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장
30).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11:1~10).
1절.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성경의 기록자 요한은 주님의 공적사역의 마지막으로 행하시는 큰 이적을 소개한다. 이 이적은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베다니는“가난한 자의 집, 덜 익은 무화과나무의 집, 푸른 과실의 집, 번뇌하는 자의 집”등을 뜻하며, 베다니는 그 기원이 아람어로서 대추야자의 집이란 뜻이다. 성경에 기록된 베다니는 두 곳이 있다.
예루살렘 성 밖에서 약2km떨어져 있는 곳이다(마21:17), 주님은 이곳에서 하늘로 올리워 가셨다(눅24:50), 본문에서 말하는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가 사는 마을 베다니는 바로 이곳을 말한다. 또 다른 한 곳은 요단강 건너편, 또는 저편으로 말하는 베다니가 있다(요1:28) 이곳은 침례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던 곳이고 예슈아 주님께서도 이곳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으며 요한복음10:40절에 주님이 찾으신 곳인데 현재로는 정확한
2절.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요한은 주님이 특별한 한 여인을 소개하는데 이 여인은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위 발을 닦던 마리아라고 소개한다. 향유를“붓다”는 헬라어로“알레이포aleipho”인데 연합불변사“기름”을 뜻하는“리파로스liparos”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기름붓다(눅7:38,46, 요11:2), 기름을 바르다(마6:17, 막6:13, 16:1, 약5:14)”을 뜻한다. 이 마리아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다음 장 즉12:1~3절에서 다시 소개한다. 그리고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였다.
3절. 이에 그 누이들이 예슈아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요한은 이제 1절에 이어 그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있었던 일을 다시 소개하는데 병든 나사로의 누이들이 예슈아 주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필레오)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소식을 전한다. 이 누이들은 주님이 속히 오셔서 그분이 사랑하시는 자기들의 오라비 나사로를 고쳐달라고 사랑으로 호소하였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 병을 능히 고치실 것을 확신한 것이다.
4절.예슈아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슈아 주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하신다고 응답 하셨다. 주님이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신 것은 나사로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나사로는 죽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그의 삶이 끝나는 죽음이 아니라 주님이 그를 다시 살리실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 그 병의 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들이 보고 그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세상에 오신 메시야이심을 알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5절. 예슈아 주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한은 예슈아 주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 마리아와 그 오라비 나사로를 사랑(아카파오)하셨다고 다시 소개한다, 유대인들의 사상에서 사람이 질병에 걸리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시지 않아서 벌로 주시는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관념이 있었다.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시89:32). 그러나 요한은 획일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 병은 주님의 분노보다는 사랑과 연관이 있다. “주께서 그 사랑(아카파오)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6). 나사로의 죽음은 사랑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 이였다.
6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절.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하시니
본문에서 우리는 어떤 문제를 보는 시야가 우리의 생각과 주님이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다는데 우리의 생각으로는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같으면 모든 하는 일들을 제쳐놓고 나사로가 죽기 전에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급히 달려가야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나 주님은 그 소식을 듣고도 이틀이나 계시던 곳에 더 계셨다. 하나님의 늦추심(연기)은 거절이 아니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바로 응답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다리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일 것이며 만일 인내를 가지고 기다린다면 그 분은 우리가 생각하고 경험하지 못한 크고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실 것이다. 우리는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를 기억해야 한다. 그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하셨다.
8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그러자 제자들은 당황했다 그러므로 랍비(선생)여 방금(흠정역은 최근)도 유대인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합니까? 고 물었다.
9절. 예슈아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주님께서는 낮이 열두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한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영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낮에는 비틀거리거나 방황하거나 넘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 있기 때문이다. 낮이 열두시간이 있다는 것은 주님의 지상 사역의 때가 아직은 남아 있다는 말이다. 즉 주님께서 아직은 사역을 끝내시고 죽으실 때가 아직은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아무리 예슈아 주님을 죽이려고 하여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큰 위로를 주시는 말씀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봉사할 시간이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음으로 우리가 위협을 받고 죽을 일은 없다는 것이다. 빛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말한다.
10절.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밤에 다니는 자는 하나님께 실실한 자가 아니라 자기 욕심에 끌려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빛 되신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여 세상의 여러 가지 염려로 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