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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 시아버님의 전사戰史
호국 보훈의 달 6월이다. 시아버님을 모시고 6·25 한국 전쟁의 격전지인 다부고개 전적비를 찾아 참배를 드린다. 아버님은 전사한 동료들이 눈에 밟혔는지 연신 눈시울을 훔치신다. 나의 시아버지, 역전의 용사 김상진, 군번 0103238. 아버님의 팔짱을 끼고 언덕을 오른다. 93세 노구에서 뿜어내는 가쁜 숨결이 나의 심장에 전이된다. 형님 원수를 갚는다며 참전할 당시의 기상은 어디 갔을까. 질곡의 세월이 아버님의 기백을 앗아갔을 터.
수많은 사람이 전쟁에 희생당했지만, 시가媤家 만큼 참상을 당한 집도 드무리라. 한국 전쟁이 터지자, 시가인 의성 길거리에도 "애국 청년들이여, 조국을 지킵시다." 는 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고샅에 울려 퍼졌다. 시 백부님은 1950.8.29. 자원입대하여 포항 전투에서 돌아가셨고, 시아버지는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입대했다. 전사하신 시백부는 국가유공자, 시아버지는 참전용사로 등록되어 있다. 내가 시집 갔을 때, 시할머니는 그늘진 얼굴에 말수가 적었다. 틈날 때마다 장독 위에 정화수를 떠 놓고 두 손을 비벼 댔다.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 처럼. 전쟁 통에 잃은 맏아들 영혼을 달랬을 것이고,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된 둘째의 앞날에 안녕을 빌었음은 틀림없겠다.
전쟁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기에 6.25 한국전쟁 자체를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던 참이다.가끔 부르짖은 '애국'이란 구호는 피상적이었다. 호국의 고장이라 일컫는 칠곡군 공무원으로 발을 내딛고는 나의 의식은 시나브로 '한국전쟁사' 에 빨려들었다. 전쟁을 온몸으로 체험한 시아버님 얘기를 세상에 알려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기고 싶었다. 겪었던 무용담과 참혹한 실상을 듣고자 아버님과 마주 앉았다.
"아부님요, 아부님께서 겪었던 전쟁 이야기를 듣고 싶심더. 기록으로 남겨 후세들에게 역사를 바로 알리고, 애국하는 마음을 키워야 안 되겠심니껴?" 아버님은 지그시 눈을 감는다. 촛점 잃은 희미한 눈동자에 생기가 돋아난다. 남자는 군대 이야기할 때면 새 힘이 돋는 것처럼. 칠십 년이 훌쩍 지났으니 감회가 깊으시리라. 아버님이 평소 즐기는 막걸리를 한잔 올렸다. 꿀꺽 꿀꺽 식도를 타고 넘을 때마다 축 쳐진 목울대가 아래 위로 힘없이 움직인다.
"전쟁이 터지기 무섭게 놈들은 봇물 터지듯 밀고 들어왔지. 그때 의성 사람들은 피난을 가야할지 말아야할지 어수선했지. 큰길마다 확성기 소리, 호갈 소리 요란했지러. 형님이 나발소리 듣고 나라 지켜야한다 카매 자원입대했지. 피난에서 돌아와 늦은 모심기를 하고 있을 때였어. 군인 한 사람이 하얀 보자기에 싸인 쪼맨한 상자를 들고 오더라고. 첨엔 뭔지 몰랐지. 속에 든 뼛가루가 히야란 소리를 듣고 어무이는 혼절했다 아이가." 아버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시백부媤伯父는 입대한 지 한 달 만에 뼛가루 되어 돌아올 줄이야. 백부님은 포항전투에 중상을 입고 '23 육군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돌아가셨다.
"아부님의 입대 경위를 들려주이소."
"내가 군에 갈 때는 열아홉 살이었지. 형님이 전사했기에 어무이는 너꺼정 잘못 되면 우짜노. 안절부절 못했지러. 인민군이 물밀듯 밀려와 온 가족이 피난길에 올랐지. 여전히 길거리엔 모병을 독려하는 호갈 소리 스피커소리가 요란했어. 청년이 눈에 띄면 반강제로 도락구에 태워갔지.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길을 제촉하여 풍로라는 마을에 하루를 묵었어. 피난을 하면서도 전사한 형님이 자꾸 눈에 어른거리는 거야. 걱정하는 어무이를 안심시키고, 트럭에 올라탔어."
"맏이가 전사하고 둘째인 아부님 마져 전장에 갔으니 집안은 풍비박산 났겠군요?"
"말도 마래이, 히야가 죽은 마당에 내까지 징집됐으니, 집은 초상 분위기 아니었겠나. 대구 '남산초등학교'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대구농림학교'에서 일주일 총 쏘는 것을 배운 뒤 바로 전장에 투입됐지. 신령 '갑티재'에 배치되어 보름쯤 됐을 끼라. 의흥 쪽에서 갑티제를 향해 놈들의 탱크가 꾸역꾸역 기어 올라오더라고. 마구재비로 총을 갈겨댔어. 그때 갑티재를 못 지켰으면 와촌·하양·대구가 한 방에 갈 뿐 했지. 산만대기서 보초를 쓰던 중에 왜관, 낙동강, 다부고개에 난리벅구통 났다는 소문을 들었어. 다부고개는 더 치열했고. 다부전투에는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엄청나게 죽었어. 천평으로 흐르는 개울에 피가 흥건했다 카더라고. 군번도 없이 실탄과 양식을 나르던 지게꾼도 많이 죽었어. 소위 보국대였어. 그 사람들은 여태 아무런 보상이 없어." 시아버지내뿜는 한숨 소리에 회한이 서려 있다.
"며늘 아가야, 그때 다부고개를 지킨 장군이 누군지 아는가?"
"백선엽 장군이라 들었심더."
"맞다. 그 장군이 없었으면 대구가 함락 됐을 끼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는 유명한 말을 남긴 장군이지. 근간에 들어서 우짠 일인지 백선엽이가 무슨 일본군 압제비라며 죽어서도 올케 대접 못 받았다 카대. 심지어 묘를 파내야 칸다는 무리도 있고..." 아버님 목소리가 높아진다. 울컥 치솟는 감정을 다스리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렇다. 사람을 평가할 때 나무가 아닌 숲을, 편견이 아닌 객관적 잣대로 전체를 봐야 하거늘. 최근 들어 다부고개에 백선엽 장군을 기리는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본인보다는 '이름도 빛도 없이 유명을 달리한 지게꾼을 추모하는 위령비를 먼저 세워라.'는 유언을 장군의 딸에게 남겼단다. 배려하는 마음에 숙연해진다.
"갑령제 전투를 끝내고 아부님 전선은 어디를 향했는지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6사단 연대장(장도연)이 지휘한 장병 2,000여 명은 도락구를 타고 삼팔선을 돌파했지. 나도 그 속에 낑깄어. 가는 동안 저항 세력은 별로 없더라고. 평양을 접수하고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시월 초에 압록강 변 초산에 다다렀어. 통일되는 줄 알고 모두 만세를 불렀지. 시월 초순이지만, 날씨는 얼마나 맵던지. 손발이 얼얼하고, 귀는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어. 오줌은 누기 바쁘게 땅에서부터 얼어붙었지. 마치 무지개처럼 포물선을 그으며." 그때 입은 동상으로 인해 겨울이면 시아버지 피부는 푸릇푸릇 부어오르고, 효자손은 환부를 연신 긁어댔다.
"아부님,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 온 상황을 이야기 해 주이소."
"초산에 도착한 지 사흘 만에 중공군의 대규모 기습공격이 시작되었어. '중공군에게 양 사방 수백리가 포위됐다. 부대이동은 어렵다. 중대별로 분산하여 빠져나가라.' 는 명령이 떨어저 분대별로 분산 이동했어. 총알이 콩 볶아대듯 요란하더군. 퇴각하면서도 간헐적으로 반격 했어. 나도 놈들을 향해 사정없이 갈겨댔지. 아마 내 총에 여러사람 희생 되었을지도 몰라. 그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 중대원 150명 가운데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은 나와 박명호, 두 사람뿐이었어. 천운이지. 놈들의 수류탄 파편에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박명호는 남해가 고향이야.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 그저 하늘에 목숨을 맡겼어. 낮에는 숨어 지내고 밤에 걸었어. 달포 만에 겹겹이 쌓인 포위망을 벗어나 평북 신북청에 도착했지러. 소위 오백 리에 걸친 포위망이라 카더라고." 아버님은 그때를 생각하시는지 명주실보다 질긴 한숨을 토해 내신다. 명치가 아린다.
"거밋줄 처럼 촘촘한 포위망을 어떻게 벗어났는지요?"
"나와 박명호는 옷을 훔쳐 입고 민간인 행세를 했지. 그런 와중에도 군번만큼은 야무지게 몸속에 챙겼지러. 팔이 달아나 한쪽이 헐렁한 박명호는 마치 들판에 세워놓은 허수아비 같았어. 쪽박 하나 들고 남의 삽짝을 두드리며 구걸했어. 헛간이나 움막에서 지새며 남쪽으로 무작정 걸었지. 불똥이 튄 옷은 구멍이 숭숭 뚫렸고. 사십여 일 동안 이발과 세수를 못 했으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 십여 일이 지날 쯤, 미 1사단 장병에께 붙잡혔어. 며칠 동안 모질게 족치며 추달 하더군. 우리를 인민군으로 의심 했을 모양이야. 사흘 만에 겨우 혐의에서 벗어나 원대복귀 했어. 2,000명 병력이 150명 정도 남아 있더라고. 모두 죽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혀갔겠지." 아버님이 무작정 헤맨 사십여 일, 그 여정은 어땠을까. 허름한 헛간에서 혹은 원두막에서, 비바람을 막아줄 언덕이면 그곳이 바로 방이고 은신처였으리라. '샛별이 돋아날 때 눈이 뜨여지면 내가 살아 있구나.' 라는 아버님 술회에 코끝이 찡해온다.
"전멸하다시피 했군요. 전우를 많이 잃어 상심 컸겠군요. 다음 전황은요?"
"복귀한 부대에서 잔병과 신병들로 전열을 정비하더군. 평북 덕천을 반격했지만 사기가 떨어진 군인들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다시 평양으로 후퇴했지.덕천에서 평양에 도착하기까지 삼 일 걸렸어. 발엔 물집이 잡히고 동상에 걸려 발이 퍼렇게 멍들었고, 발가락마다 피를 물고 있었어. 1950. 12. 3. 평양에 도착한 군인들은 미군이 정해 준 막사에서 깊은 잠에 빠졌어. 칠흑 같은 밤중에 사이렌이 요란히 울더군. 후퇴하라는 명령이었지. 미군이 먼저 빠져나가고, 엉겁결에 앞사람을 따라 무조건 내달았지. 그 앞이 높은 언덕인 줄 모른 채. 언덕에 떨어지면서 오른쪽 다리와 오른팔이 부러졌어. 뿔뿔이 사라졌지만, 전우인 박명호만 곁에서 나를 지켜주고 있더군. 그 친구를 여태 잊을 수 없어. 그것을 살신성인이라 하겠지. 그사람은 여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버님의 주름진 골을 따라 흐르던 눈물이 이내 말라붙는다. 나이가 듦에 따라 눈물도 줄어드는 모양이다.
"흩어진 뒤로 아버님의 행적은요?"
"날이 밝아오자, 신작로에는 피난 행렬이 기차곱배처럼 길었어. 피난민 대열에 인민군 폭격기가 무차별 폭탄을 퍼붓더군. 많은 사람이 죽고 쓰러지고,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어. 아수라장을 벗어나는가 했더니, 대동강이 앞을 가로 막았어. 굴신하기 어려워 강을 건널 엄두조차 못 냈지. 그때 지게에 엄마를 지고 가는 피난민에게 애원했어. 그 양반이 나를 지게에 얹어 강을 건네주었지. 사실인 즉, 지겟군도 '징집을 피하고자 엄마가 환자인 척, 지고 다닌다.'며 속임수를 썼다더군. 우여곡절 끝에 야전병원에 가는 차를 탈 수 있었어. 사리원에 있는 임시 야전병원(가정집)에서 하루 머물다 여덟째 되는 날, '서울수도육군병원'에 후송됐지. 기차간에서도 부상자가 많이 죽었어. 주검들은 바로 시체 칸으로 던져 넣더군.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했지." 아버님의 얼굴이 가늘게 일그러진다.
"그 시절, 치료는 어떻게 하던가요?"
"서울수도육군병원 의사는 '다리를 잘라야 한다.' 는 말에 '죽어도 못 짜린다.'며 과물 질렀지러. 군위관 유대령(성명 미상)이 환자의 뜻이 완고하니 그냥 치료하라 지시하더군. 수술대에 묶어놓고 생재비로 깁스하는 바람에 실신했어. 한 나절 동안 깨어나지 못했지. 그곳에서 삼 일 머물다 대구 대건중학교에 설치된 '27육군병원'에 옮겨 삼개월 가량 치료 받았어.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상태에 복귀 명령이 떨어지더군. 운전할 줄 안다는 거짓말이 통해 수송부에 배치되었지. 운전병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았았으니까. 지원병이 43명이나 됐어. 그 가운데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는데. 십삼 명을 차출하여 광주 송정리에 위치한 운전기술학교에 입교해 석 달 동안 운전 교육을 받았어. 교육 중에 세 사람이 죽었어. 제대로 치료 못하고 못 먹었으니. 교육을 마치고 복귀하니 강릉 있던 부대가 대구로 옮겨졌더라고."
"아버님, 다리가 다친 상태로 혹독한 훈련을 받으셨군요, 요즘 같으면 상이용사로 제대할 수 있었을 텐데?"
"그림이 떡이지. 전쟁통에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한사람이 절실하니까. 대구 신암동에 위치한 '철도공사'에 한 달 머무는 동안 십오 명을 차출하여 제주도에 있는 자동차 학교로 갔어. 그곳에서 운전 조교로 아홉 달 조수질 했지. 그때 너희 시엄마와 결혼했지. 그 당시만 해도 휴가란 무척 까다로웠어. 아부지가 군수, 면장, 동장 도장을 받아 관보를 쳐 며칠 휴가 받아 사모관대 쓰고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어. 혼례 후 재행 걸음도 몬 가고 귀대했어. 그길로 제대할 때까지 삼 년 동안 휴가 한 번 몬 갔어."
"어무이가 안 보고 싶던가요"
막상 결혼 했지만, 할망구가 우예 생겼는지 통 기억이 안 나더군. 고향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 명절이나 대보름날, 둥근 달이 휘영청 떠오르면 아부지 엄마 모습이 간절했어. 죽은 형은 말할 수 없고. 때론 마누라 생각도 더러는 났지만... 제주도에서 부산 부두 작업장에서 88시간 대형 차량 운전 교육을 받았어. 추레라가 달린 큰 자동차를 맡기더군. 미군들이 운전할 수 있게 만든 큰 차를 왜소한 내가 운전하기에는 무척 버거웠어. 곱배 붙은 긴 차를 후진하기 무척 꼬꾸랍더라고. 그 일을 1952년까지 했어."
아버님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휴전 되었지만, 바로 못하고 약 오 년에 걸친 군생활 끝에 1955. 1. 1. 제대를 명 받았다. 계급은 하사! 나는 이 계급이 대장보다 더 우러러 보인다. 전쟁을 치런 군 생활은 아버님께는 아픈 기억이자 자부심일 것이다. 여태 아버님 방에는 군복과 모자, 군번줄이 걸려 있다. 비상사태가 돌발하면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준비가 된 것처럼. 6.25전쟁이 발발 73년, 정전협정 70년이 되었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거의 세상을 떠나고, 기성세대의 안보 의식은 희미해지고 있다. 전쟁의 교훈은 크며 평화는 소중한 것일진대.... 아버님이 겪은 전쟁사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돌아가시기 전에 바치고 싶다.
다부고개를 내려다보는 유학산, 숱한 주검을 품은 유학산 허리에 검은 구름이 감겨온다. 장맛비가 후두두 우산을 때린다. 떨어지는 빗소리는 넋들을 향한 진혼곡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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