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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황혼처럼 (감사 감성일기)
-어지러운 시대의 강을 지혜롭게 건너려는 한 개인의 미시적(微視的) 역사-
-들머리-
남을 의식하지 않는 내 글을 쓰고 싶었다. 글을 쓰다 보면 자꾸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기분이다. 이론과 실제가 엇갈리는 느낌이 든다. 형상화와 의미화를 강조하는 글도 좋다. 쉬운 사실을 자꾸 어렵게 만드는 것이 정말 좋은 글일까?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생생한 민낯의 글을 쓰고 싶다. 역사로 보면 선비들의 고고한 삶이 세상을 지배한다. 풀뿌리 서민의 흙냄새 풍기는 일상의 글은 드물다. 일기 형식으로 개인의 역사를 풀어가기로 한다.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나만의 역사를……. 삶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기록으로 간직해야겠다. 가능하면 저녁보다 새벽에 어제의 삶을 간략하게 쓰기로 했다. 타성에 빠진 내 영혼이 잠시나마 긴장과 겸손한 마음을 얻기 위해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에 따르면 ‘인간은 자고 일어났을 때가 자기 검열이 없고, 마음이 가장 순수하고 자유로운 시간’이라고 한다. 다른 선입견이 적게 들어가는 시간이다. 방법은 한두 가지 사건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쓴다. 이런 작업이 나를 즐겁게 할 것이다. 작은 행복의 순간이 아닐까. 행복은 내가 허락한 만큼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미루면 행복의 감각도 무뎌진다. 즐겁고 긍정적인 가벼운 고백이 나를 기쁘게 한다. 훗날 살면서 우울하고 답답할 때 펼쳐보면, ‘내가 그때 이렇게 살아왔구나’ 하는 추억의 삶을 되새길 수 있는 따뜻한 에너지를 주는 역사 곳간이 되면 좋겠다.
고대 중국 <격양가(擊壤歌)>에 “일출이작(日出而作) 일몰이식(日沒而息)”이란 말이 있다.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쉰다.’라는 단순하고 평범한 일상을 얘기한다. 대단한 일을 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다.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사는 하루가 평안하다면 그것 자체가 행복한 생활이 된다. 글도 삶도 하나로 통한다. 자연스럽게 쉽게 인생을 표현한 글이 좋은 글이 아닐까? 특별한 일이 없는, 어제와 같은 소시민의 자잘한 일상을 풀어놓은 글을 남기고 싶다. 비교하지 않고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 내 삶의 기록이 역사의 작은 조약돌로 남기를 소망할 뿐이다.
달의 이름은 미국 원주민(인디언)들이 달력을 만들 때, 풍경의 변화나 마음의 움직임을 주제로 정한 것을 빌려왔다. 그들은 이름을 숫자로 부르지 않고 문장으로 표현했기에 의미가 있고, 철학이 묻어나는 삶의 교훈을 준다.
1부.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
2부. 큰 잎사귀의 달
3부. 기다리는 달
4부. 나뭇잎이 짙어지는 달
5부. 열매가 빛을 저장하는 달
6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달
7부. 검지 손가락 달(月), 춤추는 달
8부.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는 달
9부. 모두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 달
10부. 무소유의 달
11부.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
12부. 햇빛에 서리 반짝이는 달
13부. 한결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달
14부.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
15부. 뽕나무에 오디 따 먹는 달
1부.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
1) 손자들이 주는 삶의 활력 2025.4.24.(목)
저녁에 손자들이 왔다. 월, 목, 토 사흘을 우리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간다. 고맙게 잘 크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다. 세 살인 둘째는 어린이집에 갔다가 먼저 왔었고, 여섯 살인 큰놈은 라온 스포츠센터 수업하고 왔다. 둘이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모습이 귀엽고 아름답다. 저물어 가는 내 삶에서 진정한 활력소를 주는 일이다. 올 때마다 건넛방에서 오목을 둔다. 지난번에 처음 가르쳤는데 눈썰미가 상당하다. 하지만 아이라 집중력이 오래 가지 못한다. 좀 지겨우면 다시 알까기로 재미를 붙인다.
올봄부터 손자를 일주일에 세 번이나 돌보는 행복을 누린다. 저녁을 먹고 두 놈이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이게 웬 모습인가? 아랫도리를 다 내놓고 거실에서 뛰어다닌다고 정신이 없다. 한참 보고 있으니 웃음도 나고, 한편으론 흐뭇하다. 요놈들이 자기 집보다 더 편한 느낌인 모양이다. 오늘도 이 작은 모든 것에 감사드린다.
2) 아내의 소중함과 삶의 유한성 2025.4.25.(금)
봄이 없이 바로 여름이다. 지금 입고 있는 바지는 계절에 맞지 않는 좀 두꺼운 바지이다. 철에 맞게 입으라고 아내가 여름 바지를 하나 내놓았다. 몇 년 전에 지인에게서 얻은 것이다. 다림질하지 않아 많이 구겨진 상태이다. 좀 다려 달라고 하니, 그냥 이불 밑에 넣어서 펴라고 한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마음이 불편했다. 에이, 그럼 내가 다려볼까? 마침, 다리미도 옆에 있었다. 근시라 안경을 벗고 다림질하기로 했다.
사실 내가 직장생활 할 때도 정장을 잘 하지 않고 다녔기에 집사람이 다림질한 기회가 거의 없었다. 물론 나도 다림질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다리미도 아주 옛날 것이다. 요즘 이런 다리미가 있는 집이 없을 것이다. 110v용이라 강압기를 사용한다. 바지를 펴고 막상 다림질하려니 아내가 슬며시 다가온다……. 분무기와 얇은 손수건을 가지고. 사실 캐주얼 바지는 집에서 다림질이 어렵다. 면이 아니기에 자칫 잘못하면 옷이 상할 수가 있다. 아니 그럼, 진작 자기가 다려주면 될 것을. 천천히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다림질을 지켜봤다. 몇 분 뒤에 주름이 펴진 깔끔한 바지가 되었다.
문득 ‘아내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모든 것이 뒤죽박죽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두렵고 슬프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우선 잠을 잘 자지 못해 불면증에 시달릴 것이고, 모든 일에 의욕이 없어질 것이다. 무엇 하나 평상심을 찾기 어렵지 싶다. 문득, 몇 년 전 용두골 배드민턴장에서 한 회원의 얘기가 생각난다. 70대 후반 나이에 갑자기 아내가 죽은 후 몇 달 동안 거의 매일 술로 지새웠다고 한다. 처음에는 자기도 죽고 싶었지만, 세월이 흐르니 차츰 평상심이 돌아왔단다. ‘메멘토모리’(죽음을 잊지 마라. 지금을 즐겨라)……. 이런 생각하는 것 자체가 슬프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는 어느 수필가의 말을 곱씹으면서 마음을 다스릴 수밖에. 새삼 아내의 고마움을 느낀다. 변변찮고 까다로운 나 같은 사람과 그럭저럭 잘 살아가지 않는가.
3) 버킷 리스트보다 추억 리스트 2025.4.26.(토)
소설가 백영옥의 칼럼을 읽다가 무릎을 ‘탁’ 쳤다. 살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버킷 리스트’ 목록이 아니라 ‘추억 리스트’라는 이야기다. 영화 속의 두 주인공은 시한부 남은 삶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번지 점프나 패러글라이딩도 원했고, 피라미드나 타지마할 같은 가고 싶은 곳 여행 목록도 나온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진정 우리 생의 마지막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무슨 생각이 날까? 하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곳의 욕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절실한 것은 지난 세월의 아름다운 삶을 기억해 꿈꾸는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 뛰놀았던 미로 같은 골목길, 친구 집 뒷마당에 소복이 떨어진 감꽃을 주워 목걸이 만들던 추억, 아내와 처음 만난 커피숍, 어린 아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에 갔던 일 등 소소한 순간이 그리울 것이다. ‘추억 리스트’인 것이다.
삶의 끝에 서면 그리운 것은 미래의 세계가 아니다. 살아 본 아름다운 삶, 한 번 더 걸어보고 싶은 추억의 삶이다. 그 시절을 되새기면서 천천히 순간에서 영원으로 가는 문을 두드릴 것이다. 살아가면서 여기와 지금이 가장 소중하다. 마음을 비우라는 말이다. 사람은 생각하고 추억하는 동물이다. 지금 이곳 삶에서 바탕이 되는 뿌리는 지난날의 아름다운 시간이 아닐까?
낮에는 J교장 따님 결혼식에 갔다. 모처럼 옛 직장 식구들을 만났다. 퇴직한 지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다. 젊은 피들을 보니 아름답다. 언제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가? 얼마 전에 출간한 산문집 두 권을 준비해 갔다. 애독자인 두 선생에게 주려고 했지만, 전달 타임이 맞지 않아 그냥 넘어갔다. 친근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 사람들에게만 주려니 좀 그랬다. L 선생에게는 꼭 주려고 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먼저 가고 없었다. 인연이 안 되네.
나는 백내장 수술 후 눈이 많이 부셔서 선글라스를 자주 쓴다. 하지만 실내에서는 보통 안경으로 바꾼다. 자주 바꾸어 쓰려니 좀 불편하다. 오늘도 안경을 고쳐 쓰고, 다시 안경집에 넣으려니 한쪽 테가 접히지 않았다. 이리저리 힘을 주었지만, 자칫 무리하면 부러질 수도 있다. 조심스레 그냥 들고 J 선생님 안경점에 들고 가서 서비스를 받았다. 늘 J 사장님이 고맙다. 작은 일이지만 욕심을 부려 무리했다가 사고가 날 뻔한 일이 아닌가!
저녁은 여고 꽃놀이를 다녀온 아내와 8시 넘어 점을 찍었다. 아침으로 받은 찰밥을 조금 먹고 가져왔기에 남은 것은 내가 먹었다. 멋진 날씨에 ‘임실치즈테마파크’와 ‘옥정호 출렁다리’가 있는 지방으로 잘 다녀온 모양이다. 아내가 즐겁게 놀다 오니 기분이 좋다. 부부라도 서로가 밝고 즐거워야 세상이 아름답다. 오늘 하루도 그냥 그냥 여물어갔다.
4)숲이 주는 치유와 가족의 고마움 2025.4.27.(일)
경산 백천동 백자산에 조성된 ‘경산 치유의숲’을 찾았다. ‘만복이 주꾸미’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산책코스로 택한 곳이다. 이곳은 얼마 전에 처형이 한번 와보고 마음이 참 가라앉고 좋았다고 추천했다. 백자산은 높이가 480m 조금 넘는 산이다. 삼성현초등학교 부근 삼보사라는 사찰을 지나가면 이내 도착한다.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도심 속 산림 휴양공간이다. 숲이 가진 다양한 기능을 통해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곳이다. 4월 말, 연둣빛 새잎으로 단장한 숲의 얼굴과 은은하게 들리는 숨소리가 눈과 귀를 한층 맑게 한다. 정상으로 가는 길을 비롯해 임도 사이사이에 아기자기하게 오솔길을 만들어 놓았다. 놀이공원처럼 나무 데크 사다리로 연결된 길이 보기만 해도 사랑스럽다. 시간이 허락하면 여기저기 다 가고 싶었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 몇 군데만 돌아보았다. 정상까지도 약 1.2km 거리다. 벌써 기온이 높아 한낮에는 걷기가 힘들다.
조금 올라가니 깔끔하게 단장한 팔각 정자를 만난다.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관리가 잘 되었기에 마룻바닥이 어제 만든 것처럼 윤이 난다. 녹음이 주는 시원함도 좋지만 쉴 새 없이 노래하는 새소리가 가슴에 파고든다. 정자에 큰대자로 누워보았다. 시간이 넉넉하면 1시간 정도 낮잠을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음에 올 때는 하모니카를 준비해서 숲과 함께 멋진 공연도 하고 싶다. 좋아하는 ‘바람’이라는 곡과, ‘석양’을 느긋하게 연주하며 취하고 싶다. 조금 아쉬운 점은 비가 오지 않아 계곡물이 너무 여물어 안타깝다. 보슬비가 소리 없이 춤추는 날, 우산을 쓰고 어슬렁어슬렁 산책하면 세상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시지로 이사 와서 숲이 그리워 파동의 용두골 생각이 늘 간절했다. 역시 산에 들어오니 마음이 둥글고 아름다워진다. 이따금 마음이 흐릴 때 찾고 싶은 곳이다.
오후에는 범물동 어머님을 찾았다. 처형에게 얻은 첫물 부추와 참죽나물을 아내와 같이 다듬어 나누었다. 집에 와서 부추전을 해 먹으니 보들보들하고 참 맛이 좋다. 후딱후딱 요리를 잘해주는 아내가 늘 고맙다. 아내가 요리 솜씨는 있는데 바로바로 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자주 티격태격한다. 그래도 고마울 따름이다.
5) 가족과 함께 사는 소소한 행복 2025.4.28.(월)
오늘 아침 아내 얼굴이 많이 부어있다. 보톡스를 맞은 것 같다. 지난 금요일 치과에 다녀온 후 계속 아프다고 했다. 토요일에는 임실도 다녀왔고, 어제는 ‘경산 치유의 숲’도 다녀왔다. 오전 오후 두 번이나 치과에 갔다. 써클 후배인 치과 닥터가 월요일 오전에는 진료하지 않았다. 사실 예약을 하고 가야 하지만 너무 아파서 전화로 묻지 않고 갔기 때문이다. 아내는 죽집에 가서 흑임죽과 호박죽을 사 왔다. 가까운 매호시장에 좋은 죽집이 있어서 다행이다. 부은 곳에 마취하고, 치료를 새로 해서 컨디션이 좋아진 모양이다. 내일도 오전에 예약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교통이나 의료시설, 먹거리가 좋은 도심에 살아야 하는 모양이다. 파동보다는 모든 인프라가 잘 되어 있어 살아가기 참 편리하다. 지역의 고마움을 느낀다.
저녁에 아들 식구가 오는 날이다. 탁구장에 갔다가 오후 5시 30분쯤 집에 왔다. 둘째 손자는 아빠와 벌써 와 있다. 요놈이 TV를 보며 쌩긋 웃는다. 언제 봐도 예쁘고 귀여울 때다. 조금 있으니, 체육관에 갔던 첫째가 아내와 함께 들어온다. 언제나 활발하다. 늘 에너지가 남아돈다. 성격은 내성적이지만 운동하고 뛰어노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반면에 둘째는 성격이 다르다. 혼자서 가만히 잘 논다. 사람을 귀찮게 하지 않는다. 형제인데도 이렇게 성격이 다르다. 머지않아 세 돌이 다가오지만 아직도 처음에는 낯을 많이 가린다. 적응 시간이 늘 오래간다.
며느리가 좀 일찍 퇴근했다. 아들은 육아휴직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며느리는 오전에는 학교 보조교사로, 오후에는 학원 수업하느라 바쁘다.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가 늘 좋다. 사실 아내와 나는 많이 절약하며 산다. 아들 내외도 우리처럼 알뜰히 살아가기에 마음이 흡족하다. 물론 잘 안 맞는 부분도 더러 있지만, 기본으로 살아가는 타입이 비슷하기에 만족한다. 우리가 좀 아껴 쓰고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밀어주려고 한다. 한참 놀다가 두 놈이 화장실에서 큰 것까지 다 해결하고 그제야 간다. 하는 짓이 늘 귀엽다.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 크게 여유 부리지는 못하지만 소소하게 부대끼며 사는 삶, 오늘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감사하며 고개 숙인다.
6) 늙음과 절제, 그리고 탁구 2025.4.29.(화)
요즘은 한 달에 몇 번 K 복지관에서 점심을 먹는다. 특히 아내가 치과에 치료하러 다녀 딱딱한 음식은 잘 먹지 못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따뜻한 밥과 국, 찬 두세 가지가 나온다. 노인의 건강을 생각해 밥을 짓고 식단을 짜기에 만족한다. 근데 오늘은 조금 부실하다. 아내를 생각하니 그래도 좋다. 나이 들수록 여자들은 부엌일을 힘들어한다. 남이 해 주는 밥을 먹고 싶어 한다. 형편상 비싼 음식점에서 자주 외식하기는 어렵다. 늙는 것은 슬프다. 누구는 익어간다고 말하지만, 말장난이 아닌가. 시간 앞에 장수는 없다. 지극히 정상이다. 모든 기능이 약해지니까 어쩔 수 없다. 이따금 갑질은 아니지만 습관적인 아내의 주문이 안타깝다. 스스로 하면 될 것을 자주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습관이 싫다. 그래도 늘 가족을 위해 애를 쓰는 일이 고맙다. 어쩔 도리가 없다. 내가 맞춰가며 살아야지. 내 수양 부족이라 생각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고…….
최근에는 모든 것이 힘이 든다. 건강을 잘 챙긴다고 자부하지만, 세월 앞에는 어쩔 수가 없다. 몇 년 전부터 척추협착증으로 다리가 아프더니 이젠 허리까지 증상이 와 자꾸 쑤신다. ** 탁구클럽에서는 활력이 넘치는 날쌘돌이로 활동하지만, 연식은 어쩔 수 없다. 살면서 항상 조심하고 매사에 전체 에너지 70%만 쓰려고 하지만, 조절이 잘 안된다. 절제심이 부족하다. 과유불급과 겸손한 마음이 모자란다. 귀가하면서 자주 반성해도 어렵다. 그래도 편안하게 즐긴다는 마음으로 운동하려고 한다. 경기마다 승부에는 마음을 비운다. 내 실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지도를 많이 받지 않았기에, 기술적인 드라이브 공엔 무척 약하다. 머리와 작은 기술로 버텨낸다.
보통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장점인 성실성이 내 무기이다. 구장에 오면 반드시 서브 연습을 한 바구니 한다. 내 루틴이다. 혼자 오랜 연습과 끈기로 노력하기에 실력이 많이 늘었다. 관장도 요즘 내가 제일 많이 늘었다고 칭찬한다. 기분이 좋다. 같이 경기하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발전했다고 생각된다. 그들이 고맙다. 혼자 가는 길보다 함께 같이 가는 길이 언제나 행운의 길이다. 오늘도 감사하고 내일도 감사하는 날만 되길 소망한다.
7) 교도소 한글 수업과 삶의 의미 2025.4.30.(수)
오늘은 하빈 큰집 한글 강습날이다. 퇴직 후 내 긴장의 끈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이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부지런히 준비해 문양역까지 가면 8시가 된다. 8시 15분. 큰집 통근 버스를 타려니 기사가 제지한다. 혹시, 직원이 맞느냐고? 살짝 옆에 가서 교육 강사라고 하니 이해를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승차를 하니 간혹 이런 일이 있다. 처음에는 기분이 상했으나, 기사 입장을 돌아보니 괜찮다. 직원이 아닌 사람을 태우면 주의받는 모양이다. 화원에서 하빈 새 청사로 옮기고 나서 출입 보안이 훨씬 엄격해졌다. 쇠 철문 대여섯 곳을 담당 직원의 보안카드로 인식해야 강의실에 도착한다.
오전 9시. 수업 시작이다. 또 황당한 일을 당했다. 예전에는 수강생이 많아 출석부와 자리에 이름표가 있었다. 이번 기수는 몇몇 되지 않아 아예 그것이 없다. 앞줄에서 제일 열심히 공부하는 수강자의 이름을 내가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옷에는 수인 번호만 있기에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처음 기억이 잘못된 모양이다. 몇 달 동안 M을 K로 알았다. 참 우스운 일이다. 나이가 들어 치밀성이 부족해서일까? 좀 부끄러웠다. 그에게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왜 그냥 대답하고 지냈느냐고 물었더니, 공부와 아무 관계가 없어서 그냥 그랬다고 답한다. 이름보다 수인번호가 돋보이는 곳이다. 정감이 가는 이름보다 기계적인 숫자가 지배하는 세상이라 씁쓸하다. 큰집 안의 풍경은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간다.
강의를 마치고 서문시장에서 C와 ‘선아 칼국수’에서 점을 찍고, 서문교회 카페 ‘블레싱’에서 커피를 마셨다. 초등동기인 그와 미팅 날은 언제나 마음이 푸근하다. 세상을 보는 눈이나 생각하는 결이 같기에 한참 이야기를 해도 정신이 맑다. 이런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게 행운이다. 귀갓길에 봉덕시장 J님 꽃집에 들렀다. 준비해 간 산문집을 전해주고 살아가는 얘기로 꽃을 피웠다. **대 11기 동기중 A와 M님, J님과는 계속 만난다. 나중에 알았지만, 대학 동기 영어과의 J**의 친동생이라 더 친분이 갔다. 그녀는 재작년 하늘이 무너지는 슬픈 일을 당해 오래 힘들어했다. 결국 사랑하는 가족을 하늘의 별로 보냈다. 밝은 성격에 성실하고 원만하게 살아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사람의 운명은 알 수가 없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인가? 답이 없다. 우문(愚問)일 뿐이다. 지금처럼 그냥 그냥 사는 게 최선이 아닐까? 우린 우주 안에서 아주 작은 모래알이나, 작은 벌레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착하게 살아야지만 그것도 정답이 아니고, 그렇다고 다르게도 살 수 없다. 이런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종교를 권하지만 잘 모르겠다. 어제나 오늘처럼 건강하게 이어지길 소망할 뿐이다. 차창 밖은 벌써 열기가 대단하다. 월드컵 도로엔 연둣빛 녹음이 성급한 여름을 부르고 있다.
2부. 큰 잎사귀의 달
1) 친구와 여행, 현재를 즐기는 행복 2025.5.1.(목)
초등 동기 E, H와 함께 수성못 ‘쿠우쿠우’ 초밥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일인당 30,900원. 쪼잔한 경제관으로 바라보니, 값이 과하다. 차를 가지고 가기가 힘들어 버스를 탔다. 수성 6번을 타고 ‘범물행정센터’에 내려 401번으로 갈아탔다. 가는 동안 억수로 빗줄기가 퍼붓는다. 장난이 아니다. 버스 앞 유리창에 성에가 잔뜩 끼어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앞에 가서 성에를 닦아주고 싶었지만 망설이다가 지나갔다. 올해 제일 많은 비가 내린다. 사흘만 일찍 내렸어도 함지산 산불이 쉽게 진정되었을텐데……. 세상일 정말 ‘머피의 법칙’으로 돌아간다.
비가 오는 날인데도 식당 안은 사람들로 넘친다. 평소에 이런 곳은 잘 가지 않기에 어색하다. 결혼식 뷔페와 비슷하다. 비싼 가성비가 내 체질에는 맞지 않는다. 대구에 여유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인 빈익빈 부익부를 절감한다. 본전 생각에 부지런히 먹었다. 집에 가면 후회할 것이 뻔하지만 참을 수가 없다. H가 내 산문집을 잘 받았다는 고마움으로 산 것이다. 감사하지만 한편으론 미안하다. 세 사람은 태국 푸켓과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등지로 해외여행도 함께 했다. 동기 중 제일 마음이 통하고 친하게 지낸다.
수성호텔 별관에 있는 NOC 커피점에서 카페라떼를 마셨다. 오랜만에 오니 수성호텔 부근의 음식점도 많이 바뀌었다. 오늘 저녁은 비가 와서 그런지 아늑하고 조용하다. 차 한잔을 손에 들고 느긋이 야경을 즐기며 맛을 음미한다. 세상이 아름답고 좋다.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누리고 감상한다. 행복하다. 멀리 인공폭포의 불빛도 환상적이다. 건너편 황금네거리의 고층 아파트의 야경이 맨해탄에 온 듯 화려하다. 근데 뭔가 허전하다. 나이 탓인가?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평상심이 잘 유지되어야 할 텐데…….
만난 김에 여행을 가기로 했다. 1박 2일을 고집하는 E를 달래 당일로 바닷바람을 쐬기로 했다. 의논 끝에 5월 29일 동해 방향으로 잠정 약속했다. 월드컵 3 주차장에서 아침 8시에 미팅을 잡았다. 저녁 9시가 훌쩍 지났다. 버스를 타고 가려는 내게 굳이 승용차로 데려다주려고 한다. 바래다준다고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친구의 제네시스 7**7호를 타고 신매역 집 근처까지 왔다. 두 친구의 배려가 고맙다. 버스를 타도 괜찮은데……. 이것저것 먹었더니 속이 거북하다. 평소 소식하는 내가 본전 생각에 약간 많이 먹었던가? 고마운 날 잘 먹어서 또 후회하는 날이다.
2) 몸의 경고와 느리게 사는 삶 2025.5.3.(토)
비가 내린다. 느슨해진 몸과 정신을 일깨우려 새벽 운동 중이다. 지난 1월부터 새벽 6시쯤 일어나 거실에서 맨손체조와 아령 운동으로 하루를 연다. 처음엔 예전 헬스장에서 배운 스트레칭을 열심히 하였으나, 척추협착증에는 맞지 않는 자세가 있어서 체조로 바꾸었다. 허리 운동을 잘못하면 역효과가 난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랐다. 곰곰 생각하니 나이가 들어 조심하라는 내부의 경고이다. 사실 예전에는 다른 무엇보다 걷는 것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근데 언제부터인지 좀 오래 걸으면 다리가 아팠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참고 지냈다. 갈수록 증세가 심했다. X-RAY 사진을 찍으니 척추협착증 진단이 나왔다. 어쩔 수 없다. 무리하지 않고 맞추어 살아가라는 몸의 신호이다. 느리게 천천히 살아가라는 경고……. 시작은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B 씨의 칼럼 ’말과 글’ 녹음파일을 켜 놓고 거실 밖을 보면서 체조한다. 매 세트가 끝나면, 근력 운동 겸 척추 운동으로 간의 철봉에 매달린다. 작은아들이 운동한다고 건넌방 문틀에 설치한 철봉을 그보다 내가 유용하게 사용한다.
춘분이 한참 지난 요즘은 해가 일찍 떠서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멋지다. 불그스름한 아침놀이 황홀하게 하늘에 물들 때도 있고, 밤비 온 다음날에는 건너편 유건산의 푸른 숲과 에메랄드빛 하늘이 가슴속에 풍덩 들어와 마음이 파랗게 변한다. 오늘은 비가 내려 하늘이 잿빛이다. 그래도 좋다. 날마다 짙어가는 녹음의 축제다. 보슬비가 건너편 가로수 새잎에 간질이는 모습, 이 또한 얼마나 사랑스럽지 않나? 눈을 감고 거실 벽에 걸린 서각(書刻)한 글을 조용히 음미한다. 파동에 살 때 지인이 서각한 글로 다른 곳에 떠돌다가 우연히 나와 인연이 닿았다. 울릉도 향나무에 서각한 작품으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물건 중의 하나이다. 고려시대 나옹선사의 글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3) 하모니카와 몰입의 행복 2025.5.4.(일)
날씨가 쾌청하다. 이런 날은 마음도 덩달아 맑아진다. 창밖의 풍경이 아름답다. 오전에 베란다 식탁 의자에 앉아 하모니카 연주를 했다. 여기가 내 간이 연주실이다. 이사 오기 전에는 주로 대구 신천의 벤치나 정자에서 연주했다. 고층이라 소리도 크게 새 나가지 않고, 거실 문만 닫으면 멋진 연주를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얼마 전에 하모니카 8개 중 5개를 새것으로 교체했다. 한 10여 년 열심히 불었더니 관리를 잘해도 소리가 새고 다른 음이 나온다.
국산과 일제 중국제 등 몇 종류의 하모니카를 두루 사용해 봤다. 그중 일제인 ‘프리미엄 톰보’ 하모니카가 성능이 좋다. 같은 ‘톰보’라도 중국 제품은 값이 적당하나 부품이 조금 다르고 소리가 맑지 않다. 일제 ‘톰보’는(3521) 바탕 보디가 다 금색이고, 중국제는(3121) 다 은색으로 크기는 같으나 성능이 다르다. 둘 다 사용해 봤기에 값을 배로 주더라도 일제 ‘톰보’가 더 좋다. 둘째 아들에게 부탁하여 인터넷에서 직구로 하나씩 샀다. 한꺼번에 구입하면 관세를 물어야 하기에 시간이 좀 오래 걸리더라도 여유를 두고 샀다. 스마트폰에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MR을 켜고, 블루투스로 연결된 스피커를 사용한다. MI 스피커는 크기는 작아도 음량이 대단하다. 대학 친구 K에게서 선물로 받아 유용하게 쓴다. 늘 고마운 마음이 든다.
건너편 유건산의 초록숲과 코발트빛 하늘을 바라보며 음률에 빠진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시작으로 ‘바람’ ‘봄날은 간다’ ‘장미빛 스카프’ ‘비 내리는 고모령’ ‘숨어우는 바람소리’ ‘석양’……. 어느덧 한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간다. 이 순간만은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자아도취 상태이다. 하모니카도 G#, C, Am, G, F#m, A 등 곡마다 음정이 다르기에 바꾸어가며 불어야 MR과 맞아들어간다. 그중 특히 2002년도 SBS 아침드라마 ‘외출’의 OST인 ‘바람’이란 곡과, 김인배의 연주곡 ‘석양’을 연주할 때면 내가 미지의 세계로 빠지는 신비한 느낌을 받는다. 음악에 대해 잘 모르지만, 곡마다 주는 고유의 분위기가 있다. 작곡한 사람의 심정을 얼마나 이해하고 해석하며 연주하는가가 중요하다. 퇴직 후 가장 잘한 일이 하모니카를 배운 것과 탁구를 시작한 일이다. 강산이 한번 바뀐 세월이 꿈결같다. 오늘도 작고 소소한 행복을 누린 오전 시간. 지극히 자잘한 개인의 역사를 남긴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봄날은 간다.”
4) 증조할머니와 증손자의 만남 2025.5.5.(월)
오늘은 어린이날이자 석가탄신일이다. 몇 달 전부터 마음먹은 일을 하기로 했다. 범물동 어머님 집에 손자들을 데리고 문안 가는 일이다. 첫째 손자 **는 몇 번 데리고 갔으나, 둘째 **이는 한번 밖에 증조할머니를 뵌 적이 없다. 몇 번 기회가 있었으나 여건이 되지 않아 뵙지 못했다. 둘째도 얼마 있으면 세 돌이 아닌가. 당신도 평소에 별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이따금 손주 얘기를 해 드렸기에 증손주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어버이날도 다가오고 겸사겸사 오늘 일정을 잡았다. 94세인 어머님은 휠체어 도움으로 사신다. 혼자 움직임이 불편해 찾아가지 않으면 뵐 수가 없다.
아들 내외와 손자 둘, 우리 부부가 방에 들어서니 좁은 방이 그득하다. 언제 이렇게 많은 식구가 한방에 모인 적이 있었을까? 생각지도 않은 증손자의 방문으로 당신 얼굴에 환한 꽃이 핀다. 진작 찾아뵐 것을 하는 죄송함이 가득하다. 정성껏 준비해 간 쑥떡, 카스테라, 김밥으로 며칠 전에 담근 열무김치와 함께 점심을 차렸다. 일곱 식구의 풍성한 오찬이다. 손주 두 놈은 낯을 많이 가린다. 낯선 곳 잘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에 내성적인 손주들은 자꾸 엄마 품을 파고든다. 시간이 지나 적응이 되면 평상으로 돌아온다. 좀 일찍 이따금 손주와 함께 찾아뵙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고, 실천이 어려웠다. 돌아보니 내가 참 바보처럼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간다. 준비해 간 용돈을 드리고 건강하시기만 빌었다.
독실한 불자인 당신은 삼성암뿐만 아니라, 간병사가 가는 파동의 법왕사에도 기원 연등을 다셨다고 한다. 우리도 얼마 전 청도 운문사에 가서 소원 연등을 달았다. 평소에도 늘 식구들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새벽마다 일어나시면 한 시간 금강경을 독송하시면서 기도한다. 내가 불자는 아니지만, 우리 가족이 이렇게 작은 행복을 누리고 별 탈 없이 살아가는 것도 어머님 기도 덕분이리라. 한편, 너무 종교에 깊이 빠진 듯해 불만도 많지만, 당신의 뜻이고 하는 일이기에 어쩔 도리가 없다. 노령 연금과 조금씩 드리는 용돈으로 어렵게 생활하지만, 사찰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여하는 모습이 늘 불만족스럽다. 그게 당신이 살아가는 최대의 행복이자 삶 자체이다. 돈 없이는 종교 생활도 하지 못하는 시대가 아닌가. 손자들도 시간이 지나니 이방 저방 뛰어다니며 재롱을 부린다.
침대에 누워 생활하시는 당신은 평생 깔끔한 성격으로 살았다. 나이가 들어도 깨끗하게 정리 정돈을 하고 사신다. 한 달 전에 갑자기 전등이 고장 나 깜깜해졌다고 한다. 관리실 영선기사가 와서 보더니,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전등이라 부품이 없단다. 새로운 LED 전구로 교체했다. 그때 공사 중에 천장 도배지가 많이 훼손되었다. 누워 있는 당신 눈에 거슬렸다. 마침, 예전에 천장 도배를 하다가 남은 도배지가 조금 있었다. 아들과 함께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내가 더 흐뭇하다. 깔끔한 천성은 평생을 가나보다.
귀가 시간이다. 모처럼 의미 있는 날을 보내니 마음이 평안하고 즐거웠다. 이따금 뵈러 와야 하겠지만 현실은 어렵다. 다음에 또 언제 올지 알 수가 없다. 손주들의 작별 인사를 받고 문에 기대어 손을 흔들어 주시는 당신의 모습, 희미하게 웃음을 띠고 불편한 몸으로 배웅하던 얼굴이 귀가하는 내내 머릿속에 사라지지 않는다. 내년 어버이날에도 손주들과 꼭 찾아뵈야지 하는 마음만 가득하다. 오늘 이것저것 세세하게 신경 써 준비해 준 아내가 고맙다. 겉으로는 아내와 티격태격했지만, 고운 마음은 피부로 느낀다. 어머님 늘 건강하시고 편하게 지내세요. 늘 죄송한 마음뿐인 맏이의 넋두리이다.
5) 문학적 인연과 글쓰기 2025.5.6.(화)
L 선생님이 보내준 수필집 ‘잡초는 뽑히지 않는다’ 마지막 장을 넘겼다. 눈을 감고 많은 생각에 잠겼다. 선생님의 33번째 저서가 아닌가. 33권이라니! 열정과 노력에 경탄의 마음을 넘어 두려움마저 느낀다. 나는 그동안 노안과 백내장 수술 후유증으로 책 읽기가 힘들었다. 아니, 눈부심이 심하다는 핑계와 게으름이 야합한 결과다. L 선생님과의 인연은 18년 전이다. 지천명 후반에 지인의 소개로 수필 공부 단체에서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몇 년 뒤 ‘문학 사랑방’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였다. 회원들 토론도 했지만, 거의 선생님이 준비하고 강의를 주재했다. 참석만 열심히 해도 뿌듯한 만남이었다. ‘228기념 중앙공원’ 맞은편 ‘노보텔’ 호텔 뒤에 있는 카페 ‘슈만’의 지하에서 주로 만났다. 이곳은 커피를 주문하면 맛난 빵도 곁들어 먹을 수 있는 멋진 곳이라 늘 사람들이 붐빈다. 세계 문학에서 고대 신화, 서양미술사 등등 여러 장르를 공부했다. 살아가면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고 인연이었다. ‘그림사랑회’라는 모임에서 서너 번 간 서울 ‘예술의 전당’ 미술전시회 관람도 좋은 추억으로 간직된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면 일상의 한 자락을 소재로 나름대로 글을 쓰자. 남을 의식하지 말고,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자. 남이 아닌 나를 독자로 삼고 쓰자. 선생님의 최근 글 쓰는 방법이다. ‘잡초는 뽑히지 않는다.’를 읽으면 전통적인 수필 관습에서 벗어나 소설 형식을 빌려 쓴 수필도 몇 편 있었다. 그중 내 눈에 확 들어온 작품이 ‘두 스승’이란 글이다. 이 글은 평생 서예를 하신 사모님 이야기다. 젊은 시절 나도 한창 서예 공부에 빠진 적이 있기에 남다른 관심이 갔다. 서예계의 속성을 많이 알고 있어서, 더 또렷하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작품에서 스승의 이름은 다르게 표현하였지만 내가 조금 아는 분들이었다. 그분들 이야기에서 아는 부분도 있었고 잘 모르는 일화도 있었다. 출발은 전통 서예로 했지만, 민화와 서각까지 접목한 사모님의 열정과 창의성이 많이 돋보인다. 역시 부부는 닮는가 보다. 남과 다른 나만의 예술세계를 구현한 점이 선생님과 똑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미술계의 비리, 특히 서예계 일화는 많이 알고 나도 겪은 일이다. 상이란 항상 양면의 얼굴을 가진다. 지금 돌아보면 정말 보잘것없는 일이지만, 배울 당시에는 대단한 것으로 생각했다. 공모전에 응모해서 상을 받으면 즐겁고, 낙선하면 마음이 좋지 않은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공정성이 부족하면 더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한때 열정이 있었기에 줄기차게 매달렸다. 그런 열정이 오늘의 내가 있게 된 자양분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다. 힘들었지만 풍성한 오늘을 사는 힘을 준다. 그래 오늘이 중요하다. 벽암록에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은 다가올 오늘이다.’란 말이 가슴에 파고든다. 지금 여기를 감사함으로 누리자.
6) 예술을 보는 눈과 글쓰기의 안목 2025.5.7.(수)
계절이 거꾸로 가는가? 날씨가 차다. 새벽에 집을 나서니 몸이 으스스하다. 옷을 따뜻하게 입고 나올 걸 후회가 된다. 하빈 큰집 강의 가는 지하철이 오늘은 조용하다. 습관대로 눈을 감고 즐겨듣는 녹음한 칼럼을 이어폰으로 곱씹는다. 비몽사몽간 1시간 남짓 지나면 문양역에 도착한다. 짙은 구름 탓인지 흐린 하늘이 더 울상이다. 수강생이 적어서 세 파트로 나누어 과외 하듯 개별 지도한다. 수업 후 오후 2시에 아들 내외와 점심 약속을 했다. 얼마 전에 개업한 ‘거북이 동네’라는 동네 식당이다. 연휴가 지났고 좀 늦은 시간이라 나이 든 손님들만 드문드문 있고 조용하다. 개인적으로 이런 식당은 좋아하지 않는다. 고기를 직접 굽기도 불편하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타버리는 것이 싫다. 나는 요리가 다 되어 나오는 단품 식단을 선호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이런 곳을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아들과 며느리가 사이좋게 속닥거리며 맛있게 먹는 모습이 흐뭇하다. 나는 언제 저런 날이 있었던가?
저녁에 모처럼 고산 다락방 아카데미 강의에 참석했다. 올해는 게으름과 여건이 맞지 않아 첫 참석이다. 지난달에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교체도 있었다. 한 달 동안 16층 계단을 하루에 서너 번씩 왕복하니 저녁 시간은 집에 머물렀다. 오늘은 작년에 서양미술사를 강의한 아르케 대표 서희주 박사의 시간이다. ‘2025년 주목할 전시 프리뷰와 리뷰’란 주제다. 입구에서 몇 번 뵌 H 수성구 의원, **대 출신 L 님도 오랜만에 만나 인사를 나눴다. 강의 중 제일 큰 주제가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영국의 작가 ‘론 뮤익’ 작품이다. 영국의 ‘찰스 사치’라는 인물도 처음 접했다. 그는 기존 제도권에서 다루지 않았던 신진 작가나 급진적 현대 미술작가를 발굴하고 선보이는 대표적인 큐레이션이다. ‘사치 갤러리’에서 YBA(젊은영국작가)를 국제적인 무대로 끌어낸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론 뮤익’은 소규모 장난감 제조업에서 시작하여 꼭두각시 인형이나 다양한 생물 모형을 만들었다. 그가 1996년 제작한 피노키오 조각으로 예술계에 주목받기 시작했다. 1997년 죽은 아버지를 나체 조각상으로 표현한 작품 ‘죽은 아빠’가 런던 왕립미술관에서 주요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조각상인데 사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주름 하나하나부터 서양인의 팔에 많이 난 털까지 세밀하게 구현한 모습에 소름이 돋는다. ‘론 뮤익’은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있다. 비현실적인 스케일, 인체를 비정상적으로 크거나 작게 표현도 했고, ‘노인과 닭’ ‘죽은 아빠’ 등에서 보여준 해부학적인 정밀함은 극사실적인 피부 질감과 디테일로 생명감을 불어 넣었다. ‘젊은 연인’이란 작품에선 인간의 내면 상태와 복잡한 감정 상태를 생생하게 드러냈다. 이리저리 살펴보며 여러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남자와 여자의 표정을 보면 이들이 정말 좋아하는 사이일까? 뒤쪽에 보면 남자와 여자의 잡은 손의 위치가 다르다. 남자는 좋아하면서 설득하는 듯하지만, 여자는 마음이 들지 않아 피하는 느낌이 그려진다. 현대인이 가진 심리적인 거리와 친밀감 사이의 모순을 표현했다고 한다. 다양한 일화와 설명을 들으며 미술사석사이고 철학박사인 서희주 강사의 대단한 스토리텔링 입담에 즐겁다.
강의가 끝나고 오가는 질문도 재미있다. 수많은 작가의 많은 작품을 어떻게 보관하느냐부터, 좋고 가치가 있는 작품을 어떻게 구별하느냐의 질문이 많았다. 좋은 작품의 답은, 정말 많이 보고 또 보고 감각을 익히는 것이라 한다. 안목을 가지란다. 대표적인 사람이 삼성미술관 ‘리움’의 명예관장 H 이름을 얘기한다. 한때는 이분이 작품을 구입하면, 얼마 후 미국 뉴욕에서 그 작가의 작품값이 두 배로 올라가기도 했다고 한다. 내가 쓰는 글을 생각해 봤다. 글은 돈이 되지 않지만, 많이 읽고 감을 익히라는 이야기는 맥락이 같다. 남과 다른 글, 생명이 있는 글의 기준이……. 삶에서 모든 길은 하나로 연결된 모양이다. 논어의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와 결이 같다.
7) 재래시장과 어머니 생각 2025.5.8.(목)
신매 장날이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아내와 장 보러 나왔다. 저녁에 손자들이 오기로 했다. 아내가 잘하는 닭백숙을 요리하기로 했다. 아침 대용으로 먹던 사과와 간식거리도 필요했다. 천마타운 입구로 가려고 잘 안 가던 광장 뒷길을 찾았다. 앞서가는 아내를 따라 카트를 끌고 따라갔다. 오늘은 든든한 짐꾼이다. 얼마 전 노변시장 화요장터에서 산 사과가 가성비가 좋았다. 그분이 목요일 신매 장날에는 천마타운 근처에서 노전을 연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근데 찾을 수가 없다. 어디일까? 아내가 잘 아는 친구에게 전화로 위치를 물었더니, 그 상인은 몸이 좀 아파서 안 나온 모양이다.
다시 시장 안으로 카트를 끌고 졸졸 따라다녔다. ‘천마식육점’에서 하림생닭을 두 마리 샀다. 이만 원이란다. 아니, 지난번보다 그새 값이 마리당 천 원 올랐다. 물가가 너무 오른다. 아이 성적과 월급 빼고 나머지는 고삐 풀린 망아지 같다. 내가 좋아하는 삶은 감자와 고구마도 샀다. 오이, 고구마, 사과를 카트에 담으니 묵직하다. 목요시장은 활력이 넘쳐 언제나 좋다. 사람 사는 정감이 난다. 붐비는 사람들과 옷깃 스치는 즐거움도 있고, 컬컬한 목소리로 호객하는 소리도 정겹다. 타임머신을 타고 수십 년 전 추억의 시간으로 되돌려준다. 서문시장보다 규모는 작지만, 일주일에 한 번 서는 장이라 발 디딜 틈이 모자란다. 깔끔하게 차려진 백화점이나 마트도 좋지만, 역시 사람 맛은 재래시장이 최고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구경하면 살아있다는 싱싱함을 느낀다.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 구경하는 맛도 쏠쏠하기 때문이다. 옛날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도 젊은 시절 우울증을 장터에서 치료했다고 했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저녁에 손자들과 한창 놀고 있을 때다. J님의 전화가 왔다. 감기기가 있는 듯하지만, 여전히 낭랑한 목소리다. 효성타운 사는 그녀가 셔틀버스를 타고 봉덕시장에 갔다가, 시간이 남아 가까운 J선생님 꽃집에 들렀단다. 내 산문집을 K님이 오면 전해주라고 J님이 보관한 책을 자기가 받았단다. 왜 내겐 안 주느냐며 약간 섭섭한 말투다. 문인협회 기행 때 전해 주려 했는데 산불로 행사가 취소되어 못 줬다. 일찍 주려고 했지만, 만날 기회가 되지 않아 그랬다 하니 그냥 웃는다. L선생님 책도 받지 못했단다. 주소를 잘 모르고 있나? 좀 의아했다. L선생님의 성격은 잘 알고 있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다. L선생님의 모임을 위해 10년 이상 총무로 누구보다 가깝고 살뜰하게 보조한 J님이 아닌가? 선생님 성품상 알뜰하게 챙기는 타입이 아니라 빠뜨렸나보다. 너무 공부만 하고 사시는 분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지만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세상에는 참 많구나! 느껴진다.
새벽마다 앞산 등산을 가던 그녀는, 요즘은 산불로 입산 금지라, 산에 못 가서 무척 힘든다고 한다. 평일에는 집에 모시고 있는 모친 친구분들 점심 준비로 바쁘게 산다. 시어머니 치매가 걱정이란다. 심했다가 조금 좋아지기를 반복하니 힘이 든다고 한다. 새삼 내 어머님이 떠오른다. 간병사의 도움으로 사시는 어머님! 휠체어 신세는 지지만 정신만은 누구보다도 맑지 않은가!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나온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오늘 어버이날이다. 살아계신 어머님이 존경스럽다.
3부. 기다리는 달
1) 아픔을 바라보는 마음의 변화 2025.5.10.(토)
토요일 아침이다. 잿빛 구름이 유건산 위에 걸려있다. 남녘에는 비가 온다나? 어디론가 가고 싶은 날이다. 수목원에나 한번 다녀올까? 얼마 전에 버스 노선이 조정되었다. 신매역 입구에서 새로 신설된 급행 10번을 타면 달서구 수목원 부근으로 통과한다. 반야월에서 출발하여 시지, 간송미술관, 가창, 앞산 터널를 지나 유천교로 가는 노선이다. 처음 계획은 집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마음을 바꿔 나들이길인데 승용차는 가지고 가지 않더라도 점심은 근처에 가서 먹기로 했다. 지난가을 퇴직 교사들 모임 때 간 수목원 입구 칼국수집을 가기로 했다.
오전 11시 3분. 시지에서 차를 탔다. 월드컵로와 앞산터널을 지나가니, 버스지만 택시 탄 기분이었다. 승객도 달랑 5명밖에 없다. 수요 예측을 잘 못했나. 다음 버스 노선 조정 때는 이 노선이 폐지되지 싶다. 지금 있을 때 많이 누려야지. 오전 11시55분. ‘수목원 삼성래미안 Apt’ 앞에 내렸다. ‘엄마손 메밀칼국수’집에서 점심을 먹고 천천히 올라갔다. 휴일이지만 날씨가 궂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인지 사람들이 적다. 한 10여 분 걸으니 또 다리가 아프다. 척추협착증 때문이다. 어떤 날은 증세가 별로 없다가도, 요즘은 계속 다리가 불편하다. 걷는 내내 마음이 착잡하다.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온갖 병이 온다고 하지만 싫다. 오래 걸으면 통증이 오기에 기분도 우울하다. 아직 많이 걷지도 않았는데……. 잠시 쉬면서 손으로 자극을 주면 조금 나아진다.
왼쪽 나무데크로 연결된 길로 올라갔다. 흐린 날씨라 숲 그늘이 컴컴하다. 시원한 느낌은 주지만 내 마음 같아서 어둡다. 중앙분수대 부근에는 청보리가 파릇파릇하다. 다행 솟구치는 분수가 눈을 시원하게 해 준다. 길가에서 만난 규화목(硅化木)은 비 오는 날 판초를 덮어쓴 군인을 연상하게 한다. 꽃이 만개하는 철은 지났는지 밝은 꽃이 드물다. 노란 붓꽃, 자줏빛 작은꽃, 몇 군데 붉은 작약 무리가 유일하다. 한 달 전만 해도 봄꽃이 만개했으리라. 야산에 많은 아카시아꽃도 없다. 오늘은 꽃구경보다 산책에 의미를 두어야겠다.
반 시간 정도 걸어가니 종착점인 곡수거와 수목정이 나온다. 경주 포석정과 비슷한 곡수거(曲水渠)는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곳이다. 삼월 삼진날 곡수거에 물을 흘려 술잔을 띄우고, 그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 한 수를 지어 읊는 연회를 즐긴 곳이다. 수목정(樹木亭)이 있는 방지원도(方池圓島)에 들어갔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연못 형태이다. 네모난 연못인 방지는 땅을 상징하고, 그 속의 둥근 섬인 원도는 하늘을 상징하는 천원지방설(天圓地方設)에서 유래한다. 혹은 방지는 음(陰) 원도는 양(陽)을 상징해, 음과 양이 결합해 생명이 태어나는 자연의 섭리로 자손이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뜻도 있다. 돌아오는 길은 반대편 흙길을 걸었다. 건강을 위해 맨발걷기 하는 사람이 많다. 한쪽에는 황톳길도 조성되어 있어서 아이들도 같이 걷는다.
1시간 반 산책을 했다. 척추협착증으로 아픈 다리를 참고 다녔다. 처음에는 짜증이 계속 났으나, 문득 ‘이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더 불편해 다니지 못하는 친구가 생각났다. 나는 아직도 참으면서 그럭저럭 다닐 수 있지 않은가? 고맙다. 부끄러웠다. 그렇다. 세상이 모든 일에는 관점과 해석만 있을 뿐이다. 마음의 상태가 몸을 지배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는 눈과, 들리지 않는 것에서 듣는 평정 상태의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은 내 안의 처소이다. 그 안에서 지옥을 천국으로 바꿀 수도 있고, 천국을 지옥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존 밀턴’의 글이 떠오른다. 그래, 신은 더 큰 아픔을 막기 위해 작은 아픔을 주셨구나! 비로소 약한 척추협착증이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 조심하고 무리하지 말고, 몸을 아껴 쓰라는 신의 충고다.
오후 2시 15분. 시지행 버스를 탔다. 올 때도 승객은 3명뿐이다. 버스 라디오에서 나오는 흥겨운 가요방송이 피곤한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기사님이 가요를 좋아하나보다. ‘꽃바람 여인’ ‘모란 동백’ 등 경쾌한 트롯트 음악에 심신을 싣고 택시 같은 급행 10번 버스는 시지역으로 달린다. 오늘도 고맙고 반가운 날이다. 봄날은 간다.
2) 작은 사건에서 배우는 삶의 교훈 2025.5.11.(일)
점심을 먹고 간송미술관에 가려고 했다. 지난달부터 ‘화조미감(花鳥美感)’이라는 주제로 조선시대 보물을 전시하고 있다. 아내는 갈 마음이 없어 혼자 가기로 했다. 지하 주차장에 들어가 차 원격 스위치를 켰다. 아니, 웬일이지? 몇 번 눌렀으나 꼼짝을 하지 않는다. 스위치 불만 깜박거리고 반응이 없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순간 식은땀이 났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아하! 밧데리 방전이구나 짐작했다. 손으로 차 문을 열려고 이리저리 노력해 봤지만 요지부동이다. 수동키로 열쇠 구멍을 찾았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큰일이다. 아들에게 전화로 도움을 청했다. 인터넷으로 열쇠 여는 방법을 검색해 카톡으로 보내왔다. 키 구멍은 운전석 손잡이 안쪽에 숨겨져 있었다. 뒷부분을 분리해야 보인다. 처음으로 방법을 알았다. 한참 고생하다가 문을 열었다. 전기는 모든 것이 먹통이다. 보험회사에 연락해 긴급출동을 불렀다. 15분 만에 기사가 왔다. 잠시 충전하니 다시 정상이다. “한 시간 이상 시동을 걸어놓고, 중간에 끄지 마세요. 쉽게 다시 방전될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몇 마디 조언을 하고 긴급출동 기사는 황급히 사라진다.
차를 운행만 할 줄 알았지, 관리는 잘못한 탓이다. 지난 월요일 어머님 댁에 다녀오고 한 번도 운행하지 않았다. 밧데리 방전을 막기 위해서는 자주 운전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리 갈 곳이 없고 먼 곳은 대중교통 이용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어제 수목원 나들이도 차를 가져갔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작은 일에서 삶의 이치를 배운다. 사람이나 기계나 늘 적당하게 움직여야 본성을 유지한다. 아끼고 절제도 좋지만, 물레방아처럼 돌아야 정상으로 돌아간다. 1시간 남짓 지하 주차장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충전이 끝날 무렵, 경산 남천에 산책 나갔던 아내의 전화가 왔다. “미술관 잘 다녀왔어요? 지금 어디세요?”라고 물었다. 승용차 방전 때문에 못 갔다고 하니 지금 간송미술관에 가자고 한다.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아내가 신분증을 집에 두고 왔다고 한다. 경로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미술관 방문은 다음으로 미뤘다. 근처 월드컵 경기장을 산책하기로 했다. 휴일이고 날씨도 시원해, 사람이 인산인해다. 빈 벤치를 찾아 앉았다. 곳곳에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 온 젊은 부부들이 자리를 깔고 즐기고 있다. 역시 젊음이 보기가 좋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던가? 킥보드, 자전거, 전동 미니카, 뛰어다니는 아이, 저마다 환한 얼굴에 웃음 지으며 봄날을 즐긴다. 혹시 내 손자가 오지 않았는가 살펴보니 보이지 않는다. 카톡으로 확인하니 다른 곳에 갔다고 한다. 천천히 경기장 주위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여기는 첫 손자와는 많이 왔지만, 둘째 손자하고는 온 기억이 별로 없다. 여건이 첫째와 둘째가 이렇게 다르다. 내일 오후에 둘째를 돌보기로 했으니, 어디로 갈까도 궁리했다.
산책하면서도 뭔가 허전한 느낌이 많이 든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무엇이 내 마음에서 빠져나간 듯하다. 갱년기는 한참 지났는데……. 내 나름 다른 사람들보다 열심히 탈 없이 살아간다고 자부하지만, 무엇인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미묘한 감정이 나를 괴롭힌다. 나이 탓인가? 조급증인가? 최선을 추구하는 마음 때문인가? 완벽주의를 벗어나고 싶지만, 제어가 잘 안된다. 생각과 입으로는 비우고 느리게를 부르짖지만, 몸은 반대로 움직인다. 작은 일에 감사하는 마음이 모자라기 때문이리라. 지금부터라도 연습해야겠다. 사람이 죽기 전에 후회하는 세 가지 중 하나인, 쓸대 없는 걱정도 적게 하자. 먹구름 속에서 벗어나자. 감사하는 마음을 늘 가져야겠다. ‘노 프로블럼(No Ploblem)!, 노 프로블럼!’ 어느 작은 외국 섬 국가의 주민들이 입에 달고 있다는 말도 생각난다. 누군가 감사는 교양 있는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자기 수행의 결과라고 하지 않던가. 고맙습니다. 오늘의 모든 일에…….
3) 오래된 우정과 세상에 대한 성찰 2025.5.13.(화)
‘사계절’팀 모임 날이다. Am10시에 자연과학고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K, S, J, K 네 명이다. 이 모임은 ‘4명이 계**학교에서 오랜 시간 함께 근무한 절친한 동료’ 또는 ‘사시사철 만나 여행하는 동료’라는 뜻으로 이천 년 초에 결성했다. 그냥 그냥 만나다가 얼마 전에 이름을 지었다. 사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젊은 시절부터 같은 직장에서 30년 이상 한솥밥을 먹었다. 나이 차이도 별로 없고, 무엇보다 생각의 결이 같기에 얘기가 잘 통하고 언제 만나도 부담이 없고 즐겁다. 우연히 옛날 사진을 정리하다가 1987년 순천 송광사에서 4명이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하고는 신선한 충격에 빠졌다. 30대 중반, 2학년 담임으로 수학여행 인솔 때의 추억이었다. 재직 중일 때는 등산을 자주 갔다. 방학이 되면 2박 3일로 여행을 함께 했다. 모두 퇴직한 지도 10년을 훌쩍 넘었다.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가진다. 주로 당일 가까운 산이나 바다를 여행한다. 여건이 되면 1박 2일이나, 2박 3일로 먼 일정을 잡기도 한다.
시내 모임은 주로 내가 차를 운행한다. 멀리 갈 때는 K선생님이나 J선생님이 운전대를 잡는다. 오늘은 월드컵 안쪽에 있는 ‘청계사’ 쪽으로 등산 계획을 세웠다. 예전에 몇 번 간 코스이다. ‘내관지’ 입구 ‘유아숲체험원’ 옆에 주차하고 출발했다. 벚나무 사이 완만한 오르막 데크길이 ‘내관지’로 이어진다. 길 아래는 하얀 아카시아꽃이 절정이고, 보랏빛 오동나무꽃도 드문드문 눈을 맑게 한다. 청계사 아래 내관지는 몇 년 전에 호수를 가로지르는 수상 데크길이 만들어져서 수성구의 명소로 손꼽히는 곳이다. 눈이 시린 푸른 숲, 에메랄드빛 하늘, 햇빛에 통통 튀는 코발트 빛 물이 어우러져 있는 멋진 곳이다. 이따금 오리 몇 마리가 자맥질하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시방 여기가 천국이구나’라고 생각된다. 지난해 둑 동쪽에 ‘소소별’이라는 건물도 만들어져, 캄캄한 밤 소소하게 특별하게 별을 보는 아름다운 장소로 알려진다.
아뿔싸! 오는 날이 장날인가? 수상 데크길에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있다. 가까이 가보니 데크에 부식되지 않게 염료로 덧칠해 말리는 중이다. 그냥 차도로 가는 수밖에 없다. ‘내관지’ 끝 ‘생각을 담는 길’ 쉼터에 앉았다. 지난번 산불 탓에 등산길은 어디나 입산금지다. 계곡 옆으로 난 숲속 데크길이 참 아담하고 맛깔스러운데 어쩔 수가 없다.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별로 없다. 포장길이지만 숲 향기가 정신을 아찔하게 한다. 시내를 조금 벗어난 곳이지만, 먼 깊은 산에 온 듯하다. 아카시아 향기 따라 온갖 소리가 귀를 황홀하게 한다. 저마다 개성 있는 소리로 노래하는 새들의 오케스트라 공연이다. 길 따라 펼쳐진 계곡물도 수량이 제법 많다. 흐르는 빛과 소리가 뽀얗고 정겹다. 가뭄이 심한데도 저렇게 물이 흐르는 것을 보니 상류 쪽 산세가 무척 깊은 모양이다.
청계사 경내는 만물이 묵언수행 중인지 적막하다. 젊은 여성 등산객 두 명이 벤치에 앉아 봄을 즐긴다. 늦봄이지만 날씨가 한여름이다. 양각에 은은하게 단청 입힌 대웅전 문살 꽃문양이 아름답다. 가만히 손으로 만지니 부처님의 음성을 들리는 듯하다. 대웅전 주련이 눈에 익은 팔공산 ‘염불암’ 주련과 같아 눈길을 끈다. 눈과 입으로 한 글자씩 음미하노라니 건너편 하늘이 더 짙푸르게 가슴에 안긴다. ‘청산첩첩미타굴(靑山疊疊彌陀窟). 첩첩 푸른 산은 아미타불 법당이요. 창해망망적멸궁(蒼海茫茫寂滅宮). 아득한 먼 푸른 바다는 적멸궁이라네. 물물염래무괘애(物物拈來無罣礙). 여러 생각이 오고 감에 걸릴 것 없으니. 기간송정학두홍(幾看松亭鶴頭紅). 소나무 정자에 학의 머리가 붉어짐을 얼마나 보았느냐.’ 대웅전 안에 들어가 참배하고 싶었으나 문고리만 잡았다가 걸음을 돌렸다.
천천히 봄을 즐기며 내려오니, 2시간 정도 걸렸다. 이따금 다리가 아파 힘이 들었지만, 즐거운 산행이었다. 점심은 가까운 ‘정 코다리’로 정했다. 세상에나? 잘 되는 음식점은 어딜 가나 북적댄다. 주차할 곳이 없어 한참 기다렸다. 넓은 홀 가득 왁자지껄한 소리에 둘러보니, 대부분 여자손님이다. 남자는 ‘가뭄에 콩 나듯’ 찾을 수가 없다. 대구는 여인 천국인가? 커피는 ‘코지 하우스’ 뒤편에 있는 ‘케빈’으로 갔다. 조용한 곳이라고 찾아왔지만, 여기도 피장파장이다. 참! 우리나라 살기 좋은 멋진 나라라 생각이 든다. 빈익빈 부익부로 잘 돌아가는 철저한 자본주의 나라. 계엄 후유증과 미국의 관세정책으로 올해 일 분기 경제는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건만, 세상은 잘 돌아가는구나. 그렇다. 부정적인 시각이 자꾸든다. 다 함께 잘 사는 것이 좋건만, 현실은 거꾸로 돌아간다. 세상일 정답이 없다. 내 생각이 정답일까? 우주 속에서 나란 존재만 있을 뿐이다. 무엇이 선이고 정의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일까? 쓸대없는 잡념만이 부정 편향 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도 고맙다. 이런 마음도 감사하자.
4) 무대에 선 기쁨 2025.5.15.(목)
아침부터 유건산 이마에 운무가 가득하다. 비가 오려나? 예보를 보니 오전에만 보슬비 소식이 있다. 오후에는 김광석길 야외 콘스트홀에서 합동출판기념회가 열린다. 대구문인협회에서 주관하나 전적으로 A회장이 사비로 운영하는 행사이다. 대단한 여걸이다. 작년에 취임한 그녀는 역대 다른 회장에 비해 무척 활동적이고 정열적이다. 출판회 개최를 통해 문인들의 창작의욕을 북돋운다. ‘문학, 꽃길 가다.’라는 제목으로 14명의 작가와 낭송가가 함께 참여하는 큰 행사이다. 세 권의 수필집을 내는 동안 처음으로 참가하는 출판기념회이다.
어제 저녁 커뮤니티 홀에서 ‘세계의 음악’이라는 주제로 이정연교수의 강의를 듣는 도중, 전화가 왔다. 내 작품을 함께 낭송할 K 낭송가였다. 배경음악과 복장, 낭송하는 방법 의견을 주고받았다. 전문 낭송가인 그녀는 한복을 입고 온단다. 무명가수 활동도 하는 그녀이다. 마지막에 ‘김광석 노래 한 소절을 같이 하면, 장소에 맞는 의미가 있으니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평범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좋고, 복장도 수수하게 입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라고 답했다. 잘 알았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혼자 하는 행사가 아니기에 준비 시간도 많이 걸린다. 3시까지 모여 낭송가들과 리허설하기로 했다. 집에서 승용차로 30분이 넘는 거리다. 나는 비취빛 모시로 만든 상의와 모처럼 구두도 신었다. 낭송가가 한복을 입고 온다기에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 좋을 듯했다. 배너에 나온 사진처럼 검은 모자를 썼다. 도착하니 벌써 왁자지껄한 분위기다. 작가들과 낭송가들 그리고 문인협회 임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작년부터 합동출판기념회를 여러 번 했기에 노하우가 상당히 쌓였다. 총감독의 지시대로 두 번 연습했다. 얼마 만에 서는 무대인가. 학창시절 열정적으로 써클에서 행사 준비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그냥 대충 참석만 하려 했다. 고희를 지난 나이에 이런 무대에 다시 서다니, 잔잔한 가슴이 쿵쿵 소리를 낸다. 행사는 즐겁고 재미있어야 한다. 참석자들의 마음이 중요하다.
좀 늦게 온다던 아내가 예쁜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왔다. 축하객이 몇 명 있으면 좋지만, 부담될지도 모르기에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자축 행사가 아닌가. 문인협회 행사라 친분이 있는 문인들과 인사도 나누었다. 시작 시간이 남아 여기저기서 기념 촬영도 했다. 사실 여기는 처음 온 곳이다. 봄의 절정인 5월 중순,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오는 야외 공연장이라 멋지다.
오후 5시. ‘은가비 예술단’의 퓨전북 축하 공연을 시작으로 막을 올렸다. 역시 축제는 음향이 생명이다. 멋진 춤과 북춤이 공연장을 휘감는다. 내 차례는 셋째 마당의 세 번째 순서이다. 무대 전면에 빔으로 사진과 약력이 나왔다가, 이어서 낭송할 수필이 붉은 꽃으로 장식된 전면에 화려하게 펼쳐진다. 한복을 예쁘게 입은 K 낭송가와 나는 무대에 올라갔다. 천천히 차분하게 낭송에 들어갔다. 전체 세 문단을 낭송했다. 첫 문단과 셋째 문단은 낭송가가, 둘째 문단은 내가 하기로 했다. 마지막 문장은 내가 다시 한번 더 낭송가기로 했다.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부대끼다가, 세월의 흐름에서 화해로 순환하는 삶의 기록이 인생이고 글이 아닌가.’ 문장이다. 마지막을 장식하고 내려오니 객석의 낭송가들이 정말 멋지다고 축하 말을 던져준다. 3분 남짓 걸린 짧은 시간이지만, 내 삶의 절정인 순간이 된 것 같다. 내 언제 이런 멋진 행사의 주역을 맡아 보았던가!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가 소중하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또 오늘이 될 것이다. 즐겁고 행복한 날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은 열정을 꽃피울 수 있는 날이 오늘처럼 이어지길 소망한다.
5) 친구들과 나눈 문학과 우정 2025.5.20.(화)
오늘은 1박 2일 일정의 대학동기회 날이다. 지난 4월 8일~9일 예정되었으나 경북 산불이 심할 때라 국민적 정서를 생각해 날짜를 연기했다. 일기예보를 보니 수은주가 32도까지 오른다나. 오전 10시 40분 출발 KTX 열차. 17분 만에 경주에 도착했다. 정말 빠르다. 신역사 경주역은 처음 왔다. 시내와 한참 벗어난 건천에 지어졌다. 왜 이렇게 멀고 불편한 곳에 지었을까? 수십 년 후 먼 미래를 보고 설계했다지만 둔한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된다. 엘리베이터를 타니 아래로 내려간다. 아하! 역사가 1층에 있고 열차는 2층에서 운행된다는 것을 새로 알았다. 서울, 원주, 동탄, 포항, 대구 등에서 날아온 친구들과 11시쯤 합류했다. 마중 나온 친구 차에 나눠 타고 점심 장소인 보문단지 애슐리 퀸즈 식당으로 떠났다.
깔끔한 뷔페로 점을 찍고 오늘의 여정인 함월산 기림사로 향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기림사를 여러 번 갔었다. 다른 친구들이 많이 가보지 않은 곳이라 이곳으로 정했다. 일주문 입구에 도착하니 포항 P 동기 친구의 지인이 마중을 나왔다. 감포에서 ‘체리와인’ 사업을 하며 농업 컨설턴트와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는 박학다식한 분이다. 기림사를 천천히 걸으면서 설명한다. 김동리 소설 ‘등신불’의 주인공인 김교각 스님도 이 절과 인연이 깊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차 문화도 이곳이 가장 원조라고, 잘 몰랐던 얘기를 한다. 약사전 법당 왼쪽 벽에 그려진 차를 공양하는 벽화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사실 법당의 부처님만 신경 써 관찰하고 벽화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공대 건축사 출신이지만 문과 나온 사람보다 구수한 입담이 좋다. 쏟아붓는 햇살 속 화단에는 작약이 절정을 달리고 불두화도 눈부시다. 명부전 옆 작은 개울 따라 ‘호국행차길(왕의 길)’이 나온다.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 문무대왕릉과 감은사, 기림사와 용연폭포, 만파식적에 관한 설화와 관련이 있는 장소이다. ‘왕의 길’은 기림사로부터 산 너머 모차골까지 계곡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져 있는 트레킹 코스로 잘 알려져 있다. 단풍이 숲을 휘감는 멋진 가을날, 가족들과 나들이 한 번쯤 하면 좋을 곳이다. 입구 쪽으로 돌아 나와 ‘매월당 김시습 영당’에 참배하고 기림사 일정을 마무리했다.
감포쪽으로 20여분 달려 김** 씨의 ‘체리와인’ 제조공장이 있는 ‘노곡산방’을 찾았다. 못 하나 쓰지 않고 지은 일자형 사랑방 한옥이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방안에서 보니 솔숲이 그대로 가슴에 확 안긴다. 큰 통유리로 된 창에 새들이 날아와 부딪혀 죽는 일도 있다고 한다. 공장에서 제조 공정도 설명 듣고, 와인 시음회까지 마치고 감포 바닷가로 향했다. ‘나정고운모래해변’ 입구에는 ‘바다가 육지라면’ 노랫말 비석이 세워져 있다. 작사가 정귀문 선생이 1970년에 이곳 바다를 보고 지은 노래이다. 당시 그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 현실에서 벗어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염원을 이 노랫말에 담았다고 알려진다. 짙푸른 수평선 위로 큰 바지선이 떠 있다. 파도는 잔잔하고 덥기만 하다. 큰 감흥은 나지 않는다. 근처 솔밭에 있는 ‘황포식당’에서 가자미찌개로 저녁을 먹었다.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보름 남짓 남은 대선이라 자연히 화제가 된다. 서로의 입장과 생각이 다르기에 이념 문제는 해결이 참 어렵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누가 옳은지는 후세의 역사가 판정을 할 뿐이다. 관점이 달라 해석도 다르다.
숙소인 경주 ‘농협연수원’ 512호에 짐을 풀었다. 오늘 힘들게 들고 온 산문집 ‘아름다운 외도’를 일일이 서명해서 전달했다. 좋은 작품집이 아니라 좀 부끄러웠지만 내 나름 정성으로 빚은 산문집이다. 친구들이 국어교사 출신이라, 한편 잘 이해할 수도 있고, 또는 비판이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게 내 실체인 것을. 글이란 그 사람을 대변하는 분신이다. 호불호(好不好)가 많다. 어느 글이 대표작이냐고 묻기에 처음에는 대답하기 어려웠다. 선뜻 내세울 작품이 하나도 없다. 내 글은 감성이 강하다. 내면의 고백이 대부분이다. 누군가 감정배설이라고도 하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 자체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살펴보면 내가 강의하면서 늘 강조한 의미화된 글이나 형상화된 글도 많이 없다. 어떻게 보면 이율배반적이다. 그렇지만 말하려면 이유가 많다. 잠깐 생각하다가 그냥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담과 벽’을 추천했다. 서울의 수필가인 S가 또박또박 읽고 함께 감상했다. 간단한 의견도 주고받았다. 조촐하지만 동기들이 즉석에서 열어준 인상적이고 의미있는 출판기념회였다. 다 같이 노래를 부르며 박수로 대신했다. 조촐한 커피값도 축하금으로 받았다. 동기의 고운 정이 고맙고 아름다울 따름이다. 행복하다.
잠시 전에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사실 친구들과 세 개의 방을 얻었다. 9시쯤 511호에 모여 출판을 축하하는 작은 모임이 시작될 때였다. 식탁과 소파에 둘러앉아 축하 노래를 부르는 중이다. 갑자기 여자 두 분이 “우리도 같이 참석해도 되나요?” 하며 슬며시 들어왔다. 다들 깜짝 놀랐다. 그들도 여자 동기들이 있는 것을 보더니 황급히 사라졌다. 문이 열려 있었고 남자들 노랫소리가 들리니까 궁금해서 들어온 것일까? 나가고 나서 여자 동기 H 선생님이 하는 말이 걸작이다.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잠깐 본 순간, S 선생님 사모님과 친구가 들어온 줄 알았다는 것이다. 내가 동기들과 이곳에 갔다는 걸 알고, 깜짝 이벤트로 왔지 않았을까, 순간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웃으며 넘긴 일이지만 황당한 사건이다. 단체 여행에서 남녀팀이 합석하는 방법의 하나란다. 여행지에서 종종 있는 일이라는 친구의 이야기에서 세태를 읽어본다. 오늘 하루도 고맙게 지나갔다. 지금 홀로 하루를 복기하며 기록하는 행복에 젖어본다. 내 안의 목소리에 잠시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즐거움이 진정한 내 삶의 돌봄이라 믿으면서…….
6) 여행과 노년의 감사 2025.5.23.(금)
정상적인 봄 날씨가 돌아왔다. 오늘은 해운대 모래축제 구경 가기로 했다. 경산에서 구포까지 열차를 이용하고, 지하철 3호선과 2호선을 환승하면 해운대역에 가는 가장 짧은 시간 코스이다. 어제 저녁 코레일 앱으로 예약했다. 8:43분-9:47분. 무궁화호. 18:29분-19:40분. 무궁화호. 지하철 타는 시간을 더하면 6시간쯤 해운대에 머물 수 있다. 기온이 낮고 바람이 강해서 서늘한 느낌이 든다. 점심을 따뜻한 국물이 있는 곳을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다. 역 부근 스시집에 초밥과 우동을 먹기로 했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어 편했다. 11시쯤 우리가 첫 손님이다. 줄지어 손님이 들어온다. 다들 외국인이다.
해변으로 갔다. 올해가 모래축제를 연지 20주년이다. 산더미같은 모래작품의 섬세함이 늘 경이롭다. 작가의 이름을 작품 앞에 팻말로 세워 놓았지만,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비가 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공들여 만든 작품이지만 축제기간이 지나면 바로 없어질 것이 아닌가. 그래도 겨울 얼음축제보다는 낫지 않을까도 생각된다. 만들고 사라지고, 창작되고 소멸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바다 가까운 촉촉한 모래사장을 걸었다. 바람이 강하지만 큰 파도는 없다. 맨발로 걷는 관광객도 드문드문 보인다. 그때였다. 늘씬한 비키니 차림의 혼혈 여성이 바다로 걸어 들어간다. 아니, 춥지도 않나? 두 팔로 파도를 가르면서 천천히 들어가더니 잠깐 수영도 한다. 모래사장에서 남편으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가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다. 이틀 전만 해도 30도 이상의 날씨였지만, 오늘은 지금 18도인데 저렇게 할 수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해운대 블루라인파크에 도착했다. 미포항에서 송정역까지 약 4.8km 거리를 예전의 동해남부선 철로를 이용해서 만든 관광지이다. 2,020년에 개통한 관광코스로 해운대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의 필수코스로 알려진다. 나는 지난해 가을 대학동기 모임에서 이곳을 들러 해변열차에 탑승했다. 집사람이 타보지 않았기에 일부러 왔다. 평일인데도 사람이 넘친다. 거의 대부분 외국인이다. 마치 내가 동남아의 어느 관광지에 있는 느낌이 든다. 끼리끼리 또는 가이드의 깃발 따라 사람들이 끝도 없이 지나간다. 12시 조금 지나 어렵게 매표했지만, 탑승시간이 오후 1:45분이다.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 할 수 없이 가까운 바닷가로 갔다. 수십 년 전에 지은 집들 사이로 좁은 골목이 이어진다. 방파제에 서서 본 바다가 아름답다. 가까운 곳에 백로 한 마리 물가 바위에 서 있고, 좀 먼 곳에는 왜가리 한 마리가 외롭게 앉아 있다. 우리 인생을 보는 듯하다. 누구든 언젠가는 혼자 저렇게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보고 있으니, 경치는 아름답지만, 쓸쓸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오후 1시45분. 단체관광객이 우선 입장이라 앞자리에 줄을 서도 앉을 자리가 없다. 20여 분 어쩔 수 없이 서서 가야 할 팔자다. 다행 한 젊은이가 벌떡 일어난다. 구미에서 단체로 연수를 왔다고 하며, 우리를 보고 자기 자리를 양보해 준다. 얼핏보니 중국 사람처럼 보였는데….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 요즘도 이런 젊은이가 있다니, 우리나라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는 않구나 생각되어 기분이 좋았다. 고마운 마음에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갑자기 둘째 아들 친구 L이 떠올랐다. 그에게서 받은 강한 느낌이 L이 같다는 느낌이다. 서글서글하며 솔직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모습이 함께 보인다. 사실 그가 정말 그런지는 확실하게 모르지만…….
구름이 많이 낀 날씨라 바다는 컴컴하다. 멀리 오륙도도 흐릿하다. 그래도 바다를 안고 달리는 해변열차가 멋지다. 이따금 아래 산책길에서 손을 흔들어 주는 관광객들도 사랑스럽다. 송정 앞 바다는 보드스핑 하는 사람들로 혼잡한 수영장을 보는 듯하다. 오늘은 바람이 좋아 보드스핑 즐기는 사람들이 붐비는 모양이다. 나도 젊었으면 한번 도전해 볼 텐데……. 푸른 청춘들이 아름답고 부럽다. 송정역에 내렸다. 해수욕장은 똑같은 바다인데, 볼 것이 뭐 있냐는 집사람의 말에 잠시 뒤 돌아가는 열차를 탔다. 다행 앞자리에 앉아 바다를 조망하니 새로운 기분이 든다. 편안하고 즐겁다. 모래 작품은 이미 봤으니 일찍 귀가하자고 한다. 18:29분 열차를 취소하고, 17:41분 ITX 새마을 열차로 예매했다. 남은 시간에 스타벅스 ‘해운대역점’에 들렀다. 얼마 전 N선생님이 선물한 기프티콘 ‘아메리카 커피’ 두 잔과 ‘티라미수 케이크’를 먹으며 휴식을 했다. 매호동에 도착하니 19시를 가리키고 있다.
오늘 하루를 복기해 봤다. 준비 부족이 많았다. 보조 충전기를 챙기지 않았다. 당일 여행은 오후가 되면 밧데리가 부족해 꼭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었지만, 그냥 왔다. 왜 이랬을까?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고 사는 것이 인생일까? 남은 용량이 부족해 조심해 폰을 관리했다. 조금만 신경 썼으면 편한 마음으로 다녔을 것을…….
그래도 마냥 행복하고 감사한 날이다. 척추협착증으로 이따금 다리가 아팠으나, 잘 다녀왔다. 고마운 아내와 함께 여행할 수 있으니 더 감사할 따름이다. 이렇게 다닐 수 있는 날이 몇 년이나 남았을까? 매사에 감사한 마음과 사랑으로 살아가야겠다. 삶에서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이 아닌가. 짜증나는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말자. 앞으로는 가능한 한 화를 내지 않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무조건 어떤 일이 있어도 받아들이자. ‘화를 낸다는 것은, 내가 독을 마시고 상대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미국의 작가이자 배우인 ‘맥코트 말라키’의 말을 되새기면서…….
7) 천년의 숲, 바다에서 만난 하루 2025.5.29.(목)
어제저녁에 많은 비가 내렸다. 대구에 짧은 시간 이렇게 많은 비가 내리기는 드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베란다 밖 유건산을 바라보니 운무로 가득하다. 오늘은 초등 동기 H, E와 모처럼 여행을 가기로 한 날이다. 아침 8시까지 월드컵 3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사실 며칠 전부터 감기로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탁구도 며칠 쉬었고, 어제 교도소 강의는 피할 수 없어 강의 후 오후에 푹 쉬었지만, 쉽게 회복이 안 된다. 어찌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한 달 전에 약속한 일이기에 무조건 가야 했다. 모처럼 소풍에 즐거운 마음의 친구에게 실망을 주면 안 된다.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먹었지만 별로다. 지은 약을 먹으면 몸이 더 취하는 느낌이 들었다. 약기운이 강해서일까? 그냥 약국의 물약이 더 효과가 있는 기분이다.
예정대로 오전 8시 조금 지나 출발을 했다. 여행지는 의논 끝에 내가 짜기로 했다. ‘경북천년숲정원’을 추천했다. 다들 안 가본 곳이라 좋다고 했다. H의 신형 제네시스가 미끄러지듯 고속도로를 날았다. 승차감도 좋고 아직 도로도 한산하다. 휴게소에서 E가 준비해 온 커피와 간식으로 채우니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가면서 검색을 해 보니 경주 유적지는 대부분 10시에 문을 연다. 9시쯤 도착 예정이라, 남는 시간 고려해 교동의 ‘월정교’를 찾았다. 운무가 걷힌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맑다. 월정교 기둥이 예전에는 다 나무가 아닌 줄 알았다. 걸으면서 관찰하니 군데군데 나무 진액이 묻어있다. 직원에게 물으니 모두 나무로 만들어져 수백억이 넘는 예산이 들었다고 한다. 교동의 경주 최부잣집에 들어갔다. 음식점으로 유명한 ‘요석궁’ 안쪽에 있다. 이른 시간이라 관광객은 거의 없다. 기념관에는 최부잣집 명성의 유래부터 역대의 발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경주 최부잣집의 살면서 대대로 지켜야 할 여섯 가지 실천철학이 오늘을 돌아보게 한다. 그중 ‘재산을 만석 이상 늘리지 마라’ ‘사방 백 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말이 돋보인다.
‘경북천년숲정원’은 불국사 입구를 지나 ‘통일전’ 부근에 있다. 규모가 정말 대단하다. 두 번 와 봤지만 잠깐 둘러봐서 속속들이 다 보지 못했다. 두 줄로 백여 미터 이상 쭉 뻗은 메타스콰이어 가로수 숲이 멋있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붉은 개양귀비와 패랭이꽃, 이름 모를 꽃들이 눈을 부시게 한다. 작은 인공폭포와 배롱나무, 소나무 등으로 가꾸어진 ‘왕의 정원’이 아름답다. 폭포 옆 정자에 앉아 사방을 돌아보면 신라의 왕이 된 기분으로 자연과 더불어 거닐다가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작은 도랑과 외나무다리가 녹음 속에서 운치를 더해준다.
다시 일명 ‘괘릉’으로 알려진 ‘원성왕릉’으로 달렸다. 넓게 자리한 왕릉의 언제 와도 아늑함과 평화로움을 준다. 멀리 보이는 능 양쪽에는 문관석과 서역인으로 추정되는 무관석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호위하고 있다. 양쪽에 두 마리씩 있는 돌사자는 동서남북 각 방향을 한 마리씩 바라보며 능을 수호하는 형상이다. 특히 북쪽으로 머리를 돌린 사자는 한쪽 발의 발톱을 날카롭게 세워 마치 금방이라도 으르렁거리며 물어뜯을 형상이다. 능 둘레 돌로 다듬은 십이지신상은 천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또렷하다. 능을 감싸고 둥글게 울창하게 우거진 솔숲이 정말 아름답다. 시간이 허락하면 자리를 깔고 도란도란 얘기도 하고, 낮잠을 자고 싶은 포근한 곳이다. 무심히 천년의 세월을 지키고 있는 ‘원성왕릉’이 살며시 내게 무슨 말을 하는 듯하다. “무어 그리 길지 않은 인생길을 허덕지덕 사시는가. 이제 천천히 돌아보며 누리며 사시게”. 돌아보면 삶의 석양 근처에 와 있건만, 아직도 쫓기듯 바쁘게 살아가는 내가 가엾게 보이는 모양이다.
감포읍 ‘수협 활어직판장’에서 싱싱한 회를 구매해 먹었다. 1kg에 3만 원. 활어 2kg에 해삼 멍게를 더해 7만 원. 상차림비와 음료를 더하니 93,800원. 풍성한 오찬을 누렸다. ‘고아라 해수욕장’ 위쪽에 있는 카페 ‘히든씨’를 찾았다. 철썩이는 파도가 눈앞에 펼쳐지는 해변과 맞닿은 카페이다. 장사 부근의 대형 카페 ‘오딘’, ‘러블랑’과 비슷한 곳이다. 전망이 멋진 곳에 카페를 지었다. 아득한 수평선과 뽀얀 파도를 보는 값이 포함된 커피값이 장난이 아니다. 셋이서 디카페인으로 주문하니 24,000원 나왔다. 그만큼 가성비가 있는 집이다. 좀 오래전에 지어진 곳이라 많이 낡았지만, 에메랄드 바다와 허연 파도는 늘 싱싱하고 푸르기에 만족한다. 커피 한 잔을 들고, 말없이 끝없는 수평선만 바라보며 앉아 있는 것이 도시인에게는 작은 힐링의 시간이 될 것이다. 동해는 물이 참 맑다. 물가에 내려가 쪼그리고 앉아 물속을 바라보니 더욱 투명하다. 쉴 새 없이 밀려왔다가 멀어지는 파도도 사랑스럽다. 자연 속에 앉아 있으니 내가 자연에 찍힌 사진 한 장면이 된 기분이다.
불국사로 가서 옛 추억을 생각하며 천천히 돌아보고, 불국사 박물관도 처음 관람했다. 저녁 6시경에 월드컵 주차장에 편안하게 도착했다. 종일 운전해 준 H, 집에서 준비해 와 맛난 간식을 잘 챙겨준 E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보낸다. 다음 또 소풍을 기약해야겠다. 고맙고 즐거운 하루가 지나갔다. 오늘도 멋지게 보낸 내 삶의 절정인 한순간을 감사드린다.
8) 손주와 즐기는 행복 2025.5.31.(토)
손자와 하루를 보냈다. 10:30분. 새로 개업한 집 근처의 ‘사운즈커피 시지점’ 브런치가 좋다기에 아들 부부에게 맛보라 하고, 아내와 난 손자를 보기로 했다. 두 놈은 들어오자마자 옆방으로 들어간다. 바둑판을 펴고 첫째 **와 난 알까기 시합을 준비했다. 알이 좀 굵은 흑 돌은 손자가, 나는 백 돌을 잡았다. 각각 셋째 줄에 10개씩 전장에서 진(陣)을 짜듯, 열을 맞추어 놓고 가위, 바위, 보로 선(先) 공격을 정했다. 몇 번 해 봤기에 제법 알을 잘 튕긴다. 하지만 손가락 놀림이 아직 어둔하기에 내 공격을 잘 피하지 못한다. 내가 일부러 실수해 낙방을 몇 번 하니 손자가 이겼다. 역시 경기는 이기면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다시 두 판을 더 해 2승 1패로 손자에게 승리의 기쁨을 안겼다.
다음에는 오목 게임이다. 오목도 전보다 제법 보는 눈이 발전했다. 설명보다는 실전을 통해 재미를 붙이니 실력이 는다. 둘째 **이도 심심한지 한쪽에 혼자 바둑알을 놓고 중얼거린다. 셋이 함께할 수 없기에 살짝 아쉽다. 아이라 집중력이 오래 가지 않아 또 심심해한다. 다시 홀짝 게임을 하기로 했다. 각각 흑백 알 10개씩을 가지고 시작했다. 게임 개념을 잘 모르기에 계속 설명하면서 시작했다. 어차피 홀짝 게임은 확률이 반반이라 누가 이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바둑알을 두 손에 둥글게 잡고 소리를 내며 흔들다가 오른손에 쥔 바둑알로 홀짝을 묻는다. 연속으로 네 번이나 손자가 이겼다. 기분이 날아갈 듯한 모양이다. 기뻐서 까르르 웃으며 넘어가는 모습이 천사같다. 나도 연신 웃으면서 게임을 한다. 새로운 게임을 알게 되어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손자와 노닥거리는 것이 이렇게 기쁜 것을 보니 역시 손주 바보 할아버지이다.
점심을 먹고 가까운 ‘생각을 담는 정원’으로 차를 몰았다. 둘째 **이는 킥보드를 챙기고 첫째 **는 줄넘기를 챙겼다. 이곳은 손자들에게는 처음 온 곳이다. 정원에는 온갖 노란 장미와 붉은 장미, 금계국이 한껏 늦은 봄날을 뻐기고 있다. 아담한 연못에는 황금 잉어 세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이리저리 헤엄을 친다. 좁은 길에도 둘째는 킥보드를 타려고 한다. 열대 식물이 가득한 정원 안에서도 킥보드를 놓지 않는다. 흙이 많은 길이라 잘 굴러가지 않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줄기차게 밀고 다닌다. 아이의 즐거움을 내가 어찌 일일이 알 수 있으랴? 보고 열심히 따라다니기만 해도 즐겁다. 한쪽에 위치한 아담한 쉼터로 자리를 옮겼다. 아내가 챙겨온 간식을 풀었다. 사과, 참외, 떡, 물을 준비해 왔다. 바닥이 마루라서 킥보드를 타기가 편하다. 마침, 다른 사람은 없어 눈치도 보지 않고 놀아 더 좋았다. 첫째 **는 줄넘기 맹연습 중이다. 지금까지 기록은 21번이 최고란다. 여러 번 시도 끝에 오늘은 23번을 돌파했다. 자랑스럽다. 자기 친구의 최고 기록은 56번이란다. 열심히 연습해서 한 달 뒤에는 자기도 50번을 돌파하고 싶단다.
오른쪽 작은 공터에 반려견 놀이터가 있다. 휴일이라 반려견 대여섯 마리가 주인과 함께 뛰어다니고 있다. 개를 키우지 않는 우리는 반려견 구경도 좋다. 울타리 밖에서 손주들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근데 갑자기 한 마리가 근처로 와서 왕왕거린다. 깜짝 놀라 두 손을 잡고 뒤로 물러났다.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러지? 다시 쉼터로 돌아와서 간식을 먹고 쉬었다.
집에 가려고 하니 더 놀자고 한다. 월드컵 경기장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장이 만원이다. 어렵게 한쪽 길에 주차하고 월드컵 공연장 공터로 갔다. 휴일 기분이 물씬 난다. 아이들과 나들이온 사람이 많지만, 워낙 넓기에 그래도 편안하다. 쉴 그늘도 많고 바람도 솔솔 불어 손자들이 좋아한다. 깔끔하게 포장된 곳이라, 킥보드를 타기가 정말 좋다. 곳곳에서 킥보드,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이 보인다. 역시 넓은 곳이 안전하고 놀기는 안성맞춤이다. 어떤 아이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타기에 조금 위험하기도 하다. 손주 바보가 분주하지만 보람 있고 즐거운 날이다. 손주가 없는 사람은 정말 심심하지 않을까. 내가 피곤해도 함께 놀아주면 피곤함도 모르고 정신없이 같이 다닌다.
내 어머니, 할머니도 나를 키울 때 이런 마음이었으리라. 내리사랑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인가 보다. 나는 어릴 때 호기심이 많았다. 이것저것 보고 싶고 배우고 싶었다. 그 습관을 손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다. 성격은 타고나지만, 습관은 자기가 만들어가면 될 것이다. 좋은 습관이 최고의 자산이 된다. 많이 보여주고 경험을 시켜 스스로 체득하도록 할 예정이다. 집에 도착하니 3시가 넘었다. 둘째 **이는 낮잠도 자야 하는데…. 저녁 시간에 힘이 들지 싶다. 잠시 휴식하다가 나는 탁구장으로 갔다. 매일 가는 곳이라 하루라도 가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다. 습관이자 중독이다. 그래도 고맙고 즐겁다. 즐거운 운동에 대한 중독은……. 몸은 고희를 넘었지만, 마음은 아직 지천명이다. 과유불급만 잘 지키면 좋지 않을까. 시시콜콜히 복기할 수 있는 오늘 하루가 고맙다. 정말 보잘것없지만,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나만의 일상 기록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