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문제는 페디큐어였다. 5년전의 금요일, 캐롤린 비셋은 여동생 로렌과 존 F 케네디 주니어를 공항에서 만나 하이어니스 포트 (별장지)로 향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약속에 늦고 말았다. 다시 말해 미숙한 파일럿 존은 일몰후 출발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는 뜻이다. 세명의 죽음 후 캐롤린이 연보라색의 페디큐어를 받기 위해 출발을 지연시켰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자, 강박적이고 까다로운 여자라는 평판이 확정적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페디큐어 비화는 7월의 어느날 밤 자가용 비행기가 캐롤린, 존과 로렌을 태우고 추락한 이후 수면에 떠오른 폭로담의 하나에 불과하다. 죽음으로 불멸을 얻은 절세미인들과 달리, 캐롤린은 악명을 얻었으며, 개인적인 약점이 노출, 확대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같은 대중적인 분노에는 냉소적인 것으로 악명높은 일반 뉴요커들도 놀랄 정도이다. 아름다움과 명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나라에서, 이 여인은 왜 그리 미움을 받게된 것일까?
캐롤린 비셋에 대한 뉴욕의 집착은 1996년, 그녀가 감히 미국의 왕자님 존 케네디 주니어와 결혼을 결심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존은 잡지 조지의 발행인으로서 뉴요커들을 매료시킨 상태였다. 당시 캐롤린은 완벽한 공주님으로 보였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금발에, 패션계의 인사이더에다 완벽한 스타일이 있었다. 디자이너들은 모두 그녀에게 옷을 입혀보고 싶어 했으며, 뉴욕 여성들은 그녀를 닮고 싶어했다. 뉴욕의 퍼스트 커플이었지만, 신혼때 대로변에서 싸움하는 모습이 사진에 담기게 되면서, 사람들은 뭔가 잘못 풀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으며 비난은 캐롤린에게 집중되었다.
일단, 존이 양복을 사러 들린 매장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이 패션홍보 담당자는 1996년, 조지아주 연안의 한적한 섬에서 결혼식을 올릴 것을 고집했다. 언론취재도 없고, 존의 친구들도 거의 참석하지 못하는 외진 장소였다. 프라이버시를 우선시 하는 그녀의 태도는 새로운 커플의 뉴스취재를 기대했던 미국인의 열망에 반하는 것이었다. 대외용 스마일을 지으면서 거리를 나서는 대신, 그녀는 분노 속에서 강박적으로 행동했다.
남편의 경우는 관심을 받고 사는데 익숙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보통 사람처럼 일상사를 꾸리는 모습에 대중들은 사랑으로 화답했다. 존은 지하철을 타고, 사회봉사 활동을 하거나, 친구와 풋볼 게임을 하고, 사촌매형인 아놀드 슈와제네거와 편하게 어울려 지냈다. 그러나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존은 언론의 배우자 취재 자제를 요청했다.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타블로이드 구독자들은 여러 소식을 읽으면서 불쾌감을 갖게 되었다.
존은 아이를 낳길 원했고, 미국은 캐네디 가문의 새로운 세대 출현을 열망했으나, 캐롤린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캐롤린이 사진사들이 벌떼처럼 몰리는 가운데 유모차를 밀고 다니고 싶지 않다고 말 한 것으로 친구들은 전한다. 캐롤린은 손윗시누인 캐롤린과도 사이가 멀어졌으며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 남편 친구들은 어떻게든 떼어낸 것으로 알려진다. 한 때 존이 손가락 신경을 다쳤을 때, 친구들은 풋볼 사고라고 믿지 않는 눈치였다. 또 존은, 때때로 집을 두고 5번가의 스탠호프 호텔에 투숙하기도 했다.
오래지 않아, 타블로이드지는 울음을 터트리는 캐롤린의 사진을 찾아 헤메게 된다. "세상 모든 여자들이 차지하고 싶은 남자와 결혼한 사람이죠," 하고 뉴욕 가십전문 기자 폴라 플로리히는 말한다. "여자들은 다들 캐롤린을 질투했어요. 그정도 파헤쳐지는 인생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알지 못했을 거에요. 다이애나 비와 비슷한 처지지만, 적어도 다이애나 비는 "포즈"가 되는 사람이었지요." 캐롤린은 다이애너비의 사고사 소식에 두려움을 느꼈다고 친구들은 말한다. 하지만 다이애나 비가 죽음으로 신경증이나 남을 조종하려는 행동 등을 용서받은 반면, 캐롤린의 악녀화는 사망후 더 거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