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기흥구의 6.25 참전용사 단합모임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통해 6.25 참전 용사 선배님들처럼 역경을 극복한 세대는 없었습니다. 6.25참전 용사선배님들이 흘리신 피와 땀과 눈물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도 없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북한 공산군의 불법남침 앞에서 나라의 명령에 따라 군복을 입으시고 자신의 자유와 인권은 제한을 받으며 온 몸으로 나라를 지켜주셨던 선배님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이 있었고 우리들이 즐기는 자유와 민주와 번영도 있는 것입니다. 이는 북한의 부자세습 독재 하에서 연명조차 어려운 북한 인민들의 모습만 보아도 쉽게 증명되는 사실입니다.
전쟁터의 군인들은 자유와 인권과 민주에 제한을 받습니다. 엄정한 군기와 군법 하에서 오직 나라의 명령에 대한 절대 복종만이 우선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여러 선배님들은 자신의 자유와 인권을 모두 희생하면서 국민들의 자유와 인권과 민주를 지켜 주셨기에 대한민국의 진정한 민주화투사는 6.25참전 용사 선배님들이라는 주장이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날 북한 동포들의 자유와 인권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안하면서 대한민국의 헌법질서를 무시한 채 “민주화”만을 외치는 길거리의 투사들은 진정한 자유와 민주를 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 6.25참전 선배님들이 조국의 진정한 자유와 민주의 투사로서 높은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한 것입니다.
오늘의 이 모임은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의 6.25참전 용사 선배님들의 애국활동이 지역 내에 알려지면서 그런 활동이 기흥구 전체로 확장되면 좋겠다는 기흥 구청장의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시지 않지만 기흥구청장님의 6.25 참전 용사 선배님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에 대하여 대한민국 예비역 장교의 한 사람으로 높은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모임에 나와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경험을 짧게 이야기해 달라는 김 정현 회장님의 주문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며 여러 선배님들 앞에 섰습니다. 제주 4.3사건을 연구했던 저의 눈에는 오늘의 상황이 1950년의 6.25전쟁 직전상황을 방불케 하는 위기로 보이며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필요한 교훈을 찾아 내 활용 하지 못하면 대한민국 안보가 위태롭다는 걱정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선배님들 중에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란 말을 들어 보신 분계시면 손 한번 들어 주십시오. 한분 밖에 안 계시는 군요.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라 기억에서 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10대 불가사의”란 말은 6.25 정전 직후에 육군참모 총장을 역임하신 이형근 장군의 “군번 1번의 외길 인생”이란 회고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형근 장군은 6.25 당시에 “군의 지휘부에 적과 내통하는 통적분자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아래와 같은 6.25초기의 10대 불가사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1. 일선부대의 남침징후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
2. 6.25발발 2주전에 단행된 각급 주요 지휘관의 대규모 인사이동
3. 6월 13-20일간에 단행된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 교대.
4. 6월 11일부터 발령되어있던 비상 경계령이 6월 23일 자정에 해제.
5. 육본은 비상경계령 해제와 함께 전 장병의 1/2에게 휴가외출외박을 허용
6. 6월 24일 밤에 열렸던 육군 장교 클럽 댄스 파티
7. 서울 북방으로의 축차적 병력투입에 의한 장병들의 불필요한 희생
8. 6월 25-27일, 중앙방송은 국군이 반격, 북진중이라고 허위 방송
9. 한강교의 조기 폭파
10. 한강교를 폭파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집행
(한국 군사학회 군사논단 2001년 여름호)
이 형근 장군은 “언젠가는 누군가가 이 의문점에 대한 확증을 제시할 것으로 믿는다”면서 “바로 그 증언이야말로 국가의 100년 대계를 위하여도 중요한 일이다”라고 갈파하신 바 있었는데, 그 증언은 아직 까지 없었다고 저는 보아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현대판 불가사의 사건들을 보면서도 그 위험을 실감하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시청 앞 광장에서 3개월간 계속되었던 불법촛불시위, 용산의 방화 참사, 국회의 쇠망치 소동 그리고 최근의 기타 사건 등등은 있을 수 없는 현대판 “불가사의”라는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북한군의 남침 도발을 억제해 온 효과적 장치는 한미 연합군 사령부라는 사실에 대하여 여러분도 대부분 동의하실 것입니다. 한미 연합군 사령부는 구라파의 NATO 사령부에 견줄 수 있는 전쟁도발의 확실한 억제장치로서 우리에게는 당면한 위협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북한의 핵과 미사일 아닙니까?
그런데도 북한의 1차 핵실험이 있었던 2006년 10월 9일로부터 11일 후에 노무현 정부는 한미 양국의 국방장관 (윤광웅-럼스펠드)회담을 통해 연합사 해체를 추진해 놓았습니다. 이미 합의가 되어 있었더라도 북한의 핵실험 이유 하나만으로도 즉각적인 연기의 협의가 필요했음에도 서둘러 해체를 시도했다는 사실은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를 초월하는 불가사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연합사의 해체시기가 2012년 4월 17일 10:00시로 시간까지 명시되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2012년이 김일성의 100주년 생일과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생일이 4월 15일인데 그 이틀 후인 17일 10시로 시간까지 정했다는 것은 불가사의중의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저에겐 저 혼자만이 고심하고 있는 또 하나의 불가사의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1997년 5월 26일, 북한 노동신문에 6.25발발 직전까지의 대남공작활동을 상세히 소개하고 대대적으로 찬양됐던 특집보도가 실렸었는데도 아직까지도 국내신문에 보도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집보도의 제목은 “민족의 영수를 받들어 통일혁명에 기여한 열사”로서 이 형근 장군이 읽으셨다면 무덤에서 10대 불가사의의 배경에 대한 확증이 풀렸다고 무릎을 치고도 남는 기사였습니다.
이 특집보도에는 ‘김일성의 특사 성시백’이가 ‘조선중앙일보’를 창간, 운영했다는 기록도 있어 그 신문의 4.3사건 당시 기사를 찾아보았더니 4.3무장폭동의 배후에도 김일성의 대남공작이 작용했다는 주장이 가능하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4.3사건 사과발언에 대한 항의로 4.3위원을 사퇴하고 4년이 지났던 2007년 10월, 한 북한 전문가로부터 이 특집보도를 접수했던 저는 이미 늦었더라도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서는 이 특별보도의 시급한 전파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그 내용과 의미를 알리는 글을 써서 여러 제목을 붙여서 인터넷망에 띄우고 주요 신문사에도 알리는 노력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러나 거의 2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아직 무거운 침묵만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북 5도 연합신문”만이 5회에 걸쳐서 기사화 해 준 것이 전부였습니다.
오늘 저는 6.25참전 선배님들께서 이 무거운 침묵을 깨트려 주시기를 바라면서 앞서 언급한 ‘성시백’이란 인물에 대하여 몇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성시백은 상해 임시정부시절, 정향명(丁向明, 뗑상명)이란 가명으로 장개석 총통의 서안지구 사령관인 후중난(胡宗南)장군의 참모로 활동했으나 사실상의 그는 18세 때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의 공산혁명을 추진했던 모택동의 심복이었던 것입니다. 중국인들도 그가 한국 사람인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태윤기저, 피어린 독립군의 항쟁수기, ‘回想의 黃河’, 갑인 출판사, 1975)
정향명이 모택동의 첩자였음을 알고 있던 김일성은, 8.15 해방 후, 주은래에게 “그를 우리에게 보내주어 조선혁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부탁을 했었고 김일성에게 인계된 정향명은 공작임무를 부여받고는 일본을 통해 서울로 와서 공작활동을 개시했던 것입니다. (기무사 제공 참고자료)
그의 서울 도착 이후의 공작활동 규모와 범위를 밝히며 찬양했던 기사가 문제의 노동신문 특집보도였는데도, 그 내용이 우리 신문에 지금까지도 발표되지 않은 것이며, 김대중과 노무현의 두 전직 대통령은, 이 특집보도의 존재에 대한 보고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1997년은 IMF의 위기 하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선거가 있었던 해로서, 4년 전인 1993년 4월의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비전향 장기수 이 인모가 북송되었고 그 3년 후인 6.15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 9월에는 63명의 장기수가 북송됐던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7년 사이에 도합 64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으로 돌아가 모두 성시백의 뒤를 잇는 인민공화국 영웅이 되는 것을 바라보았던 남파 공작원들의 사기는 어디까지 올랐을까요? 그리고 남파간첩들을 수사했던 대한민국 대공요원들의 사기는 어디까지 추락했을까요?
사기의 추락과 함께 많은 대공조직의 축소도 추진된 가운데, 2차의 남북 정상회담이 진행되었던 것은 참으로 끔찍합니다.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자는 이야기는 어느 대통령의 주장이었습니까?
이상과 같은 불가사의의 연속 하에서 국민들의 안보불감증은 깊어질 때로 깊어졌고 커질 대로 커져서 오늘에 와서는 북한의 공작에 대해서는 모두 침묵으로 일관하는 기현상이 계속되는 것으로 저는 봅니다. 이 무거운 침묵의 시작이 97년 5월 26일자의 노동신문 특집보도에 대한 침묵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감히 주장을 하면서 이제 더 이상의 침묵은 대한민국 국가안보에 치명적 위험을 초래할 것이란 생각을 갖고 몇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오늘 군복을 입고 있는 군의 후배 간부들과 장병들의 자세는 아직 훌륭합니다. 현역시절의 옛 부하들을 만나보면 모두 살아있습니다. 문제는 사회의 지도층과 국민들 모두의 관심입니다. 제 1, 제 2의 성시백 망령이 살아남아 대한민국 사회의 거목으로 활동하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경계의 눈만 뜨게 된다면 대한민국은 튼튼히 지켜질 것입니다.
군과 민이 그리고 현역과 예비역이 ‘철’저히 ‘경’계하고 ‘만’반의 ‘대’비를 갖추는 <철경만대>의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이미 12년이 지난 구문이지만 1997년 5월 26일자의 노동신문 특집보도가 많은 국민들에게 전파되고 읽혀져야만 합니다.
오늘 기흥구의 6.25참전 용사들 모임이 “철경만대”의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저에겐 최대의 보람이 될 것입니다. 글이 안 보이시면 손자들에게 읽어 달라고 부탁을 해서라도 우선 그 내용부터 파악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베트남 참전 전우들의 홈페이지인 vietnamwar.co.kr을 여시면 채명신 장군의 사진 밑으로 제 사진과 함께 ‘인강칼럼’이 보입니다. 인강칼럼의 headline에는 “10년전의 노동신문 특집보도 전문”과 함께 관련되는 다른 제목의 글들도 실려 있습니다.
연세가 높아지신 6.25참전 용사 선배님들께서 그 글들을 읽어 주시고 집안과 지역사회에서 우렁찬 목소리를 내어 주실 때 선배님들은 더욱 건강해 지시고 대한민국의 안보도 튼튼한 반석위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선배님들은 또 다시 대한민국의 진정한 민주화투사로서 높은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되실 것을 확신합니다.
용인시 기흥구의 김정현 회장님과 여러 선배님들이 보여주시는 친목활동과 애국 안보활동에 높은 경의를 표하며 오래도록 건강하시기를 기원하며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9.8.12일, 기흥구청 대 회의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