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는 돌은 이끼가 안 낀다
우리는 말로써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남에게 전달하고, 또한 말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말이란 이러한 의사 전달의 단순한 음성적 도구만은 아니다. 말은 쓰는 사람의 인격이나 의식 구조를 드러내는 하나의 징표이기도 하다.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학력 수준이나 교양의 정도는 말할 것도 없고, 그가 지닌 성격이나 사고의 높낮이도 함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말은 그 사람의 내부에 갖추어져 있는 의식을,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과 의사들이 환자의 언어를 듣고 분석하여, 발병 원인을 찾아내고 그에 대한 적절한 치료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이러한 언어의 기능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의 의식을 밖으로 드러내는 언어는, 거꾸로 사람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역할도 아울러 하고 있다. 고운 말을 사용하는 습관을 갖게 되면 심성 또한 곱게 다듬어지고, 거친 말을 버릇처럼 계속해서 사용하면 마음 또한 거칠어지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는 인간의 의식을 밖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반대로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키기도 하는, 가역적(可逆的)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 이러한 언어의 기능은 그것을 사용하는 한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적인 언중(言衆)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러한 예를 몇 개의 단어 속에서 살펴본다.
한 단어가 지니고 있는 내포적 의미를 보면,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집단의 사고 유형이나 의식 수준을 알 수가 있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안 낀다.”는 속담은 우리나라에도 있고 영국에도 있다.
그런데 그 의미에 있어서는 양자가 서로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돌도 한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이끼가 앉듯이, 사람이 활동이 없으면 폐인이 된다는 뜻으로 쓴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한 곳에 자리 잡지 않고, 자꾸 옮겨 다니면 이익이 없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 쓰임이 정반대다.
우리는 이끼를 나쁜 관념으로 떠올리지만, 저쪽 사람들은 좋은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문화의 차이다. 그러므로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를 번역할 때는 직역할 것이 아니라, ‘새는 앉는 곳마다 털 빠진다.’ 정도로 의역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영어의 ‘father’를 한번 보기로 하자. 이 단어는 ‘아버지’란 뜻 외에 ‘성직자’, ‘신(神)’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the father’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어의 ‘아버지’는 남자인 어버이, 곧 부친(父親)을 의미하며, 그 이외의 뜻은 원래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상하 질서를 존중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온 민족이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말 속에는 존엄한 아버지 이외의 다른 뜻이 들어올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둘일 수가 없는 것처럼 두 가지 뜻이 용납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특성을 살피지 아니하고, 초기 성경의 번역자들이 ‘father’를 그대로 아버지로 직역한 것은 다소 미숙한 번역이 아니었던가 싶다. 영어의 ‘father’에는 ‘창조주, 신’의 뜻이 포함되어 있지마는, 한국어 ‘아버지’에는 이러한 의미가 전혀 들어 있지 않음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아버지 이외의 그 누구도 아버지일 수 없다는 사고 체계를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므로 그러한 번역은 문화적 충격을 빚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 ‘father’를 ‘아버지’ 아닌 다른 적절한 말로 번역했더라면, 새로 들어온 종교에 대해 좀 더 친근감을 갖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지금도 성경에 천부(天父)라는 말이 있는데, 처음부터 그런 말로 썼으면 훨씬 더 언중들에게 친근감을 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다음으로 영어의 ‘yield’를 한번 살펴보자. 도로 표지판의 우리말 ‘양보’란 단어 아래 번역어로 함께 쓰여 있는 바로 그 말이다. 이 ‘yield’는 ‘양보하다’라는 뜻 이외에 ‘(농산물 등을)산출하다’, ‘(이익을) 가져오다’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어권 사람들이, 양보는 곧 생산적이며, 이익이 된다는 사고 체계를 갖고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횡적 질서를 강조하면서 생활해 온 그들의 문화에서 생성된 결과라 생각된다.
그러나 위아래의 종적 질서를 존중하면서 살아온 우리는, 이러한 횡적인 양보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연유로, 양보라는 말에 ‘생산’이란 의미를 내포시키지 못하였다. 먼저 걸음[步]을 내디디는 것을 사양[讓]한다는 정도의 뜻만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양보하면 오히려 손해 본다는 의식이 우리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우리도 ‘양보’가 ‘생산적’이며 ‘이익’이 된다는 의식의 변화를 일으켜, ‘양보’라는 단어의 의미 속에 그러한 뜻이 담겨지는 날이 빨리 왔으면 싶다.
선물을 의미하는 영어의 ‘gift’는 독일어로는 ‘독약’을 뜻한다고 한다. 선물에 대한 독일인들의 의식을 이 말에서 더듬어 볼 수가 있다. 적당한 선물은 주는 이와 받는 이 사이의 정을 돈독히 쌓게 하지만, 지나친 선물은 오히려 뇌물이 되어 폐해를 초래하는 법이다. 그야말로 선물이 독이 된 것이다. 아마도 독일인들은 선물을 주거나 받을 때, 그 속에 정이 담겨 있는지 혹은 독이 스며 있는지를 깊이 살펴볼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의 선물이라는 말의 선(膳)에는, ‘반찬이나 고기 따위를 먹거나 바친다’는 뜻밖에 없다. 그 속에 독이라는 뜻은 전혀 없고, 무조건 먹는다는 의미밖에 없다.
이렇듯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한 개인이나 민족의 사고 체계를 담고 있는 문화적 산물이다. 그러므로 단어 하나라도 그것을 다른 말로 번역할 때는 그것을 사용하는 언중의 정서에 맞게 번역해야 할 것이다.
영어에는 피동형이 많지만, 우리말은 주로 능동형이다. 그러므로 영어의 피동형을 옮길 때, 곧이곧대로 번역하면 문장이나 말이 껄끄럽게 된다. 우리의 정서와 의식에 맞게 번역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종교의 경전은 한 자 한 구가 다, 신자들의 양식이 되는 말씀이 되기 때문에, 더한층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성경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영어 성경의 “Blessed are the poor of spirit for theirs is a kingdom of heaven”을 직역한 것으로 보인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함일까? 우리는 마음이 가난하다 하면, 마음가짐이 인색하고 여유롭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의 ‘The poor’는 탐욕의 마음을 내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표층적 의미로만 번역한 탓으로, 원래의 뜻과는 정반대가 되고 말았다. 문화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성경은 비교적 원뜻에 맞게 번역되어 있다. “虛心的人 有福了 因爲天國是他們的”라 번역하여 놓았다. 마음을 비운 사람은 복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의식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언어다. 또한 언어는 의식을 바꾸기도 한다. 이 말은 곧 언어가 문화를 반영하고, 역으로 문화를 형성해 내기도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언어는 개인이나 사회의 문화적인 양상에 맞게 사용하고, 또 이를 잘 감안해서 다듬어 나가야 하는 음성 매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