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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먼 후일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핵심 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3음보의 규칙적 율격 성격 : 애상적. 민요적 표현 : 반어적 진술에 의존. 반복과 변조의 기법이 돋보임. 하나의 연 속에서 과거 시제와 미래 시제가 공존하는 시제상의 모순이 보임 구성 : 1연 - 먼 훗날 임과 만날 때의 화자 반응 2연 - 임의 비난에 대한 화자의 반응 3연 - 임의 계속되는 비난에 대한 화자의 반응 4연 - 임을 잊지 못하는 애절한 마음 제재 : 당신 주제 : 떠난 임에 대한 강한 그리움 출전 : <개벽>(1922) 이해와 감상 소월 시에 등장하는 님은 대부분 과거적인 님으로, 현재는 부재(不在)하는 님이다. 님이 부재하는 현실은 화자에게 있어서 한낱 시간의 공백일 뿐이다. 이 시에서도 화자는 임과 헤어진 존재로 그려져 있다. 화자는 매 연에서 님을 '잊었노라'고 독백한다. '잊음'이라는 단어는 과거적 실체와 관련된 말이다. 특히 이것이 과거시제로 사용될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화자는 과거적 시간에서 현재를 건너 뛰어 미래 속으로 들어간다. 과거에서 미래로 건너뜀에는 시간의 불연속이 개입한다. 현재적 존재로서의 화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에서 볼 수 있듯이, '먼 훗날 그 때'로 암시되는 미래와, '잊었노라'로 단언되는 과거가 있을 뿐, 현재 그 자체는 추방되어 버렸다. 현재가 추방된 상황에서 화자의 참답고 진정한 삶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먼 훗날' 님을 만나 잊었노라고 말할 수 있을 때가 아닐까. 그렇다고 문제가 그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대개의 가정법의 진술이 현재나 미래의 불가능성에 대한 진술이라고 볼 때, '먼 후일 당신이 찾으시면'과 같은 시구는 미래에도 님을 만날 수 없다는 화자의 비극적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 결국 화자의 미래는 현실적 미래가 아니라 관념적 미래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 시는 결정적이고 엄청난 이별 앞에서 가슴 속에 오가는 사연을 말하고 있다. 이별의 충격은 엄청나지만, 충격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이겨 내지 않고는 온전히 살아 부지할 수가 없다. 욕하고, 원망하고, 탓하고, 미워하고…. 사랑이 깊으면 깊은 만큼의 여러 생각이 어지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갈등이 끝나지 않을 때, 생각을 달리한다. “좋다, 다시 내 앞에 나타나기만 해라, 차디차게 ‘잊었다’고 하리라.”는 식이다. 이런 생각은 실상 당신을 잊고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자기를 다독거려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는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 점이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라는 말에서 물씬 풍겨 나온다. 그럼에도 지금 이 슬픔을 이기자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다시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번연히 알지만, ‘잊었노라’고 말하리라는 결심이 아니고서는 지금의 갈등을 견디어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심리의 어지러운 흔들림이 이 시의 특징이다. 1연에서 4연까지 서정적 자아는 계속해서 ‘잊었노라’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잊었다’는 사실의 확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의 강조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4연으로 해서 이 시의 그런 의도는 더욱 명백해진다.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 먼 훗날 그 때에 과거와 현재에 ‘잊었노라’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잊을 수 없는 임이라면, 먼 훗날 그를 잊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먼 후일’의 결말은 이렇듯 임 을 잊겠다는 진술로 시종일관(始終一貫)하고 있다. 이것은 표면에서 이루어진 언표(言表)가 화자의 의도와는 전혀 반대되는 경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의 가장 주된 표현 기법은 바로 반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서정적 자아가 그리워하고 있는 임은 오직 과거의 시간 속에서만 존재한다. 현재에 임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에 임을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시가 가정법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왜냐 하면 가정법은 실현 불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어법이기 때문이다. 소월 시의 주된 정조인 한(恨)은 이렇듯 임이 오직 과거의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고 현재와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것은 미래에 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지니고 현재의 어려움을 꿋꿋하게 견디어 나가는 한용운의 경우와는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고 하겠다. 소월 시의 대부분은 이별이 제재가 되고 있다. 이별, 슬픔, 한의 정조는 보편적인 민족 정서의 형상화로 볼 수 있다. 그는 소박하고 순진무구한 전원의 세계를 동경하였지만 이러한 회원은 좌절과 미련, 원망과 자책의 갈등으로 변전되면서 깊은 상실감과 한의 근원을 만든다. 소월 시에서 드러나는 한은 순종과 미련이 교차하는 데서 더욱 깊어지는 슬픔과 원망을 지니고 있어서 한층 절실함을 얻는다. 그러나 그의 시는 감상적 슬픔만으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의 빈궁이나 억압적 상황에서 그는 당대 민족의 설움을 찾아내고 있으며 ‘바라건대 우리에게 보섭 대일 땅이 있었더면’ 과 같은 작품에서는 그가 건강하고 긍정적인 삶의 인식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소월의 시는 민족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으면서 당대의 삶과 정서를 새로운 율격을 통해 형상화해내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