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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 제비꽃, 오랑캐, 달오름 마을
흥부전(興夫傳)
이조 후기에 나온 작자·연대 미상의 국문소설.
소설로서뿐만 아니라 판소리로도 불려지고 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가 만나는 삼남지역이 배경
...............흥부마을.....................
전북 남원시 아영면 성리마을은 흥부전의 배경.
흥부가 정착해 부자가 된 발복지(發福地)이다.
성리마을에는 박춘보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
매년 정월 보름에 망제단에서
흥부를 기리는 춘보망제 행사.
성리에는 흥부전에 등장하는 지명이 곳곳에 있다.
허기재, 고둔터, 새금모퉁이, 흰묵배미 등의 지명
지금은 길 양쪽으로 감자농사가 한창인 '허기재'
허기에 지쳐 쓰러진 흥부를 마을 사람들이 도운 고개
'고둔터'는 고승이 가난에 시달리는 흥부에게 잡아 준 명당
흥부는 이곳에서 제비를 고쳐준 발복집터.
'고둔'이라는 지명은 곳집(창고)이 모이는 터,
장수군 번암면으로 가는 짓재 고개마루에 위치.
'사금모퉁이'는 사금꾼들이 금을 채취하던 곳으로,
흥부가 이곳에서 금을 주워 부자가 된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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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근원설화로는 동물보은담(動物報恩譚)·
선악형제담(善惡兄弟譚)·무한재보담(無限財寶譚)·
모방담(模倣譚) 등을 꼽는데, 국외에도 널리 유포
....................'동물보은담'......................
개와 고양이가 주인의 은혜를 갚기 위해
주인이 잃어버린 구슬을 되찾는 과정에서
서로 다투어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는 설화.
견묘쟁주(犬猫爭珠) 견묘보주탈환(犬猫寶珠奪還)’
옛날 어느 바닷가에 늙은 어부 부부.
어느날 노인이 큰 잉어를 잡게 되었다.
잉어가 눈물을 흘리자 가여워 놓아주었다.
다음날 노인이 바다에 가니,
한 소년이 용왕의 아들이라며
노인에게 감사하며 용궁으로 초대
용왕의 대접을 받고 보배 구슬을 얻어
돌아온 노인 부부는 큰 부자가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웃 노파가 속임수를 써서
구슬을 가져가 노인의 집은 다시 가난해졌다.
그 집의 개와 고양이는 주인의 은혜를 갚고자
그 노파의 집으로 가서 구슬을 되찾게 되었다.
돌아오던 중, 강 건널 때 개는 헤엄치고
고양이는 등에 업혀 구슬을 물고 있었는데,
개가 구슬을 잘 간수하고 있느냐고 자꾸 묻자
고양이는 대답하다가 구슬을 그만 물에 빠뜨렸다.
그 책임으로 서로 다투다가 개는 집으로 갔지만,
면목없던 고양이는 강 건너편에서 물고기를 먹다가
그 속에서 구슬을 찾게 되어 주인에게 가져다주었다.
주인은 고양이를 우대하고 개를 집 밖에 거처하게 하고
박대했으므로, 그 뒤 둘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는 내용.
이 설화는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아시아·유럽·
아프리카·북미·남미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다양
우리나라에서는 서울·개성 중심 중부지방의 설화.
이 설화는 부리아트족(바이칼호 동부 몽골족)에서 유래.
고려 중엽 이후 많은 몽골인·거란족이 이주, 귀화할 때
가지고 온 설화로 보이며 삼남지역은 그들의 귀화 정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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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화 몽골인과 거란족.......................
천년 전 중국 동북 중원을 장악했던 요(遼)나라 거란(契丹)족
거란은 993년부터 세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던 강국이었다.
1018년 강감찬 장군이 적장 소배압을 상대로 귀주대첩을 거둔 것
거란은 그후 고려에 대한 야심을 접었는데
몽골이 세운 원(元)대 이후 자취를 감췄다.
어떻게 거란족이 한순간 사라지게 되었을까?
중국 서남쪽 윈난(雲南)성 일부 지역에 사는 다얼족
거란의 시조 '야율(耶律)'을 사당에 모신 사실이 확인.
거란족 후예들은 왜 이처럼 멀리 떨어져 살아남은 걸까?
거란족은 징기스칸 당시 몽골군 전위부대였기 때문.
요나라 멸망 뒤 자신을 공격했던 금(여진족 왕조)을 증오
거란족은 몽골 칭기즈칸과 손잡고 원 왕조 정복부대의 선봉
그 결과 거란족은 전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결국 중국 내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할 기회를 상실.
거란족 일부는 요나라 멸망 뒤 현재 이란 지역으로 이동
'이슬람 세력으로 귀화했다는 설도 유력.'
고려 말 80년간 원나라 지배를 받았던 고려.
고려는 중국 송나라와 밀접한 무역 교역 국가.
거란과 중국 송나라 관계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
송나라는 문치주의 정책으로 힘이 미약했던 왕조
거란에게 조공을 해야만 명맥이 유지되었던 송나라.
1005년 매년 20만필의 비단과 10만냥 은을 거란에 조공
그 조건으로 거란과 송나라는 상호 평화조약을 맺게된다.
거란은 북경[유주-엣 지명]과 대동을 점령하는것으로 만족.
1005년 [제1차조약]거란과의 조약과 1042년[제2차조약]
송나라 조정은 거란에 열등한 지위를 수용하고 계속 조공.
1042년 거란과,송과의 관계는 형제 관계로 조약을 체결하고
매년 바치는 세제도[세금-조공물] 은 20만냥과 비단 30만필
송나라는 매년 막대한 조공을 거란에게 바쳐 국가 명맥 유지.
원나라 지배를 받던 고려에 대거 유입된 거란족.
몽골군 정예부대로 삼남지역 경계선에 주둔한듯.
그후 원나라가 역사에서 사라지자 한반도에 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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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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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 전라, 경상 3도의 어름에 연생원의 두 아들
같은 어미의 소생이었지만, 형 놀부는 심술이 사납고
아우 흥부는 동기간 우애 깊고 천하에 둘 없는 착한 사람.
형 놀부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전답과 재산을 독차지
흥부에게 밭 한 마지기, 돈 한 푼도 주지 않고 쫓아낸다.
흥부 가족은 움집 짓고 들어 앉았으나 살 길 막막.
게다가 아이들은 해마다 낳아서 자꾸만 늘어만 났고,
품팔이를 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만큼 가난했다.
하루는 흥부가 견디지 못해 형 집에 쌀을 얻으러 간다.
그러나 그 악한 형 내외에게 죽도록 매만 실컷 얻어맞고
온갖 욕설과 구박만 당하고 돌아온다.
흥부 내외는 아무리 품팔이해도 살아갈 길이 막막.
하루는 읍내에 나가 대신 볼기 맞고 30냥을 벌려 한다.
흥부는 관가로 가나, 일이 여의치 않아 그도 못하게 된다.
어느덧 겨울이 가고 봄이 돌아왔다.
강남에서 제비들이 돌아와 집을 짓는다.
흥부집 처마에도 제비가 집짓고 새끼를 키운다.
하루는 뱀이 제비집 새끼를 잡아 먹으려 하자,
흥부가 불쌍히 여겨 뱀을 칼로 쳐서 쫓으려할 때,
제비 새끼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다.
흥부는 불쌍히 여겨 당사실로 동여주니,
그 제비 새끼는 죽지 않고 겨우 살아난다.
그 제비가 강남 제비 왕에게 사실을 고하고,
흥부에게 입은 은혜를 갚아 달라고 부탁한다.
제비 왕은 박씨 하나를 주며
흥부에게 가져다 주라고 한다.
이듬해 봄에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와서
흥부의 집에 박씨 하나를 떨어뜨려 준다.
흥부는 그 박씨를 뜰에 심었고,
가을에 커다란 박이 많이 여문다.
흥부 내외가 먹으려고 박을 하나씩 켜니,
선약을 비롯해 수많은 재물이 쏟아져 나온다.
이에 흥부는 일시에 부자가 되고,
놀부는 흥부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고는 시기와 질투
이것저것 빈정대다가, 흥부로부터 부자가 된 이유를 묻는다.
놀부는 이듬해 봄에 제비 새끼 다리를 부러뜨려
실로 동여 주자 이듬해 박씨 하나를 가져다 준다.
놀부는 그 박씨를 심고 가을이 되기를 고대한다.
가을이 되어 많은 박이 익었다.
하인을 시켜 박을 타게 하니,
첫째 박에서는 여러 동자가 나와서
놀부를 곯리며 3천 냥을 뺏아간다.
둘째 박에서는 노승들이 여러 상좌를 데리고 나와
5천 냥을 빼앗아 간다.
세 번째 박에서는 상여꾼이 나와서 또 3천 냥을 빼앗아 간다.
넷째 박에서는 무당들이 나와서 5천 냥을 빼앗아 간다.
마지막 박을 타보니 누런 똥이 쏟아져 놀부의 집은 똥바다
이 때 아우 흥부는 형이 패가망신했다는 소문을 듣고,
형 내외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지성으로 섬기며,
자기 집과 똑같은 집을 지어 주어서 살게 한다.
이에 그렇게 악독한 놀부도 개과하고,
착한 사람이 되어 형제가 화목하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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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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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후기 작자 연대 미상의 판소리계 소설.
훙부전은 가난한 지리산 자락의 조상 이야기.
'과연, 그 배경 무대는 어디쯤 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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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부군에는 <흥부전>의 주인공 흥부와 관련된 마을 지명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동면 성산리와 아영면 성리가 흥부와 관련된 마을이다.
성산마을은 흥부가 출생한 곳, 성리마을은 흥부가 유랑 끝에 정착한 곳.
성산리는 남원과 함양을 잇는 팔랑치 아래쪽에 있다.
<흥부가>에 "전라도는 운봉이요, 경상도는 함양이라.
운봉, 함양 두 얼품에 흥보가 사는지라..." 라는 대목.
운봉과 함양 사이에 있는 성산리를 떠올리게 하는 곳.
성산리엔 연비봉, 화초장 바위, 흥부네 텃밭, 연하다리
모두 흥부전을 떠오르게 하는 배경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놀부 박첨지는 부자임에도 인색했을 뿐만 아니라
재물을 믿고 소작인들과 이웃을 몹시괴롭혔다 한다.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동생도 매만 때려 내쫓았단다.
훗날 함양 땅에서 민란에 박첨지가 죽임을 당하였는데도
마을사람들은 박첨지의 시체조차 거두어주지 않았다 한다.
흥부가 동네사람들에게 형의 제사를 지내 달라고 부탁하여
성산마을에서는 박첨지의 제사를 지내 오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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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에서는 보리고개.
보리 농사를 수확하기 전까지 배고픈 춘공기를 지냈다.
초근목피로 굶주림을 면하느라 뒷간마다 피똥의 흔적들.
닥치는대로 먹어야 했기에
거친 음식 탓도.. 못할 만큼,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때문.'
추수로 비축했던 겨울 양식은 떨어지고
산과 들은 얼어붙어 봄나물도 나지 않고
아직 보리순도 나오기 전 4월은 잔인한 달
다이어트는 상상 조차도 못할 만큼, 굶어 죽었던 보리고개.
시집 장가가기 전까지 보리 한말 먹기도 어려웠던 두메산골.
하여, 그 굶주림의 애환을 가장 잘 대변한 흥부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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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쇠 흥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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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설한에 형님 집에서 놀부로부터 거리로 쫓겨난 가족들은
길에서 만난 실상사 스님의 말씀대로 북쪽으로 십리길을 가다가
'복덕촌'이란 마을 빈집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복덕촌이란 마을이 이름 답게 인심이 후하고 정이 많긴 하지만
워낙 없는 시골마을 인데다가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길었다.
공부 밖에 모르고 이 날 이 때까지 살아왔던 흥부인지라
당장은 마누라 날품일로 근근히 끼니를 때우던 흥부네 식구들은
점점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아지는 것이야 당연지사 이라,
'굶주림을 참다 참다~~ 못한 흥부..'
형님 놀부에게 보리쌀이라도 얻어 보려고 갔다가
놀부에게 매만 흠씬 맞고 놀부 형수님에게는
밥주걱으로 뺨만 좌우로 맞고 돌아오는디,
'아이고 ! 흥부가 기가 막혀...'
겨울이 가고 이른 봄이 되자
먹을 것은 아예 찾아 볼 수가 없는데
말 그대로 춘궁기 인지라 참다못한 흥부,
의관을 정제하고 현청에 가서 궁휼미를 얻으로 갔다가
전주감형에 갇힌 인월고을의 박좌수를 만났는데,
박좌수가 곤장 열대를 대신 맞아주면
돈 삼십냥 준다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계약금 닷냥을 받고들고 어깨 춤을 덩실거리면서
임시 먹을 곡식과 반찬을 사 가지고 집에 돌아온 흥부,
매품 팔려고 받은 계약금으로 배불리 저녁먹은 흥부네 가족
참으로 오랜만에~~ 행복에 겨워, 기나 긴 저녁 밤을 보내었다.
다음날 새벽, 전주 감영에 당도한 흥부,
붉은기, 푸른기가와 노란기를 꽂아 놓고
인정사정없이 형틀에 매달아 곤장을 치는디,
아따 곤장 열대에 살가죽 찢어지고 선혈이 낭자하며
아프다 못해~ 하늘이 핑핑돌아.. 정신이 하나도 없는디,
돈받으려고 박좌수에게 가보니 놀부가 벌써 가로채 갔다는디,
“아이고 형님!~~ 어쩌려고 그 돈을 챙기셨다요."
아픈 몸을 이끌고 눈물 범벅, 피 범벅, 인월 까지 오려니
한나절 다잡아먹고 팔령치 앞 지리산 삼봉산 자락에 도달하여
집에 들어갈려니 눈앞이 깜깜~~~~,
자식들 끼니 기다리다 굶을 것 생각 하니
"더 이상은 못 가겠네 , 죽어도 못가겠네~~~"
허기 지고 상처 나고 힘 없고 눈물이 앞을 가려,
큰나무에 기대어 깜박 잠이 들었는데 한참을 있다보니
신기하게도 엉덩이 찢어진 상처가 아물고 있는게 아닌가,
"어라 ! 이 무슨 신기한 조화 당가요~~~ "
흥부가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보니
나무에서 수액이 흘러내리고 있지 않은가?
흥부가 대나무 잎으로 그 물을 받아 먹고보니
달짝찌근하며 알싸 청량한 감이 온몸을 휘돌아
힘이 불끈 나는 것이... 정말로 신기한 물인지라,
"천지신명님! 부처님! 산신령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구나, 마구 절하며
정성스레 그 물을 받아 다시 한번 나무님께 감사드리며
얼씨구 절씨구 콧노래를 부르며 집 앞 마당에 들어서자,
아이들 집앞에서 모두들 나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
“ 여보 마누라! 애들아 들어가자꾸나”,
“ 아부지 곡식 자루는 어디 있당가여?"
"에따! 우선 이거라도 받거라"
"배고파 죽겠는디.. 밥 주세요~~."
"밥 대신에 이거라도 마시거라."
"밥은 없고 어디서 냇물만 한동이 퍼 왔당가요?"
” 천지신명이 보호하사 우리가 굶어 죽지 말라고 내린
신령스런 물인디~~ 여러소리 말고 빨랑 마시거래이~~“
"........................"
애들의 볼멘 소리에..모처럼 흥부가 버럭 화를 내자
생전 흥부의 화낸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인지라
애들은 서둘러서 물을 마시는디, 과연 달짝찌근 하면서
입안에 감도는 맛이 예사롭지 않아 다들 정신없이 먹었지만
배탈나지도 않고, 허기를 면하게 되어, 배부름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린 것만 빼놓고 힘이 샘솟는 듯.
아침에 눈뜨기가 바쁘게 흥부 가족은 그 나무를 찾아가보니,
주변에 비슷한 나무가 많아 모두 신이 나서 나무 수액을 먹고,
몇 동이를 지고와 끼니 때마다 허기를 때우며 며칠을 보냈다.
복덕촌 마을 사람들 모두 춘궁기라 힘든 걸 아는 마음 착한 흥부.
마을 사람들에게 신기한 나무를 얘기하며 수액을 받으러 가자니,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산에 올라가 수액 채취해 춘궁기를 넘겼다.
그후 흥부는 마을 사람 추천으로 아랫마을 인월에 서당에서 훈장.
각시는 음식솜씨와 바느질 솜씨로 굶지 않으며 잘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봄에 날아온 제비 다리 고쳐주고
이듬해 봄에 박씨 받고 부자된 뒷 이야기는
모두 다 아는 이야기 이니까 생략하기로 한다.
........
흥부가.
........
-흥부가 초입 놀부 심술 -.
아동방이 군자기국이요,
예의지방이라,
십실촌에도 충신이 있었고,
삼척 유아라도 효제를 일삼으니,
어찌 불량헌 사람이 있으리요마는,
요순의 시절에도 사흉이 있었고,
공자님 당년에도 도척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어찌 일동여기를 인력으로 할 수가 있나!
전라도는 운봉이 있고,
경상도에는 함양이 있는데,
운봉, 함양, 두 얼품에 박 씨 형제가 살았으되,
형 이름은 놀보요, 아우 이름은 흥보였다.
사람마다 다 오장이 육보인듸,
놀보는 오장이 칠보였다!
그 어찌 칠보냐 하며는,
이놈이 밥곧 먹으면,
남한테 심술 부리는 보 하나가
왼쪽 갈비 속에 가서 장기 궁짝만헌 것이 붙어 가지고,
병부 줌치 찬 듯 딱 이놈이 앵겨 가지고,
남한테 심술을 부리는듸, 꼭 이렇게 부리것다.
놀보 심사 볼작시면,
술 잘 먹고 쌈 잘하기,
대장군방 벌목시켜,
오귀방에 이사 권코,
삼살방에다 집 짓기고,
남의 노적에 불 지르고,
불 붙는 듸 부채질, 새 초분으도 불지르고,
상인 잡고 춤추기와, 소대상 주정 내여 남의 젯상 깨뜨리고,
길 가는 과객 양반 재울듯이 붙들었다 해 다 지며는 내어 쫓고,
의원 보며는 침 도적질, 지관 보며는 쇠 감추고,
새갓 보면 땀때 떼고, 좋은 망건 편자 끊고,
새 메투리는 앞총 타고, 만석 당혀 윤듸 끊고,
다큰 큰애기 겁탈, 수절 과부 무함 잡고,
음녀 보며는 칭찬허고, 열녀 보면 해담허기,
돈 세난듸말 묻기와, 글 씨는듸 옆 쑤시고,
사집병으 비상 넣고, 제주병에다 가래춤 뱉고,
옹구 진 놈 가래 뜨고, 사그짐은 작대기 차고,
우는 애기는 발구락 빨리고, 똥 누는 놈 주저앉히기,
새암 가상이 허방을 놓고, 호박에다가 말뚝 박고,
곱사동이는 되집아놓고, 앉은뱅이는 태껸하고,
이런 육시를 헐 놈이 심술이 이래 노니,
삼강을 아느냐,
오륜을 아느냐?
이런 난장을 맞을 놈이!
심술이 이래 노니, 삼강 오륜을 알며,
형제 윤기인들 알 리가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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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가 기가 막혀.
...................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아이고 성님 동상을 나가라고 하니
어느 곳으로 가오리오 이 엄동설한에
어느 곳으로 가면 산단 말이오
갈 곳이나 일러주오
지리산으로 가오리까 백이 숙제 주려죽던
수양산으로 가오리까
아따 이 놈아 내가 니 갈 곳까지 일러주냐
잔소리 말고 썩 꺼져라
해지는 겨울들녘 스며드는 바람에
초라한 내 몸 하나 둘 곳 어데요
어디로 아- 이제 난 어디로 가나
이제 떠나가는 지금 허이여
굳게 다문 입술사이로
쉬어진 눈물이 머금어진다
무거워진 가슴을 어루만져
멀어진 기억 속에 담는다
어슴프레 져 가는 노을 너머로
소리 내어 비워본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나
이제 나는 어디로 가나
갈 곳 없는 나를 떠밀면
이제 난 어디로 가나
안으로 들어가며
아이고 여보 마누라
형님이 나가라고 하니
어느 명이라 안 가겄소
자식들을 챙겨보오
큰 자식아 어디 갔냐
둘째 놈아 이리 오너라
이삿짐을 짊어지고
놀부 앞에다 늘어놓고
"형님! 나 갈라요."
해지는 겨울들녘 스며드는 바람에
초라한 내 몸 하나 둘 곳 어데요
어디로 아- 이제 난 어디로 가나
이제 떠나가는 지금 허이여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 남원에서 당일에 가볼 수 있는 곳.-
육모정, 구룡폭포, 정령치, 노고단, 달궁계곡,
뱀사골계곡, 반선 지리산 전적 기념관, 살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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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래봉 & 덕두산 & 인월면 ] 지도
인월이라는 지명이 붙게 된 유래를 찾아..역사 기행.
1380년 인월리 황산(607m)에서 이성계 장군.
왜구를 토벌하려고 여진족과 함께 동맹군 결성.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물리치려 진을 쳤다.
'하지만, 그믐날 밤이라 칠흙 같은 어둠,'
이성계는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이 나라 백성을 살피시어 달뜨게 해 주소서”
그러자 거짓말같이 칠흑 같은 하늘에 보름달이 떠
환히 길을 밝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고 전해온다.
이성계가 달을 끌어 올렸다 하여 명명된 인월(引月).
달오름 마을은 지리산 자락 맑은 공기와 물,
달빛의 신성한 기운이 365일 함께 하는 곳.
하여, 기(氣) 수련 도시인들이 즐겨 찾는 곳.
달오름마을 특산 토속음식은 흥부 거지 비빔밥.
지리산의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하룻밤을 묵으면
이곳이 무릉도원이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난다.
이 마을 주민은 78가구 178여명.
24번 국도변에서 바라본 달오름마을.
마을 뒤로 지리산 바래봉 줄기가 보인다.
이 마을은 흥부가 살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
그래서 비빔밥을 흥부 바가지에 비벼먹는다.
...........여진족 후예들의 풍습................
이조 초기 귀화한 여진족 잔류민들
산간에 살며 머리깎고 절을 짓고 생활
함경북도 부령군·회령군·유성군·종성군·온성군·
경원군·경흥군 6진 변방에 주로 모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궁벽한 산간지역에서 여타 사회와 교제를 끊고
은둔부락으로 살아갔기에 재가승 마을이라고 불리웠다.
재가승들의 직업은 대개 농업이며
화전을 하며 주로 귀리를 생산했다.
귀리로 황지(黃紙)를 생산해 세공(稅貢)으로 바쳤다.
황지는 연지(燕紙)라고도 하 진귀품으로 이름 높았다.
소를 중심으로 품앗이 하는 소겨리 농업 조직이 성했다.
장례풍습은 원래는 화장법이었으나
함경도의 풍습을 받아들여 매장했다.
마을공동으로 상여를 준비하고
마을전체가 몇 개 조로 나뉘어
윤번으로 장(葬) 일체를 책임지는
향도가 재가승생활에도 이루어졌다.
정초와 10월 2일에 올리는 산치성(山致誠),
연중 4번 국사당에 올리는 산제가 있었다.
민속놀이로는 주지춤·수박치기·길마지기·
벙어리놀음(걸립굿)·윷놀이·그네뛰기·장기
외부세계와는 거래를 하지 않았고
혼인도 자기들끼리 한 폐쇄적인 생활
산간 오지에 살았던 자연지리적 환경 탓.
그러나 차츰 함경도를 중심으로 우리민족에 동화
8·15해방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거의 동화
재가승 풍습은 여진족들의 연원에 대한 자료를 제시
단일민족으로 동화과정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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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당(國師堂)......................
이조 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한양 수호신사(守護神祠)로 북악신사(北岳神祠)와 함께
남산 꼭대기에 두었던 목멱신사(木覓神祠)의 사당.
훗날 무당(巫堂)으로 변해 일반의 기도장으로 사용되었다.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을 때
건물을 헐어 편액(扁額)과 사당의 일부를 인왕산으로 옮겼다.
현재, 옛 국사당이 있던 그 자리에는 남산 팔각정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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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이 유목 민족이란 대표적인 증거.
똥에 관한 해학적인 속담이 많은 우리나라.
일상생활에서도 똥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편.
<속담>
똥을 싼다.
방구가 잦으면 똥이 된다.
똥 치는 막대기 취급을 한다.
똥 누고 밑을 아니 씻은 것 같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똥 누러 갈적 마음과 올 적 마음 다르다
똥 치는 막대기는 유목민에게 필수품
일정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유목민.
똥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흥부전.
'우는 아이에게 똥 먹이기.'
'똥누는 사람 주저 앉히기.'
...............선악형제담(善惡兄弟譚)....................
흥부전은 흥부이야기와 놀부이야기의 이원적 구조.
<단 방귀 장수> <말하는 염소>에 관한 설화가 있다.
<단 방귀 장수>
욕심이 많아 유산을 독차지한 형과 가난한 동생.
동생이 산에 가 꿀통을 발견하여 실컷 먹고 온다.
그후 동생은 꿀처럼 단 방귀 장사로 큰 부자가 된다.
형이 그 말을 듣고 꿀을 찾다가 없어
할 수 없이 생콩을 한 말이나 먹는다.
형은 방귀 장사 한다고 잔칫집에 불려가
방귀 뀌니 똥물이 나와 매만 죽도록 맞는다.
<말하는 염소>
착하나 못 사는 형, 인색하나 잘 사는 동생.
형이 산에 갔다가 말하는 염소를 데려와
이를 사람들에게 구경시키고 돈을 번다.
동생이 형의 염소를 빌려다 돈을 벌고자 하였으나
염소가 말을 하지 않아 망신만 당한후 염소를 죽인다.
형은 염소의 뼈를 가져다 울안에 묻어 주었더니
거기서 대나무가 자라 하늘에 있는 돈보를 찔러
집안에 돈이 가득 차 큰 부자가 된다.
동생도 그말을 듣고 염소의 뼈를 가져다
울안에 묻었더니 거기에서 자란 대나무가
하늘에 있는 똥보를 찔러 똥에 파묻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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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 설화...........................
신라에 방이 형제가 살았는데 형 방이는 가난하여
의식을 구걸해서 살아가는 형편이었고, 아우는 부자.
어느 해 방이는 아우에게 누에알과 곡식의 종자를 구걸.
동생은 나쁜 사람이었으므로 알과 종자를 삶아 주었다.
형이 받아 온 알 중에 누에 한 마리가 황소만큼 자랐다.
동생은 누에를 죽이고 가자 사방에 누에가 모여 실을 켰다.
종자도 한 줄기만 살아 이삭이 한 자나 자라나자,
어느날 새 한마리가 날아와 그것을 물고 달아났다.
그는 새를 따라 산 속으로 갔다가 밤을 맞게 되었다.
이윽고 난데없이 아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금 방망이를 이리저리 치는데
그때마다 그들이 부르는 것이 나타났다.
그들은 술과 밥을 차려 먹더니 어디론지 가버렸다.
방이는 이 방망이로 아우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다.
아우는 시기심이 나서 그도 역시 형이 한 바와 같이
새를 따라가서 아이들을 만났는데 아이들은 그를 보자,
이놈이 전에 방망이를 훔쳐 간 놈이라면서 부역을 시킨 후
코를 뽑아 코끼리처럼 만든 후에야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우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속태우다가 죽었고 그 방망이는 방이의 후손에게
전해졌는데 어떤 후손이 "이리 똥 내놓아라."고 희롱
그후 갑자기 벼락치며 사라진 방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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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모방담 설화들이 흥부전의 골격'
지금까지 ‘흥부전’의 근원설화에 대해서는
고유설화 외래설화 혼합, 몽고설화, 불교설화
그중 흥부전과 유사한 몽고 ‘박 타는 처녀 설화’
..............박 타는 처녀'.....................
옛날 처녀 하나가 하루는 바느질을 하고 있노라니까,
무슨 소리가 들려, 나가 본즉 처마에 집을 짓던 제비
땅으로 떨어져 버둥거리기에 상처를 실로 동여매어 치료.
얼마 뒤 그 제비가 튼튼한 몸이 되어서 날아오더니,
고마운 인사를 하는듯 씨앗 하나를 떨어뜨리고 갔다.
처녀는 그것을 뜰 앞에 심자 커다란 박이 하나 열렸다.
엄청나게 큰 박이라 굳기를 기다려 타 보았다.
박을 켜자 그속에서 나온 금은주옥과 온갖 보화
그 이웃에 심사 바르지 못한 색시가 하나 있었다.
이 색시가 박 타서 부자가 된 처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그 처녀처럼 제비 상처를 고쳐 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제집 처마 밑 제비를, 일부러 떨어뜨려서
부둥깃을 부러뜨리고, 오색 실로 동여매어 보냈다.
얼마 후 박씨 하나를 가져왔기에 얼른 뜰에 심었더니,
박이 열려 탔더니 독사가 나와 그 색시를 물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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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설화들이 서로 어울려 흥부전을 이룬듯 하다.
이 작품은 구전설화로 전해지다가 판소리로 불려지며
내용에 첨삭이 가해지며 차츰 세련된 형식을 띠게 된듯.
판소리에서는 〈흥보가〉·〈박타령〉이라고도 하며,
개화기에 이르러 이 작품이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며
〈연(燕)의 각(脚)〉이란 이름의 신소설 형식으로 개작.
〈흥부전〉은 형제간 우애를 강조하는 도덕적 측면과
빈부간의 격차를 문제삼은 사회적·경제적 측면에서 이해
표면상 이 작품은 형제간의 우애를 내세우지만,
작품 중심 소재는 도덕률과 재물의 갈등에 있다.
가난하면서도 착하게 살려고 하는 인물과
부유하면서도 탐욕스럽게 사는 인물의 대비
놀부의 심술과 흥부의 가난에 대해 과장된 수사법
해학성을 높임으로써 독자들을 흥미롭게 한 줄거리.
〈춘향전〉〈심청전〉 같은 여성 취향의 소설과는 달리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서민 실생활과 경제문제를 주제
기존의 고대소설과는 또 다른 일면을 보이는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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