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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장 주석
예수님과 그의 고향 사람들 (마가복음 6:1-6)
Ⅰ.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고향을 방문하시었다. 그 곳은 예수께서 태어나신 곳이 아니고 자라나신 곳인데, 그 곳 이름은 나사렛이다. 그 곳에는 예수의 친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고향에서 향민들로부터 생명의 위험까지 당하신 적이 있었다(눅 4:29). 그런데 지금 다시 그들을 방문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대단히 이상하리 만큼 당신의 원수들의 구원을 은혜스럽게 기다리고 구하고 계시었다. 이러하셨기 때문에, 비록 위험 속에 뛰어드는 격인 이곳을 또 다시 방문하신 것이며, "제자들도 좇으니"(1절) 이는 그들이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섰기 때문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그 곳에 있는 회당에 들어 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시었다(2절). 그 곳에서는 다른 곳에서와 같이 많은 무리가 모여들지 않은 것 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저들이 회당에 모여들기까지에는 말씀을 전하실 다른 기회를 얻지 못하시었다. 그리고 가날 그 회당에서 성경의 한 부분을 아주 명석하게 설명하여 주시었다. 오늘날 교회의 정기적인 집회에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가르치심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Ⅲ.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대단한 찬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 그리스도께서 대단히 지혜롭게 가르치시니, 그들은 예수께서 교육을 받지 않으신 것을 잘 아는 고로, 어디서 이런 지혜를 "이 사람이 얻었느뇨?" 하면서 이상히 여겼다.
2.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가르치신 말씀을 확증하기 위하여 "그 손으로 권능을" 행하시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신적인 기원에 대해서 두 가지의 큰 증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두 가지 증거 중 하나는 복음을 깨닫게 해준 것같이 보이는 하나님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에 대해서 확증하고 추천하는 일을 하는 것같이 보이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시는 복음에 대해서 처음에는 부인할 수 없었지만 결국은 받아 들이려하지 않았다.
Ⅳ.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그분에게 반대하는 편견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으켜 주려고 연구하였다. "이 사람의" 이 모든 "지혜"와 이 모든 "권능이"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다만 집에서 교육받은 것뿐이고, 어디로 여행을 다녀온 일도 없고, 어느 대학교에 다닌 일도 없으며, 어느 유명한 박사의 밑에서 교육을 받은 일도 없기 때문이다(3절). "이 사람이 목수가 아니냐?"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를 목수의 아들이라고 그들은 비난하였다. 그것은 예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 그런 직업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더 비난하려고 "이 사람이 목수가 아니냐?"고 한 것같이 보인다. 아마 우리 주 예수께서 당신의 사업을 위해서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전에는 이따금씩 남의 일도 맡아서 하셨을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자기를 낮추"시었으며 당신 자신의 명예를 나타내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이 섬기러 온 종의 모습을 취하심 것이다. 우리의 구속주께서 그와 같이 낮추셨으니 그가 오실 때에 우리의 낮은 자리에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써, "게으리지 말"것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시었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라는 가르침을 주시기 원하시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생활 수단과 일에 고용되는 것이 오히려 아무런 생계의 대책이 없는 것이나 태만 가운데 스스로 방종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임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빈둥거리는 습관처럼 해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유대인들에게는 이 점에 있어서 좋은 규율이 있는데, 그것은 학자가 되려는 젊은이들은, 마치 바울이 장막 짓는 일을 익힌 것처럼, 어떠한 기술을 익혀, 필요할 때에 일자리를 얻어 생활에 위협을 받지 않도록 한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천대를 받는 직공들을 칭찬하고 그들의 손으로 노동을 해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격려하여 주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소위 위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멸시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비난한 또 한 가지는 예수의 친족들의 천한 신분에 대한 것이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형제들과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우리가 그의 친척들을 알고 있지 아니하냐?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대해서는 "놀라"게 되었지만(2절). 예수의 신분에 대해서 오해하고 걸림이 된 것이다(3절).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좋지 않은 선입관을 가진 것이며,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리스도께서 아무리 좋은 호감을 주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만일에 그들이 예수의 혈통을 모르게 되었더라면, 아니면 예수께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이 하늘에서 그들에게 바로 내려오시었다면, 아마 그들은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를 극진히 환대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유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가 어디에서 오신 줄을 모르고 있었지만 예수를 배척하였던 것이다(요 9:29).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완고한 불 신앙은 결코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Ⅴ.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경멸을 어떻게 참으셨나를 아래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1. 그리스도께서는 평범한 말로 그것에 대해서 일부를 변명하시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록 합리적이 아니고 적당치 못했을지 모르나, 그들이 기대를 하였을 만하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4절). 아마 이 법칙에 대해서 예외도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편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이 말씀은 맞는 것이다. 목사들이 낯선 곳에서 보다 자기들의 고향에서는 환대를 받기가 어렵고 목회의 성공이 어려운 것이다. 어려서 친숙하게 된 분들에게는 멸시를 받게 되며, 출세 길에서 뒤진 사람들에게서는 시기를 받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가축 떼들을 사냥개에게 맡길 준비는 하면서도 그들의 영혼을 지도하는 아버지들에게 자기들을 맡기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러한 경우에 그리스도의 그 말씀을 어렵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말씀은 평범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인 것이다.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전 10:10).
2.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경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중에 얼마의 선을 행하시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악인에게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도 선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다"(5절). 비록 선을 행함에 있어서 칭찬은 고사하고 부당한 배척을 당하더라도, 선을 행하는 그 일에 대해서 기쁨과 만족을 갖고 자족하는 것은 관대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임을 명심하라.
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른 곳에서와 같이 그런 능력을 그곳에서는 많이 행하시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그들의 지도자들이 대중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편견을 갖게 한 이유로 말미암아 불 신앙이 그들을 지배하였기 때문이다(5절). 그것은 마치 불 신앙이 전능자의 손을 매어놓는 듯한 이상한 표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물론 그 곳에서도 다른 곳에서와 같이 많은 기적을 행하시기를 원하시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께 나와서 간구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은혜 받기를 위해 그리스도에게 요청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위해 역사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위해 역사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은혜를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불 신앙과 경멸이 그들에게 임하는 그 분의 은혜의 흐름을 막게 되며 그들 자신의 문에 빗장을 지르는 것이 됨을 유의하라.
4. 그리스도께서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6절).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신앙에 관해서 놀라시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세 번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이며 낯선 사람인 로마 백부장의 신앙과(마 8:10),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마 15:28), 당신이 고향 사람들인 이 유다 사람들의 불 신앙에 대해서 기이히 여기시며 놀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받는 것을 싫어하는 불 신앙과 같이 이상한 일은 없다.
5.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7절). 만일 우리가 원하는 곳에 선을 행하지 못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곳에 선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비록 벽촌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고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갖게 된 것을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때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부와 허영과 환락과 교활함이 적은 농촌 마을이 인구가 많은 도시보다 더 나은 환대를 받는 것이다.
열두 제자들의 실습 (마가복음 6:7-13)
Ⅰ. 예수께서 열두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기적을 행하도록 임명하시었다. 이 기사는 우리가 마태복음 10장에서 더욱 자세하게 살펴 본 것과 같은 것이다. 마가는 여기에서, 마태가 한 것처럼, 그들의 이름을 나타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앞서 그들이 처음에 예수의 제자로 부름을 받게 되었을 때에 그들의 이름을 마가가 기록한 바 있기 때문이다(막 3:16-19). 이때까지 그들은 그리스도와 교제를 가져왔고, 그리스도 앞에서 가르치심을 들어왔고, 능력 행하심을 보아왔던 것이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들어 쓰실 때가 되었다고 결정을 내리신 것이다. 그들이 받았으니 주어야 했고, 그들이 가르침을 받았으니 남을 가르쳐야 했다. 그래서 지금 그리스도께서 "열두 제자를 보내시게" 된 것이다. 그들은 학교에서 어느 때까지나 배우기만을 계속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각 지방으로 나가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이 얻은 지식을 활용하여 선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비록 그들이 아직 그들이 마땅히 이루어야 할 정도로 잘 감당을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능력과 재능대로, 그들은 일을 착수하고 앞으로 더욱 향상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면 아래에서 여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둘씩 둘씩" 보내시었다. 마가는 이점에 유의하였다. 그들은 두 사람씩 짝을 지어갔다. 그것은 두 증인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들이 낯선 곳에 갔을 때에 그 둘이 서로 친구가 되어 서로 일손을 돕고 마음을 격려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만일 어떠한 일이 잘못되었을 때에 당황하지 않고 서로 도와 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모든 병사들에게는 전우가 있는 것이다. 정평 있는 격언에 "둘은 하나보다 더 낫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역자들에게 서로 연합하라고 가르치시며 서로 주고 받으며 도와주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2.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마귀의 왕국을 공격하도록 임명하시었으며, 그리고 사람들의 영혼 안에 있는 마귀의 이익을 그들이 받은 말씀으로 깨쳐버리기 위해서, 그리고 마귀들이 사로잡고 있는 인간들의 몸에서 그 마귀의 세력을 추방하도록 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모범으로 삼아 그들에게 능력을 부여하신 것이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foot)는 말하기를 "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병을 고치고 마귀들을 추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그리스도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을 전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3.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시었다. 그것은, 그들이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로, 즉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듯한 그러한 사람들로 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 나은 은혜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다른 세상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전대"와 "주머니"를 가지라고 명하신 것은(눅 22:36), 라이트푸트 박사가 밝힌 바에 의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가진 관심이 당초보다 감소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 전도의 임명을 받은 당초보다도 더욱 어려운 때와 더욱 못한 대우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금하신 것으로 되었는데, 그 "지팡이"는 싸울 때에 사용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마가복음에서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시었으며, 그것은 여행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걸을 때에 사용하는 지팡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신만 신고." 이 신은 슬리퍼와 같이 발바닥 밑에 신고 끈으로 얽어매는 가죽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로 차리기에 가장 간단하고 손쉬운 옷을 입고 가야만 했다. 그리고 "두 벌 옷도"가지지 말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전도 여행이 길지 못할 것이며, 그들은 겨울이 되기 전에 돌아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저희들이 원하는 바를 전하게 될 것이며, 그리고 유쾌하게 그들에게 적응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어느 도성에 가든지 그들을 영접하는 그 집에 들어가 그들의 처음 거처를 삼고, 그곳으로 그들의 본부를 삼으라고 지시하시었다.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10절). 이 말씀은 이러한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어디까지나 심부름을 하는 것을 알고 충분한 환영을 받도록 하라. 그리고 너희를 처음에 초대하는 집에 들어가거든 그들이 너를 귀찮게 생각하지 않음을 믿고 너희의 친구들에게 대하는 듯한 그러한 우정을 가지고 대하도록 하라."
5.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사람들에게 행할 대단히 무거운 명령을 내리시었다.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치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11절). 이 말씀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복을 받아서 오늘의 그들이 된 것을 먼지로 증거를 삼아 알게 하라. 그러나 그들이 복음을 거절한다면 그들은 다른 기회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로 그들 집에 있는 먼지를 취하도록 너희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라. 아마 그들의 운명이 그렇게 될 것이다." 그 먼지는 마치 애굽의 먼지와 같이 그들에게 재앙으로 변할 것이며(출 9:9), 그 진노의 날에 그들이 받을 심판은 소돔성의 그것보다 더 참혹할 것이다. 소돔성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보냄을 받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모욕을 당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큰 심판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복음의 은혜를 베풀어주기 위해 온 그리스도의 사도들에게 모욕과 경멸을 당하게 한 때에 얼마나 큰 멸망을 당하겠는가 말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임명하신 대로 순종한 사도들. 비록 그들은 자기들 자신들이 얼마나 약하며, 도저히 자기들이 이 귀한 임무를 안전하게 수행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에게 순종하기 위해서, 주 예수의 힘을 의지하고 마치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출발하였듯이 나갔던 것이다.
1. 그들은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12절). 그들이 "회개를" 전파한 것은 메시야 왕국이 가까운 장래에 수립될 것을 예상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생활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무엇보다도 가져야 할 계획과 복음 전도의 의도하는 바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여 새 마음과 새 길을 취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들은 우스운 농담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 않았고, 마땅히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것을 전한 것이다.
2. 그들이 행한 기적.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심은 무효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을 헛되이 받지 않은 것이고 그 권세를 행사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나가서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었기 때문이다(13절). 어떤 이들은 이 "기름"은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약으로 사용하였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보다도 오히려 비록 그리스도께서 언급은 안 하셨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임명을 받았으므로 기름 부음에 의한 기적적인 치유의 상징으로 그것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름은 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병 고치는 은사"가 "교회의 장로들"에게 주어졌을 때에 그들에 의해 사용하게 되었다(약 5:14). 여기에 "기름"을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하였다면 제자들도 그러한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해서 "기름을 바르며" 병자를 고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기름부음에 의한 신유의 능력이 나타나면서는 그 상징도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다.
세례 요한의 죽음 (마가복음 6:14-29)
Ⅰ. 우리 주 예수에게 대한 사람들의 엉뚱한 생각들(15절).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의 초라한 친족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예수에 대하여 아무 것도 큰 것이 나타나리라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못된 선입관을 갖지 않은 사람들 중에 어떤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참된 메시야라고 하는 진리를 믿기보다는 다른 것을 믿으려고 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그들이 기다리던 "엘리야"라 하고 또 "선자자"라 하였다. 구약의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또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가 새로 일어났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Ⅱ. 그리스도에 대한 헤롯의 의견. 헤롯은 예수의 이름과 그분의 평판에 대해서, 그 분이 무슨 말을 하며, 무슨 일을 행하심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14절). 우리가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것같이 분명하게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16절).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전에 우리와 함께 있을 때에는 "그가 아무 기적을 행하지 않았지만", 그가 잠시 동안 딴 세계에 갔다가 큰 능력으로 다시 돌아온 지금은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14절). 여기에 대해 다음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1. 신앙이 없는 곳에는 공상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선지자"라 하였다. 헤롯은 말하기를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하였다. 이 일로 미루어 보건대 "죽은 자 가운데서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나 능력을" 그들에게 행해 주기를 기대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있을 수 있고 또 있음직한 것이다. 그리고, 곧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을 때에 쉽게 의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후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이런 생각이 사실로 이루어지고, 그 진리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증거 되었을 때에는 이 사실이 그들에 의해서 반박을 당하고 부인된 것이다. 진리에 대해서 가장 믿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보통 거짓과 공상에는 가장 잘 속는다.
2.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일에 반대해서 싸우는 자들은, 비록 그들이 승리자들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그 때에도 그들 자신이 낭패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주의 말씀이 끝까지 견딜 것이므로 그들이 득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죽임을 당하자 기뻐하였던 자들이 그들이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자 그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였던 것이다(계 11:10, 11). 돌이킬 줄 모르는 완악한 사람들은 비록 예후의 칼을 피하게 되낟 하더라도 엘리사가 죽이게 될 것이다(왕상 19:17).
3. 죄를 자각하는 양심은 그를 책망하는 자도, 찔러 주는 자도 필요 없고 양심 그 자체가 필요할 따름이다. 세례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헤롯은 스스로 책임을 지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목 베인 요한." 이 사실에 대한 공포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가리켜 "요한 그가 살아났다"고 상상하게 한 것이다. 헤롯은 세례 요한이 살아 있을 동안에 그를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예수를 요한으로 생각하였으니, 요한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열 배나 더 두려워 게 되었을 것이다. 인간은 양심의 가책에서 공포를 느낄 뿐 아니라 귀신이나 유령에게서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평안을 소유하고자 하는 자들은 더립히지 않은 양심을 끊임없이 간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행 24:16).
4.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변화의 진리를 모르는 자들에게도 강한 죄의식의 공포가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이 헤롯이 나중에 예수를 죽일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이며(눅 13:13), 그 얼마 후에 예수를 업신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헤롯은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에 의해서도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 해도 안 될 일이다.
Ⅲ. 헤롯이 세례 요한을 옥에다 감금시킨 일에 대한 이야기.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에서도 그러했지만 이 경우에 기입되어 있다. 그럼 여기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헤롯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얼마동안 가졌던 평가와 존경. 이 말은 다만 이 복음서 기자에 의해서만 나타내었다(20절). 우리는 여기에서 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영강을 향하여 얼마나 이대한 길을 걸어나갈 수 있으며, 그러나 불행하게 그 길을 끝까지 계속하지 못하고 영원히 멸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1)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사람이 선한 사람들에게 대하여, 특별히 선한 사역자들에게 대하여 큰 존경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안에 선한 것이 있기 때문이며, 그 자신은 여전히 나쁜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1] 세례 요한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었다. 완전하게 선한 사람이 되려면 의와 거룩 이 두 가지가 구비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거룩이고 인간에게 대한 의이다. 세례 요한은 이 세상의 정욕에 대해서 금욕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의와 거룩에 대해서 선한 사람이었다.
[2] 헤롯은 이 사실을 일반적인 평판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과의 개인적인 친분에 의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들 자신들이 비록 이 두 가지 덕을 조금밖에 지니지 못한 분들도 남의 안에 있는 이 덕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3] 그러므로 헤롯은 세례 요한을 두려워하고 존경을 하였던 것이다. 거룩과 의는 존경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들 자신들이 비록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그런 덕을 구비한 사람들에게 존경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2) 헤롯은 세례 요한을 "보호하였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그의 원수들의 악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그를 숨겨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도 오히려 그는 세례 요한의 뛰어난 대화에 관심을 갖고, 그 안에 잠재해 있는 놀랄 만한 대화의 능력에 유의하여 자기 옆에 있게 해서 말을 들어보려고 그를 가까이 있도록 명령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요한이 말하고 행하는 바를 살펴보려고 그렇게 한 것이라 본다.
(3) 헤롯은 세례 요한의 말을 들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초라한 모습을 고려할 때에 퍽 겸양한 태도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길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는 그 진노의 날에 변변치 못한 항변일 따름이다(눅 13:26).
(4) 헤롯은 세례 요한이 그에게 들려 준 많은 일들을 행하였다. 헤롯은 "말씀을 듣는 자만" 다니 것이 아니고, 어떤 면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는 요한이 설교 중에 꾸짖는 어떤 죄는 버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떤 의무는 잘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계명에 대해서 순종하지 않는 한, 만일 일을 행하는 것만으로 부족한 것이다.
(5) 헤롯은 세례 요한의 말을 "달게 들었다". 헤롯은 세계 요한의 말을 들을 때에, 마치 벨릭스가 사도 바울의 말을 들을 때처럼 두려워하지 않았다. 외식자들이 말씀을 들을 때에 그러하듯이 말씀을 듣는 헤롯에게는 순간적인 즐거움도 있었다. 에스겔 선지자의 말을 듣는 자들이 에스겔을 "사랑하는 노래하는 자" 같이 여겼다.(겔 33:32).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죽시 기쁨으로 받는다"(막 4:16).
2. 헤롯에게 그의 허물을 말해 주는 세례 요한의 성실성. 헤롯은 자기의 동생 빌립의 아내와 결혼하였다(17절). 의심 없이 온 국민이 헤롯의 이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 그를 욕하였을 것이며 그를 비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이 일에 대해서 헤롯을 책하면서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이것은 헤롯 자신의 부정한 죄다. 헤롯은 요한이 그에게 가르쳐 준 많은 일을 행하면서도 이 부정한 죄를 버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요한은 이 잘못을 특별히 그에게 말하게 된 것이다. 비록 헤롯이 왕이었지만 세례 요한은 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네가 죽이고 또 빼앗느냐?"고 말하면서도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 같이 말이다. 요한은 헤롯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말 충고가 어쩌면 그 흥미를 깨드릴지 모른다는 것은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그를 충고해 주었다. 왜냐하면 "친구의 통책은 충성하게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잠 27:6). 비록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으며"(벧후 2:22) "진주를 돼지 앞에 던져……저희가 그것을 발로 밝고 돌이켜 찢어 상할까 염려"가 되더라도(마 7:6),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라"(잠 28:23). 헤롯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리고 헤로디아의 마음을 건드는 일은 더욱 위험스러운 일이었지만 자기의 의무를 감당하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운명에 맡기고 수행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기를 바라는 주의 일꾼들은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영적인 유익에 보다 그들을 즐겁게 하는데 더 힘쓴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이 아닌 것이다.
3. 이 일로 말미암아 헤로디아가 세례 요한에게 적개심을 품었다(19절). "헤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헤로디아는 요한을 죽일 수 없게 되자 그를 옥에 가두게 하였다(17절). 세례 요한이 헤로디아의 일로 헤롯의 마음을 건들여 놓을 때까지는 헤롯은 요한을 존경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언의 말씀을, 그 말씀들이 걸림이 없는 평범한 것들이면, 순종을 잘하며, 또 어떤 말씀들이, 그들이 사랑하는 그러한 죄와 거리가 먼 것이면,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일단 그들의 마음에 걸리게 되면 그들은 참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해서 그 악함을 증거 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세상이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죄인들에 대하여 그들이 잘못을 깨우쳐 주는 성실성 때문에 그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는 것이, 그들의 잘못에 입을 다물은 성실하지 못함 때문에 그들에 의해서 영원한 원망과 저주를 받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4. 세례 요한의 목을 베기 위한 음모가 꾸며졌다. 나는 헤롯 자신도 이 음모에 가담하였다고 생각한다. 비록 헤롯이 싫어하고 놀라는 빛을 보였다 하더라도 그가 이 음모에 가담을 하였고, 그 일은 그와 헤로디아 사이의 동의에 의해 추진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적합하였다.
(1) 헤롯 왕의 생일에 궁정에서 무도회가 열리게 될 것이며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 귀인들"을 위해서 만찬이 준비될 것이 틀림없었다.
(2) 위엄한 식전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헤롯은 그 헤로디아의 딸의 춤에 미칠 듯이 매혹될 것이다. 그리고 헤롯이 그렇게 되면 그와 같이 배석한 내빈들도 그에게 아첨하기 위해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3) 여기까지 이르면 왕은 엄청난 약속을 하게 될 것이 틀림없으며 그 약속은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에 옳게 이해를 하였더라면 그러한 목적을 위한 음모를 꾸미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머리는 그의 전 왕국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맹세를 하면서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취소하거나 무효화할 수 없었다.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주리라." 나는 헤롯이 그렇게 엄청난 약속을 하리라고 거의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헤로디아의 딸이 무엇을 구하게 될지 알고 있었다.
(4) 헤로디아의 딸은 그녀의 어미니 헤로디아에게 지시를 받은 후에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 마치 헤로디아가 그것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예쁜 물건처럼, 헤로디아에게 가져다 주었음에 틀림없다(24, 25절). 거기에는 시간을 지체하는 일이나, 시간을 놓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녀는 그 일을 서둘렀을 것이다.
(5) 헤롯은 헤로디아의 딸의 요구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내빈들이 자리를 같이하고 있는 동안에 곧 이 끔찍스러운 일은 이루어졌다. 헤롯이 이전에 이 일을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리라고는 거의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헤롯은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결단을 내어 아래와 같이 하였던 것이다.
[1] 헤롯은 이렇게 하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만일 이러한 약속을 갑자기 하지 않았더라면 온 세상을 다 준다해도, 그러한 불행스러운 일은 안했을 것처럼 하였을 것이다. "왕이 심히 근심하나." 이 말은 그가 그렇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가 그러하였다고 그가 말할 것이다. 그는 마치 그가 그러했던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속임수이고 가장이었다. 그는 요한을 없앨 수 있는 구실을 찾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였을 것이다. "가장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다스릴 줄 모르는 것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도 애도의 마음은 있었을 것이다. 그는 후회와 가책이 없이 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본래의 양심은 인간들이 죄를 쉽게 범하도록 허락치 않는 것이다. 양심을 거역하면 불안한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이 양심을 어떻게 반영시키었는가?
[2] 헤롯은 자기의 맹세에 대한 의무에 있어서 아주 민감한 것처럼 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그 소녀가 그 나라의 절반이 아니라 사분의 일을 구했다 하더라도, 그는 자기의 맹세에 대해서 어떻게라도 모면할 방도를 찾으려고 하였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 맹세는 조급하게 이루어졌으며 그는 그 불의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였던 것이다. 죄악적인 맹세에 대해서는 곧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맹세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란 우리가 우리의 지배하에서 잘못 행한 일을 취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소송인에 의해 "맹세"를 하라고 재촉을 받았을 때에, 그는 말하기를 "나는 이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정당하지 않은 일이면 맹세는 할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헤롯이 성급하게 그 약속을 하였을 때에, 그가 이 음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가 이 일을 서둘러서 행한 것은 그 배석한 귀빈들에 의하여, 그들의 흥을 돋울 목적으로 하였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이 일을 수행하게 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헤롯은 그 대신들과 귀인들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그러므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 헤롯은 무슨 일이라도 행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군주들은 자기들 자신들의 존중과 안전을 위해서, 자기들이 바라는 자들로부터 신망을 얻기 위해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헤롯의 신하들 중 아무도, 헤롯이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에게 보여 준 그러한 경외심을, 헤롯에게 보이지를 않은 것이다. 헤롯 왕은 자기의 "시위병 하나를" 집행관으로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어"오게 하였다. 피에 굶주린 폭군들에게서는 제아무리 그들이 잔인하고 불의한 명령에도 따를 수 있는 사형 집행관들이 있는 것이다. 사울 왕에게도 그러한 도엑이 있었다.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는 그에 명령에 다른 모든 신하들은 거절하였지만 도엑은 이 명령에 따랐던 것이다.
5. 이 일의 결과는 어떠하셨나 살펴보자.
(1) 헤롯의 악의에 찬 궁정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 선지자가 그들의 죄를 규탄하여 왔기 때문이다. "요한의 머리를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27, 28절).
(2) 요한을 따르던 거룩한 무리들에게는 슬픔에 잠기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 일에 대해서 별로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였다(29절). 그러므로 헤롯이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공상에 두려워하였을 때에 그가 원하기만 하였다면 그 무덤에 가서 그것을 확인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마가복음 6:30-44)
Ⅰ.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파하고 기적을 행하도록 파송하였던(7절) 제자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얼마 동안 그 나라의 여러 지방으로 흩어졌었다. 그러나 그들이 몇 가지 약속을 잘 지키었을 때에 그들 스스로 "모여"그들의 전도 기행문을 비교해 보고 나서 그들의 공동체의 본부인 예수에게 와서 그들의 받은 임명에 따라서 그들이 행한 바를 모두 보고하기로 한 것이다. 마치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하러 보냄을 받은 종들이, 손님들로부터 대답을 듣고 돌아와 모든 사실을 다 보고 한 것처럼, 여기에 사도들도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였던" 것이다. 사역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행하였고 무엇을 가르쳤는가에 대해서 계산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도 경성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해야만 한다(히 13:17). 그들은 마땅히 그들이 자원하여 어떤 일을 행하고 가르쳤음을 주 예수에게 거듭해서 보고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실한 사역자들에게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그 가르침이나 생활 방식에 있어서 어떤 오해를 받게 되었을 때에 그것들에 관해서 그리스도에게 호소할 수 있음이 위로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당신과 더불어 조용한 시간을 갖기를 원하시며 그들의 모든 사정을 당신 앞에 공개하여, 어떠한 취급을 받았고 어떠한 점에서 성공하고 어떠한 점에서 실망하였나를 "낱낱이 고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피로해진 사도들을 위해 휴식을 배려하시었다(31절). 그들이 피로에 지쳐 기진맥진한 것을 아니고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하시었다. 요한의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의 죽음에 대한 비보를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나온 듯하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당신의 제자들이 그들의 승리의 쾌보를 가지고 그들의 스승인 그리스도에게 돌아온 듯하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 중에 놀라는 자들이나 피로에 지친 자들이나 다 잘 이해하시고, 피곤한 자들을 위해서는 휴식이 될 수 있고 놀라는 자들을 위해서는 안전히 될 수 있는, 모두에게 적당한 구제책을 마련하여 주시었다. 얼마나 큰 친절과 동정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향하여 "와서 잠깐 쉬어라"하셨는가! 그리스도의 활동적인 종들도 주의 일의 긴장 속에서 항상 견디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의 육체가 얼마 동안의 휴식과 안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쉬지"않고 계속하는 하늘 나라에 갈 그날까지, 우리가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계속할 수 없는 것이다(계 4:8). 그리고 머리가 되시는 주께서는 몸을 위해 계시기 때문에 몸의 건강을 고려하시어 육체의 휴식뿐만 아니라 마음의 휴식도 허락하시는 것이다.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아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사 26:20). 그리고 부지런히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은 유쾌하게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느니라"(잠 5:12).
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따로" 불러내어 쉬도록 하시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들과 같이 있게 되면 그들이 유익을 위해 어떤 대화도 나누어야 하고 어떤 일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참으로 휴식을 취하려면 그들은 "따로" 있어야만 했다.
2.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좋은 건물도 있고 아름다운 정원도 있는 그러한 상쾌한 별장으로 초대한 것이 아니고, 조화가 대단히 빈약하고 자연으로만 채워져 있으며 예술이 가미되어 있지 않은 "한적한 곳에" 그들의 정숙과 휴식을 위해 초대하시었다. 그러나 이곳은 그리스도께서 생활하고 계시는 모든 환경들의 일부인 것이다. 배를 당신의 말씀을 전하시는 강단으로 사용하셨던 예수께서 한적한 광야를 당신과 제자들의 휴양지로 사용하신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3.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다만 "잠깐"쉬도록 부르신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쉴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고 나서 다시금 일하러 나서야만 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들이 하늘 나라에 가는 그 시간까지 충분히 휴식이 이 땅에서는 없는 것이다.
4. 제자들이 항상 일해 왔으므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은 이제 항상 분주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하였으므로 그들은 그들의 일에 질서를 읽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 도 없음이라." 모든 일에 있어서 적당한 시간을 배정하여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일들이 큰 어려움이 없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계속해서 오고 가며, 규칙도 질서도 지켜지지 않으면, 많은 노고로써도 적은 일밖에 이룰 수 없는 것이다.
5. 그들은 "배를 타고"갔다. 그러나 바다를 가로질러간 것이 아니고 해안을 따라서 벳세다 광야로 간 것이다(32절). 배를 타고 가는 것은 육로로 가는 것 보다 힘이 덜 드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만 "따로" 있으려고 비밀리에 떠나갔던 것이다. 공무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은 때로 혼자 있고 싶어하는 것이다.
Ⅲ.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근면.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그러한 정당한 이유로 물러나 쉬려고 하는데 그렇게 사람들이 따라온 것은 무례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책망을 당하거나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지 않고 환영을 받은 것이다. 올바른 예의를 범함이, 만일 그것이 전적으로 선량한 사람에서 이루어진 것이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쉽게 용서해 주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부름을 받지 않고, 그들 임의로 그리스도를 따라왔던 것이다. 여기에는 시간의 배정도 없었고, 집회도 정해지지 않았고 종도 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구름처럼 밀려 왔으며 비둘기가 날아오듯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든 고을로부터" 그들의 집고 상점을 떠나고, 그들의 직업과 일을 떠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려고 따라왔다. 비록 예수께서는 배를 타고 가셨지만, 그들은 "도보로" 왔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을 시험해 보시려는 듯이 그들에게 냉담한 빛을 보이고 그들을 떼어놓으려고 노력하시었지만, 그들은 끝까지 예수에게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들은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모하여 그리스도에게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비록 쓸쓸하고 불편한 광야라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라서 그곳에 갔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광야가 변해서 낙원이 되게 하는 것이다.
Ⅳ.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들을 환대하시었다(34절). "예수께서 큰 무리를 보았다." 그들이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이고 많은 무리라 하였을지라도, 당신이 "따로"있고 싶었는데 그들이 방해를 하므로 불쾌함을 느끼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더욱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을 바라보시었다. 그들은 양으로써 잘 양육을 받고 인도를 받고 싶은 듯 보였으며, 잘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듯하였으나 그들에게는 목자가 없었다.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안내해 줄 자가 아무도 없었으며, 그들을 좋은 말씀으로 가르쳐 줄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리스도께서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었을 뿐만 아니라(마 14:14)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모두 진실하고 선량하였으며 말씀을 가르침 받을 자격이 있었음을 확실하다고 본다.
Ⅴ.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사람을 위해 갖추신 음식.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청중들을 당신의 손님들로 정중히 맞이하였으며 그들에게 놀라운 환대를 하시었다. 그러므로 이 일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1. 제자들은 그 무리들을 보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로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소서"(35, 36절). 이렇게 제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무리가 자기들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를 보내소서, 그 무리들이 비록 배가 고프다 하여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그들의 필요한 양식보다 더 낫게 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리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그들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을 해산해서 돌려보내는 것이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원하는 마음은 선한 일을 하게 될 때가 그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며 오래 지속하게 할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그 무리를 모두 먹이라고 명령하시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37절). 비록 그 무리들이 그에게 모여들고 당신의 제자들이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할 만큼 방해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굶주린 채 돌려보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우리에게 설사 누가 무례한 일을 하더라도 그들에게 친절히 대하라는 교훈을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이 광야로 가지고 간 음식은 다만 그들을 위해서만 한 끼니를 메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그 많은 무리와 나누어 먹으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친절한 대접을 베푸시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영의 양식을 얻어먹기 위해서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육의 양식까지 관심을 갖고 계시었다. 의무를 수행하는 일이 안전의 길이 되는 것처럼 공급의 길도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만이 홀로 하늘에서 비를 내려 웅덩이들을 채우실 수 있으며,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들을 위해서, 눈물 골짜기로 샘이 되게 하시며, 힘을 얻어 더 얻게 하시는 것이다(시 84:5-7). 하나님의 섭리는 시험을 당하지 않으며 충분히 신뢰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진실한 하나님의 종들을 결코 실망당하지 않게 하시며 때에 따라 알맞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주시어 새롭게 하여 주시는 것이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을 위하여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하는 "여호와 이레"의 섭리가 지금도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창 22:14).
3. 제자들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실행될 수 없는 일로 생각하였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그들의 약한 신앙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지시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생각이 앞서 당황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의문은 그들에게 지금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많은 돈이 없으며, 그들이 만일 그런 돈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빵을 어떻게 갑자기 사올 수 있으며, 설사 사온다 해도 이 많은 무리에게 어떻게 흡족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문은 모세가 가졌던 의문이었다.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리이까?"(민 11:22)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준비하시는 양식에 대하여 더 귀한 가치를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미리 보게 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모든 무리에게 배불리 먹이셨다. 그들은 배 안에서 먹으려고 가지고 왔던 "떡 다섯 개"와, 그들이 여기에 오면서 잡았을 것으로 보는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음식에 대한 식단표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위해서도 오히려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치 어려운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였듯이, 그리고 마게도니아 교회가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의 식탁에 초대를 받아 가셨을 때에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같이 식사하시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많은 무리에게 음식을 먹이시는 것이다. 이 사실은 사람들이 "그들의 소유로 그를 섬기"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다른 데서 공급을 받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대접에 따름으로써 당신의 겸손의 일면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스스로 일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기적을 바라고 대접하는 것에 동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 다음에서 이 광야의 기적을 살펴보도록 하자.
(1) 광야의 만찬은 간소하였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원하시기만 하셨다면 광야의 이 식탁에 그렇게 준비하실 수 있었지만 여기에 진수 성찬은 마련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손쉬운 간소한 음식으로 만족하고 진미를 탐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필요한 것을 취하게 된다면 비록 우리가 진미나 별미를 취하지 않는다 해도 문제가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굶주리는 우리에게 식물을 주신다. 그러나 진노하심으로 "우리의 탐욕대로 식물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시 78:18). 그리고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대한 약속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리라는 것이지, 그들에게 잔치를 열어 주리라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그러한 간소한 음식을 드셨다면 우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2) 그 손님들은 질서 정연하였다.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39, 40절). 이렇게 한 것은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줄 때에 좀더 쉽고 질서 있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고전 14:33). 예수께서는 그 광야에 온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지거나 과식하지 않고 흡족하게 먹을 수 있도록 그토록 세밀하게 보살펴 주신 것이다.
(3) 이 간단한 음식은 하나님의 축복을 필요로 하였다. "예수께서……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다." 그리스도께서 제자 중의 하나를 불러서 축사하라고 부탁하시지 않고, 당신 자신이 축사하시었다(41절). 그리스도께서 축사하시자 떡과 물고기가 이상하게 불어나서 "다 배불리 먹고" 남았다. 그리고 이들의 수는 오천 명이 넘었던 것이다(42. 44절). 이 기적은 의미심장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대 의원이 되시기 위함인 것처럼 대 양육자가 되시기 위함인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인 생명을 회복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이 영적인 생명을 건강하게 보호하고 양육하기 위해 오신 것을 보여 주시기 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에는 그에게 나오는 모든 자들에게 줄 수 있는 충분한 것이 준비되어 있어, 그들의 영혼들을 채워 주시기에 넉넉하며 그들의 값진 그릇들을 채워 주시기에 넉넉한 것이다. 아무도 그리스도에게 채움을 받지 못하고 빈 그릇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그에게 나오는 자들은 충만한 채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먹고 남은 조각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거두어들인 것은 "열 두 바구니"나 되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심으로써 많은 떡을 얻으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들을 허비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시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버리는 그러한 조각들을 원하고 있으며, 우리나 다른 사람들이 어느 때 그것들을 원하게 될 지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마가복음 6:45-46)
이 본문 말씀의 이야기는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다. 그러나 다만 거기에는 언급되었던 베드로에 대한 기사가 여기에 생략되어 있다. 그럼 아래에서 본문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자.
Ⅰ. 무리들이 흩어지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뒤따라가실 의도로 "제자들을 재촉하사……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세다로 가게 하시었다". 사람들은 흩어지기를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을 돌려보내는데 적지 않은 시간과 수고를 허비해야 하였다. 그들은 지금 좋은 만찬을 들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곁을 쉽게 떠나려고 하지를 않았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어느 때까지라도 그리스도와의 교제만을 계속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즐길 수 있는 영원한 잔치는 미래의 나라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1.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나오는 사람들에게 많은 설교를 하시었지만 또한 기도도 많이 하시었다. 예수께서는 자주 기도하셨고 오래 기도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끊임없는 중보의 기도를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아닐 수 없다.
2. 그리스도께서 혼자서 기도하러 가시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마음의 산만함이나 허실을 피하시기 위해 조용한 곳에 찾아가실 필요는 없으셨지만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기 위해 홀로 하나님께 나가 기도하시었다. 그리고 골방이 필요하시어 산을 찾아가시었다. 선량한 사람은 하나님과 홀로 있을 때 말고는 혼자 있을 수 없게 된다.
Ⅲ. 제자들이 바다에서 조난을 당하였다. "바람이 거스리므로"(48절). 제자들은 열심히 노를 저어 보았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 일은 이후에 그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에 의해서 사방으로 파송 될 때에 예상할 수 있는 고난에 대한 예표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이때에 그들을 거스르는 바람을 향하여 보내는 것 같을 것이다. 그들은 이 역풍을 향하여 노 젓는 수고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세찬 물결과 싸우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원수들에 의하여 핍박을 당하는 파도에 부딪침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을 그렇게 역풍의 고난 가운데 보냄으로써 예수께서는 그러한 고난에 대해서 그들을 훈련시키어 고난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하시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교회는 자주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위로를 받을 수 없는'바다에 떠가는 한 척의 배와 같을 때가 많은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데도 바람과 물결이 우리에게 거슬러 올 수 있다. 그러나 주께서 성산에서 그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것이다.
Ⅳ. 그리스도께서 물 위를 걸으셔서 그들을 방문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계시는 그 곳에서 바람의 강세를 측정하시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천사를 보내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가능한 한 사랑의 정을 나타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택하시어 그들을 보살피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이 직접 그들에게 걸어오신 것이다.
1. 예수께서 "밤 사 즈음"까지 즉, 새벽 세 시 될 때까지는 그들에게 오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시간에야 그들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자기 백성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방문이 오래 지체되더라도 마침내 그분은 오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절정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방문하실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기회가 되는 것이다. 비록 구원이 더딜지라도 우리는 이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밤 사경이" 즉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 하라리.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정녕 응하리라"(합 2:3).
2. 그리스도께서 물 위로 걸어서 오시었다. 바다에는 지금 풍랑이 거세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물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시었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기" 때문이다(시 93:4). 정한 시간이 이르게 될 때에는 어떠한 난관도 자기의 백성들에게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방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험한 파도 속에서도 찾아오시는 것이다(시 42:7).
3. 그리스도께서는 "지나가려고 하시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바라보지 않으시고 그냥 더 가시려는 것처럼 얼굴을 다른 데로 향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심은 그들을 일깨워 당신을 부르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환난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계획 가운데서 직접 구원을 섭리하시고 계시지만, 때로는 그들을 못 본 척 지나시는 것 같고 그들의 그러한 경우에 대해서 무관심하시는 것 같이 보일 때가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지나가려고 하시는" 것처럼 생각하였지만 예수께서 그냥 지나가시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4. 제자들은 예수를 보자 유령인줄 알고 무서워하였다.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50절). 그들은 마귀나 그들을 붙어 다니고 바람을 일으키는 악령인 것으로 생각하고 놀란 것이다.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의 공상과 상상 가운데 나타나는 것을 유령으로 알고 당황하며 무서워하는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그들에게 알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요기를 북돋아 주시고 그들의 무서움을 진정시켰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주 다정하게 그들을 향하여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었다.
(1)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실 때까지 그리스도를 모르게 된다. "내니, 두려워 말라." 이 말씀은 즉 "내니라. 나는 너희의 주니라. 나는 너희 친구니라. 나는 너희의 구속주이며 구주니라. 그리고 괴로움이 많은 이 지상에 왔고 지금 너희를 돌보기 위해 성난 바다에 찾아온 바로 나니라."
(2)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의 가까이 계신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 지식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하여금 폭풍 가운데서도 넉넉히 안심케 할 수 있고, 어 이상 두렵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왜 내가 그렇게 두려워하여야 하겠는가?" 난일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다년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만일에 우리의 잘못을 특별히 그리스도에 관한 우리의 허물을 돌이키게 된다면 우리의 두려움은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창세기 21장 19절 과 열왕기 하 6장 15절 이하를 참고하라.
(3) 폭풍우가 이는 무서운 날에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비록 먹구름과 어두움이 우리를 엄습할지라도 우리는 능히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니"라 말씀하시었다. 그는 당신이 누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들은 양이 그들의 목자의 음성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주의 음성을 알아낼 수 있었다(요 10:4). 아가서에서 그 신부는 거듭해서 서슴치 않고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라고 말하였던 것이다(아 2:8; 5:2).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 원어에 "e,gw, evi,mi"로 나와 있는데 그대로 번역한다면 "내가 그니라, 또는 나니라"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런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려고 하실 때에 당신의 이름이라고 표현하시기도 하셨던 것이다(출 3:14). 그리고 이 말씀은 지금 자기의 제자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그리스도의 이름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무력으로 당신을 잡으려고 나온 자들에게 "내로다"하실 때에 그들은 물러가 땅에 엎드리게 되었던 것이다(요 16:6). 예수께서 믿음으로 인해 자기를 붙들러 나온 자들에게 "내가 그인 줄을" 알라고 하셨으며 그들은 이 말씀대로 그를 믿게 되었고 위로를 받게 되었다(요 8:28-30).
6. 그리스도께서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그 배에 오르시어 그들을 편안하게 하시었다. 그들이 주를 모시게 되자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예수께서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자마자" "바람이 그치었다". 이 앞에서 그들이 조난을 당하였던 폭풍에서는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던"것이다(막 4:39).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런 의례적인 명령은 하시니 않았으나 바람이 갑자기 그치게 된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당신의 일을 비록 언제나 동일한 격식과 관찰에 의해서 하지 않더라도 효과적으로 수행하실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의 명령하심을 듣지 않았다 하더라도 바람은 그와 같이 그치게 된 것이며 우리는 그와 같은 고요함에 대해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배 안에 계시기 때문이며 "부지중에" 그리스도의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아 6:12).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천국에 이르게 될 때에 바람은 곧 그치는 것이다. 저 높은 곳에는 바람이 없는 것이다.
7. 제자들은 그들의 분수에 지나치리만큼 이 기적에 대하여 놀라고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놀라게 된 그 근저에는 참으로 죄가 될 만한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것은 그들이 완전히 당황하여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마치 그것은 아주 새롭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마치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전에는 결코 행하신 바가 없는 일인 것처럼 그리고 지금도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일을 행하실 것 같지 않은 일처럼 말이다. 그들은 마땅히 그리스도의 능력을 찬양하고 이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더욱 확신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왜 그들은 이렇게 당황하고 놀라게 되었을까? 그것은 왜냐하면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그 일에 대한 합당한 가치를 알았더라면 그들은 이 일에 대하여 이렇게 놀라지 않았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떡을 많게 하신 일은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실례에 있어서 물 위로 걸으신 것만큼 위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상하리만큼 둔하고 생각이 미치지를 않았으며 마음이 완고하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께서 잠잠하라고 명령하실 만한 그런 일임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전의 일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전에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역사 하시는 현재의 일에 대해서 생각이 막혀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Ⅴ. 예수와 제자들이 벳세다와 가버나움의 사이에 있는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을 때에 사람들은 그들을 대 환영하였다. "배에서 내리시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54절). 그 사람들은 예수께서 이르시는 곳마다 능력을 많이 행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만병의 의원이신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오래 머물러 계시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방문한 이 기회를 잘 활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그들이 병고침 받기를 원하였을 때에 그들이 감기에 걸릴 위험성은 없었다(55절). 예수께서 들아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이나 그 어디라도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가로변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혈루증 않은 여인이 한 것처럼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다만 병고침 받기를 원하였지 예수에게 복음의 말씀을 가르침 받으려고 원한 일은 찾아 볼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심 같이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병든 자들을 고치게 되면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찾아 나오게 되겠는가 !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에 대하여서 보다 육신에 대하여 더 많이 관심을 갖는가를 생각할 때에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첫댓글 카페지기가 회원님께 드리는 간곡한 부탁의 글입니다
어느덧 한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코로나로 힘든 연말
회원님께 주님의 크신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카페지기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늘 어렵게 살아가는데
코로나 사태로 후원이 거의 없어지니 하루하루 사는게 말이 아니네요,,
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 치료비 겨울 난방비를 마련해야합니다
쌀과 김치라도 마련하도록 오늘은 후원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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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원 병원약과 주사비가 30만원 40만원으로 먹을거라도 사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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