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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씨는 서승, 서준식씨의 동생이다.
제일교포로 한국인의 이름을 지니고 살아가는 경계인의 삶을 살고 있는 분이다.
일본에서도 이방인이며 한국에서도 그렇다. 경계인의 삶은 위태롭고 고통스럽지만 그래서 더 깊은 시선과 경계에서만 바라보이는 예리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에 유학을 왔던 형들은 박정희 정권의 칼날에 간첩으로 몰려 장기수로 복역을 했다.
서승씨는 그 와중에 화상으로 얼굴을 잃기도 했다.
가족사의 슬픔, 사랑했던 조국이 돌려준 배신과 상처...
처음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접했을 때, 그 때는 아마도 10여년쯤 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미술 평론에서 가장 인상적이던 장면, 미켈란젤로의 '노예', 그리고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감상이다.
그 노예에게서 감옥에 갖힌 형들을 본다.
우울한 독일 새벽, 겨울 성에낕 창문 너머 무거운 고딕의 성당 첨탑들과 나무들, 새들... 그 속에 얹혀있는 깊은 우울과 슬픔.
중세 종교화에 깃들인 생의 잔혹함에 대한 통찰...
그에게 미술 작품은 지하실에 갖힌 것 같던 그에게 유일한 창이었다고.
창은 손에 닿지도 않고, 창문으로 도망칠 수도 없지만, 그 작은 창문 덕에 살아 있을 수 있었다고...
나는 그의 감수성이 좋았다.
탁월한 감수성, 작품에 자신의 마음과 이야기를 투사해서 공감을 끌어내는 그의 시선은 예술 작품의 가치가 무엇인지, 왜 예술작품이 존재해야 하는지, 작가와 작품, 수용자와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의미의 과정을 배웠다.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또 텍스트를 만들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생의 의미도 배웠다.
그의 작품에 반응하고 읽어내는 감수성에 반하고 그의 감수성에 동참하는 일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그래서 이번에 '청춘의 사신'과 '고뇌의 원근법'을 구입하여 읽었다.
청춘의 사신의 부제는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이다.
고뇌의 원근법의 부제는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응시한 화가들을 찾아서'이다.
20세기의 유럽은 어떠했던가?
파시즘과 전쟁, 이념...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거대한 슬로건에 깔려 압살당하는 인간성.
인간의 어두움과 잔혹함, 광기... 그 속에서 예술가들은 저항하고 발언하고 풍자하고 미친다.
자신의 치열한 광기로 시대의 거짓을 꿰뚫는다.
머릿말에서 서경식씨가 한 말이다.
"청춘의 사신이라는 제목은 에곤 실레(Egon Schiele)를 다룬 에세이에서 딴 것이다. '청춘'도 '사신'도 현재 일본 사회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죽은말'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된 까닭은 이 사회에 사는 이들에게 생사이 윤곽 자체가 흐릿해져버렸기 때무닝다. 제 자신의 삶과 죽음 자체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사회에 사는 사람은 죽지 않는가 하면, 물론 그렇지는 않다. 사람들은 시시각각 불합리하게 수명을 줄이고 남의 목슴을 빼앗기도 하는데, 그것을 절실히 깨닫지 못호고 있다. 자각할 수 없도록 유도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 거기에서 눈을 돌리고 있기도 하다. 화를 내도 안되고 울어서도 안되는데, 하물며 '감동'이라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 내 눈에는 사람들이 매끈매끈한 아크릴 껍질을 푹 뒤집어쓴 채 되도록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감성을 섬세하고 예민하게 유지하는 것이 이 사회에서 무난히 살아가는 데 불리할 테니 말이다.
이 책에 굳이 반시대적인 제목을 붙인 것은 이런 현실에 떠밀려 가지 않으려는 마음가짐 때문이다.
...
20세기는 세계대전, 대량학살, 그리고 난민의 시대였다. 이런 시대의 도래를 에곤 실레의 예술은 20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이미 비통할 만큼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있었다. 실레만이 아니라 이 책에서 다룬 화가들은 대부부분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사투를 벌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깨어날 것 같지도 않은 악몽 속에서 불안한 암중모색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의 예술은 반투명의 거대한 지하실에서 서서히 질식해가는 우리 모두에게 둘도 없이 귀중한 '창'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나는 언제나 예술작품의 배후에서 예술가의 인생 이야기를 읽으려고 애썼던 것 같다. 나는 작품 자체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보다, 인간으로서의 예술가에 관심을 갖는다. 굳이 말하자면 나의 예술관은 '인간주의'적이다.
예술은 예술가의 삶에서 떼어내어 작품 자체로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뛰어난 예술가란 독창적이고자 하는 격렬한 욕망에 항상 몸을 불사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이 정체 모를 욕망에 사로잡혀, 시대와 인생에 대한 따분하고 판에 박은 상식을 돌파하려고 쉬지 않고 싸운다. 돌파에 성공하는 사람은 얼마되지 않고, 대다수 분수에 맞지 않는 자신의 욕망때문에 파멸하고 만다.
잘 살지 못하는 예술가한테서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여기서 '잘 산다'는 것은 '착하다'거나 '모범적'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잘산다는 것은 쑤띤이 그러했듯이, 무엇보다도 창조의 욕망에 충실하게 산다는 뜻이다. 뛰어난 예술작품을 낳은 예술가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든 반드시 감동적이고, 시대와 인생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나 깊은 사색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의 삶과 작품은 절대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세계대전과 대량살육으로 상징되는 20세기 전반, 예술가들은 사신의 숨결을 끊임없디 귓전에 느끼면서 창조의 싸움을 벌였다. 푸르른 삶과 시커면 죽음에 대한 동경. 그들이 남긴 작품은 우리에게 그 동경이 아직도 다 타버리지 않았음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목차이다.
* 에로스의 혀 : 에드바르드 뭉크 <생명의 춤> 1899-1900
* 창백한 괴물 : 빠블로 피카소 <자화상> 1901
* 사악한 원숭이 : 구스타프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적대하는 힘> 1902
* 전쟁의 세기의 어머니와 아들 : 케테 콜비츠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1903
* 조용한 야수 : 알베르 마르께 <그랑-조귀스땡 강변, 빠리> 1905
* 그늘의 사람 : 조르즈 루오 <거울앞의 여인>1906
* 순수하게 독일적인? : 로비스 코린트 <대순교> 1910
* 슈테틀의 기억 : 마르끄 샤갈 <탄생> 1910
* 만남 : 바씰리 깐딘스키 <인상 2(연주회)> 1911
* 균열 :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베를린의 거리 풍경> 1913
* 환시자 : 오스카르 코코수카 <바람의 신부> 1914
* 청춘의 사신 : 에론 실레 <죽음가 소녀> 1915
* 세계대전의 악몽 : 죠지 그로스 <매장식-오스카르 파니찌에게 바친다> 1917
* 광기와 비애 : 세끼네 쇼오지 <신앙의 슬픔> 1918
* 죽음의 초상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자화상>1919
* 역사의 천사 : 파울 클레 <새로운 천사> 1920
* 이단의 빛 : 이께다 요오손 <재화의 흔적>1924
* 저물어 가는 근대 일본 : 사에끼 유우조오 < 심바시 풍경>1926
* 대상과 비대상의 경계 : 끼지미르 말레비치 <머리> 1928-32
* 항의운동의 성화 : 변산 <싸꼬와 반쩨띠의 수난> 1931-32
* 자본주의 문명의 유적 : 디에고 리베라 <디트로이트의 산업 남쪽 벽화> 1932-33
* 나찌의 신경을 건드리다 : 오토 딕스 <일곱가지 대죄> 1933
* 총통의 포르노그라피 : 아돌프 찌글러 <네 원소>1936-37
* 현실은 밝은 것 : 노다 히데오 <도회>1934
* 죽어버릴 거야! : 하세가와 토시유꼬 < 중화요리점>1936
*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고요함 : 빠블로 피카소 <게르니까> 1937
* 포그롬의 기억 : 샤임 수띤 <소나기가 지나간 뒤의 하교> 1939
* 흙과 예술 : 에밀 놀데 <바다와 붉은 구름> 1938-45
* 궁지에 몰린 남자 : 펠릭수 누스바움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 1943
*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미쯔 <눈이 있는 풍경>1938 <자화상> 1944
* 헌금함 : 후지따 쯔구하루 <싸이판 섬 동포, 신절을 다하다> 1945
세번째 미술에 관한 에쎄이 집은 '고뇌의 원근법'이다.
이 책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화가들, 딕스, 놀데, 키르히너, 콜비츠, 베크만 등의 작품을 보고 예쁘거나 잘그렸다가 아니라 '얼마나 절실한 그림인가?" 혹은 '얼마나 치열한 그림인가'라고 늘 감탄하였다 한다. 반면 한국의 근데 미술은 어떠한가? 우리 미술의 미의식은 무엇인가? 이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 '미의식'이란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다. '무엇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다. 자신의 '미의식'을 재검토한다는 것은 자신이 무언가를 '예쁘다'고 느꼈을 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느끼는지, 그렇게 느끼도 좋은 건지 되물어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미의식이 실은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만들어져 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근대국가는 국민들의 '미의식'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한다.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무엇을 추하다고 할 것인가를 국가가 결정하고 국민에게 강요한다. 어떤 특정한 미의식을 공유하는 자들만이 같은 국민이라는 이데올로기, 말하자면 미의식을 통한 국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때때로 언급한 나치의 예술 정책이 바로 그 전형인데, 이는 나치뿐만 아니라 모든 근대국가가 공유하는 본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인간이고자 하는 이들은 '미의식'에서의 독립을 쟁취해아 한다. 이 책에서는 그 곤란한 싸움에 투신한 모습을 다루었다....
다른 한편, 식민 지배를 받는 형태로 근대를 경험한 '우리'는 현재도 분단과 이산이라는 현실 속에 있다. 그러한 현실로부터 태어나는 미의식은 일본과 같은 근대국가의 전철을 밟지 않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국의 일부 현대미술에서 잠재적인 가능성을 보고 기대를 걸고 있다. 한국의 예술가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 더 철저하게 바라보고, 더 격렬하게 창조하라. "
이 책의 목차이다.
1부
1. 통일 독일 미술 기행
2. 너의 눈을 믿어라! - 오토 딕스와 그의 시대
3. 증언으로서의 예술 - 누가 펠릭스 누스바움을 기억하는가?
2부
4. 문을 열어젖히는 자 - <토마스의 불신>에 관하여
5. 고뇌의 원근법 - <고흐에 관한 대담>
6. 다니엘 에르난데스 살라사르의 천사들
이 중 고흐의 원근법에 대한 대담중... 매력적인 부분을 옮겨본다.
"고흐의 방에 들어간 사람들은 벽에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그림을 열심히 보게 됩니다. 고흐에게 매혹되는 것입니다. 희한하지 않습니까. 그걸 보면서 고흐의 그림은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근대화와 조금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갔을 때에도 확실히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다른 작품과 달리 고흐의 작품에만 모두가 찰싹 붙어있었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보지 않습니다. 빛을 보고 벌레들이 달려드는 것과 같죠. 그림 자체가 발하는 강렬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걸 생각하면서 고흐의 풍경화를 보면, 그 속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풍경화에서 볼 수 없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이스달같은 거장의 작품은 더욱 정교합니다. 하지만 로이스달의 그림은 사물이 거기에 있다고 믿는 그림입니다. 멀리 있는 물건은 보이진 않더라도 반드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념이 화면에 또렷이 드러납니다. 수백미터 앞에도 반드시 사람이 있고 밭이 있다고 말입니다. 고흐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고흐는 사물의 화가니까 그렇게 믿습니다. 믿긴 하지만 고흐가 그리면 그 물질을 뚫고 지나가 저 건너편에 가닿는 감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물건이 없지만, 고흐는 그 건너편에 갑니다. 그 곳을 꿰뚫고 지나가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 끝 간 데 없는 느낌이 고흐의 그림에는 나타나며, 그런 감각이 고흐 자신의 인간성 속에도 존재합니다.
작품을 보고 있자면 어쩔 수 없이 고흐라는 인간에게 가 닿게 되며, 인간 고흐를 행각하면 왜 이 인간이 회화에 가 닿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보여드린 풍경 속의 멀어져 가는 감각, 그 끝 간 데 없이 멀어져가는 감각은 고흐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으로, <슬픔>에 그려진 시엔과의 동거 생활에도 드러납니다. 현세를 살아가기 위한 가치관, 혹은 필수품 같은 것이 인간에게는 있는 법이지만, 고흐에게는 그런 것을 뚫고 나아가는 감각이 있습니다. 뚫고 나가는 것은 일종의 비극이지만, 인간 중에는 그런 비극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현실로 환원되거나 현실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이건 고호의 풍경화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고흐의 풍경 속에는 잠재적이긴 하나 멀어져가는 감각의 모티브가 있습니다.
...
보리베기를 하는 그림은 전체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지만, 예쁘다기보다는 태양빛에 그을린 듯한 느낌입니다. 해바라기의 노란색도 이 불에 그을린 듯한 색에 가깝습니다. 그래서인지 현실 속에 자신이 정착할 곳을 가진 사람의 그림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계를 그리는 사람은 세계 속에 자신이 안심하고 머물 장소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전체를 남김없이 태양빛에 그을리게 하는 감각은 그 장소에 없는 사람의 감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건너편'이라고 말한 감각을 야노 씨께서 정말 적절하게 표현해주셨습니다. 정착할 장소가 없다는 것은 끊임없이 불안에 쫒긴다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근면하지만 지나치게 조바심을 내다가 어느 곳에서도 안정이 되지 않는 것이죠. 야노 씨는 고흐가 오베르 시대에 그린 가장 마지막 작품이 지나치게 고요하다고, 그전과 달라졌다고 쓰셨죠. 허나 고흐는 자신의 감각을 끝까지 관철하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이 인간이 그렇게까지 철저하진 못해도, 끝까지 해봐야 한다는 명제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이건 머리가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면 마치 자신의 머리로 선택한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고흐의 원근감과 색채에는 신체화된 '삶의 방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광기라고 하면 광기지요. 보통 사람이라면 이 정도에서 그만두고 돌아갈 것을, 보통 이런 느낌의 풍경일 거라고 하고 그만들 것을, 고흐는 아슬아슬하게도 끝까지 가버리고 맙니다. 이 정도로 집중력을 동원하면 육체적을 지치고 결국에는 광적인 세계가 펼쳐집니다. '미쳤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각성되어 있었다고 말하고 싶네요. 시엔과의 동거 생활도 주위 사람들은 모두 지긋지긋해 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고흐는 계속 그러고 있었습니다. 그 인내심 강한 테오가 참다 참다 헤어지라고 말했지만, 고흐는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에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지경까지 가지만, 그러고도 자신들의 관계는 애정으로 맺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보통의 배려를 뚫고 지나가는 무엇입니다. '고흐라는 인간은 이미 죽은지 오래다'라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일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서운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