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 읽기
- 김현 일기 1986-1989 《행복한 책읽기》, 문학과지성사, 2015, 개정판.
류인혜
지난 수개월 동안 인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다. 코로나19는 과학이 따라잡기 어렵도록 그 세력을 키운다. 옆의 누구의 속에 들어가 있는지, 혹시 내 속에도 어떤 나쁜 것이 침입했는지 두려운 때다. 절대로 가벼이 볼 수 없이 스스로 진화하며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이때, 우리는 더욱 정신을 차려고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을 충실히 실행해야 된다. 사람은 어떠한 환경도 잠시만 인내하면 적응할 수 있다. 조금씩 천천히,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정신과 습관이 적응하기 힘든 환경에서는 솔직히 책 읽기도 힘들다. 하하 웃음이 나오는 유쾌한 내용이라도 그렇다. 그래도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모이기 어려운 이때를, 집안에 머물면서 책을 가까이하는 좋은 기회로 만들어 보자.
어려서부터 무조건 눈에 뜨이는 대로 읽어왔지만 읽을거리 중에서 가장 재미없던 것이 평론이었다.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외국의 문학사조나 이론을 과시하며, 문장이 순하게 흐르지 않고 난해했다. 작품을 직접 쓴 작가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작품의 이면을 파헤쳐 들어내며,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풀어낼까를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비평문학에 대한 오해를 말끔히 가시게 한 것이 김현이라는 젊은 평론가였다.
그때 나는 스무 살 전후였다. 그의 작품을 읽자 눈이 번쩍 뜨이고 머리가 맑아졌다. 평론의 문장은 대중없이 어렵다는 선입견과는 달리, 그의 글은 흐름이 완만하여 잘 읽히는 것이다. 단번에 애독자가 되었다. 구독하는 문학잡지의 목차에 그의 이름이 있으면 무조건 찾아 읽었다. 덕분에 여러 장르의 작품 구조를 이해하게 되고, 저절로 문학작품을 대하는 안목을 키워 글 읽기가 즐거워졌다.
그런데 까마득한 세월 저쪽으로 잊혔던 사람인데, 요즘 갑자기 김현이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서둘러 검색을 하여 책을 찾아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 《행복한 책읽기》(문학과지성, 2015)이다.
그 책의 초판 1쇄가 1992년 11월 20일이었는데, 꾸준히 출판이 계속되어 1판 30쇄가 2014년 4월 2일에 나왔다. 문학과지성사에서는 개정판을 2015년에 만들었다. 이렇게 개정판이 나오게 된 의미를 존중한다. 생각대로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편집이다.
“새 개정판의 디자인은 책의 본문은 일기 본연의 ‘시간 여행’적 특징을 담아내는 새로운 틀에 앉혔고, 독자들에게 친숙한 맞춤법을 적용하여 가독성은 물론 자료로서 실증적 가치를 높이는 데 역점을 두었다. 책 말미에는 ‘인명 찾아보기’를 덧붙여 이 책의 중심을 이루는 독서 기록들과 독서 외의 삶에서 촉발된 경험과 인상을 드러내는 사적 기록들의 궤적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라고 개정판을 발간한 안내 글이 있다.(인터넷 교보문고)
초판본을 희귀본으로 귀히 여기고, 오래 묵은 책을 소중히 여기는 소장자들이 많지만 종이의 묵은 냄새를 싫어하고, 아주 작아도 책벌레를 무서워하는 나는 새로 만든 책이 좋다. 도서관의 신간 입고를 주시하는 이유이다.
여기에서 집고 넘어가야 한다. 지난 호의 원고 중에서 《독서의 역사》에 관한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먼저 사람이 책을 읽어온 내력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아낸 책이 《독서의 역사》이다. 2000년에 출간 된 초판은 이미 절판 되었고, 2016년과 2020년(152*225mm)에 다시 출간되었다. 우리 집에 있는 책은 2000년 1월 30일에 나온 초판(188*254mm) 1쇄이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을 기준으로 하여 이 글을 쓰지만, 관심이 있는 분은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을 구입하여 읽도록 권한다. 쪽수는 같지만, 책의 크기에 차이가 있다. 심정적으로도 크기가 작은 책이 들고 읽기 편하다. 또 책은 개정판을 만들 때, 현재에 사용되는 표현이나 바뀐 문법에 의해 문장을 정리하였을 확률이 높다. 그럴 것이다가 아니라 ‘그렇다’라고 쓰고 싶어서 최근에 발간된 책을 도서관에 예약했는데, 코로나19의 수도권 확산으로 인한 재휴관이다. 언제 만날 지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쓰고 나서 결론을 내려야했기에 잠시 도서관이 열렸을 때 책을 찾아왔다. 먼저 크기에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새로 나온 책과 초판의 크기는 그리 많은 차이가 나지 않는다. 또 문장을 다시 정리했을 확률이 높다고 했는데, 전혀 고친 부분이 없이 쪽수도 같고 편집도 바뀐 것이 없다.
다만 책 표지에 초판은 <책과 독서에 관한 인류의 끝없는 갈망과 그 위대한 승리>라는 부제를 달았고 최근의 책은 <책과 독서, 인류의 끝없는 갈망과 독서 편력의 서사시>라고 바뀌었으며, 중간 224와 225쪽 사이에 접지로 ‘독서가들의 연대표’를 새로 넣었다. 예약해 둔 책을 찾아와서 지난번의 추측을 바로 잡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행복한 책읽기》는 김현의 1985년 12월 30일부터 1989년 12월 12일까지의 일기로 그가 남긴 유고를 이인성이 정리하여 출간한 책이다. 유고 묶음의 속표지에 김현은 자필로 ‘책읽기의 즐거움’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이 원고의 보관을 부탁하며 그 제목을 ‘행복한 책읽기’로 고쳐줄 것을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해제](죽음을 응시하는 삶-읽기와 삶-쓰기)에서 밝혀놓았다.
책을 소개하는 글에서 “김현의 숨은 사유 과정들, 그의 꿈과 욕망을 보여주는 ‘김현 문학의 밑그림들’이다. 한국 문학을 향해 끊임없이 ‘창조적 배반’을 요구하는 열린 비평과 지성적 사유의 전범으로서 김현의 글은 지금도 여전한 감동과 질문을 던진다.”라고 어려운 단어로 복잡하게 말했지만 간단히 이 책은 평론가 김현의 책읽기다. 그의 바람대로 행복한 책읽기를 독자에게 선물하고 있다.
일기라고 하지만 비평을 전업으로 하는 평론가다운 시선으로 작품을 읽은 감상을 여과 없이 써두었다. 책 속에서 잊고 있었던 당대의 유명한 작가들과 신인들의 작품이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그중에서 그의 개인적인 친분을 엿볼 수 있는 김치수 댁의 문상기를 소개한다.
1989.5.24
월요일 아침 치수가 담담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전화를 했다. 팔순을 넘긴 지가 오래전이니까 담담할 만은 했으나, 그래도 목소리에는 슬픔이 배어 있었다. 나는 알았다고 말한 뒤에 병익에게 전화를 했다. 그가 시골에 내려가겠다고 했으므로 문제는 차편을 구하는 것이었다. 주연은 연락이 되지 않았고, 생근은 타교 출강 중이었다. 결국 병익이는 인철이와 함께 가는 것으로 낙찰되었고, 나는 서정기 패들과 가기로 했다. 우리는 여섯이었다. 선운사 입구의 풍천장집에서 점심을 먹고 들어간 무장은 아주 조그만 동네였다. 그러나 옛날 의미에서의 시골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고, 그 집 저녁거리는 무엇이라는 것까지 잘 알고 있는 그런 시골은 오랜만에 보는 시골이었다. 그의 집은 크고 넓었다. 기둥은 통나무였고 마당에는 꽃들이, 아니 꽃나무들이 가득 차 있었다. 마당이 넓으니, 사람들이 좀 붐벼도 보이질 않는다. 아파트하고는 완전히 다른 정황이다. 문상 뒤에 나오는 상도, 독상·겸상·큰상……이런 식이다. 그의 촌놈 얼굴은 시골에서는 아주 의젓하니 잘 어울린다. 그는 천생 시골 사람이다. 차라리 그의 색시는 시골 사람인데도 시골에 어울리지 않는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 286~287쪽에서
이 짧은 글에 이름이 나오는 사람(병익 인철 생근 서정기 주연)들은 당시 서로 막역한 사이라고 느껴진다. 여기에서는 문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고, 현재도 그러한 그 분들을 아는 척하지 않는다. 그저 친구의 어머니가 별세하여 멀리 선운사가 있는 고창의 시골동네까지 문상을 가는 우정의 행보가 따뜻하고 감성적이다. 또 꽃나무가 마당에 가득 차 있는 크고 넓은 시골 초상집의 풍경이 상상만으로도 슬프지 않고 평화롭다.
김현(본명 김광남金光南, 1942~1990)은 1942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따라 목포로 이주, 목포 북교국민학교와 목포중학교, 그리고 서울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 및 동 대학원 불문과를 졸업했으며,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유학했으며 작고하기까지 서울대 인문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1962년 《자유문학自由文學》 3월호에 「나르시스 시론詩論」을 필명 ‘김현’으로 발표하며 공식적인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분석과 해석》으로 제1회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행복한 책읽기》의 원고를 유고로 남긴 채 1990년 6월 27일 48세로 작고했다.
그의 사후 3년 뒤인 1993년에 《김현 문학전집》(문학과지성사, 전16권)이 간행되어 김현 문학에 접근할 수 있는 충실한 자료가 되었다. 2000년 그의 10주기에는 심포지엄이 원주 〈토지문학관〉에서, 2010년 20주기에도 서울 동교동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심포지엄이 각각 개최되었다. 2011년에 그의 정신적 뿌리에 해당하는 목포에 문학관이 개원했고, 2015년 9월에는 서울 동숭동 〈예술가의 집〉에서 그의 25주기를 기념한 심포지엄 개최와 더불어 문학상 ‘김현문학패’가 제정·시행되었다. 이제 그의 30주기에 맞추어 또 다른 행사가 준비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젊어서 하늘로 돌아간 김현이라는 사람을 새삼 추억하며 그의 글을 다시 읽는 요즘은 행복하다. 그를 통해서 다른 이들의 작품을 읽어내는 마음의 거리와 시선의 범위를 배웠기에 더욱 의미가 깊어진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로 인하여 다른 애서가들은 어떤 방법으로 무슨 책을 읽을까. 한층 더 궁금해졌다. 읽어가는 속도가 더디긴 했지만 《독서의 역사》를 소개한 것을 시작으로 ‘책에 대한 책’을 더 찾게 되었다.
표정훈의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한겨레출판사, 2019), 이동진의 《밤은 책이다》(워즈덤하우스, 2011), 장정일의 《빌린 책 산책 버린 책》1·2·3(마티, 2010), 알베르토 망구엘의 다른 책 《밤의 도서관》(세종서적, 2011) 등 책을 소개하는 책들을 메모했다. 그리고 강명관의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푸른역사, 2011)를 대출해 왔는데, 도서관이 다시 휴관되어 반납할 날짜가 정해지지 않아서 천천히 읽고 있다.
류인혜(柳仁惠) innhea@hanmail.net
《한국수필》 1984년 수필 <우물> 추천완료.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수필집: 《나무이야기》, 《나무에게 묻는 말》 외 4권. 수필선집: 《마당을 기억하며》.
인문서: 류인혜의 책읽기 《아름다운 책》. 시집: 《은총》
수상: 제18회 한국수필문학상, 제23회 PEN문학상, 제11회 한국문협작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