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좌절을 딛고 일어서서
글- 월탑 박경훈(月塔 朴敬勛)
그러나 어린 스님에게 있어서 중학교 진학을 단념하기란 쉽지 않았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는 것은 좌절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몸이 공중에 붕 뜬 것처럼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책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목적도 하는 일도 없이 한 해, 또 한 해가 훌쩍 지나갔다.
그러한 동생을 보다 못한 형이 사다준 책이 중학교 과정의 통신강좌였다. 통신강좌를 손에 들어도 처음에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당시의 중학교 학제는 5년제였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3년과 고등학교 3년 과정을 합한 것이었다.
공부의 진도가 지지부진한 때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스님을 긴장시켰다. 1941년 12월 8일, 일제는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한 것과 동시에 동남아 각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기선을 잡은 전쟁으로 초기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있었음에도 극도로 부족한 전쟁물자의 확보를 위해서 식량은 물론 사소한 생활필수품까지 혹독하게 통제하였다. 동시에 전쟁에 광분하는 일제는 단말마와도 같은 독전(督戰)을 하였다. 소위 전시체제령이라고 하는 법령이 나라 안을 온통 옥조이기 시작한 때였다. 생존을 위협하는 혹독한 생활고와 전쟁이 주는 정신적 압박 속에서 스님이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는 일뿐이었다.
다시 책을 들고 중학교 과정의 통신강좌를 공부하기 시작한 지 1년 남짓해서 형이 유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해가 바뀌자 곧 아버지도 타계하였다. 설상가상이었다. 형과 아버지의 잇따른 죽음은 조숙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에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스님은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내가 불문에 들어온 뒤에도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형과 아버지의 죽음이 떠올랐다. 인생, 누구나 죽음으로 부모형제를 잃은 슬픔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그때, 나는 왜 나만이 그러한 슬픔을 당해야 하는가, 사람은 왜 친근한 사람에게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안겨 주면서 죽는가, 하는 의문이 가슴을 짓눌렀다. 바위 덩어리 마냥 나를 짓누르는 의문과 슬픔은 차라리 절망이었고 어둠이었다.”
스님은 형과 아버지의 잇따른 죽음을 계기로 인생에 대해서 회의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슬픔과 절망과 불안의 끝을 알 수 없는 깊고 어두운 터널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외롭고 연약한 소년의 모습이 그때의 자기 모습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오는 데 많은 인고의 시일이 걸렸다고 하였다.
형과 아버지의 잇따른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그 충격을 이기기 위해서 카톨릭에 귀의하였다. 그러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함께 다니게 된 천주교회를 더 열심히 다니기도 하였다. 호구지책을 위해서 일을 찾아 거리를 헤매 다녔으나 소년에게 주어지는 일감은 없었다. 거리에는 오직 전쟁, 전쟁, 전쟁을 외치는 소리뿐이었다. 오산에는 비행장 등 군사기지가 있었기 때문에 전쟁 분위기가 한층 더 삼엄하였다. 삼엄한 거리를 헤매다가 지쳐서 집에 돌아오면 등화관제로 불을 밝힐 수 없어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그러한 때에 스님이 택한 길은 비록 통신강좌라 하더라도 하루 속히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취직을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는 통신강좌를 이수하면 정규과정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스님은 분발했다. 5년 과정을 3년에 마쳤다. 그것은 독학으로 공부를 해내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슬픔, 절망, 불안, 이러한 것들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책에 파묻힌 결과였다.
스님은 통신강좌로 이수한 중학교 과정의 학력을 가지고 서울 영등포에 있는 고바야시 광업소(小林鑛業所)의 정식 사원으로 입사를 하고 사택을 제공받았다. 돌이켜보면 괴로운 기억뿐인 오산을 떠나 영등포에 새 삶의 터전을 잡았다.
이때가 1944년 봄, 스님의 나이 18세였다.
4. 지적 방황
고바야시 광업소는 무기를 생산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철광을 탐광하고 생산하는 회사이므로 군수산업에 속하는 회사였다. 그러므로 회사원이 조선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본인과는 차이가 있으나 식량과 생활필수품의 특별 배급을 받았다.
이제 스님은 어엿한 가장의 몫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와 형이 유명을 달리 한 후에 찾아온 모처럼의 풍요였다. 그러나 스님은 그 풍요 속에 안주할 수가 없었다. 일제의 억압으로 농토를 빼앗기고 고향을 등져야 했으며, 지금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돕고 있는 식민지 지배하에서 살아야 하는 망국민의 비애가 가슴에서 멍울져 자라고 있었다.
이 무렵, 회사에는 성(成)씨 성을 가진 한국인 선배 사원이 있었다. 이 사람은 뒷날, 스님이 대동상업고등학교의 재단법인 재산을 보강해서 종단이 인수를 할 때, 광산 등을 출연하여 일을 도왔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해서 대동상고의 서무과정을 지낸 사람이다. 이 성과장이 고바야시 광업소에 근무하던 당시의 스님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어느 날, 키가 훌쩍 큰 미소년이 입사를 했다. 처음에는 사환인 줄로 알았다. 그런데 총무과장이 정식사원이라고 해서 놀랐다. 그리고 서무를 맡는다고 해서 또 한번 놀랐다. 회사 일이란 서무에서 시작해서 서무로 끝나는 것인데 경험 없는 나이 어린 소년에게 서무를 맡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얼마나 갈지 걱정을 했다. 그러나 의외로 맡은 일을 잘 처리하였다. 성품이 유순하고 성실해서 사원들 사이에 금세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러한 사람이 때때로 침울한 낯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어린 사람에게 무슨 고민거리가 있나보다 하였다. 그리고 여가만 있으면 독서에 열중하는 것을 보면서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때, 회사에는 도서실이 있었다. 광업과 기계공업에 관한 책이 대부분이었으나 그에 못지않게 교양, 문학, 철학, 법률에 관한 서적도 적지 않았다. 스님은 이 중에서 특히 철학과 법률서적, 그리고 『생명의 실상』이라고 하는 책을 탐독하였다. 『생명의 실상』은 당시, 전쟁에 시달리고 있는 일본 서민에게 생명수와 같이 여겨진 책이었다.
어린 사람이 읽는 책으로는 좀 동떨어진다 싶어서 왜 그런 책을 읽는가 물었다. 그때 스님은,‘전쟁에 시달리기는 침략자인 일본인이나 침략을 받은 우리나 같을 것이다. 그런 인생의 끝이 어디인가 알고 싶어서’라고 하였다.“
전쟁과 망국민의 비애는 스님으로 하여금 생에 대한 회의를 더욱 깊게 하였다.
“왜, 정당하지 못한 일제에 협력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 끝은 어디인가?”
스님은 성과장의 회고담 끝에 그 당시의 심정을 그렇게 토로하였다.
스님은 생의 끝을 찾기 위해서 손에 닿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해답을 구했다. 마치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보고 탐닉하듯이 책 속에 빠져 들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읽는 주경야독의 생활이었다.
어머니는 병약한 아들의 지나친 주경야독의 생활이 건강을 해치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였다.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으려고 밤을 새워가며 읽느냐고 걱정을 하면, 웃으면서 하는 말이
“한 방 가득히 읽을 것입니다.” 하였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였다. 평소 부모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그러한 스님이 책을 읽는 일에 있어서만은 어머니의 뜻을 따르지 않게 되었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3 -구국구세의 횃불, 글 송암지원, 도피안사
첫댓글 책과 함께 그 어려움을 극복하신 스님의 독서력이 오늘날의 지혜와 밝음으로 이어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같이 책이 지천으로 있는 현실에서 즐겨 독서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일이 우리 어른들의 몫인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어디서 이렇게 크고 귀하신 분이 오셨을까요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어려서 부터 남다른 스님의 모습입니다. 만중생을 위한 독서였네요. 마하반야바라밀.....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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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