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학부에서 발행한 보통교육창가집에 수록된 작품으로 작사,작곡,노래공히 미상이나 일설에는 고(故)도산 안창호 선생이 대성학교를 설립후 지어 학생들에게 부르게 했다는 말도 있다. 따라서 음반이전의 노래이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구전적 계몽가라 할수 있겠다. 당시 동경유학생들이 방학이 끝나고 일본땅으로 건너갈 때 남대문역 (現서울역) 플레트홈에서 곧잘 합창하던 풍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노래는 1919년 3.1운동 직후부터 널리 불리기 시작했다는데, 1922년에 나온 노래집에는 '청년경계가'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고, 이어서 전국적인 유행에 힘입어 일축(일본축음기상회)에서 음반으로도 발매되었다. 음반 발매 당시에는 다시 제목이 바뀌어 '이 풍진 세월'로 나왔는데, 시기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1925년 이전에 나온 것임은 틀림이 없으니, 음반에 취입된 것으로는 우리나라 유행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 된다. 이 노래는 채규엽의 “희망가”로도 알려져 있으나 근거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원곡은 토마스 가튼의 “夢の外”이다.
1926年에 발표된 작품으로 소위 나발 축음기 때의 노래가수인 신여성 윤심덕의 일생일대의 노래이며 당시 동경 유학중인 김우진과 맺지못할 사랑에 고민하던 나머지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여 취입하고 돌아오는 관부 연락선에서 현해탄 푸른 물에 님을 부여 안고 뛰어들어 정사(情死)한 이 세상에의 유언이기도 하다. 가사는 김우진 또는 윤심덕이 썼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뭇 청춘들이 실연의 안타까움을 이 노래에 실어 한숨짓는 자위의 노래로서 비관과 실의의 밑바닥을 흘러내려가는 소름끼치도록 가슴 아픈 이 가사의 구절마다 생을 거부한 인간 윤심덕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사연으로 알려지고 있어 더욱 유명한 작품으로 꼽고 있다.
1932년 이애리수가 취입한 작품으로 작곡가 전 수린은 개성 만월루방초 우거진 고궁 옛성터에서 뼈저리게 느껴지는 민족의 슬픈 감회를 오선지에 나타내어 이애리수로 하여금 부르게 했다고 한다. 이 애리수가 무대에서 부르면 수 많은 관중들은 저도 모르게 따라서 불렀으며 일본인 조차 불멸의 조선의 세레나데라고 해서 즐겨 애창한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황성옛터는 우리들의 가슴 속에 뿌리 깊게 박힌 민족의 노래이다.
1934년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으로 발표된 고복수의 대표곡으로 원제목은 “타향”이다. 가수 고복수의 정한이 엇갈린 떨리는 목청으로 흘러나오는 이노래는,그 당시 듣는 이로 하여금 민족의 비분을 공감케하여 누구나 부등켜 안고 울음의 홍수를 이루웠던 노래이다. 간도 용정에서는 고복수가 이노래를 불렀을 때 한 여인이 비탄에 못이겨 자살했다는 일화가 있으니 노래에 취해 죽을 수도 있던 어두운 시대를 느낄수있다.
1935年 발표된 작품으로 이난영을 민족의 연인으로 승화 시켰던 노래이고 목포를 일약 유명도시로 만든 작품이다. 특히 이 노래를 통해서, 영화 “님은 가시고 노래만 남아‘를 만들게 했다.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의 한국적이고 비극적인 멜로디는 우리 가요역사상 영원히 기억될 불멸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1938년 오케레코드에서 발표되어 남인수를 최고의 인기가수로 올려놓은 곡. 처음에는 시에론레코드에서 “눈물의 해협”이라는 제목으로 남인수의 본명인 강문수로 발표되었으나 반응을 얻지 못하고 이후 박시춘과 강문수가 오케레코드로 옮기고 이름도 예명인 남인수로 바꾸고 가사도 “애수의 소야곡”으로 변경하여 대히트한 곡. 이 노래가 히트하자 “눈물의 해협” 또한 같은해에 재발매되었다.
1938년 박단마가 17살대 “빅타레코드”에서 첫 취입한 노래. 풋내기 열일곱살이 부른 노래로서는 너무나 깜찍하다. 무대연극의 막간에서 어린 단발머리 소녀가 반주에 맞춰 “파랑새 꿈꾸는 버드나무 숲으로 가만히 오세요...”하면서 애교가 철철 넘치는 능숙한 제스추어로 관중을 열광체 만들었던 노래.
1939년 빅타레코드의 일대 히트작. “알뜰한 당신”에 이어서 황금심의 인기는 충천했으니 그 당시 빅타레코드의 라이벌인 “오케레코드”에서는 황금심을 스카웃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빅타에서는 황금심을 놓치지 않으려고 금은보화처럼 애지중지하였다한다.
우리나라에 와서 금광을 경영하던 미국인이 채굴한 금덩이를 건드리지 말라고(no touch) 말한 데에서 '노다지'라는 말이 나왔다고 하며, 이 노래는 1939년 당시의 세태를 유머러스 하게 풍자하고 있다. 오늘날 '눈깔 먼 노다지'는 '노다지타령'이라는 제목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눈깔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거슬리는 탓에 이처럼 새로운 제목이 붙여진 것 같다. 그리고, 김용환이 일찍 세상을 뜬 뒤에는 그의 친동생인 김정구가 대신 이 노래를 많이 불렀으므로, 김용환의 '눈깔 먼 노다지'가 아니라 김정구의 '노다지타령'으로 잘못 인식되는 결과가 생기기도 했다.
연극으로, 영화로, 유행가로, 극음반으로 연이어 만들어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즉 '홍도야 울지 마라'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극작가 임선규의 30년대 대중문화의 화려한 정점에 선 작품이다. 1939년에 유행가로 발표된 이 음반에는 앞면에는 남일연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실리고 뒷면에는 부 주제가인 김영춘의 “홍도야 울지마라”가 실렸으나 오히려 뒷면의 노래가 더욱 히트하였다.
1940년에 발표된 '나그네 설움'(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은 당시의 성숙한 유행가의 전성기를 대표할 만한 곡이었으니, 광복 이전 유행가로서는 최고인 10만 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렸다는 추정이 있으며, 이 노래를 부른 백년설은 1939년 정월 신보로 태평레코드에서 데뷔했는데, 불과 1년만에 당시 최고 인기가수인 채규엽, 남인수를 일시 능가할 만큼 급속히 성장했다.
1940년 태평레코드사의 폭발적인 대 히트작. 지금은 오히려 작사자 “반야월”로 더욱 잘 알려진 진방남의 대표곡으로 40년대 초반 오케레코드를 위협할 정도로 치열하게 2파전을 벌이던 태평레코드의 위세를 올리던 곡이다. 타향을 헤메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향과 어머님의 포근한 품을 그리게 하여 주는 애상의 노래이다.
1941年에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으로 오케레코드에서 발표한 고운봉의 대표작. 선창가를 거닐며 사랑의 상처한 추억을 달래보는 상조의 이 歌謠(가요)는 조명암의 월북으로 인하여 작사자의 이름에 가수의 친형인 高明基(고명기)와 김해송의 처남인 이봉룡의 이름을 넣어 후에도 널리 불려진 곡이다.
1942년 발표된 백난아의 대표곡. 꿈에도 그리운 고향을 멀리 떠나 타향에서 몸부림치는 젊은이들에게 백난아의 찔레꽃 피는 고향에의 향수는 더할수 없는 공감을 느끼게 했고 또 애창케 했다고 한다. 한때는 방송윤리위원회에 의해 월북작가 작품이란 낙인이 찍인 바 있었으나 작사자 김영일씨의 정당 항변으로 사실이 밝혀져 금지곡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45年 解放(해방)과 더블어 光復(광복)된 祖國(조국)을 향에 돌아가는 배위에서, 조국땅을 바라보며 歡喜(환희)에 춤추는 감격의 느낌을 노래로 만든 작품이다. 그 암흑의 시절 끝에 되찾은 빛 光復(광복), 解放(해방) 독립의 감격을 가장 잘표현한 곡으로 民族(민족)의 질곡을 피해 조국을 떠났던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감동을 주었던 노래이다.
解放(해방)후 建國(건국)에의 꿈이 부풀던 시절 民衆(민중)들의 가슴속엔 新羅(신라)적인 태평성대를 꿈꾸는 또 다른 심리가 스며들고 있었다. 찬란한 文化(문화)와 아름다운 藝術(예술)을 피웠던 옛 영화를 더없이 절실하게 느끼면서 옛 시대에 대한 민족적인 감회를 아름답게 재현시켜 당시 민중들에게 밝은 미래상을 열어주었던 노래이다. 아마 해방된 조국에서 민중들의 희망이 무르익어가는 시대에 탄생한, 우리 가요사의 한 분수령이 되는 불멸의 노래로 기록된다.
1951年에 釜山(부산)에서 발표된 作品으로 이무렵의 釜山(부산)은 피난민으로 초만원이었다고 한다. 戰爭(전쟁)으로 인한 不安(불안)과, 故鄕(고향)에 대한 사무친 향수로 피난민들은 하루하루를 죽은 목슴처럼 살아가던 때에 부산의 뒷골목 선술집에서는 絶望(절망)과 회의의 한숨이 이 노래와 함께 수놓아 졌고 장단을 맞추어 가며 때로는 서로 부등켜안고 이 노래를 合唱(합창) 하였다고 한다. 이 노래야 말로 우리나라가 현대사에서 겪었던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의 기념비적인 노래라 할수있다.
서울수복직후 발표되어 지금도 愛唱(애창)되는 곡이다. 이 노래의 作詞者(작사자) 반야월은 1.4후퇴후 전파로 잿더미가 된 서울에 還都(환도)해보니, 미처 서울을 탈출하지 못했던 부인은 영양실조에 걸려 병석에 누워 있었고 次女(차녀) 수라(당시6세)양은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해 숨져 입은 옷 그대로 언땅에 묻어야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못내 잊을 수 없어 이를 가요화했다고 한다.이 사연을 들은 많은 가요인들은 심금을 울리는 듯한 공감의 열창을 아끼지 않았고 이는 6,25 한국전쟁 비극의 하나로 민족적 통탄의 서정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