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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의 뿌리(The Roots of Korean Presbyterianism)
I.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 총무 아더 브라운
박사는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이 세계 어느 나라 선교사들과 비교할 때 매우 탁월한 자들이었고, 신학적으로 매우 건전한 자들이었다고 평한
적이 있다.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뚜렷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비 칸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초기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앙은 한 마디로 "보수적 복음주의 입장"이었다.
초기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 대부분은
청교도 전통의 보수적 복음주의 노선에서 신앙훈련을 받고 또 그와 같은 입장의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파송된 자들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 브라운( A. J. Brown) 선교사가 지적한대로, "한국이 문호를 개방한 이후 25년에 걸쳐 입국한 선교사들의 전형적인 모습은
청교도 풍이었다. 잉글랜드 선조들이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에 안식일을 지켰던 것처럼 엄격하게 안식을 지켰다. 댄스, 흡연, 카드 놀이는 그리스도의
참된 추종자들이 빠져서는 안 되는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성경 비평학에 있어서는 강한 보수주의였으며, ... 또한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은 아주
위험한 이단으로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청교도적이고,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성향 때문에 이들이 성경의 초자연적 계시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존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09년 마포삼열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에 자리잡은 "선교회와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로부터 구원받는 복음을 믿는 철저한 믿음과 열정적인 복음주의 정신을 특징으로 지녔다. "그로부터 25년 후 1934년 한국선교 설립 희년 기념식에서 그는 한국교회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고 가르친데 있음을 재천명하며 이렇게 고백하였다.
"한국선교의 복음주의 메시지에 관해서는 확실하다. 선교부 산하 선교사들 대부분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검이라는 강한 확신을 지니고 있으며, 죄를 사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시고 하늘에 오르사 다시 오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강한 확신을 지녔다. 이 신앙 속에서 성경은 우리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현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본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유일하고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여기는 태도가 지난 50년간의 한국 복음화에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확신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Charles Allen Clark가 그의 The Nevius Plan For Mission Work Illustrated in Korea에서 지적한 것처럼 "다른 국가에서처럼 성경은 복음화의 가장 지대한 요인이었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성경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그렇듯이 전 교회는 성경지식에 젖어 있었다." 그는 다시 1934년 한국선교 희년 기념식에서 "처음부터 거의 모든 선교회 회원들은 상당히 보수적인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에 제시된 것을 초자연적인 계시로 받아들였고, 성경을 권위의 책으로 믿었다. 그들은 복음의 메시지가 세상에서 독특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을 찾는' 몇몇 협력적인 종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계시를 통해 그를 발견해온 유일한 종교라고 믿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은 복음에 대한 확신과 맞물려 있고, 복음에 대한 확신은 성경이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에 기초한다고 믿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신앙적으로 성장했고, 신학교육을 받았으며, 자연히 이와 같은 신학적 입장에 확고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Charles Allen Clark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초기 선교사들 대부분은 스코틀랜드 옛 언약자들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믿고 가르쳤던 것처럼 성경을 믿었고, 믿고 있다. 그들은 이 사상을 한국교회에 굳게 심어 주었다. 이것이 현재까지도 너무 견고한 나머지 성경을 권위로 받아들이지 않는 책은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禁物이었다. 그들은 기독교 복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유일한 계시의 메시지로 여긴다. 그들에게 기독교 복음은 위대한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담대하게 증거 한다. 여기에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고, 수줍어 어물거리지도 않는다." 일부 한국의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1930년대 박형용 박사를 기준으로 해서 이전에는 성경의 비평학도 수용하는 온건한 입장이었으나 1930년대에 박형룡박사를 통해 보수적인 성경관이 한국교회에 이식된 것은 아니다.
획일화시킬 수 없지만 초기 한국 장로교
형성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들은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부흥운동에 대해 상당히 고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평양을
선교 거점으로 삼고 활동했던 시카고의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출신 선교사들은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신학적으로는 구 학파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무디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부흥운동에 대해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본고는 한국장로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맥코믹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의 입국 동기와 한국에서의 주요 사역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II.
한국 장로교가 선교의 기초를 다지는 1890년부터 1900년까지 10여년 동안 한국장로교 형성과 발전을 주도해왔을 뿐 아니라 한국장로교 신학을 형성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이들은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이다. 1888년부터 1902년까지 맥코믹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 14명이 한국에 입국했다. 이들은 Every-Day Life in Korea(1898)의 저자 Daniel L. Gifford, 평양을 중심으로 크게 기여했던 선교사들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 윌리암 베어드(William M. Baird, Sr.), 그레함 리(Graham Lee), 윌리암 스왈른(William L. Swallen), 제임스 아담스(James E. Adams), 시실 로스(Cyril Ross), 찰스 번하이젤(Charles F. Bernheisel), 윌리암 바렡(William M. Barrett), 알렉스 피터스(Alex. Alb. Pieters), 칼 컨(Carl E. Kearn), 찰스 알렌 클락(Charles Allen Clark)등이다. 이들 맥코믹 출신 선교사들이 미친 영향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선교활동이나 신학교육 그리고 기독교 학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대하다. 이들 대부분이 선교 거점으로 삼은 것은 평양을 비롯 한국의 북부지역이었다.
이렇게 많은 맥코믹 신학교 출신 졸업생들이 한국을
선교지로 택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분명한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맥코믹 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크레이그(Craig)박사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한국 선교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크레이그 박사는 한국선교에 대한 비젼을 학생들에게
심어주어 1888년 이후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이 한국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특히 1892년 졸업생 가운데 그레함 리(Lee),
스왈른(Swallen), 무어(Moore)등 세 명의 선교사가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도 크레이그 박사의 영향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 미국에서 일고 있던
복음주의 학생 자원운동(the Evangelical 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강력한 활동 때문이었다. 무디의 영향
하에 형성된 학생자원운동은 19세기 말부터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특히 무디의 영향력이 짙게 드리워진 시카고에
위치한 맥코믹 신학교는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어느 학교보다도 더 강하게 받고 있었다.
한국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장 먼저 불태우고 있던 사람은 다니엘 기포드(Daniel Lyman Gifford,'88)였다. 1861년 1월 19일 일리노이 엘진(Elgin)에서 태어난 기포드는 미시간에 있는 Alma 대학을 졸업하고 맥코믹 신학교에 진학해 1888년에 졸업했다. 그해 2월 21일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받고 Ottawa 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그가 한국을 향해 출발한 것은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10월 27일이었다. 선교지에 도착한 2년후 1890년 기포드는 그와 같은 해에 한국에 도착한 Mary E. Hayden과 결혼했다. 기포드 만큼 한국선교지에서 선교사로서의 성실과 열정을 소유한 사람도 드물 정도였다.
"기포드의 선교사 경력은 대단한 성실과 진지한 성품으로 특징 지워졌으며, 그는 그에게 맡겨진 일은 어떤 일이던지 충성을 다했다. 그는 항상 천성적인 헌신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신사적이고 양보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성실성과 맡겨진 일에 대한 충실함, 강한 책임감으로 인해 기포드는 그만 건강을 잃고 말았다. 1896년 건강 문제로 불가불 선교지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6개월 동안 선교지에 홀로 남아 사역을 계속하던 아내 역시 그와 합류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1898년 선교지로 돌아온 기포드는 본래의 성실성으로 인해 선교에 헌신하다 경기도 남부 지방 순회 전도 여행중 1900년 3월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제임스 아담스(James E. Adams)가 "인간적으로 매우 친근미가 넘치고 사랑이 넘쳤던 친구," "문학적인 탁월한 통찰력을 갖고 뛰어난 글을 썼던 완숙한 학자"라고 극찬했던 기포드는 선교의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39살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 Mary도 그로부터 1개월후 남편의 뒤를 뒤따랐다.
기포드의 뒤를 이어 한국에 입국한 맥코믹 신학교
출신 선교사는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사무엘 마펫('88)이었다. 기포드와 동기 동창이었던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9년
한국에 파송되어 1939년까지 무려 50년 동안 한국에서 활동했다. 그는 1864년 1월 25일 인디애나주의 매디슨에서 태어나 1884년 20살
나던해에 고향의 하노버대학에서 이학사 학위를 받고 맥코믹 신학교에 진학했다. 4년후인 188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하노버 대학에서
문학사(M.A.) 학위까지 받고 같은 해 New Albany 노회에서 강도사 자격을 따고 안수를 받았다. 그는 미조리 애플톤
시(Applet!!!on City)와 몬트로스(Montrose)에서 약 1년 동안 선교 준비 기간을 거친 후 1889년 4월에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그해 11월 미국을 떠났다.
1895년에 청일 전쟁이 일어났을 때 평양에서
끝까지 선교사들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심어준 선교사가 마포삼열(Samuel A. Moffett)이었다. 그후 평양지역에 놀랍게 복음이 확산되어
평양은 한국 선교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그의 순회 선교와 헌신적인 전도열은 평양을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으로 끌어올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93년부터 1924년까지 장대현교회와 @제 5장로교회를 맡았으며, 평양장로회 신학교(1901-1925) 교장과 평양숭실대학
교장(1918-1925)을 지냈다.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었을 때 첫 노회장에 선임되었고, 1910년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the World Missionary Conference)에 한국대표로 참석했으며, 1911년에 105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주동적인 인물로 지목을 받았고,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나던 격변의 시대, 1919년에는 장로교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이와 같은 화려한 경력이
말해주듯 마포삼열 선교사는 한국 장로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09년 25주년 선교대회 샤뮤엘 마펫이 언더우드와 쌍벽을 이루는
한국선교의 개척자로 인정받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언더우드가 세상을 떠난후 그의 역할은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고, 1934년 선교 50주년
때에는 한국의 윌리암 케리라는 칭호를 받기에 이르렀다.
언더우드가 한국 장로교 선교회 전체와 한국개신교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한국 선교의 초석이 되었다면 마포삼열 선교사는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평양지역의 복음화와 그곳에서의 신학교 설립,
그리고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끌어올리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케넷에스 라토렛(Kenneth S.
Latourette) 교수가 마포삼열을 가리켜 한국의 북방 선교확장에 있어서 "개척자"라고 평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들 네 개의 장로교 선교회의 활동에 힘입어 1914년에 장로교 선교사는 한국에 전체 개신교 선교사의 반 이상을 넘어섰고 거의 개신교인의 4분의 3분이 장로교인들이었다. 북장로교는 숫적으로 압도적일 만큼 가장 규모가 컸다. 북장로교는 북쪽으로 자신들의 선교활동을 확장했다. 이일에 있어서 사무엘 마펫은 개척자였다. 중요한 도시 평양에 선교의 거점에 세워졌다. 처음에 적대적이었으나 1894년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전투가 그곳에서 벌어진 후 평양은 더 선교에 마음이 열리게되었는데, 그것은 당황한 민중들은 자신들이 선교사들을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후에 교회들은 이 지역에서 놀랍게 성장했다."
마포삼열의 영향력은 그의 주도로 1901년 평양에 장로교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주로 평양에 거점을 마련하고 선교활동을 하던 이길함, 마포삼열, 블레어, 소안론, 곽안련 등 일련의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은 자연스럽게 평양신학교가 설립되자 처음부터 신학교육에 적극 참석하였다. 1939년 폐교의 순간까지도 평양신학교는 "한국의 맥코믹 신학교"라고 불릴 만큼 맥코믹 출신 선교사들과 깊은 연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복음의 빚진 자로서 북부 지역의 복음화에 자신의 혼신을 불사르면서도 신학적으로는 철저하게 구학파(old school) 전통을 계승하였다.
자연히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의 이념이나 <표준성경 주석> 서문이나 <神學指南>에 나타난 마포삼열의 신학사상은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그는 표준성경주석 서문에서 "성경전체는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법칙"이라는 선명한 장로교 노선의 성경관을 갖고 있었고, 이 때문에 성경의 어떤 부분은 인정하면서 또 다른 부분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반대하고, "우리는 원저자들의 쓴대로의 모든 부분이 다 참되며 모든 부분이 다 신께서 자기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신 바라고 믿는다"는 분명한 입장을 가졌다. 때문에 선교 50주년 기념 보고서에서 그가 밝힌 대로,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그 복음, 곧 초자연적 계시를 선포하는 것이라" 믿었고, "이 신앙 때문에 성경은 한국 선교사역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해왔다." 특별히 20여년 이상을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그와 같은 입장에서 신학교육을 실시했고, 또 그와 같은 신학적 입장을 한국교회가 지켜가기를 원했다.
이와 같은 신학적 입장의 토대위에 구축된 그의
지도력과 가르침은 1902년부터 1924년까지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통해, 1918년부터 1928년까지 평양숭실대학을
통해 한국교회에 전수되었고, 자연스럽게 한국장로교의 신앙과 신학의 형태를 특징지어주었다. 1939년 10월 24일 마펫은 75세의 일기로 은퇴
후 여생을 지내던 캘리포니아 몬트로비아(Montrovia)에서 세상을 떠났다. 로버트 매코휘(Robert McCaughey)가 지적한 것처럼,
"여러가지 면에서 마포삼열 박사는 신학교 사역을 통해 한국에 공헌한 가장 뛰어나고 찬란한 선교사였으며," 실로 "그의 영향력은 전국에 퍼졌다."
맥코믹의 명예를 가장 빛내주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찰스 마펫(Charles H. Moffett)도 맥코믹 신학교에 진학해
1936년에 졸업했다.
마포삼열의 동기 윌리암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 '88)가 한국 장로교 발전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1862년 6월 16일 인디애나 클락 카운티(Clark
County)에서 출생한 베어드는 1885년에 하노버 대학을 졸업하고, 맥코믹 신학교에 진학해 3년 후인 1888년에 신학교를 졸업했다.
1888년 마포삼열과 같이 뉴 알바니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베어드는 1889년 1년 간 캔사스 시에서 전도일에 종사하고 그 이듬해에는
1890년 콜로라도 Del Norte의 Del Norte College 학장이 되었으나 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은 후 학장직을 사임하고
1890년 12월 18일 한국 행 배에 올랐다. 서울에서 8, 9년 동안 사역한 후 베어드는 평양으로 거점을 옮겨 1898년에 평양에 숭실학교를
세워 학교 사업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숭실학교는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놀랍게 성장해 1906년에는 대학으로 발전했고, 이어 4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가 연합으로 운영하면서 서울에 언더우드에 의해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되기 전까지 한국의 대학교육을 선도하는 대학으로 자리 매김을
하였다. 그는 평양숭실대학(1906-1916) 학장직 외에 평양 신학교 교수, 신학지남 편집, 사경회 인도, 성경번역위원회 위원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한 사역을 통해 장로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평양숭실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에 그가 번역한 책들만도 상당수에 이른다.
1906년에는 모교 하노버 대학으로부터 한국교회의 기독교 교육에 공헌한 공을 인정받아 Ph.D. D.D. 학위를 수여 받았던 탁월한 교육자이며
선교사였던 베어드는 1931년 11월 28일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한국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발흥에 가장 크게 기여한
그레함 리(Graham Lee, '92) 선교사 역시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다. 그레함 리만큼 부흥운동을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시키는데 기여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1861년 6월 2일 일리노이 록 아일랜드(Rock Island)에서 출생한 그레함 리는 레이크 훠리스트(Lake
Forest) 대학과 1889년 뉴저지대학(프린스톤대학 전신)을 수학한후 컨네티커트 하트포드의 플럼 하트포트 신학교(Plumb Hartford
Seminary)로 진학했다. 1년을 그곳에서 수학한 그래함 리는 시카고의 맥코믹으로 적을 옮겨 1892년 마지막 2년을 맥코믹에서 공부하고
1892년에 졸업했다. 졸업하던 바로 그해 일리노이 록 리버(Rock River) 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곧 바로 평양으로 향했다. 그가
1912년 건강 악화로 선교사를 사임할 때까지 평양에서 그가 이룩한 선교 업적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평양신학교 교수,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지도자로 그의 활약은 대단히 화려했다.
남감리교 선교사 하디를 주 강사로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열린 평양 주재 선교사들을 위한 사경회에서 놀라운 도전과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그래함 리는 자신이 맡고 있는
장대현교회로 돌아와 자신이 은혜 받은 요한 1서를 본문을 가지고 1주일간 제직 사경회를 열었다. 얼마 후 존스톤을 초청해 장대현교회에서 특별
사경회가 열렸을 때 장대현교회 조사 길선주가 큰 은혜를 체험했다. 이와 같은 준비 속에서 이길함 선교사는 1907년 1월 2일부터 자신이 맡고
있는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 때 수 많은 사람들과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순절의 은혜를 경험한 그래함 리는 이
평양의 축복을 전국교회와 공유하기 위해 동료 선교사들과 길선주 장로를 비롯 한국인 지도자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다녔다. 1907년 1월부터
6월까지 평양부흥운동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할 수 있기까지 그래함 리의 공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부흥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미국 선교본부가
피력해 선교본부가 한국 부흥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 할 때도 일련의 강력한 항의 편지를 보내며 평양대부흥운동을 강력히 변호했던 것도
그래함 리였다. 마포삼열이 평양 선교의 개척자라면 이길함은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을 끌어올린 실질적인 선구자였다. 평양에
막 동이 터 오르던 1892년에 한국에 입국해 총회가 조직되던 1912년까지 20년간 그레함 리가 이룩한 업적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이
기간으로만 평가한다면 그레함 리 보다 더 큰 선교 사역의 결실을 거둔 선교사는 없을 것이다. 1907년 1월 14일 장대현교회에 놀랍게 임한
오순절의 역사 그 이후 100만인 구령운동이 막을 내리던 1912년까지 평양은 물론 전국적으로 낮을 기다리고 있는 횐 벌을 목도하면서 추수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한 나머지 그만 자신의 건강을 잃고 말았다. 아마도 그가 건강의 문제로 1912년 사임하지 않았다면 그의 명성과 위치는 마포
삼열을 능가했을 것이다. 1912년 건강 문제로 더 이상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길함은 선교사를 사임하고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캘리포니아 Saratoga에서 휴양을 취하고는 다시 목회 전선에 뛰어 들었다. 1913년부터 1915년까지 캘리포니아 콘코드에서
그 남은 정렬을 쏟아 붓고는 1916년 12월 2일 캘리포니아 길로이(Gilroy)에서 향년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전 역사를 현장에서 목도했던
부흥운동의 주인공, 이길함은 이렇게 해서 길지 않은 그의 생애를 마감해야 했다. 그는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교사였다.
서울 승동교회를 창립하고 천대받고 버림받은
백정들에게 희망의 복음을 전하였던 사무엘 무어(Samuel Foreman Moore,'92) 역시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었다. 1860년 9월
15일, 일리노이 Grand Rodge에서 출생한 무어가 몬타나(Montana) 대학을 졸업한 것은 29살 나던 1889년이었다. 곧 바로
맥코믹 신학교에 진학한 무어는 3년후인 1892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그해 4월 시카고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미 안수를 받기 전
1891년 12월 7일 선교사로 임명받은 무어는 1892년 8월 16일 은둔의 나라로 향하는 배에 올랐고, 그곳에서 1906년 12월 22일
부름을 받을 때까지 14년간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있어서 매우 선명하면서도 온화하고 관대한 성품으로
널리 알려진 무어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복음 안에서 하나라는 복음 본래의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변함 없이
실천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누구도 모방할 수 없을 만큼 "그의 태도는 한국의 하류층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고" 이와 같은 성품에 기초한
그의 리더쉽에 힘입어 "그는 이 백성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교회 가운데 몇을 세웠다." 그는 자유자나 종이나 복음 안에서 하나라는 역사의 진실을
몸으로 실천하고, 한국 사회에 신분 타파를 정착시킨 주인공이었다.
성경 통신강좌를 시작하고,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비롯 수많은 아름다운 찬송가를 작시하고, 영향력 있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활약했던 소안론(William Leander Swallen,
'92)은 이길함, 무어와 함께 맥코믹에서 같은 학년에서 공부했던 선교사였다. 1859년 3월 25일 오하이오 칼톤(Carlton)에서 태어난
소안론은 만 30세 되던 1889년에 우스터(Wooster)대학을 졸업한 만학도였다. 대학을 졸업한 소안론은 맥코믹 신학교를 진학해 3년후인
1892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시카고 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그가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미국을 떠난 것은 1892년 9월
15일이었다. 한국에 도착해 서울과 다른 지역에서 사역을 하던 소안론이 평양으로 거점을 옮긴 것은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1901년이었다.
그로부터 1932년 73세의 나이로 명예 은퇴를 할 때까지 소안론은 평양을 무대로 전도 및 문서 선교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1932년 은퇴
후에도 성경번역 작업에 참여하는 등 여전히 일선에서 활동하던 소안론은 1939년 만 80이 될 때까지도 여전히 선교지 한국에 남아
있었다.
대구 지역 선교의 개척자, 제임스
아담스(James Edward Adams, '94) 역시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었다. 1867년 인디애나 맥코이(McCoy)에서 출생한 아담스는
21살 나던해 1888년 워시번(Washburn) 대학을 졸업하고, 맥코믹신학교를 진학했다. 1894년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해 12월 27일
토페카(Topeka) 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1894년부터 1895년 1년간 the Inter Seminary Missionary Alliance
순회 서기로 사역하다 1895년 4월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부산에 선교 거점을 마련했다. 2년간 그곳에서
사역하고 1897년 대구지역으로 사역지를 옮긴 후 1929년 6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32년간을 전도와 교육 사역에 생명을 걸었다. 그의 리더쉽
아래 대구 지역은 전도와 교육 분야에 이르기까지 북부 지역 못지 않은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아담스는 대구가 남부의 평양이라고
일컬을 만큼 대구를 복음화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북부에서는 평양과 더불어 가장 왕성한 선교열을
보여주었던 선천 지역에서 무려 34년간 활동하면서 선천지역을 주목받는 선교지로 끌어 올렸던 시릴 로스(Cyril Ross, '97) 역시 맥코믹
출신이었다. 1867년 4월 24일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피블스(Peebles)에서 출생한 로스는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와 매세츠세츠주 노스
아담스(North Adams)에 있는 윌리암 대학(William College)을 졸업하고 맥코믹 신학교에 진학해 1897년에 졸업했다. 그해
6월 선교부로부터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같은 해 9월 13일 미국을 출발했다. 4년간 부산에서 활동한후 1902년 선천지역으로 선교지를 옮긴후
1936년까지 34년간 그곳에서 활동하면서 그 지역을 평양에 이어 북부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교부 가운데 하나로 끌어올렸다. 남다른 학구열을
가지고 있던 로스는 틈이 날 때 마다 학업을 계속해 프린스톤에서 B. D.를 Park College에서 M.A.를 그리고 달라스 신학교에서
Th.D. 학위를 받았다.
1900년도 맥코믹 졸업생 찰스
번하이젤(Charles Francis Bernheisel) 만큼 평양지역의 복음화와 선교확장에 기여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1906년부터
산정현교회를 담임하면서 수많은 기독교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배출해 기독교 신앙을 기독교 영역을 넘어 사회 일반에까지 확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874년 9월 11일 인디애나 컬버(Culver)에서 출생한 번하이젤은 1896년 하노버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1년후 맥코믹 신학교를
진학해 1900년에 졸업했다. 그해 3월 선교사로 임명되고, 5월 9일 뉴 알바니(New Albany) 노회에서 안수를 받았으며, 한국으로
출발한 것은 그 해 8월이었다. 평양에 정착한 번하이젤은 1912년 1928년까지 평양숭실대학 교수, 평양신학교 교수, 1912년 평양선교부
의장, 그리고 1914년부터 1924년까지 연합공회(Federal Council of Missions in Korea) 의장 역임등 그의 화려한
경력이 말해주듯 맥코믹의 이상을 평양과 북부지역에 구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번하이젤은 1928년부터
1929년까지 1년간, 그리고 1935년부터 1936년까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평양신학교 임시 교장직을 지내기도 했다. 전도사역, 목회사역,
교육사역, 그리고 문서사역에 이르기까지 한국 장로교 형성에 미친 번하이젤의 영향은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1908년 하노버 대학으로부터
M.A. 학위를, 그리고 1915년에는 같은 학교로부터 D.D. 학위를 수여 받았다.
The Korea Pentecost(1908),
The Korean Pentecost & the Sufferings which Followed(1977), Gold in
Korea(1957)등의 저술로 널리 알려진 William Newton Blair('01)역시 맥코믹 신학교 출신 북장로교 선교사였다.
1876년 7월 11일 칸사스 샐리나(Salina)에서 출생한 윌리암 블레어는 1897년 샐리나에 위치한 캔사스 웨슬리안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잠시동안 교편을 잡다 맥코믹 신학교에 진학해 1901년에 졸업했다. 1900년 솔로몬 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고, 그 이듬해 신학교를
졸업하고 안수를 받았다. 1901년 선교부로부터 임명을 받은 그는 8월 한국 평양에 선교의 거점을 마련하였다. 1901년부터 눈에 띠게 나타난
평양선교부의 눈부신 성장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눈으로 확인하면서 평양의 놀라운 부흥운동의 역사를 현장감 있게 그러면서도 학적으로 생생하게
정리해 전해준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의 오순절의 역사 그 현장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을 체험하고 그것을 현장감 있게 전해 준
것이 The Korea Pentecost였고, 그 부흥운동의 영향과 결과가 그후 어떻게 결실로 나타났는가를 동시에 제시해준 것이 Gold in
Korea였고, 그리고 그의 사위 Bruce Hunt와 함께 새로운 감각으로 한국의 부흥운동과 그후 고난의 역사를 담아 낸 것이 The
Korean Pentecost and the Following Sufferings였다. 마포삼열이 평양선교의 문을 연 주인공이었고, 이길함이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이었다면 윌리암 블레어는 그 생생한 현장을 생동감 있는 문장으로 정리해 후대에 전해준 현장 역사가였다.
비록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01년 블레어(Blair)와 함께 한국에 도착해 건강 문제로 1907년 선교지를 떠났던 윌리암 마샬 바렡(William Marshall Barrett, '01)도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었다. 그는 7년간 대구 선교부에서 사역하면서 대구선교부가 놀랍게 성장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다.
맥코믹 출신 선교사 중에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찰스 알렌 클락 선교사(Charles Allen Clark, '02)다. 클락은 1878년 5월 14일 미네소타 스프링 밸리에서 태어나
미네소타 대학에서 수학하고, 1899년 매칼레스터(Macalester) 대학을 졸업하였다. 이미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 1901년 11월에
선교사로 임명받은 클락은 1902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네아폴리스 노회에서 안수를 받은 후 1902년 8월 선교지 한국을 향해 출발했다.
1912년부터 1924년까지 북장로교 선교회 실행위원회 위원이었고, 평양신학교 실천신학교 교수를 오랫동안 지냈으며,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실행위원회 의장, 1918년부터 1936년까지는 신학지남 부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시카고 대학에서 석사학위와 Ph.D를 수여 받은 곽안련
선교사는 한국 선교사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중에 한 사람이다. 특히 그의 시카고 대학 논문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해외
선교연구의 하나의 모델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동안 종교백과사전에 3개의 논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곽안련 선교사가 죽기 얼마 전에 남긴 '60년의
나의 회고록'에 의하면 건축업자였던 부친을 도와 어릴 때부터 건축 일을 배웠고, 미네소타 대학에서 2년을 수학한 후 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맥칼레스터 대학으로 옮겨 학부를 마쳤다. 학부를 마친 그는 맥코믹 신학교에 진학했다. 그가 한국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한 것은 신학교 졸업반
때였다. 회고록에 따르면, 놀라운 사실은 맥코믹 신학교 졸업반 44명 중에서 해외선교를 가겠다는 사람이 18 명이었고 그 중에 모두가 한국을
지원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국에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서 얼마나 깊이 개입하시고 계셨는가를 말해주기도 한다. 곽안련 선교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한다.
"마침내 신학교를 졸업하기 4개월 전에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항복하였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이 가라시면 어디든지 가오리다. 교단의 해외선교부는 나에게 신청서를 보내왔다. 독자들이 믿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우리들은 이렇게 말을 해야 했다. 부디 청하건대 나도 선교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나는 이를 피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왔던 것이다. 해외선교부는 나에게 이 신청서에 어느 선교지로 가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차례로 한국(한 사람의 친구가 거기에 다녀온 적이 있었으며 밤낮으로 그곳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중국, 일본이라고 썼다. 그러나 공란에 또 하나의 질문이 있었다. 선교부가 이러한 곳들 중 어느 곳에라도 보낼 수 없다면 그대는 선교부가 보내는 세계 어느 곳에라도 기꺼이 가겠는가? 오, 여기에 서명하기를 얼마나 싫어했던가. 나는 두 주간을 기도한 후에 마침내 여기에 서명할 수 있었다. 나는 오늘날도 거기에 서명할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우리 반의 급우 44명 가운데 18명이 해외선교지에 나가겠다고 자원하였다. 그당시 한국은 하찮은 존재였고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도 없었지만 모든 사람은 한국을 원하였다. 18명이 모두 한국에 가기를 자원하였지만 나의 단짝인 컨즈만이 나와 그곳으로 갔다. 컨즈는 얼마 전에 소천하였다."
곽안련 선교사는 18대 2라는 엄청난 경쟁을 뚫고 한국에 왔던 것이다. 18대 2의 경쟁률을 뚫고 왔다고 해서 한국에서의 그의 선교가 평탄하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 선교지에 도착한지 일년 안에 자기의 사랑하는 첫 아들, 둘째 아들을 잃어버렸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우리는 부산에 접근하였다가 한국의 남쪽 끝을 돌아 1902년 9월 22일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우리가 상륙할때 마침 전염병인 콜레라가 한창이었다. 이로인해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죽어갔으며, 어떤 사람들은 길거리에 쓰러진체 죽어갔다. 얼마 후에는 천연두가 엄습하여 어린이들의 시체가 수백명씩 서울의 동대문 밖으로 실려나가 수마일이나 퍼져있는 둥그스럼한 분봉 사이에 매장되었다. 어느날 나는 동서문밖에서 천연두로 죽은 시체 12구가 성벽을 따라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성벽의 틈새에 막대기를 꽂고 그 곁에 막대기를 똑바로 세워 하나의 조그만 단을 만든 다음에 거기에 시신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백성들은 유아들의 시체들을 곧장 묻을 경우 큰 손님(천연두 악귀)이 찾아와 집 안의 다른 아이들도 잡아간다고 믿고 있었다. 그후에는 성홍열이 습격해와 우리의 첫 사내 아이를 앗아갔다. 내가 그 아이를 간호했었다. 한번은 디프테리아 걸린 것을 간호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상륙한지 6개월 후 한 동료 선교사가 천연두에 걸려 내가 그를 간호한지 14일 만에 죽었다. 선교사들은 무슨 일이든 다 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우리는 두번째 사내아이가 우리를 떠나 하늘 나라로 갔다. 두 아이를 일년 안에 잃었던 것이다. 선교사가 되면 때론 이런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두 아이를 선교지에서 잃어버린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슬픔을 뒤로하고 냉혹하리 만큼 침착한 한 마디의 짧은 문장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선교사가 되면 때론 이런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그는 두 아이를 잃은 슬픔보다는 자신을 통해 하실 원대한 일을 바라본 것이다. 곽안련 선교사는 한국에 있는 동안 무려 42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 외에도 그는 수많은 연구 논문들을 발표했다. 표준성경주석, 평양신학교 교재, 신학지남에 남긴 주옥같은 여러 편의 논문들은 한국의 장로교 신학의 맥을 형성하는 초석이 되어 왔다. 그의 신학은 구 학파의 신학을 전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특별히 성경의 영감이라는 면에서는 타협하지 않는 구 프린스톤의 후계자였다. 성경의 완전영감과 성경의 완전무오를 철저히 변호했다. "성경 기자들의 영감을 종교적 교훈과 도덕적 진리에만 국한하고 역사의 외부적 사실이나 과학의 견해에 있어서는 오류가 있다"는 현대주의자들의 견해를 일축하고 성경은 다른 책들과는 달라서 오류가 없는 책으로 "성경기자들이 종교적 진리에서는 영감을 받고 역사적 사실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제언을 용납하기가 곤란하다"고 못 박는다.
곽안련과 같은 동기이면서 한국에 파송 받은 두
명의 선교사가 더 있다. 알렌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us Pieters, '02)와 칼 컨스(Carl Emerson
Kearns, '02)가 그들이다. 칼 컨스는 1901년 11월에 임명을 받고 1902년에 졸업한 후 1902년 8월에 곽안련과 나란히 미국을
떠났다. 1876년 5월 13일 아이오와(Iowa), 시더 래피즈(Cedar Rapids)에서 출생한 그는 1899년 그곳 Coe
College에서 학부를 마친 후 맥코믹 신학교에 진학해 1902년에 졸업했다. 그해 4월 16일 시더 래피즈(Cedar Rapids) 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그는 1907년 갑자기 사임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1902년부터 1907년까지 선천지역의 선교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물결이 선천지역까지 확대될 수 있도록 부흥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881년 12월 30일 러이사
Ecaterinoslav에서 유대인 계 부모 사이에 태어난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Pieters)는 1902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New Albany 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1902년 4월 필리핀 선교사로 임명받은 피터스는 그 해 8월 미국을 떠났다. 2년간
필리핀에서 사역한 피터스 선교사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1904년 5월이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 모국어 히브리어를 비롯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통해 선교사역에서 그가 이룩한 공헌은 자못 컸다. 직접 전도사역이나 순회 사역보다는 한영사전(the Korean English
Dictionary)과 한글찬송가를 편찬하고 구약성경을 번역하는 일 등 문서 사역에 주로 종사하였다. 유대인이면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신학교육을
통해 신학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한국 선교지에 파송 받은 피터스 보다 구약성경 번역에 적격자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복음전도, 신학교육,
그리고 문서 선교에 이르기까지 평양, 선천, 대구 선교부를 중심으로 선교 초기(적어도 1920년대까지) 한국 장로교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이었다. 특히 평양신학교는 설립, 운영, 교수, 건물 건축에 이르기까지 맥코믹 신학교와 매우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며 발전해왔다. 첫 교장 마펫이 20여년이 넘게 교장직을 수행했고, 번하이젤이 두차례 교장직을 지냈으며, 스완른이 한차례, 그리고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로 개교하지 못하고 있을 때 교장대행으로 있었던 사람도 맥코믹 출신 곽안련 선교사였다. 맥코믹 여사에 의해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사가 지어지고, 맥코믹 출신 선교사들이 교수진에 참여하고, 그들의 신학사상이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통해 구현되었던 것이다. 곽안련 선교사가
1939년 평신을 "한국의 맥코믹신학교"라고 불렀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III.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국 장로교는 선교 초, 적어도
1890년부터 1920년대까지 맥코믹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이 한국장로교 형성을 주도하였다. 한국에 파송된 영향력있는 장로교 선교사들은
맥코믹출신들, 유니온신학교 출신들, 그리고 프린스톤 출신들이었지만, 처음 한국 장로교 선교에 크게 기여한 이들은 맥코믹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이었다. 평양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수했던 많은 선교사들, 마포삼열 선교사, 곽안련 선교사, 이길함 선교사, 소안론 선교사 모두는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이었다. 프린스톤 신학교 출신들이 실질적으로 평양신학교에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프린스톤 출신 나부열 선교사가 1924년에
신학교 교장에 오르면서다. 그가 평양신학교 교장에 오르면서 많은 프린스톤출신 선교사들이 교수진에 고용되었고 자연히 프린스톤의 이상이 이 신학교에
이식되었던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맥코믹 출신 선교사들이 한국 장로교를 주도했다. 맥코믹 신학교는 무디의 활동무대 시카고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부흥운동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신학적으로는 프린스톤과 마찬가지로 구 학파의 전통에 서있으면서면서, 부흥운동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이사실은 왜 한국에 파송된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이 구학파 신학을 계승하면서도 부흥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말해준다. 맥코믹이 신학파(New School)의 전통에 서있었기 때문에 부흥운동에 긍정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시카고에 위치하고 있어
무디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부흥운동에 대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