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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과 二代 帝王之地(2대제왕지지)
구한말 당대 지관 정만인은 대원군을 만나 2명의 천자가 나올 명당을 소개하고 그 명당의 발복이 20년 내에 온다는 것과
또 발복이 빨리 오고 빨리 가는 흠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아울러 명당에 이장한 부친 남연군묘 의 도굴을 예언하여 귀신같이 적중시키는 일화를 소개 한다.
❍ 대원군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때는 1800년 조선 제23대 순조 임금이 등극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는 영특하고 쓸 만한 왕손은 어떤 구실이나 트집을 잡아서라도 도륙 하던 때였다.
대원군은 세도 가문의 잔칫집에서 식은 전(부침게) 조각에 침을 퉤퉤 받아 내던지면 얼른 주워 도포 자락에 쓱쓱 닦아 앙천대소하며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시정잡배 무뢰한 천하장안(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들과 어울려 다니며 破落戶(파락호. 행세하는 집의 자손으로서 난봉이 나서 결딴난 사람)행세도 서슴치 않고
궁도령(宮道令.부유한 집에서 자라나 세상의 어려운 일을 잘 모르는 사람을 비유저그로 이르는 말)이라는 비칭(卑稱)으로 까지 불리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한다.
또 철종의 후사가 없어 걱정하던 안동 김 씨 수뇌부에서 무식하고 미련한 왕손을 고르던 중, 흥선군 이하응의 얘기가 나오자
“그 자도 왕손이냐? ” 고 껄껄대며 조롱했다고 한다.
❍ 직접 金鷄抱卵形(금계포란형)을 찾아 나서다
흥선대원군은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수릉천장도감. 왕실의 묘를 옮기는 임시직)의 代尊官(대존관)이 되면서 상지관(궁중지관)들과 업무상 어울리는 일이 많았는데
평소에도 풍수지리를 신봉하여 은밀히 공부하면서 후일 왕권을 회복하고 정권을 다시 찼기 위해서는
명당자리에 아버지 묘를 이장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이 기회가 풍수의 실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며 야심을 다지는 계기가 된다.
❍ 그러던 어느 날, 쾌청한 봄날 이였다.
대원군은 인시(03-05:00시)에 일어나 산행에 필요한 패철(나침판)과 점심밥을 챙겨 행랑을 둘러메고
계양산(현재 인천시 부평 앞산)에 있는 금계포란형(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명당)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금계포란형은 大富大貴(큰부자와 벼슬이 높이 되는 것), 形言(형언)할 수 없으며 人間至寶格(인간지보격. 사람에게 최고의 보배)으로
조선 10대 명당중의 하나로서 지구와 더불어 영원히 발복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특히 세도가들은 이 명당을 찼기 위하여 혈안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누구도 찾지 못했고 天藏地秘(천장지비. 하늘이 숨기고 땅이 감춤) 한 체
그대로 보존 되고 있다고 풍수가들 사이에 비밀리에 구전되고 있었는데
대원군은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단독으로 금계포란형을 찾기 위하여 계양산을 두 번 답사 했지만 허사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찾아 발복이 되어 정권을 잡으면 안동 김씨들에게 당한 수모를 말끔히 씼으리라 마음에 다짐을 했다.
오시(11-13:00)쯤에 이르러 계양산 정상에 올라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좌우를 살펴보니 鶴群隊列(학군대열)이 정비하여 飛來(비래)하여 오는 듯하고
선두의 한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아 좌우로 날개를 활짝 벌리고 섰는 듯 전면에는 百里山川(백리산천)이 雲砂(운사)와 같이 羅列(나열)되었고 한강은 동방에서 와서 북방으로 유유히 흘러 간다.
멀리 북한산의 백운대는 높이서서 영접한다 전면에 전개되는 大小(대소)의 萬峰(만봉)은 수려하게 빼어나서
鶴群鷄立格(학군계립격)을 이루었으며 조잡한 기세는 일점도 찼을 수 없었다 참말로 속세를 떠난 선인이 노는 경계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몇 갈래의 脈(산맥)이 흘러 갔지만 진맥은 어디로 떨어져 나갔는지 막연하다 이 골짝 저 골짝으로 헤 멘지 벌서 몇 시진이 지났다.
이론은 달달 외었지만 현장은 너무도 달랐다. 다리까지 아파오면서 어느 듯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아! 아직 기회가 오지 않는 것일까? 하늘이 대원군을 버리시나!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렇게 해서 대원군의 3번째 금계포란형 답사도 허사로 끝나고 말았지만 계양산의 금계포란형은 아직도 그대도 남아 있다.
❍ 당대 지관 鄭萬人(정만인)과의 운명적 만남
따뜻한 봄날이라 대원군은 사랑방에 앉아 추사 김정희 선생에게 배운 난초를 치고 있었다.
이때 허름한 40대 초반의 사내 한명이 소리 없이 대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 사랑방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 대원군이 파락호 시절, 과천에 살고 있는 당대 난의 일인자인 추사 김정희를 찼아가 큰절을 올리며
“대감 난초를 배우고 싶습니다 제자로 받아 주시기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추사선생이 대원군을 쳐다보니 왕손이지만 너저분한 옷차림과 어제 밤 마신 술이 아직도 덜 깬 듯한 얼굴에 몰골이 말이 아니 였다.
그래서 존대도 아니고 반말도 아니게 거부하는 말투로
“난초를 치겠다고? 그거무척 어려운건데‼”
그렇다 매.란.국.죽을 사군자라 하는데 그중 난초가 제일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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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하드라도 꼭 이루 겠습니다.”
대원군은 눈을 반짝이며 간청하고 있었다.
왕손에 대해 너무 박절하게 대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 추사 선생은 즉시 난초 한 장을 그려 먹물도 마르지 않은 화선지를
두 손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장죽(긴담뱃대)으로 난초 중간을 짚어서 대원군 무릎까지 밀어 버린다.
그 후 10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대원군이 그동안 연습하고 연습한 난초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골라 추사선생을 찼는다.
“대감 제가 친 난초에 대해 강평을 좀 해 주십시오”
추사 선생이 대원군의 난을 보고는 눈을 뗄 줄 몰랐다 난봉꾼으로 이름난 그가 이렇게 타고난 훌륭한 귀재일 줄이야!
내가 사람을 잘못 본거야! 내심으로 깜짝 놀라면서도 냉정하게
“이제 조금 난을 칠 줄 아네 그려! ”
10년 동안 고생하며 연습한 난을 “이제 조금 칠 줄 안다니 허 허” 그러나 이젠 사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대원군은 추사선생의 정식 제자가 되어 추사체와 사군자 기법을 전수 받는다.
대원군의 작품 중 “대련” 이라는 제하의 난초는 보물로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추사 선생도 말년에 “난초를 칠 려면(배울려면) 대원군에게 물어 보라.
압록강 남쪽에는 최고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필체도 완벽한 추사체를 구사 한다.
또 아들인 고종이 등극하기 전의 난초는 반드시 절엽(한개의 잎을 꺾어 놓은 것)을 했고
등극 후에는 절엽이 없어져 현대에서도 대원군 난초의 년도 감정법에 이용되고 있다.
한편, 대원군의 제자 중 소호 김응원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난초를 치는 실력이 매우 뛰어나
대원군이 바쁠때는 김응원이 대신해서 난초를 그렸는데 그래서 대원군의 난초는 가짜가 많다고 한다.
또 일제시대 독립자금을 모으려고 대원군의 가짜 난초가 일시 성행했으나 대원군의 난초는 추사 이후 최고로 치며 많은 애호가들의 영원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이어서
“대감! 소인은 일찌기 풍수에 입문하여 전국을 돌며 평생 풍수만 공부한 정만인 이라고 합니다.
대감께서 제왕지지를 찾는다는 풍문을 듣고 체면불구 이렇게 찼아 왔습니다.”
정만인은 조선말 당대 최고의 지관으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터에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 대원군의 마음을 이미 꿰뚫고 있는 듯한 말에 깜짝 놀랐다.
안동 김 씨의 감시가 이렇듯 심한데 드러내 놓고 제왕지지를 언급하다니… 등어리에 이미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정만인 이라고… 그런데 니놈이 여기는 웬일이며 제왕지지는 무슨 말인고! 이놈 말조심 하렸다.”
얼떨결에 고함을 질렀으나 정만인은 좌우를 둘러보며 너무도 태연하게 말했다.
“대감 저를 속이시렵니까? 충남 가야산에 2명의 왕이 탄생할 2대 帝王之地(제왕지지)가 있고,
또 광천 오서산에 만대에 걸처 부귀영화를 누릴 천하의 대명당 萬代榮華之地(만대영화지지)가 있습니다.”
어 허‼ 대원군은 침을 꿀꺽 삼켰다.
1대도 아닌 2대 제왕지지라고…
이렇게 해서 풍운아 대원군은 당대 최고지관인 정만인을 만나 아버지 남연군을 移葬(이장)할 첫 단추를 끼우고 있었다.
※ 여기에서 풍수인 정만인의 이름이 한자로 萬人이라고 쓰는데 이 이름은 1만 명을 살린다는 뜻이 아니고 1만 명을 죽인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후일 대원군이 집권 시 천주교 박해에서 보듯 피를 흘린 사람이 일만 명을 넘었다.
정만인의 사주팔자도 태어날 때부터 1만 명을 죽인다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한다.
현대 풍수가들의 해석도 제왕지지에 묘를 쓴다고 해서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한사람을 왕으로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되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며
전. 현대사를 보드라도 왕조나 정권이 바뀌면 수많은 사람이 죽고, 귀양 가고
또는 숙청 당 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도 배우고 현실도 목격했다.
그런데 대원군은 만대영화지지를 제처 두고 2대 제왕지지를 원하고 있었다.
“대감 2명의 왕이 탄생할 제왕지지는 틀림이 없사오나 아무리 완벽한 명당이라 하드라도 조금의 결점은 있습니다.
그곳의 흠은 速發速盡處(속발속진처. 발복이 빨리 되었다가 빨리 없어지는 곳)입니다. 만대 영화지지가 어떻겠습니까?”
“아닐세 설혹 금방 왔다가 금방 가드라도 나는 제왕지지를 택하겠네!”
“대감 그곳은 20년이 지나면 틀림없이 발복 합니다.”
정만인은 장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에 권력을 잡게 되시면 소인의 소원도 하나 들어 주십시오. 소인에게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마음껏 열람할 수 있도록 명을 내려주십시오”
소원치고는 너무 간단했다.
“그 정도쯤이야 내 꼭 약속 하리다.”
정만인은 대원군에게 제왕지지를 알려주는 대신 반대급부로 자신의 소원도 하나 얻어 내고 있었다.
❍ 그러면 정만인이 무슨 연유로 海印寺(해인사) 대장경을 열람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말했을까?
海印(해인)은 불교계와 격암유록에도 언급되고 있으며 조화도술(요술방망이)을 부리는 물건으로서 글자대로 해석하면 “바다의 도장”이란 뜻이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이 해인을 가지고 일본을 갔는데 일본에서 사명대사를 죽일 려고 방안에 가둬놓고 장작불을 지폇으나
사명대사는 얼음 빙자를 써놓고 그 위에 해인을 찍으니 방안 전체가 얼음이 얼고 수염에 고드름까지 열려 일본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사명대사가 귀국해서 도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해인을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어느 곳에 감춰 뒀다는 말이 口傳(구전)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정만인은 대원군 집권 후 해인사 전체를 뒤져 해인을 훔쳐 어느 한 海島(해도=섬)로 들어가 장차 계룡산(鷄龍山)에
鄭氏(정감록의 정씨)의 도읍을 열기 위해 大事(대사)를 꾸미면서 좋아서 돌아다니다 황해바다에 빠뜨렸다는 야사가 전해오고 있다.
❍ 수일 후 대원군과 정만인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전마을에 나타났다.
남연군 묘를 둘러싸고 있는 산세.
중앙에 석문봉이 우뚝하다.
대원군은 덕산면 읍내리에서 옥계저수지를 지나 상가리가는 길에 들어서자 청룡의 긴 산 끝이 계곡을 막고 그 안쪽으로 백호가 감고 있으며
그리고 웅장한 석문봉의 임금 제(帝)자 모양이 첫눈에 들어오자 대원군은 그림 같은 산세에 흥분을 감추지 못해 감격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석문봉을 主山(주산. 중심이되는 산)으로 하여 좌로는 가야봉이 천을(天乙)이 되고, 우로는 옥양봉이 태을(太乙)이 되어 시립(侍立)하여 있고
혈 앞에는 어보사(御寶砂)의 반석(盤石)이 깊고 튼튼하고 신비스럽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남연군 묘 의 어보사
※제왕지지는 임금의 옥쇄인 어보사가 필수적이며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 상모동 선산 조부묘에도 어보사가 있다.
또, 청룡 백호가 감싸 안아준 공간인 명당(明堂)은 평탄 원만하고, 청룡 백호가 여러 겹으로 중첩되어 혈에서 보면 마치 군대 의장대가
양옆으로 도열한 모습이며 수구(물이 빠져 나가는 곳)는 관쇄(자물쇠로 잠근듯)되어 불통주(배 한척 지나다니지 못할 정도로 좁다는 의미) 격이다.
사방의 산들은 가야산 골짜기 한복판에 병풍을 두르고 서있는 모습으로 만조백관이 임금이 앉아있는 혈(묘터)에 절하는 형태다.
가히 군왕지지가 분명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남연군 묘 에서 수구 쪽으로 내려 다 보면 청룡 백호가 중첩되고 수구는 관쇄되어 불 통주 격이다.
❍ 정만인은 보란 듯이 의기양양하게 풍수의 좌향을 읊고 있었다.
“대감! 이곳의 물은 우측 신(申)방위에서 득수(得水)하여 우선수(右旋水)로 혈을 감싸주면서 좌측 을진(乙辰)으로 파구(破口)되니 건좌손향(乾坐巽向)을 하면
팔십팔향법으로 부귀왕정(富貴旺丁)하다는 자생향(自生向)을 놓을 수 있습니다 여기다 묘를 쓰면 이십년 안에 틀림없이 2명의 제왕이 날 자리입니다”
과연 대원군 이였다. 지금까지 감격 또 감격하며 흥분했던 대원군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무서우리 만치 냉정 침착하게 미소를 지으며 속내를 감춘 채
“잘되면 영의정 하나 나겠소”
정만인 또한 알았다는 미소를 지었다.
만약 제왕지지에 묘를 섰다는 소문이 나면 당장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 참고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답산후 한지에 붓으로 작성한 산도를 보면,
남연군 묘를 가운데 두고 석문봉이 주봉이 되어 좌측에 옥양봉 우측에 가야봉과 원효봉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사람의 엄지 손가락 형태에서 용맥이 나와 대 명당이 결혐됨을 알 수 있다.
또 좌측편에 육관도사 손석우씨의 묘를 표시해 뒀다.
❍ 그러나 그곳은 수덕사 보다 더 큰 가야사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고
묘를 쓸 자리에는 고려 때 나옹 화상이 건립한 금탑이 있었다.
아무리 통이 크고 비범한 대원군이라 하여도 절의 탑 자리에 묘를 이장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일을 어찌할꼬? 저 가야사와 금탑을 어떻게 없애나?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
오로지 제왕지지 하나를 찼을려고 그 얼마나 오랜 세월을 기다리며 고생을 했던가?
어떤 댓가를 치루드라도 반드시 해내고 말리라.
❍ 뇌물로 여의정과 충청감사를 움직이다.
다시 한양에 올라온 대원군은 묘안에 묘안을 짜내고 있었다.
대원군은 안동 김 씨 중에서도 그래도 자신과 말이 통하는 대제학 김병학 집을 찾아가 그 집 대대로 가보로 내려오는 옥 벼루를 빌린다.
※ 김병학은 대원군 집권 후 안동 김씨 일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 했으나 와중에서도 보란 듯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는 큰 영화를 누리게 된다.
큰 맘 먹고 옥 벼루를 빌려주고 포기한 댓 가를 톡톡히 받은 셈인데“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 한다”는 말이 아마 그때부터 있었는가 보다.
그리고 당시의 세도가인 영의정인 하옥대감 김좌근을 찾아가서 거짓말로 이야기 한다.
“대감. 내가 이 옥 벼루를 어느 선비한테 난초 한 폭을 쳐주고 얻은 것인데, 옛날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본래는 한 쌍이었는데 하나는 어디로 가고 하나밖에 없다고 하더이다”
“나는 이런 귀중한 물건을 갖고 있을 형편이 못되는 사람이오. 설사 갖고 있다하더라도 결국 술값으로 없애게 될 것이니 마음에 들면 대감에게 진상하러 왔오”
김좌근이 유심히 살펴보니 대제학 김병학이 갖고 있는 거와 똑같은 진품이 아닌가 이걸 나를 준다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하옥 대감. 그런데 내 부탁이 하나 있소. 충청감사에게 내 청을 하나 들어주라는 편지 한 장만 써 주시오”
김좌근은 사대부로서 평소 얼마나 가지고 싶은 옥 벼루 였는데 그까짓 편지 한 장이 뭐가 대수로울소냐 즉시 지필묵을 당겨 편지를 쓰고 있었다.
❍ 가야사여 비켜라!
1846년 충청감사는 세도가인 영의정의 부탁에다가 왕족인 흥선군이 직접 찾아오자 정중히 대접하고
대원군의 뜻대로
마곡사의 중을 불러 불을 지르라 강요하여 가야사를 소각 시킨다.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가야사를 방화한 승려가 사동리 고개를 채 넘지 못하고 불길이 충천하는 가야사를 쳐다보다가
돌연 허공을 향해 두 팔을 크게 휘저으며 “불이야! 불이야!” 소리를 지르다가는 그 자리에서 졸도하여 사망했다.
천년 사찰 가야사 방화에 대한 업보였다.
❍ 연천에서 덕산가지 8백리 길을 릴레이로 상여를 운구했다.
대원군은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다시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상태에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으며
당시에 남연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군 남송정에 있었다.
연천에서 덕산까지 상여로 운구 하였는데 남연군의 상여가 지나는 지방의 동리사람들은 왕손이 자기네 동네를 지나니 영광으로 생각하고
자기네 동네를 벗어날 때까지 서로 다퉈 상여를 릴레이식으로 운구하여 덕산까지 무사히 도착 할 수 있었다.
최종 마지막으로 남연군의 유해를 운구한 사람들은 현재의 덕산면 광천리 사람들이 선소리 구성지게
때로는 애처롭게 요령소리에 발 맞춰가며 행여라도 고인께서 편치 않으실 세라 조심조심 정성을 다 하여서 운구를 마쳤는데
이에 흡족했던 흥선군은 이 상여를 마지막 주자인 광천리 사람들에게 포상으로 기증하고
그 뒤 광천리 사람들은 죽으면 왕손이 처음으로 탔던 그 영광스러운 상여를 타고 마지막 이승 길을 떠나는 대접을 받았다.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 호화롭다.
※ 광천리 사람들이 백여년 이상을 사용한 그 상여는 지방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8호로 지정하고 덕산면 광천리 도로변에 상여막을 지어 잘 보관하고 있다.
❍ 이장시, 정만인은 대원군에게 조언을 넘어선 예언을 하고 있었다.
“대감 후일에 도굴의 위험이 있으니 묘곽에 석회를 300포대 이상을 쓰써 단단히 해야 됩니다”
“너무 많이 쓰는게 아닌가?” 떨떠럼 하게 대답하자.
“이렇게 어렵게 얻은 대 명당을 다른 사람이 도굴 한다든가 파내 버리고 다른 사람을 묻으면 발복의 효과가 없습니다 고집을 피우실 일이 아닙니다”
※ 현재 일반인들이 묘를 쓰는데 석회는 많으면 10포대 정도, 보통 3-4포대, 또는 아주 안 쓰는 지역도 있다.
석회는 굳으면 시멘트보다도 더 단단하다. 아마 300포대는 과장된 말일테고 많이 사용했다는 표현이다.
❍ 정만인의 예언은 귀신같이 적중하고 또 적중했다 !
구한말 명성을 날리던 당대 지관 정만인은 대원군을 만나
첫 번째로 2명의 천자가 나올 제왕지지를 소개하고
두 번째로 20년 안에 발복이 올 것이라는 것과
세 번째로 그 제왕지지가 발복이 빨리 오고 빨리 가는 흠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네 번째로 부친 남연군 묘의 도굴을 예언하는 등 귀신같이 적중 시켰다.
❍ 대원군은 이곳에 묘를 이장한 지 7년 만에 1852년 둘째 아들 명복을 낳았으며,
명복은 12세 되던 해인 1863년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황제로 등극(재위 44년)하고
손자까지 순종황제(재위 3년)가 되어 2대에 걸쳐 천자가 탄생했지만
간악한 일본인들이 남연군 묘에 氣(기)를 단절시키려고 묘의 入首處를 파헤쳐
명당의 발복은 47년 만에 속발속진으로 끝나고 5백년을 이어온 이씨 조선은 그것으로 막을 내린 비운의 왕조가 되었다.
❍ 그리고 흥선군은 소원을 이뤄 임금의 아버지로 대원군(大阮君)이 되어 안동 김 씨 들에게 철퇴를 가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사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양반에게 세금부과, 척화비를 건립하는 등 개혁을 시작 한다.
※ 일제 강점기 일본인 무라야마지존은 조선의 풍수를 집대성해 “조선의 풍수”라는 저서를 완성 하고
전남 무안군 청계면 도림리에 있는 승달산 노승봉 하 老僧禮佛形(노승예불형. 늙은 중이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는 형세)의
대 명당을 아무도 못쓰게 구덩이를 파버리고 전국의 유명한 산에 쇠말뚝을 꼿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일본인이 저자인 “조선의 풍수”를 한국어로 번역해 현대의 우리나라 풍수가들이 열심히 탐독하고 있는데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각성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예언과 같이 남연군 묘의 도굴은 실패로 끝나다.
1868년 5월 독일인 오페르트는 프랑스 신부 페롱과 조선인 천주교도 등 총140명으로 도굴단을 구성하여 1000t 급 기선 두 척을 이끌고
현재 서해 대교 밑 행담도 휴게소자리에 배를 정착시킨 후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 구만포에 상륙하여
남연군 묘소에 이르러 도굴을 시작 했으나 단단한 석회 때문에 도굴에 실패하고 공해상으로 도주 한다.
부모의 묘를 능욕 당한 대원군의 분노는 극에 달해 쇄국정책 또한 더욱더 강경해지고
이때 오페르트를 안내한 자가 천주교 신자임이 밝혀지자, 진노한 흥선대원군은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에 들어갔다.
❍ 대원군의 속죄, 보덕사를 창건하다.
보덕사 입구 이정표
대원군은 그동안 아버지 묘를 이장하기 위해 가야사를 불태워 버린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그의 아들인 조선 26대 고종황제가 즉위하자
가야사를 승계하여 1871년(고종 8년) 불살라버린 가야사의 동쪽 산중턱 서운산 남쪽기슭에
새 절을 창건하고 부처님께 속죄한다는 뜻으로 보덕사라 명하였고 지금도 그곳에 있다.
❍ 마지막으로 파란만장한 대원군의 묘와 정만인은 어디로 갔을까?
대원군(1898년 사망)의 묘는 명당도 아닌 無脈地(무맥지. 산의 기가 없는 곳)인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록에 어느 벼슬아치의 무덤만도 못하게 너무도 초라하게 있다.
한 나라의 황제 아버지 묘가 이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보는 이로 하여금 심사가 어지러우며 권불십년을 또 한 번 느끼게 한다.
그리고 대원군 집권 후, 정만인이 해인사로 간 이 후 누구도 그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이 없었으며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 또 하나의 볼거리 육관도사 묘
당대 지관 육관도사 손석우 묘는 남연군 묘 에서 좌측 저수지 길을 따라 올라가면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다.
손석우는 풍수계에서 허풍쟁이라고 하지만 생전에 “터”라는 책을 집필하여 국내외에 풍수의 붐을 일으키케 한 장본인으로 그 공로가 매우 크다.
육관도사 묘의 용맥이 내려오는 위쪽에 독수리 부리를 닮은 바위가 있어 밑에 있는 꿩은 날지를 못한다.
그래서 육관의 묘는 꿩이 엎드려 있는 형세의 복치혈 이라고도 한다.
당대 지관 육관도사 손석우 묘
누군가 조화와 배 두 개를 묘 앞에 놓아두었으며
국내에서 풍수를 한다는 사람들은 남연군 묘에 들렸다가 육관 묘를 보고는
"수맥이 있다, 없다"고 반드시 한마디씩 하고 가는데,
어느 말이 맞는지 독자들의 생각에 맡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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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연군묘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직접 쓴게 아니고 퍼온 글입니다...이해하시리라 믿고...
올려주신글 너무 잘보고 갑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역사공부 제대로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