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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조선 명종 1년(1546) 부장공 김언광의 묘소수호를 위해 건립한 재사이다.
김언광은 딸만 셋이 있어(첫째 사위 의성 김씨 김인, 둘째 사위 청도 김씨 김봉상, 셋째 사위 고령 박씨 박대령) 유명에 의하여 외손 봉사하게 되었다. 그후 인조 16년(1638)에 재실은 무너지고 사당만 남게 되자 김인의 5대손인 만휴와 박대령의 후손인 정량이 숙종 13년(1687)에 중건하였다.
건물은 양지암마을 좌측편 야산자락에 남향하고 있다. 전면에는 경사진 대지에 중층 루각건물인 수우당을 배치하고, 그 뒤편 한단 높은 축대위에 양지암과 대문간, 유사실이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양지암은 정면 4칸, 측면 2칸 납도리집이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큰방 2통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정지 2통칸, 우측에 온돌방 1칸, 도장방 1칸이 앞·뒤로 놓여 있다. 큰방 2칸은 앞·뒤로 퇴간을 두었는데, 앞쪽에 툇마루를 깔았고 뒤쪽은 통로 1칸에 제수방 1칸을 두었다. 정지는 내정으로 개방되어 있고, 도장방은 우물마루 바닥에 큰방쪽으로 문을 내어 이용하고 있다. 기단은 자연석을 높이 5척 가량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아 네모기둥을 세웠다. 상부가구는 재실 건축으로는 특이하게 2고주 5량가이고, 정지상부는 3량가로 꾸몄다.
지붕은 안방부분은 맞배지붕이고, 양측은 가작지붕을 설치한 공자형 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수우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몰익공계 소로수장집이다. 평면구성은 루하층을 통로와 창고로 사용하고, 루상층은 우물마루를 깔고, 안마당을 제외한 삼면에 판벽을 치고 쌍여닫이 띠장 널문을 달아 놓았다. 특히 어칸에는 영쌍창을 설치한 홈 흔적이 남아 있고, 각칸의 창호폭은 조금씩 틀리다. 주상은 몰익공으로 꾸미고, 창방과 정혀사이에는 소로 2개씩 수장시켰다. 상부가구는 건실한 굴도리 5량가이고,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유사실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굴도리 익공계이다. 전면주상은 첨자가 있는 이익공이고, 후면은 몰익공이다. 대문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3량가 맞배지붕이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문을 내고 양측은 온돌방을 꾸몄다.
안채
수우당 안
부엌
안채서 내려다 본 아덩과 수우당
수우당과 안마당
수우당 안쪽
동쪽 측면
야성송씨 괴동재사(冶城宋氏 槐洞齋舍)
이 재사는 야성 송씨(冶城 宋氏) 시조인 맹영(孟英)의 14대손인 영유현령(永柔縣令)을 지낸 윤(綸)의 제단(祭壇)과 그의 아들인 석충(碩忠)을 비롯한 후손들의 묘소수호를 위해 1716년에 건립되었다.
송석충의 자(字)는 원로(元老), 호(號)는 눌재(訥齋)이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종(成宗) 8년(147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금남(錦南) 최부(崔溥)등 당대의 명현들과 깊게 교류하면서 정지교부계회도(情志交孚契會圖)를 남기기도 하였다. 조선전기의 정치․사회적 폐단을 개혁하여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냈던 사림파의 초기 구성원으로 활동하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영주로 낙향하여 영주의 입향조가 되었다.
재사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자형 가옥으로 경북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로 소박하고 검소하다. 상부가구는 견실한 3량가이고,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안마당
안채 모습
오래된 마루, 구멍난 마루장
뒷쪽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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