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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연건강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밝은바다
서울 중림동 1984 서울 중림동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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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안 풍경 사진가 김기찬 | ||||||||||||
열린광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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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은 어려운 살림에 한 번도 못간 여행으로 평생의 원을 풀었다. 전시장을 찾차온 중림동 사람들은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각각의 삶을 돌이켜 보며 여기저기서 한숨과 눈물, 그리고 감탄의 놀라움이 쏟아졌다. 찢어지게 어려웠던 가난의 설움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사진 속에는 몰라보게 성장한 그들의 자녀도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았을까. 도심 개발에 밀려 생각지도 않게 시골로 내려간 사람, 이젠 세상 사람이 아닌 이의 가족,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찾아 곳곳으로 수소문해 다니며 바쁘게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의 ‘골목안 풍경’ 사진 작업은 2010년을 얼마두지 않고 저 세상으로 떠남으로써 그의 작업도 그렇게끝났다. 빈민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그. 지금은 어느 하늘에 있는지 문득 그리워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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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의 '골목 안 풍경'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골목만을 일관되게 찍어온 김기찬 사진가의 '골목 안 풍경'들이었다.
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는데 반복되는 일상의 풍경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찾던중, 하루는 장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노점상들을 따라나선 것이 그네들이 살고 있는 골목 풍경을 찍게된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김기찬
들이댄다는 것은 동네에서 쫓겨나기 알맞은 행동이었다. 사실 젊은 엄마들
을 찍을 수 있었던 시기는 내 나이오십이 넘어서였다.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접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을 향해 사진 찍는 행위가
그들의 생활 속에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길 원했다. 그리고 해가 거듭될수록 나는 자연스레 골목
안 사람이 되어갔고 그들도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를 의논 상대로 생각해 주기도
했다. 중림동은 참으로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처음 그 골목에 들어서던 날, 왁자지껄한 골목의 분위기는
내 어린 시절 사직동 골목을 연상시켰고, 나는 곧바로 '내 사진 테마는 골목 안 사람들의 애환, 표제는 골목
안 풍경, 이것이 내 평생의 테마이다'라고 결정해버렸다. 그리고 지금가지 이러한 나의 결정을 한 번도
후회해 본 일이 없다.' - 김기찬 사진선집 '골목 안 풍경'의 작가노트에서
골목길에서 상펴고 이웃과 밥먹는 사람들. 동네 강아지들. 그시절에 골목은 길이 아니라 앞마당이고
부엌도 되고 마루도 되는 사람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김기찬
사진가의 시각으로 보는 우리시대의 골목안 풍경'이었다. 아직도 일반인들에게는 문턱이 높기만한 미술관이
라는 공간을 '어떻게 하면 대중들이 쉽고 편하게 오도록 할까?' 고민 끝에 만든 자리라고 한다.
동 매축지, 안창마을, 우암동, 거제동, 용호동 등. 부산의 골목이란 골목은 다 나오는 것 같았다. 심지어 '번화
하고 화려할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남포동 한켠에도 오래된 골목길이 있어 놀랬다'고 사진가는 말했다.
ⓒ문진우
었는데 아파트라는 물건이 생기고 난후 골목은 점차 주변으로 밀려 이제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부산만 해도 재건축, 재개발에 밀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김기찬의 골목 안 풍경
출처: http://zazak.tistory.com/1580
단상 하나: 어린 시절, 시골에서 올라온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부러웠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수박서리를 하고, 과수원의 나무며,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이야기속의 시골고향은 그 자체로 낭만적이었다. 하여 회색빛 도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만 살아온 나로선 그들의 이야기가 못내 부러웠다. 나에겐 평생을 추억을 그런 낭만적인 고향이 없으니까.
그건 3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있어서 서울의 좁은 골목길은 반드시 떠나거나 극복해야 될 대상이었지, 아련한 추억의 장소가 될 수 없었다. 누군가 나에게 ‘고향이 어디에요?’ 그러면, ‘서울입니다’라고 괜히 머쓱해하며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단상 둘: 어린 시절보다 나아졌지만, 초등학교때 숙제나 체험 때문에 미술관에 가는 게 제일 싫었다. 세기의 명화니 불후의 명작이니 하는 말들이 난무했지만 어린 나로선 미술작품을 보면서 전혀 감흥이 일어나질 않았다.
하여 뛰면서 후다닥 관람하고 나온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지금은 그때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제대로 미술관 관람을 했는지 난감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사진도 비슷하다. 유명작가의 사진을 보면서 ‘이게 왜 유명한 거지?’라고 스스로에게 반문을 던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예술 작품을 보면서 이해가 가질 않아 머리를 쥐어 뜯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런 나에게 김기찬 작가의 유고 사진집인 <골목안 풍경>은 보는 내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맛보게 되었다. 왜냐고? 거기엔 내가 살던 서울의 골목길이 고스란히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김기찬 작가는 30여년을 매주 일요일마다 서울의 골목길을 기웃거리며 찍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는 사람을 가까이 가서 클로즈업해서 찍는 것을 미안해했다. 하여 멀리서 찍고, 친해지고 나서야 부탁해서 가까이에서 찍었다고 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따스한 감성을 동시에 지닌 멋진 작가의 풍모라 아니할 수 없다.
한때 사진계에선 ‘리얼리즘’이란게 유행했다고 한다. 하여 가난이 넘치는 골목길 풍경을 낭만적이고 따스하게 그려낸 김기찬의 작품은 소홀한 대접을 받았단다. 상위 10% 이상의 부자들이 모든 것을 가지고, 가진 것이 없어서 변두리로 쫓겨나거나 시멘트와 슬레이트 따위로 얼기설기 지은 집에서 다닥다닥 붙어서 살 수 밖에 없는 소시민의 모습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문제점을 보여주는 좋은 대상이었고, 그런 식으로 많은 사진작가들이 찍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는 도시에서 골목길은 이제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를 지낸 많은 도시인들에게 골목은 생각만 해도 넉넉한 마음의 고향이 될 수도 있다.
생활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다닥다닥 붙어살던 서울의 골목길은 모두의 사랑방이자 공부방이자 누군가에겐 부엌의 확대공간이었다. 우린 그곳에서 함께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밥을 먹고, 친구들과 함께 놀기도 했다.
김기찬은 그런 골목의 풍경을 모조리 찍었다. 때론 멋낸 할머니와 아주머니가 있고, 때론 동생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들의 모습에선 때론 삶의 고단함이 느껴지지도 하지만, 가난 속에서도 구김살 없는 미소는 마음에 알 수 없는 파문을 끝도 없이 일으킨다.
골목길에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와 고양이도 함께 한다. 때론 어떤 할아버지가 크게 취했는지 실례하는 장면도, 미니스커트를 입고 한껏 멋을 낸 아가씨가 잡히기도 한다.
<골목안 풍경 전집>의 장점은 사진이 쉽다는 것이다. 특별히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소시민의 삶의 표정을 고스란히 포착하고 따스한 감성이 녹아있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물론 거기서도 골목길이 파괴되는 현장은 포착된다.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파괴된 골목길과 거기에 힘겨운 한숨을 토해내는 한 할아버지의 모습은 끝을 알 수 없는 절망강과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때론 아파트와 대비되는 끝없이 이어지는 달동네의 계단은 올라가는 아이에겐 너무나 힘이 부쳐 보인다.
그러나, 조그만 아이가 청년이 되고, 골목에서 만난 연인이 부부가 되어 아이를 낳는 등의 모습을 잡아낸 마지막 6장에선 감동마저 일어난다. <골목안 풍경 전집>은 말 그대로 30여년 동안 김기찬 작가가 수고한 모든 작품의 모음집이다. 특히 ‘한순간이 보여준 한평생’이란 제목아래, 자신에게 사진을 찍힌 인물들을 찾아서 몇 년 혹은 몇 십년 후의 모습을 찍어낸 광경에선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감정의 파문이 일어난다
처음엔, 공지영이나 신경숙 같은 작가가 왜 ‘김기찬’ 이란 처음 듣는 사진작가의 작품집에 발문을 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생전 처음 그의 이름을 들었어도 그의 작품집을 보는 순간, 얼마나 작가가 애정을 가지고 골목길을 대했는지 알게 된다.
그곳은 우리 모두의 고향이기도 했다. 비록 볼품 없고 가난에 찌든 곳이지만, 그곳에서도 사람은 살았고 정이 있었고 추억은 가득했다. 아파트에서 살지만 이곳은 분명 살기엔 편리하고 좋지만, 바로 옆에 사는 이웃과도 말 한번 섞지 않고 10년 이상을 살아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아니던가?
그것에 비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길에선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벌이 있는지 다 알 수 밖에 없었다. 하여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함께 했다. 때론 이웃끼리 싸움도 벌어졌지만, 어느샌가 오해가 풀려 다시 ‘형님아우’하면서 지내기도 했다. 오늘날의 삶은 그때보다 덜 고단하고 덜 수고럽지만, 그때만큼 인정미가 넘치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말대로 1천만이 넘는 대도시에 김기찬이 찍었던 골목길이 존재한다는 것은 언젠가는 ‘정리될 수 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서울을 찾는 외국인에게 골목길은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는 공간이었다. 하여 우리 모두는 그걸 부수거나 변방으로 몰아내서 감추기에 급급했다.
<골목안 풍경 전집>이 나에게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오두막을 구입한 이후, 항상 멋진 사진만을 찍고 싶어하는 필자에게 ‘일상의 기록이 위대하다’라는 평범하지만 커다란 진리를 다시금 일깨워주었다는 점이다.
앙코르와트나 그랜드 캐년 같은 외국의 풍광이나 이름조차 모르는 꽃과 새들을 익스트림 클로즈업 한 사진들에 열광하는 오늘날에 평범하다 못해 진부해 보이는 김기찬의 사진은 외면받기에 딱 좋아 보인다. 그러나 그의 작품엔 아무리 인터넷에서 만나는 삐까번쩍한 사진들이 줄 수 없는 진한 감동이 녹아있고, 위대한 작가정신이 살아숨쉬고 있다.
그건 한 대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30여년 동안 공을 들여 찍어온 한 사진가의 체취와 마음이 녹아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골목안 풍경 전집>을 당신에게 권한다. 당신이 만약 나처럼 서울에서 나고 자란지 20여년이 넘게 지났다면, <골목안 풍경 전집>은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서울의 골목안 풍경은 너무나 서로 비슷하다. 가진 게 없으니까 역설적으로 서로 다른 곳에 살아도 풍경은 비슷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이제 사라져 영영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골목안 풍경 전집>이 아니라면 우린 우리의 소중한 추억앨범을 평생 가지지 못할 뻔 했다.
하여 나는 김기찬 사진작가에게 너무나도 고맙다. 2005년 향년 68세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가 만약 좀 더 살아계셨다면, 우리의 골목길 풍경을 좀 더 찍어서 우리에게 보여줬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골목안 풍경 전집>은 그 자체로도 우리에게 너무나 귀중한 보물이다. 거기에 찍혀있는 풍경이 1천만 서울시민의 모두의 ‘추억앨범’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아니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문화유산으로 전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