구영주 감독님!
땅끝 마을 해남에서도 차를 타고 1시간쯤 들어가야 하는 마을에 살고 있는 우리 엄마는 나를 낳은 이후로 한 번도 차를 타 본적이 없습니다. 차를 타 보기는 커녕, 지나가는 차를 보기만 해도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울럼증이 생긴답니다. 엄마는 마흔 살에 나를 낳은 이후부터 어지럼증이 생겼답니다. 그래서 둘째 오빠 제대할 때도 두 시간이나 걸리는 읍내 버스터미널까지 걸어서 마중 나가고, 큰 언니 결혼식에는 무리해서 택시를 탔다가 동네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포기하고, 결국 혼자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28년 전부터 우리 엄마에게 차는 더 이상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그럴 때마다 “나가 늘그막에 너를 날라고 너무 힘을 써버렸당게…”며 허허 웃습니다.
이 영화는 님께서 연출하신 <엄마>의 줄거리 중 일부입니다. 님께서는 1963년 광주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1995년 무한한 어머니의 사랑을 그린 이 영화 <엄마>로 영화에 데뷔한 이래, 1997년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로 확고한 작품세계를 쌓았던 한국영화의 젊은 느티나무셨습니다. 유작이 된 <모크샤>는 벤쿠버국제영화제 용호상 부문에 초청돼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님께서는 1984년 지금은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인 전양준, 영화기획자가 된 안동규, 영화평론가이자 잡지 편집장인 정성일과 영화 계간지 ‘열린 영화’ 편집에 참여했고, 교육용 다큐멘터리 <세계 민중사>(88)를 책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80년대 후반 민족영화연구소를 거쳐 황규덕 감독의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의 연출부 생활로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았고 이후,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에서 연출부로, <화엄경>과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는 조감독으로 작업했고 <너에게 나를 보낸다>로 대종상 각색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모크샤> 등의 작품을 연출하셨고, 2013년 12월 11일 안타깝게도 제주도 어느 바닷가에서 불의의 실족사로 50년의 짧은 영화 인생을 살다 가셨습니다. 님께서는 여러 영화에 깜짝 출연하기도 하셨는데, <'행복한 장의사>에서는 대사 한 마디 없이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는 연기를 선보였으며, <불후의 명작>에서는 헌책방 주인으로 등장하기도 했던 한국영회의 젊은 느티나무셨습니다.
한국영화의 영원한 소리의 마술사, 김석호 음향녹음 감독님!
2013년 10월 영면에 드신 한국영화의 영원한 소리의 마술사셨던 님께서는 돌코녹음실 창립 원년 맴버로 음향계 입문, 어시스턴트 엔지니어로 활동, 1992년부터 녹음기사로 활동하면서 MBC 일요아침드라마 <한지붕 세가족>, MBC 오락물 <일요일 일요일 밤에> 등 수많은 드라마와 교양물, 오락물 등을 녹음해 오셨습니다.
1997년부터는 영화녹음을 시작하여 박철수 감독의 <성철>, 넥스트필름 창립작 <씨어터>,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번 2002> 한명구 감독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 남기웅 감독의 <강철> 등 수많은 영화의 녹음을 도맡아 오셨습니다. 또한 제25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영화 <토요일은 밤이 없다>로 음향효과상을 수상하기도 하신 한국영화의 영원한 소리의 마술사셨습니다.
전국 방방곡곡 누빈 한국 영화계의 원조 국민 어머니 황정순 원로배우님
원조 국민 어머니셨던 님께서는 1925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나 15세에 이미 동양극장 전속극단에서 연기를 시작해 250여 편의 연극 무대에 서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는 1941년 <그대와 나>에 단역으로 출연했으며 1961년 <마부>, 1979년 <장마> 등 370여 편에서 활약하시며 한국영화계의 영원한 어머니로 우뚝 셔셨습니다.
1964년 <육체의 고백>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나이트클럽 마담, 1965년 <민며느리>에서는 악독한 시어머니 등 다채로운 캐릭터를 연기하셨고 1967년 고 김희갑 선생님과 부부로 출연한 <팔도강산>에서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열연하기도 하셨습니다. 이후부터 배우 황정순 하면 '국민 어머니'의 이미지가 굳어지게 됐다는 평가입니다.
영화 <팔도강산>은 김희갑, 황정순 부부가 전국 각지에 사는 자녀를 만나러 유람여행을 다니는 이야기인데 당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국책홍보영화임에도 큰 흥행을 거둬 속편들까지 인기를 누렸었지요.
님께서는 또 연극, 영화에 이어 1982년~1984년 KSB-TV에서 방영된 <보통사람들>에 출연하는 등 TV에서도 활동 영역을 넓히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지난 2005년부터 치매를 앓아오시던 님께서는 지난 해 병세가 극도로 나빠져 요양병원에 입원하셨으나 올해 초 폐렴이 악화되어 지난 2월 17일 향년 89세의 나이로 끝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셨습니다. 님의 별세 소식에 우리 영화인은 물론 많은 국민들은 "우리 시대의 영원한 어머니 모습이다", "너그러운 할머니 역활에 부드러운 인상이었다"라며 님을 추모하는 글들로 온라인 등을 통해 님을 추모하는 글들로 한동안 인터넷을 달구기도 하였습니다.
님께서는 또 1957년 <사랑>으로 제1회 한국평론가협회 최우수여우상, 1992년 보관문화훈장, 2004년 대한민국예술원상, 2007년 여성영화인상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하시며 역대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 최다 수상자로 제 1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자이기도 하셨습니다.
님께서는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의 전당에 올르셨으며, 2013년 제 50회 대종상에서는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하셨습니다. 당시 시상식에서 지병인 치매로 인해 수상 소감으로 연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만을 말해 안타까움을 사기도 하셨지요.
우리나라 국민 어머니라 평가 받는 님께서는 해방 전부터 활동한 한국영화의 어머니이 명실상부한 한국영화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 시대의 영원한 향수, 유달산 원로 영화배우님!
1941년 전남 영암에서 출생하셔서 향년 73세로 지난 3월 25일 영면에 드신 님께서는 지난 50여 년 간 영화배우로서 일생을 마친 이 시대의 영원한 향수로 남아 있는 진정한 충무로의 산 증인으로 사셨습니다.
님께서는 국방 홍보영화 <배달의 기수>에서 북한군 역할을 수십 편 출연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주로 국군 홍보영화에서 활약을 하셨는데, 충무로 영화인 단체인 ‘시네마테크 충무로’의 회원이시기도 하셨습니다.
님께서는 또 대표적인 유작인 된 2012년 단편영화 김문옥 감독의 <할아버지의 호루라기>에서 성폭행을 당하는 손녀를 구하려다가 절명하는 할아버지 역할로 열연을 하셨으며 그 작품은 2013년 제1회 서울구로국제어린이영화제 디지털 대상, 제6회 서울노인영화제 본상(서울특별시장상), 제8회 정읍전국실버영화제 우수상을 수상 하기도 하신 이 시대의 영원한 향수였습니다.
'사나이' 시리즈로 한국영화계를 평정한 한 시대의 거목, 편거영 원로감독님!
지난 1927년 제주에서 출생하셔서 향년 86세로 지난 7월 15일 영면에 드실 때까지 님께서는 20대 후반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월간 영화잡지 ‘씨네마 펜’ 취재부장을 거쳐 편집장을 지내셨고, 시나리오 작가로도 주목 받으셨습니다.
또 영화감독으로 <팔도사나이> 등 30여 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특히 <팔도사나이> 시리즈는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첫 편부터 마지막 편까지 님께서 홀로 기획, 제작, 각본, 감독을 맡는 기록도 세우신 '사나이' 시리즈로 한국영화계를 평정한 한 시대의 거목이셨습니다.
님께서는 25년 전 제주에 정착하여 지난 2003년부터 2011년도까지 제주영상위원회 이사로 활동하기도 하셨으며, 2013년 영상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내시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님께서는 영화사랑 못지않게 나라사랑에도 열심이셨는데, 봉사단체인 ‘무궁화 사랑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셨습니다.
투철한 정신의 영상작가이셨던 서일룡 촬영감독님! 2014년 7월 작고
님께서는 지난 7월 영면에 드실 때까지 지난 1974년 이규환 감독의 <남사당>에서 촬영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이래, 투철한 정신의 영상 작가로 충모로 영화계의 스크린을 화려하게 수 놓으셨던 분이십니다.
그동안 1981년 박호태 감독의 <내 모든 것을 빼앗겨도>, 1983년 이은 감독의 <사랑할 때와 헤어질 때>, 1992년 박용준 감독의 <안개에 젖은 리오의 밤은 깊어>, 1992년 박용준 감독의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2> 등 수 많은 영화에서 촬영 감독으로서 맹활약을 하셨습니다.
그 옛날 그 님의 남상진 감독님!
1937년 출생하셔서 지난 7월 23일 향년 78세로 영면에 드신 님께서는 멜로드라마에 재능을 보이며 유난히 영화팬의 손수건을 적셨던 감독이셨습니다. 지난 1967년 <밀실>로 영화계에 데뷔한 이래, 여섯 편의 영화를 남기셨습니다. 1968년작 <순정>과 1969년작 <남몰래 흘린 눈물>, <고독한 순간>, <그 여자에게 옷을 입혀라>, 1970년 <이별 없이 살았으면>을 연출하셨는데, 님의 작품 중에는 삼각관계에서 남자를 양보하는 여성이나 희생적인 여성에 의해 구원되는 남자와 같이 희생하는 여성이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멜로드라마가 많았습니다.
데뷔작인 <밀실>은 살인범을 숨겨준 여인과 살인범이 사랑을 하게 되고 결국은 여인의 설득으로 그는 자수를 하고 두 사람이 맺어진다는 이야기로 구원의 매개자로서 여성이 등장합니다. 또 68년작 <순정>과 69년작 <남몰래 흘린 눈물>도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데, 이렇듯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여성상은 60-70년대 한국멜로 드라마에서 스테레오타입화된 인물형을 보여주며 지금도 많은 영화팬들에게 '그 옛날 그 님'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영화의 중흥에 봉사한, 신우철 전 영화인총연합회 회장님!
님께서는 지난 8월 19일 지병으로 향년 65세로 타계하실 때까지 한국영화의 중흥에 봉사활동으로 전념하신 분이셨습니다.
지난 1975년 영화 <비밀객>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했셨으며, 감독·제작자로도 활동하셨고, 한국영화배우협회 부회장과 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2001년부터는 9년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으로 봉사하셨고, 대종상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셨습니다.
님께서는 지난 2009년 림프종암이 발병한 후엔 현역에서 물러나 한국영화인총연합회 명예회장직만 맡아 오시면서도 한국영화의 중흥에 힘쓰셨던 한국영화계의 진정한 봉사인으로 우리 영화인의 영원한 표상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을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