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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1 윤동주
가슴 1
소리 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
뚜드려 보오.
그래 봐도
후―
가아는 한숨보다 못하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가슴 2 윤동주
가슴 2
불 꺼진 화(火)독을
안고 도는 겨울밤은 깊었다.
재[灰]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가을밤 윤동주
가을밤&
궂은비 나리는 가을밤
벌거숭이 그대로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마루에 쭈구리고 서서
아인양 하고
솨― 오줌을 쏘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간 윤동주
간(肝)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쓰산중(山中)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肝)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사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誘惑)에 안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간판없는 거리 윤동주
간판(看板)없는 거리
정거장(停車場)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看板)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문자(文字)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慈愛)로운 헌 와사등(瓦斯燈)에
불을 켜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거리에서 윤동주
거리에서&
달밤의 거리
광풍(狂風)이 휘날리는
북국(北國)의 거리
도시(都市)의 진주(眞珠)
전등(電燈)밑을 헤엄치는
조그만 인어(人魚) 나,
달과 전등에 비쳐
한몸에 둘셋의 그림자,
커졌다 작아졌다.
괴로움의 거리
회색(灰色)빛 밤거리를
걷고 있는 이 마음
선풍(旋風)이 일고 있네
외로우면서도
한 갈피 두 갈피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
푸른 공상(空想)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거짓부리 윤동주
거짓부리
똑, 똑, 똑,
문 좀 열어 주세요
하루밤 자고 갑시다.
밤은 깊고 날은 추운데
거 누굴까?
문열어 주고 보니
검둥이의 꼬리가
거짓부리 한걸.
꼬기요,꼬기요,
달걀 낳았다.
간난아 어서 집어 가거라
간난이 뛰어가 보니
달걀은 무슨 달걀,
고놈의 암탉이
대낮에 새빨간
거짓부리 한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굴뚝 윤동주
굴뚝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웬 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거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그 여자 윤동주
그 여자(女子)&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지나는 손님이 집어 갔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길 윤동주
길&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꿈은 깨어지고 윤동주
꿈은 깨어지고
잠은 눈을 떴다
그윽한 유무(幽霧)에서.
노래하는 종달이
도망쳐 날아나고,
지난날 봄타령하던
금잔디밭은 아니다.
탑(塔)은 무너졌다,
붉은 마음의 탑(塔)이―
손톱으로 새긴 대리석탑(大理石塔)이―
하루저녁 폭풍(暴風)에 여지(餘地)없이도,
오오 황폐(荒廢)의 쑥밭,
눈물과 목메임이여!
꿈은 깨어졌다
탑(塔)은 무너졌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눈 윤동주
눈&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눈 감고 간다 윤동주
눈 감고 간다
태양(太陽)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눈오는 지도 윤동주
눈오는 지도(地圖)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窓)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地圖) 위에 덮힌다. 방(房)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壁)이나 천정(天井)이 하얗다. 방(房) 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前)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나려 덮여 따라 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년(一年)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달밤 윤동주
달밤&
흐르는 달의 흰 물결을 밀쳐
여윈 나무그림자를 밟으며
북망산(北邙山)을 향(向)한 발걸음은 무거웁고
고독(孤獨)을 반려(伴侶)한 마음은 슬프기도 하다.
누가 있어만 싶은 묘지(墓地)엔 아무도 없고,
정적(靜寂)만이 군데군데 흰 물결에 폭 젖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닭 윤동주
닭&
한 간(間) 계사(鷄舍) 그너머 창공(蒼空)이 깃들어
자유(自由)의 향토(鄕土)를 잊은 닭들이
시들은 생활(生活)을 주잘대고
생산(生産)의 고로(苦勞)를 부르짖었다.
음산(陰酸)한 계사(鷄舍)에서 쏠려나온
외래종(外來種) 레그혼,
학원(學園)에서 새무리가 밀려나오는
삼월(三月)의 맑은 오후(午後)도 있다.
닭들은 녹아드는 두엄을 파기에
아담(雅淡)한 두 다리가 분주(奔走)하고
굶주렸던 주두리가 바지런하다.
두 눈이 붉게 여므도록―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돌아와 보는 밤 윤동주
돌아와 보는 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延長)이옵기에―
이제 창(窓)을 열어 공기(空氣)를 바꾸어 들여야 할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房)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 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둘 다 윤동주
둘 다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끝없고
바다도 끝없고
바다에 돌 던지고
하늘에 침 뱉고
바다는 벙글
하늘은 잠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또 다른 고향 윤동주
또 다른 고향(故鄕)
고향(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房)은 우주(宇宙)로 통(通)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또 태초의 아침 윤동주
또 태초(太初)의 아침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電信柱)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啓示)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罪)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무서운 시간 윤동주
무서운 시간(時間)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잎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呼吸)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들어 보지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바람이 불어 윤동주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理由)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理由)가 없을까,
단 한 여자(女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時代)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반딧불 윤동주
반딧불&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버선본 윤동주
버선본
어머니
누나 쓰다 버리 습자지는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드니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걸.
어머니
내가 쓰다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드니
천 위에다 버선본 놓고
침발려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 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별 헤는 밤 윤동주
별 헤는 밤
계절(季節)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來日)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靑春)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하나에 추억(追憶)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동경(憧憬)과
별하나에 시(詩)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小學校)때 책상(冊床)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異國) 소녀(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쓰․짬' `라이넬․마리아․릴케' 이런 시인(詩人)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병아리 윤동주
병아리
`뾰, 뾰, 뾰,
엄마 젖좀 주'
병아리 소리.
`꺽, 꺽, 꺽,
오냐 좀 기다려'
엄마닭 소리.
좀 있다가
병아리들은
엄마 품 속으로
다 들어갔지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병원 윤동주
병원(病院)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病院)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女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日光浴)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女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病)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病)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試鍊), 이 지나친 피로(疲勞),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여자(女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花壇)에서 금잔화(金盞花) 한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病室)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女子)의 건강(健康)이―아니 내 건강(健康)도 속(速)히 회복(回復)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봄 윤동주
봄&
봄이 혈관(血管)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까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비둘기 윤동주
비둘기&
안아 보고 싶게 귀여운
산비둘기 일곱마리
하늘끝까지 보일 듯이 맑은 공일날 아침에
벼를 거두어 빤빤한 논에
앞을 다투어 모이를 주으며
어려운 이야기를 주고 받으오
날씬한 두 나래로 조용한 공기를 흔들어
두 마리가 나오
집에 새끼 생각이 나는 모양이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비로봉 윤동주
비로봉(毘盧峰)&
만상(萬象)을
굽어 보기란―
무릎이
오들오들 떨린다.
백화(白樺)
어려서 늙었다.
새가
나비가 된다.
정말 구름이
비가 된다.
옷 자락이
칩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비애 윤동주
비애(悲哀)&
호젓한 세기(世紀)의 달을 따라
알 듯 모를 듯한 데로 거닐고저!
아닌 밤중에 튀기듯이
잠자리를 뛰쳐
끝없는 광야(曠野)를 홀로 거니는
사람의 심사(心思)는 외로우려니
아― 이 젊은이는
피라밋처럼 슬프구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사랑스런 추억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追憶)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停車場)에서
희망(希望)과 사랑처럼 기차(汽車)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汽車)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동경교외(東京郊外) 어느 조용한
하숙방(下宿房)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希望)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汽車)는 몇 번이나 무의미(無意味)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停車場)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사랑의 전당 윤동주
사랑의 전당(殿堂)
순(順)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殿)에 들어갔던 것이냐?
우리들의 전당(殿堂)은
고풍(古風)한 풍습(風習)이 어린 사랑의 전당(殿堂)
순(順)아 암사슴처럼 수정(水晶)눈을 나려감어라.
난 사자처럼 엉크린 머리를 고루련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성(聖)스런 촛대에 열(熱)한 불이 꺼지기 전(前)
순(順)아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창(窓)에 부닥치기 전(前)
나는 영원(永遠)한 사랑을 안은 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森林)속의 아늑한 호수(湖水)가 있고
내게는 험준한 산맥(山脈)이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산골물 윤동주
산골물
괴로운 사람아 괴로운 사람아
옷자락 물결 속에서도
가슴 속 깊이 돌돌 샘물이 흘러
이 밤을 더불어 말할 이 없도다.
거리의 소음과 노래 부를 수 없도다.
그신듯이 냇가에 앉았으니
사랑과 일을 거리에 맡기고
가만히 가만히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산림 윤동주
산림(山林)
시계(時計)가 자근자근 가슴을 때려
불안(不安)한 마음을 산림(山林)이 부른다.
천년(千年) 오래인 연륜(年輪)에 짜들은 유암(幽暗)한 산림(山林)이,
고달픈 한몸을 포옹(抱擁)할 인연(因緣)을 가졌나 보다.
산림(山林)의 검은 파동(波動)우으로부터
어둠은 어린 가슴을 짓밟고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바람이
솨― 공포(恐怖)에 떨게 한다.
멀리 첫여름의 개구리 재질댐에
흘러간 마을의 과거(過去)는 아질타.
나무틈으로 반짝이는 별만이
새날의 희망(希望)으로 나를 이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산울림 윤동주
산울림&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혼자 들었다,
산울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삶과 죽음 윤동주
삶과 죽음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序曲)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사람은―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恐怖)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하늘 복판에 알 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者)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 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者)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勝利者) 위인(偉人)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새로운 길 윤동주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새벽이 올 때까지 윤동주
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실(寢室)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 올 게외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서시 윤동주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소년 윤동주
소년(少年)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 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少年)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은 어린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詩)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學費) 봉투(封套)를 받아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슬픈 족속 윤동주
슬픈 족속(族屬)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십자가 윤동주
십자가(十字架)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아우의 인상화 윤동주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운 대답(對答)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애기의 새벽 윤동주
애기의 새벽
우리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양지쪽 윤동주
양지(陽地)쪽
저쪽으로 황토(黃土) 실은 이 땅 봄바람이
호인(胡人)의 물레바퀴처럼 돌아 지나고
아롱진 사월태양(四月太陽)의 손길이
벽(壁)을 등진 설운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
지도(地圖)째기 놀음에 뉘 땅인 줄 모르는 애 둘이
한 뼘 손가락이 짧음을 한(恨)함이어
아서라! 가뜩이나 엷은 평화(平和)가
깨어질까 근심스럽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위로 윤동주
위로(慰勞)&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病院) 뒤뜰 난간과 꽃밭 사이 사람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옥외(屋外) 요양(療養)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치어다 보기 바르게―
나비가 한 마리 꽃밭에 날아 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란 날개를 파득거려도 파득거려도 나비는 자꾸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가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는 끝없는 실을 뽑아 나비의 온몸을 감아 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이보담 무수한 고생끝에 때를 잃고 병(病)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慰勞)할 말이― 거미줄을 헝클어버리는 것밖에 위로(慰勞)의 말이 없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유언 윤동주
유언(遺言)&
후어ㄴ한 방(房)에
유언(遺言)은 소리 없는 입놀림.
바다에 진주(眞珠)캐려 갔다는 아들
해녀(海女)와 사랑을 속삭인다는 맏아들
이 밤에사 돌아오나 내다 봐라―
평생(平生) 외롭던 아버지의 운명(殞命)
감기우는 눈에 슬픔이 어린다.
외딴 집에 개가 짖고
휘양찬 달이 문살에 흐르는 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이적 윤동주
이적(異蹟)
발에 터부한 것을 다 빼어 버리고
황혼(黃昏)이 호수(湖水) 위로 걸어 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 보리이까?
내사 이 호수(湖水)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 온 것은
참말 이적(異蹟)이외다.
오늘 따라
연정(戀情), 자총, 시기(猜忌), 이것들이
자꾸 금(金)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餘念) 없이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湖面)으로 나를 불러 내소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자화상 윤동주
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장 윤동주
장
이른 아침 아낙네들은 시들은 생활(生活)을
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
업고 지고……안고 들고……
모여드오 자꾸 장에 모여드오.
가난한 생활(生活)을 골골이 버려놓고
밀려가고 밀려오고……
제마다 생활(生活)을 외치오……싸우오.
왼하로 올망졸망한 생활(生活)을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쓴 생활(生活)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장미 병들어 윤동주
장미(薔薇) 병들어
장미 병들어
옮겨 놓을 이웃이 없도다.
달랑달랑 외로이
황마차(愰馬車) 태워 산(山)에 보낼거나
뚜― 구슬피
화륜선(火輪船) 태워 대양(大洋)에 보낼거나
푸로페라 소리 요란히
비행기(飛行機) 태워 성층권(成層圈)에 보낼거나
이것 저것
다 그만두고
자라가는 아들이 꿈을 깨기 전(前)
이내 가슴에 묻어다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조개껍질 -1- 윤동주
조개껍질 -1-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언니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잃은 조개껍데기
한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닷물소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조개껍질 -2- 윤동주
조개껍질 -2-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 언니 바다가에서
주어 온 조개껍데기
여기여긴 북쪽 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 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다물 소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참새 윤동주
참새
가을 지난 마당은 하이얀 종이
참새들이 글씨를 공부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로 받아 읽으며
두 발로는 글씨를 연습하지요.
하루종일 글씨를 공부하여도
짹자 한 자밖에는 더 못 쓰는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참회록 윤동주
참회록(懺悔錄)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만이십사년일개월(滿二十四年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창 윤동주
창(窓)&
쉬는 시간(時間)마다
나는 창(窓)녘으로 갑니다.
―창(窓)은 산 가르침.
이글이글 불을 피워주소,
이 방에 찬 것이 서립니다.
단풍잎 하나
맴도나 보니
아마도 자그마한 선풍(旋風)이 인 게외다.
그래도 싸느란 유리창에
햇살이 쨍쨍한 무렵,
상학종(上學鐘)이 울어만 싶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창공 윤동주
창공(蒼空)
그 여름날
열정(熱情)의 포푸라는
오려는 창공(蒼空)의 푸른 젖가슴을
어루만지려
팔을 펼쳐 흔들거렸다.
끓는 태양(太陽)그늘 좁다란 지점(地點)에서.
천막(天幕)같은 하늘밑에서
떠들던 소나기
그리고 번개를,
춤추던 구름은 이끌고
남방(南方)으로 도망하고,
높다랗게 창공(蒼空)은 한폭으로
가지 위에 퍼지고
둥근달과 기러기를 불러왔다.
푸드른 어린 마음이 이상(理想)에 타고,
그의 동경(憧憬)의 날 가을에
조락(凋落)의 눈물을 비웃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초 한 대 윤동주
초 한 대
초 한 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光明)의 제단(祭壇)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祭物)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生命)인 심지(心志)까지
백옥(白玉)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려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暗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祭物)의 위대(偉大)한 향(香)내를 맛보노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코스모스 윤동주
코스모스&
청초(淸楚)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少女)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庭園)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오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태초의 아침 윤동주
태초(太初)의 아침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前)날 밤에
그 전(前)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트루게네프의 언덕 윤동주
트루게네프의 언덕
나는 고개길을 넘고 있었다…… 그 때 세 소년(少年)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等) 폐물(廢物)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充血)된 눈, 색(色)잃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襤褸), 찢겨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少年)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惻隱)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時計), 손수건,……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勇氣)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 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다정(多情)스레 이야기나 하리라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充血)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 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팔복 윤동주
팔복(八福)
부제: 마태복음(福音) 오장(五章) 삼(三) ― 십이(十二)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永遠)히 슬플 것이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편지 윤동주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한난계 윤동주
한난계(寒暖計)
싸늘한 대리석(大理石) 기둥에 모가지를 비틀어맨 한난계(寒暖計),
문득 들여다볼 수 있는 운명(運命)한 오척육촌(五尺六寸)의 허리 가는
수은주(水銀柱),
마음은 유리관(琉璃管)보다 맑소이다.
혈관(血管)이 단조(單調)로워 신경질(神經質)인 여론동물(輿論動物),
가끔 분수(噴水)같은 냉(冷)침을 억지로 삼키기에
정력(精力)을 낭비(浪費)합니다.
영하(零下)로 손가락질 할 수돌네 방(房)처럼 추운 겨울보다
해바라기 만발(滿發)한 팔월교정(八月校庭)이 이상(理想) 곱소이다.
피끓을 그날이―
어제는 막 소낙비가 퍼붓더니 오늘은 좋은 날씨올시다.
동저고리 바람에 언덕으로, 숲으로 하시구려―
이렇게 가만 가만 혼자서 귓속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아마도 진실(眞實)한 세기(世紀)의 계절(季節)을 따라―
하늘만 보이는 울타리 안을 뛰쳐,
역사(歷史)같은 포지션을 지켜야 봅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해바라기 얼굴 윤동주
해바라기 얼굴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햇비 윤동주
햇비
아씨처럼 나린다
보슬보술 햇비
맞아 주자 다 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 엿자 자라게
햇님이 웃는다
나 보고 웃는다.
하늘다리 놓였다
알롱달롱 무지개
노래하자 즐겁게
동무들아 이리 오나
다 같이 춤을 추자
햇님이 웃는다
즐거워 웃는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황혼 윤동주
황혼(黃昏)&
햇살은 미닫이 틈으로
길죽한 일자(一字)를 쓰고 …… 지우고 ……
까마귀떼 지붕 위로
둘, 둘, 셋, 넷, 자꾸 날아 지난다.
쑥쑥, 꿈틀꿈틀 북(北)쪽 하늘로,
내사……
북(北)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 싶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황혼이 바다가 되어 윤동주
황혼(黃昏)이 바다가 되어
하루도 검푸른 물결에
흐느적 잠기고……잠기고……
저― 웬 검은 고기떼가
물든 바다를 날아 횡단(橫斷)할고.
낙엽(落葉)이 된 해초(海草)
해초(海草)마다 슬프기도 하오.
서창(西窓)에 걸린 해말간 풍경화(風景畵).
옷고름 너어는 고아(孤兒)의 설움.
이제 첫 항해(航海)하는 마음을 먹고
방바닥에 나뒹구오……뒹구오……
황혼(黃昏)이 바다가 되어
오늘도 수(數)많은 배가
나와 함께 이 물결에 잠겼을게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흐르는 거리 윤동주
흐르는 거리
으스럼히 안개가 흐른다. 거리가 흘러간다. 저 전차(電車), 자동차(自動車), 모든 바퀴가 어디로 흘리워 가는 것일까? 정박(碇泊)할 아무 항구(港口)도 없이, 가련한 많은 사람들을 싣고서, 안개속에 잠긴 거리는,
거리 모퉁이 붉은 포스트상자를 붙잡고 섰을라면 모든 것이 흐르는 속에 어렴풋이 빛나는 가로등(街路燈), 꺼지지 않는 것은 무슨 상징(象徵)일까? 사랑하는 동무 박(朴)이여! 그리고 김(金)이여! 자네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끝없이 안개가 흐르는데,
`새로운 날 아침 우리 다시 정(情)답게 손목을 잡어 보세' 몇 자(字) 적어 포스트 속에 떨어뜨리고, 밤을 새워 기다리면 금휘장(金徽章)에 금(金)단추를 삐었고 거인(巨人)처럼 찬란히 나타나는 배달부(配達夫), 아침과 함께 즐거운 내임(來臨),
이 밤을 하염없이 안개가 흐른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흰 그림자 윤동주
흰 그림자
황혼(黃昏)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발자취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속으로
소리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를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黃昏)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信念)이 깊은 의젓한 양(羊)처럼
하루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